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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25원통

작성자空山 내려놓음 마음학교장|작성시간26.06.05|조회수52 목록 댓글 0

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머릿속에서 끝없이 떠오르는 그 많은 생각들의 소리입니다.
여러분 이런 밤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분명 몸은 지쳤는데
마음은 더 또렷해지는 밤이 있습니다.
잠을 청하면 청할수록 더 깊이 깨어 있는 밤
가라앉아야 할 마음이 끝내 가라앉지 않는 그런 밤 말입니다.
2500년 전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소리와 마음의 관계를 가장 깊이 들여다보신 경전을 남기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능엄경입니다.
그 안에는 25분의 보살과 아라한이
부처님 앞에서 자신의 깨달음을 직접 말씀드린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25원통이라 부르는 깨달음의 25 가지 길이 한 자리에 모인 그 장면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들여다 보려는 곳이 바로 이 25 원통의 한 풍경이라 하겠습니다.
25 분이 답한 25 가지 길 가운데 부처님과 문수 보살께서 한 사람을 가만히 가리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관세음보살이시며
그분이 걸으신 길이 耳根원통
곧 귀로 깨달아 들어간 길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이 끝날 무렵 가만히 듣고 있는 이 순간이 곧 관세음보살께서 들어 가신 그 자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들으려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흘러가는 소리에 마음을 맡기시면 어느새 잠과 깨어 있음의 경계가 부드럽게 풀려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지금도 머릿속 소리가 멈추지 않아.
뒤척이고 계신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자식 걱정 건강 걱정 어제 들은 말 한마디에 마음이 아직도 흔들리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 무거운 마음 충분히 헤아립니다.
마음을 가라 앉히라는 말이 얼마나 막연하게 들리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미 2500년 전에 그 가라앉히는 길을 25 가지로 펼쳐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부드러운 길 하나를 우리에게 남겨두셨습니다. 그 길이 바로 오늘 함께 걸어 들어갈 이근원통
곧 듣는 자리를 통해 마음에 이르는 길이라 하겠습니다.
그 길의 풍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보겠습니다.
능엄경이 설해진 곳은 사위국의 기원 정사였습니다.
그곳에서 안거를 마치신 부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왕궁의 공양 자리로 향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함께 가지 못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부처님의 사촌 동생이자 늘 곁에서 시봉하던 아난존자입니다.
아난 존자는 늦게 탁발해서 돌아오던 길에 한 여인의 환술에 걸려 도심이 흔들리는 위기를 만났습니다.
이 일을 멀리서 아신 부처님께서는 문수 보살을 보내어 아난 존자를 구해 오게 하셨고
그 일을 계기로 능엄법회가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능엄법회는 다른 법회와 결이 달랐습니다. 단순히 가르침을 펼치는 자리가 아니라 흔들린 한 제자의 마음을 처음부터 다시 들여다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난 존자에게. 그리고 모인 모든 대중에게 부처님께서는 묻고 또 물으셨습니다.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보는 자가 누구냐?
듣는 자가 누구냐?
이렇게 거듭 물어가시는 법회였습니다.
이 깊은 문답이 길게 이어지다가 마침내 부처님께서는 큰 능엄삼매를 설하시며 진언을 펼치셨습니다.
그러자 법회 자리에 가득했던 보살과 아라한들의 마음에 같은 한 가지 물음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처음 도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켰을 때 어떤 길을 따라 이 깨달음의 자리에 이르렀는가?
바로 이 물음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마음을 미리 헤아리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법회에 앉은 큰 제자들과 보살들을 가만히 둘러보시며 단 한 가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대들은 처음 도심을 일으켰을 때
어떤 문에 의지하여 삼매에 들었으며
어떤 자리를 따라 원통을 얻었는가?

부처님께서 던지신 이 한마디는 짧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물음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문은 하나가 아니며 사람마다 그 처음 들어선 문이 달랐다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한 분 한 분에게 그 길을 직접 말해 보라 하셨던 것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선 분들이 모두 합하여 25분이었습니다.
우리가 25원통이라 부르는 그 자리가 바로 이 안 질문에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25분의 면면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어떤 분은 소리를 들으며 깨달음에 드셨고 어떤 분은 향기를 맡으며 길을 여셨습니다. 어떤 분은 호흡을 헤아리다가 마음의 본 바탕을 찾으셨다 합니다.
