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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허공법신

작성자空山 자각각타도량|작성시간25.09.29|조회수28 목록 댓글 0

반야심경은 복잡한 이론을 설명하기보다

깨달은 존재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그 시선을 통해 어떻게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지

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실천적인 지혜의 길잡이와 같습니다.

이 경전은 우리가 겪는 불안과 슬픔 분노와 같은 감정들이 외부에 어떤 사건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 내면의 근본적인 착각

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그 착각의 핵심에는 바로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관자재보살이라는 위대한 수행자가 깊은 지혜의 실천 즉 반야바라밀다를 통해 그 착각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반야바라밀다란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현상의 실상을 직觀적으로 통찰 [觀] 하여 생사와 고통에 있죠. 이 강둑에서 열반이라는 평화의 저쪽 강둑으로 건너가게 하는

궁극의 지혜

를 의미합니다. 관자재보살은 바로 이 지혜의 눈으로 우리가 말하고 굳게 믿고 있는 존재의 구성 요소를 하나하나 비추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텅 비어 있음을 발견하고 마침내 모든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다고 선언합니다.

반야심경의 첫 구절은 바로 이 위대한 발견을 담고 있습니다.

관자재보살이 오오니 모두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너갔다

는 宣言은 우리가 나라고 철저하게 믿고 있는 존재가 사실은 5 가지 요소의 일시적인 묶음
즉 오온도 空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먼저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첫 번째 요소는 색으로 우리의 육체를 포함한 모든 물질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 몸을 나라고 여기며 몸이 아름다우면 기뻐하고 늙고 병들면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이 몸은 음식과 공기 같은 외부 요소들이 잠시 모여 형태를 이룬 것으로 세포 하나하나가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변화의 과정 그 자체입니다.

그 어디에도 영원하고 독립적인 주인으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요소는 수로 즐거움 괴로움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을 말합니다.
외부 자극에 의해 이 느낌들은 쉴 새 없이 일어나지만 마치 물 위에 거품처럼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는 즐거운 느낌을 붙잡으려 하고 괴로운 느낌을 밀어내려 애쓰면서 또 다른 고통을 만들어냅니다.

세 번째 요소는 상으로 대상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개념이나 이미지를 떠올리는 생각의 작용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보고 친구 또는 적이라는 상을 만들고 사물을 보며 좋다. 또는 싫다는 상을 만들어냅니다. 이 생각들은 과거의 경험과 기억에 의해 조건 지어진 것으로 실제 그 자체가 아닌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그림자에 가깝습니다.

네 번째 요소는 행으로 어떤 대상을 향해 나아가거나. 멀어지려는 의지를 포함한 모든 능동적인 정신 활동을 의미합니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욕망하고 분노하는 등의 마음작용이 모두 여기에 속하며 바로 이 의지적 행위가 미래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업의 원동력이 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요소는 식으로 대상을 분별하고 인식하는 순수한 알아차림의 기능입니다.
눈은 형태를 귀는 소리를 인식하는 것처럼 이 의식 작용이 있어야만 우리는 세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의식 역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영혼 같은 것이 아니라 감각 기관과 대상이 만나는 조건 속에서만 잠시 일어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관자재보살은 이 5 가지 무더기들이 서로에게 의지하여 쉴 새 없이 변화[無常]하고 있을 뿐
그 어느 곳을 찾아봐도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는 사실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통찰이며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空이라는 개념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반야심경은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라

는 유명한 구절을 제시합니다. 이는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모든 물질적 현상 즉 색이 텅 비어 있는 공의 성품을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앞에 놓인 책상은 나무라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는 숲의 흙과 물 햇빛이라는 조건들이 모여 잠시 나무의 형태를 이룬 것이고 더 깊이 들어가면 수많은 분자와 원자들의 결합일 뿐입니다.
그 어디에도 책상이라는 고유하고 독립적인 실체는 없습니다.
이것이 색이 곧 공이라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공이 곧 색이라는 말은 그 텅 비어 있는 본질이 바로 이 물질적 현상들을 통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공이라는 것이 물질 세계와 동떨어진 어딘가에 존재하는 허무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진 생생한 현실의 본질임을 의미합니다.

즉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무한한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며 생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우리의 몸과 물질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의 느낌과 생각 의지. 그리고 의식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의 기쁨이나 슬픔 같은 느낌도 어제 했던 생각도 지금 이 순간의 의식도 모두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일 뿐 그 안에 붙잡을 만한 실체는 없습니다.
세상 만물이 이처럼 텅 빈 채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영원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이러한 공의 지혜를 더욱 철저하게 드러내기 위해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의지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씩 부정해 나갑니다.
경전은 우리의 감각 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의식이 없다고 말하고
그것들이 받아들이는 대상인

색깔 소리 냄새. 감각 생각

에 대해서 대상들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실제로 눈이 보이지 않거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내가 본다. 내가 듣는다라고 생각할 때 전제하는 그 보는 행위의 주체로서의 고정된 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반야심경은 복잡한 이론을 설명하기보다

깨달은 존재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그 시선을 통해
어떻게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실천적인 지혜의 길잡이와 같습니다.

이 경전은 우리가 겪는 불안과 슬픔 분노와 같은 감정들이 외부에 어떤 사건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못하는 우리 내면의 근본적인 착각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그 착각의 핵심에는 바로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관자재보살이라는 위대한 수행자가 깊은 지혜의 실천
즉 반야바라밀다를 통해 그 착각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반야바라밀다란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현상의 실상을 직관적으로 통찰하여

생사와 고통에 있는 이 강둑에서
열반이라는 평화의 저쪽 강둑으로 건너가게 하는 궁극의 지혜를 의미합니다.

관자재보살은 바로 이 지혜의 눈으로 우리가 말하고 굳게 믿고 있는 존재의 구성 요소를 하나하나 비추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텅 비어 있음을 발견하고 마침내 모든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다고 선언합니다.


반야심경의 첫 구절은 바로 이 위대한 발견을 담고 있습니다.