또 어떤 분은 흙을 평탄하게 다지다가 본래의 평등함을 보았다 하시는가 하면
부처님 명호를 한결같이 부르며 그 자리에 이르신 분도 계십니다.
25 가지 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25 가지가 결코 따로 떨어져 있는 길은 아닙니다.
안 진리를 향해 각자 다른 문으로 들어선 것이며 자기 인연 자기 그릇에 맞는 문을 찾아 바를 디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굳이 한 분 한 분의 길을 다 들으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부처가 되는 길에는 단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모든 길이 결국 한 곳으로 모인다는 사실을 그 법회에 모인 모든 이에게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25분의 답이 모두 끝난 그 마지막에서 한 분이 천천히 일어나셨습니다.

자비의 화신으로 우리가 잘 아는 그분 관세음보살이셨습니다.
관세음 보살께서는 아주 까마득한 옛적 한 부처님에게서 받은 가르침을 그 자리에서 풀어 놓으셨습니다.
그 가르침이 곧 듣는 행위를 통해 깨달음에 이른 길 이근원통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길의 입구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 그 밤의 기원 정사를 마음에 한번 그려 보십시오. 둥글게 앉은 25분과 그 한가운데 계신 부처님 그리고 마지막에 일어선 관세음보살의 그림자 그 풍경이 마음에 가만히 떠오르실 것입니다. 그 풍경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걷는 길입니다. 소리는 본래 거칠지 않으며 다만 마음이 거칠 뿐입니다. 그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하면 같은 소리도 다르게 들립니다. 오늘 이 시간은 그 가라앉음의 첫 자락이며 25원통의 문이 천천히 열리는 자리입니다. 능헌법회의 그 밤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 밤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부처님의 한마디 물음에 한 분 또 한 분이 천천히 일어나 자기 길을 풀어 놓으셨습니다. 어떤 분이 무엇으로 깨달음에 들었는지 그 25 갈래가 어떤 모양으로 펼쳐졌는지 그 흐름을 가만히 따라가 봅니다. 25이라는 수는 그저 모인 사람의 머릿수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펼쳐 보이신 깨달음의 길을 빠짐없이 거두어 담은 수입니다. 한 분 한 분이 한 갈래의 길을 대표하고 계시며 25분이 모이면 부처가 되는 길에 모든 통로가 한자리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25 갈래는 크게 네 무더기로 묶입니다. 육진원통이 한 무더기이고 오근원통이 한 무더기이며 육식원통이 한 무더기. 그리고 칠대원통이 또한 무더기를 이룹니다. 여기에 관세음보살께서 따로 말씀드린 이근원통 한갈래가 더해져 모두 25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25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분류표가 아닙니다. 바깥에서 안쪽으로 안쪽에서 다시 더 큰 본바탕으로 나아가는 마음의 여정을 그대로 그려 보이는 계자비입니다. 바깥에 티끌이 6이고 그 티끌을 받아들이는 뿌리가 5이며 안과 밖이 만나 일어나는 알미 여섯 그리고 안과 밖을 넘어 우주의 두루 펼쳐진 큰 성품이 일곱이 됩니다. 작은데서 시작해 점점 크게 펼쳐지는 그 흐름 자체가 이 25 갈래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겠습니다. 먼저 육진원통입니다. 진이라는 글자는 티끌이라는 뜻이며 바깥에서 우리에게 들어오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색과 선과 향과 미와 촉과 법 이 6가지가 곧 육진입니다. 눈으로 보는 빛깔과 모양이 색에 해당하며 귀로 듣는 소리가 성이고 코로 맞는 냄새가 향이라 합니다. 혀로 맛보는 맛이 미가 되며 몸으로 닿는 감촉이 촉 뜻으로 떠올리는 모든 생각의 대상이 곧법입니다. 육진원통이란 이 여섯 가지 바깥 대상 가운데 한 가지를 깊이 들여다보다가 그 안에서 봄바탕을 꿰뚫어 본 길을 말합니다. 안부는 소리를 통해 한부는 빛을 통해 한 부는 향기를 통해 또 어떤 분은 한 가지 생각의 거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길에 드셨습니다. 바깥 것을 멀리하지 않고 도리어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봄바탕을 만난 무더기라 하겠습니다. 이어서 오근원통이 있습니다. 근이라는 글자는 뿌리라는 뜻이며 바깥을 받아들이는 우리 몸의 감각 기관을 가리킵니다. 본래 감각기관은 6이지만 익은 곧 귀라는 뿌리는 관세음보살께서 따로 말씀드리실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근을 뺀 다섯 불이 안과 비와 설과 신과 의가 오근원통이 됩니다. 