관자재보살이 오온이 모두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너갔다

는 선원은 우리가 나라고 철저하게 믿고 있는 존재가 사실은 5 가지 요소의 일시적인 묶음 즉 오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먼저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첫 번째 요소는 색으로 우리의 육체를 포함한 모든 물질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 몸을 나라고 여기며 몸이 아름다우면 기뻐하고 늙고 병들면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이 몸은 음식과 공기 같은 외부 요소들이 잠시 모여 형태를 이룬 것으로 세포 하나하나가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변화의 과정 그 자체입니다. 그 어디에도 영원하고 독립적인 주인으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요소는 수로 즐거움 괴로움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을 말합니다. 외부 자극에 의해 이 느낌들은 쉴 새 없이 일어나지만 마치 물 위에 거품처럼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는 즐거운 느낌을 붙잡으려 하고 괴로운 느낌을 밀어내려 애쓰면서 또 다른 고통을 만들어냅니다. 세 번째 요소는 상으로 대상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개념이나 이미지를 떠올리는 생각의 작용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보고 친구 또는 적이라는 상을 만들고 사물을 보며 좋다. 또는 싫다는 상을 만들어냅니다. 이 생각들은 과거의 경험과 기억에 의해 조건 지어진 것으로 실제 그 자체가 아닌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그림자에 가깝습니다. 네 번째 요소는 행으로 어떤 대상을 향해 나아가거나. 멀어지려는 의지를 포함한 모든 능동적인 정신 활동을 의미합니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욕망하고 분노하는 등의 마음작용이 모두 여기에 속하며 바로 이 의지적 행위가 미래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업의 원동력이 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요소는 식으로 대상을 분별하고 인식하는 순수한 알아차림의 기능입니다. 눈은 형태를 귀는 소리를 인식하는 것처럼 이 의식 작용이 있어야만 우리는 세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의식 역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영혼 같은 것이 아니라 감각 기관과 대상이 만나는 조건 속에서만 잠시 일어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관자재보살은 이 5 가지 무더기들이 서로에게 의지하여 쉴 새 없이 변화하고 있을 뿐 그 어느 곳을 찾아봐도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는 사실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온이 모두 공화당 통찰이며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20이라는 개념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반야심경은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라는 유명한 구절을 제시합니다. 이는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모든 물질적 현상 즉 색이 텅 비어 있는 공의 성품을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앞에 놓인 책상은 나무라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는 숲의 흙과 물 햇빛이라는 조건들이 모여 잠시 나무의 형태를 이룬 것이고 더 깊이 들어가면 수많은 분자와 원자들의 결합일 뿐입니다. 그 어디에도 책상이라는 고유하고 독립적인 실체는 없습니다. 이것이 색이 곧 공이라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공이 곧 새기라는 말은 그 텅 비어 있는 본질이 바로 이 물질적 현상들을 통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공이라는 것이 물질 세계와 동떨어진 어딘가에 존재하는 허무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진 생생한 현실의 본질임을 의미합니다. 즉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무한한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며 생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우리의 몸과 물질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의 느낌과 생각 의지. 그리고 의식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의 기쁨이나 슬픔 같은 느낌도 어제 했던 생각도 지금 이 순간의 의식도 모두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일 뿐 그 안에 붙잡을 만한 실체는 없습니다. 세상 만물이 이처럼 텅 빈 채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영원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바냐, 신경은 이러한 공의 지혜를 더욱 철저하게 드러내기 위해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의지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씩 부정해 나갑니다. 경전은 우리의 감각 기관인 둔 귀 코 혀 몸 의식이 없다고 말하고 그것들이 받아들이는 대상인 색깔 소리 냄새. 감춰줘. 생각에 대해서 대상들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실제로 눈이 보이지 않거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내가 본다. 내가 듣는다라고 생각할 때 전제하는 그 보는 행위의 주체로서의 고정된 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눈이라는 감각 기관과 빛이라는 대상 그리고 의식이라는 조건이 만났을 때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이처럼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은 상호의존적인 과정에 실상을 보여주기 위해 경전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을 부정합니다. 더 나아가 바냐 신경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고집 멸도 즉 괴로움과 그 원인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과 그에 이르는 길이라는 가르침마저도 궁극적으로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가르침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공화당을 완전히 깨달은 경지에서는 더 이상 괴로워할 나도 없고 따라서 소멸시켜야 할 괴로움의 원인도 없으며. 도달해야 할 10반의 경지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지어 깨달음을 통해 얻게 되는 지혜도 없고 그 지혜를 통해 얻는 얻음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깨달음을 얻어서 무언가 특별한 존재가 되려는 미세한 욕망이나 아줌마저도 남김없이 부수어버리는 철저한 가르침입니다. 