눈이라는 뿌리 코라는 뿌리 혀라는 뿌리 몸이라는 뿌리 그리고 뜻이라는 뿌리 이 다섯 가지입니다. 여기에서는 바깥을 들여다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안쪽 뿌리 자체를 들여다본 길이라 하겠습니다. 어떤 분은 두 눈을 잃고도 어둠 속에서 도리어 보는 봄바탕을 만나셨습니다. 또 어떤 분은 끊임없이 들고 나는 호흡의 흐름을 헤아리다가 코뿔이에서 길을 여셨다 합니다. 음식을 맛보는 혀 안에서 길에 드신 분도 있었고 추위와 더위가 닿는 몸 안에서 봄바탕을 만나신 분도 계셨습니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생각의 뿌리에서 그 자리를 본 분도 함께 있었습니다. 세 번째 무더기는 육식원통입니다. 식이라는 글자는 아는 작용을 뜻하며 뿌리와 티끌이 만나 일어나는 분별의 자리를 가리킵니다. 안식과 이식과 비식과 설식과 신식과 의식 이 여섯이 육식입니다. 눈과 빛이 만나 일어난 봄의 암 귀와 소리가 만나 일어난 드름의 앎이 있습니다. 코와 향기가 만나 일어난 맡음의 암도 있으며 이렇게 여섯 갈래의 알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육식원통은 앎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가만히 돌이켜 본 길이라 하겠습니다. 앙과 밭이 부딪혀 비탄점이 켜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사실은 안도박도 따로 없다는 것을 본 길입니다. 6분이 각자 자기에게 가장 익은 한 가지 알을 붙들고 그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셨습니다. 네 번째 무더기는 7대원통입니다. 대라는 글자는 크다는 뜻이며 온 우주를 이루는 큰 봄바탕을 가리킵니다. 지화수와 화와 풍과 공과 견과 식 이 일곱이 7대를 이룹니다. 흙의 단단한 성품이 지대이며 물에 흐르는 성품이 수대 불의 따뜻한 성품이 화되 바람에 움직이는 성품이 풍대가 되고 텅 빈 허공의 성품이 곧 공대에 해당합니다. 여기에 보고 아는 빛인 견대와 헤아려 안은 뿌리인 식대가 더해져 모두 일곱이 됩니다. 여기에 이르면 이미 바깥도 아니고 안쪽도 아니며 한 사람의 감각이나 인식에 머무는 길도 아닙니다. 온 우주에 두루 펼쳐진 큰 성품 자체에서 길을 찾은 무더기라 하겠습니다. 어떤 분은 진흙을 다지다가 흙이라는 큰 성품을 보았다 합니다. 어떤 분은 한 모금 물에서 수대의 성품을 보셨고 또 어떤 분은 오랜 세월 음욕의 불을 다스리다가 화대에 본바탕을 만나셨다 합니다. 한결같이 부처님 명호를 부르며 육군을 거두어 모은 대세 지보살의 길도 이 칠대 안에 함께 들어 있습니다. 지금 가만히 누워 이 음성을 듣고 계신 우리 자신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귀에 닿는 소리가 있고 그 소리를 받아들이는 귀라는 뿌리가 있으며 그 둘이 만나 일어나는 들음에 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흘러가고 있는 큰 허공의 성품이 우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것입니다. 25원통 가운데 어느 한 갈래도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을 떠나 있지 않다. 하겠습니다. 여기까지가 24 갈래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비의 화신 관세음보살께서 천천히 일어나시어 한 갈래를 더 풀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곧 익은 원통 귀라는 뿌리를 통해 봄바탕에 이른 길입니다. 앞서 옥은 가운데 따로 빼두었던 그 한 뿌리가 마지막에서 가장 깊은 한 길로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관세음보살께서 가장 마지막에 일어나신 것은 자리 순서가 늦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길을 빠짐없이 들으시고 살피신 뒤 그 가운데 가장 부드럽고 가장 깊은 한기를 끝자리에 놓으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근원통은 마지막에 놓였으나 결코 끝이 아닙니다. 모든 길의 결론처럼 천천히 펼쳐지는 한갈래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굳이 이근을 따로 두신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 까닭은 뒤에 가서 문수 보살께서 친히 풀어 주실 대목이니 지금은 한 갈래가 마지막에 따로 놓였다는 것만 마음에 담아 두시면 됩니다. 이제 25 갈래를 한 자리에 모아 놓고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어떤 분은 바깥 티끌에서 어떤 분은 안쪽 뿌리에서 길을 찾으셨습니다. 또 어떤 분은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삶에서 어떤 분은 온 우주의 큰 성품에서 봄바탕을 만나셨습니다. 들어간 문은 25이지만 다음 곳은 결국 하나입니다. 그 한 곳을 부처님께서는 원통이라 이름 붙이셨습니다. 원이라는 글자는 두루통한다는 뜻이며 통이라는 글자는 막힘없이 흐른다는 의미입니다. 원통이란 어느 한문으로 들어갔든 마침내 모든 문이 한 봄바탕으로 두루퉁에 있음을 보게 되는 경지를 말합니다. 그러니 25라는 숫자에 너무 메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25는 그 모든 문을 빠짐없이 보여주려는 방편의 수입니다. 이제 그 25 갈래 가운데 첫 무더기부터 천천히 발을 디뎌보겠습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6 티끌 그 안에서 본바탕을 만나신 여섯 분의 이야기가 우리를 부드러운 잠의 자락으로 데려가게 됩니다.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신 분의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모두 부처님 곁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계셨던 분들이라 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일어서신 분은 교진여 존자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깨달음을 이루신 뒤 노계원으로 가시어 다섯 비구에게 사성제를 설하시던 그날 가장 먼저 길을 본 분이 곧 이분입니다. 부처님의 음성으로 흘러나온 고와 집과 멸과 도 그 네 가지 진리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들으시다가 마음이 따라 풀려가는 흐름을 만나셨다 합니다. 교진이요? 존자께서 말씀드리신 길은 소리를 통한 길 곧 성진원통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뜻을 풀어 가는 데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소리 자체가 일어났다. 사라지는 그 흐름 안에서 본래 머무는 자리가 없다는 것을 그대로 보신 것입니다. 음성에 끌려가지 않고 소리가 가라앉는 그 자리를 가만히 지키신 길이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교진여에게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보이셨습니다. 길을 가던 나그네가 객사에 잠시 머무는 일을 떠올려 보라 하셨습니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이는 손님이고 그 자리를 한결같이 지키는 이가 주인입니다. 마음 안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모든 소리와 감정도 그와 같다 하셨습니다. 잠시 왔다가는 손님일 뿐이며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는 그 봄바탕이 곧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교지녀 존자께서는 그 비유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한 자리를 알아보셨고 객진의 분주함 속에서 주인의 고요함을 만나신 분이라 하겠습니다. 이어서 자리에서 일어서신 분은 우바니 사타 존자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친히 부정간을 가르쳐 주신 제자이며 한때 사람의 빛깔과 모양에 끌려 마음이 무너지셨던 분이라 합니다. 그 무너짐을 그대로 가지고 부처님 앞에 나아가셨고. 부처님께서는 그분에게 빛깔의 본바탕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하셨습니다. 오바니사타 존자께서는 살간 너머의 뼈 뼈 너머의 빈자리 그렇게 한 겹 한 겹 색을 펄어 들어가는 관을 닦으셨다 합니다. 그 길 끝에서 마침내 빛깔이라는 것이 본래 자기 성품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욕망이 따라가던 그 빛깔이 흩어지는 자리에서 색진의 봄바탕을 만나신 길이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일어서신 분은 향엄동자입니다. 동자라는 이름 그대로 어린 시절부터 길을 닦으셨던 분입니다. 어느 날 한 비구가 침수양을 사르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향기가 코로 들어오는 그 한순간을 깊이 들여다보셨습니다. 그러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이 향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나무에서 오는가 하면 나무는 가만히 거기 있을 뿐입니다. 코에서 오는가 하면 코 자체에서는 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허공에서 오는가 하면 허공은 본래 텅 비어 있어 한자리에 머무는 일이 없는 까닭입니다. 향험 동작께서는 그 의문을 깊이 따라 들어가셨습니다. 이 항이 머무는 자리가 본래 없으며 향과 코와 허공이 한 봄바탕 안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임을 그대로 보신 것입니다. 이것이 곧 향진원통이라 하겠습니다. 