이처럼 얻을 것이 본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수행자는 더 이상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부담감이나 조급함 없이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공화당을 남김없이 깨달았을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될까요. 반야심경은 그 경질을 마음에 걸림이 없다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불안과 갈등은 대부분.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소유 관념에 마음이 걸려 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내 자존심 내 재산 내 가족 내 의견에 대한 집착이 마음에 걸림이 되어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실체없이 텅 비어 있음을 알게 되면 더 이상 마음이 머물거나 걸릴 곳이 없어집니다. 마치 허공에 그물을 던져도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마음의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 또한 사라집니다.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의 대부분은.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됩니다. 건강을 잃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 하는 두려움은 모두 나라는 존재가 상처받거나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라는 실체가 본래 없다는 것을 알면 그 나를 중심으로 생겨났던 모든 두려움이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이렇게 모든 집착과 분별 그리고 두려움에서 벗어나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난 상태를 반야심경은 구경 열반 즉 궁극의 평화와 자유의 경지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고통의 완전한 소멸이며 반야심경이 제시하는 해탈의 첫 모습입니다. 세상을 이루는 두 가지 큰 축을 꼽는다면 보리는 흔히 물질과 정신을 이야기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어야 정신 활동이 가능하고 정신이 깃들어야 비로소 물질적인 몸이 생명력을 얻어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물질과 정신은 서로를 의지하며 존재하는데 바니아 신경은 이러한 관계를 더욱 근원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경전의 핵심 구절인 색즈 시공 공주 시색은 물질 즉 색이 텅빈 실체 없음. 즉 공예 상품을 떠나 존재하지 않으며 거꾸로 그 텅 빈 성품이 바로 물질 현상을 통해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우리의 정신 활동을 구성하는 느낌 생각 의지 의식 또한 그러하다고 덧붙입니다. 우리는 물질과 정신이 단순히 서로를 의지하는 2개의 다른 실체가 아니라 본래부터 하나의 진실 즉 공이라는 바탕 위에서 드러나는 두 가지 모습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곧 세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첫걸음이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몸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이 몸은 음식과 물 공기와 같은 수많은 외부 조건들이 잠시 모여서 특정한 형태를 이룬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바니아 신경의 관점에서 보면 이 몸은 고정된 실체가 없는 공한 존재입니다. 어제 몸을 이루던 세포와 오늘의 몸을 이루는 세포가 다르듯이 몸은 한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 그 자체입니다. 마음의 움직임은 더욱 명확합니다. 조금 전까지 기쁨을 느꼈던 마음 사소한 일 하나에 슬픔으로 바뀌고 평화롭던 생각이 한순간에 분노로 타오르기도 합니다. 이처럼 마음 역시 고정된 실체 없이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의 연속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영원하지 않은 몸과 마음엔 나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영원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리고 그 착각 위에서 모든 괴로움을 스스로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즐거운 느낌이나. 생각을 붙잡아 곁에 계속 두려고 하고 괴로운 느낌이나 싫어하는 생각은 어떻게든 밀어내고 멀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변화하는 것이 세상의 본질이기에 즐거움은 언젠가 사라지고 괴로움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대상을 붙잡으려 하거나 밀어내려 하니 그 마찰 속에서 고통이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반야신경에서 말하는 일체고의 즉 모든 괴로움의 실체입니다. 우리가 의지하려는 몸과 감정과 생각은 사실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여러 조건에 의해 잠시 합쳐진 무더기 즉 오온일 뿐입니다. 그 무더기 속에는 영원한 주인이 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특히 우리의 감정을 나와 동일시하는 습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우리는 흔히 내가 화가 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냐 심경의 지혜로 이를 비추어 보면 나라는 주인이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분노라는 하나의 감정 현상이 특정 조건을 만나 잠시 일어났을 뿐입니다. 그 감정은 나와 별개로 존재하며 마치 하늘의 구름이 잠시 떠 있다가 지나가듯이. 우리 안에서 머물다 사라지는 일시적인 손님과 같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이해하고 감정을 지나가는 현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고 그것을 차분히 바라볼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관자재보살이 행한관 즉 관찰의 수행입니다. 그는 자신의 오온 즉 몸과 감정 생각이 모두 공화다는 것을 그저 지식으로 안 것이 아니라 깊은 관찰을 통해 직접 비추어 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우리는 마음의 본래 성품을 마주하게 됩니다. 마음은 본래 텅 비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마음이 아무것도 없는 허무라는 뜻이 아니라 특정한 색깔이나 모양 혹은 성질을 가진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마음은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투명한 공간과 같아서 기쁨이라는 생각이 들어오면 잠시 기쁨으로 채워지고 슬픔이라는 감정이 들어오면 잠시 슬픔으로 물듭니다. 그러나 기쁨이 사라진다고 해서 마음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슬픔이 지나간다고 해서 마음의 영원한 상처가 남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 바람이 휙 불었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듯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감정들은 본래 머무는 바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입니다. 바냐 신경에서는 이러한 마음의 본질을 불구부정 즉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다고 표현합니다. 미움이나 질투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난다고 해서 마음의 본성이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며 자비나 사랑 같은 긍정적인 마음을 낸다고 해서 본래 없던 깨끗함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음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해 있는 순수한 가능성의 공간입니다. 이러한 인간 존재의 유동적인 특성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만약 인간이 고정 불변의 존재라면 한번 저지른 잘못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될 것이고 한번 악한 사람은 영원히 악한 사람으로 남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냐. 신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 안에는 고정된 나가 없으므로 영원한 죄인 또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지은 잘못된 행위 즉 법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진실한 마음으로 참회하며 선한 행위를 쌓아간다면 과거의 업본은 점차 씻겨 나가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사상이 주는 위대한 긍정성이며 모든 존재에게 주어진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실수에 얽매여 절망할 필요가 없으며 현재의 부족함에 좌절할 이유도 없습니다. 언제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우리 자신 안에 이미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 모든 지혜를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방법은 바로 자신의 마음을 끊임없이 관찰하는 실천에 있습니다. 외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듯 내면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마음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향한 미움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혹은 예상치 못한 칭찬의 기쁨이 솟아오를 때 그 감정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말이나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잠시 멈추어. 그것을 그저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아 지금 미움이라는 감정이 일어났구나 기쁨이라는 느낌이 피어나는구나 하고 마치 제3자가 되어서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을 억누르거나 없애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것이 존재함을 알아차리고 머물지 않고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바냐 신경에서 말하는 신문가에 즉 마음에 걸림이 없는 상태는 바로 이러한 수행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에 집착하여 머물지 않기 때문에 마음은 언제나 자유롭고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모든 고통은 그것이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그 뿌리를 따라가 보면 결국 집착이라는 하나의 원인으로 모입니다. 그리고 그 집착이 시작되는 지점에는 세상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의 관점에서 이 무지란 바로 우리 자신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고정된 실체를 가진 채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근본적인 착각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지금의 내 몸 내 생각 내가 가진 소유물들이 변치 않을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가정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바로 이 진실을 외면한 채 변화하는 것들의 헛되이 매달리려 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바냐 신경은 바로 이 무지의 어둠을 꿰뚫는 지혜의 빛과 같습니다. 경전은 우리에게 집착의 대상을 하나하나 비추어 보게 하고 그것들의 본성이 실체 없이 텅 비어 있음을 깨닫게 함으로써 우리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 집착을 놓아버렸을 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은 본래의 고요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의 핵심은 나라고 부르는 존재가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것은 사실 5 가지 요소의 일시적인 무더기 즉 오온에 불과합니다. 이 오후는 물질적 요소인 색 느낌 인수 생각인 상 의지 작용인 행 그리고 인식 작용인 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경전의 첫 구절에서 관자재보살은 바로 이 어온이 모두 공화당을 비추어 보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공화당은 이 5 가지 요소들 중 그 어느 것도 독립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진리를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연기의 법칙입니다. 연기의 법칙이란 세상의 모든 것은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무수한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만 생겨난다는 가르침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부모님이라는 조건 음식과 공기라는 조건 그리고 사회와 문화라는 조건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서로에게 의존하여 그물망처럼 얽혀 있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홀로 존재하는 고정된 실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바냐 신경에서 말하는 공은 바로 이 연기의 다른 이름이며 나라는 존재가 실체가 없다는 선언은 이 연기의 법칙을 깨달으라는 초대장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연기의 법칙을 알지 못하는 무지 속에서 실체도 없는 나를 보호하고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갑니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3 가지 독과 같은 마음 즉 탐욕과 성능 그리고 어리석음이 생겨납니다. 탐욕은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을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하고 영원히 소유하려는 마음입니다. 50대 이상 남성분들이라면 많이들 경험하시지 않습니까? 소변이 시원치 않다. 밤에 두세 번 깬다. 아 나이 탓이지 하고 넘기지 마세요. 이것은 전립선 비대증의 징위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쿠아블레이션이라는 놀라운 수술법이 있습니다. 자세한 정보는 아래 링크에 남겨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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