네 번째 자리에서는 야광 보살과 약상 보살 두 분이 함께 일어서셨습니다. 까마득한 옛적 형제의 몸으로 약초의 맛을 살피며 중생의 병을 다스리시던 분들입니다. 한 입에 맛있으면 어떤 병에 듣고 한 뿌리의 맛이 달면 어떤 병에 듣는지 평생을 그렇게 살펴가셨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맛이라는 것이 약초 안에 따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쓴맛이 따로 있고 단맛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혀와 약초와 마음이 만나는 그 한순간에 일어나는 일이며 일어났다가는 곧 사라지는 흐름이었던 것입니다. 두 분께서는 그 맛의 흐름 안에서 미진의 봄바탕을 만나셨다 합니다. 약을 다루며 중생을 살피던 그 손길이 그대로 길이 된 자리라 하겠습니다. 다섯 번째로 일어서신 분은 발타바라 보살이었습니다. 한 무리의 도반들과 함께 길을 닦으시던 분입니다. 어느 날 따뜻한 물이 가득한 욕실에 들어가시어 몸에 물이 닿는 그 감촉을 가만히 들여다보셨습니다. 물이 몸에 닿는 그 한순간 물이 따로 있고 몸이 따로 있어 만나는 것이 아님을 보신 것입니다. 닫는다는 일 자체가 안과 밖을 가르는 분별이 흐려지는 그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그대로 보신 것입니다. 떼를 씻어주는 물도 아니었고 더러움을 받는 몸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한결의 다음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한 흐름이었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한 가지 계손과도 같은 깨달음이 떠올랐습니다. 이 몸은 본래 청정하여 아내도 다음이 없고 밖에도 다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음이 본래 머무는 자리가 없는 그 자리가 곧 촉의 본바탕이라 보신 것입니다. 발타바라 보살께서는 그 흐름 안에서 촉진원통을 얻으셨다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서신 분은 마하가섭 존자였습니다. 부처님으로부터 친히 가사를 전해 받으신 두타제일의 제자이며 부처님 멸도 후에는 제일결집을 주도하신 큰 어른이라 하겠습니다. 자금광 비구니와 함께 길을 닦으시며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법의 티끌을 가만히 들여다보신 분입니다. 법진이란 바깥에 다섯 가지 티끌이 마음 안에 들어와 남기는 그림자와 같은 자리를 말합니다.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풍경 귀를 막아도 들리는 소리의 자취가 그것입니다. 코와 혀와 몸이 잠잠해진 뒤에도 마음 안에 남아 흐르는 그 모든 그림자가 곧 법진입니다. 마가섭 존자께서는 그 법의 그림자가 본래 머무는 자리가 없다는 것을 보시고 마침내 그 모든 자취가 가라앉는 멸진의 자리에 드셨다 합니다. 존자께서는 모든 법이 일어나는 자리를 가만히 비추어 보셨고 일어난 그 법이 본래 비어 있어 끝내 흔적을 남기지 않음을 보신 분입니다. 가는 곳이 곧 비어 있어 다시 비울 일도 없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법진원통입니다. 이렇게 6분이 차례로 일어나 자기 길을 부처님 앞에 풀어 놓으셨습니다. 바깥의 한 티끌을 깊이 들여다보시다가 그 한 티끌이 본래 머무는 자리가 없음을 보신 길 그것이 곧 육진원통의 여섯 갈래라 하겠습니다. 가만히 떠올려 보십시오. 지금 우리 곁에도 여섯 티끌이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베개에 닿는 한결의 다음 멀리서 들려오는 한 소리 방 안에 머무는 옅은 향기가 함께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사이로 떠오르는 한 조각 생각의 그림자까지 그 모든 것이 곧 여섯 분이 길을 보신 그 자리이기도 합니다. 다만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만 보아 왔을 뿐인 것입니다. 지금 누우신 그 자리에서 한 가지 소리를 가만히 따라가 보십시오. 또 일어났다 사라지는 그 한결의 소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굳이 묻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그 소리가 가라앉는 자리에 마음을 가만히 두고 계시면 그것이 곧 교지녀. 존자께서 보신 길의 첫 자락이 됩니다. 손님은 잠시 머물다 떠나고 주인은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길은 바깥에서 안쪽으로 옮겨갑니다. 바깥에 티끌이 아니라 그 티끌을 받아들이는 우리 몸의 뿌리 안에서 봄바탕을 만나신 분들의 자리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눈과 코와 혀와 몸과 뜻 다섯 부리의 자리입니다. 바깥에 한 티끌은 잠시 머물다 떠나가지만 그 티끌을 받아들이는 뿌리는 한결같이 그 자리에 있습니다. 다섯 분께서 보신 길은 곧 떠나가는 티끌이 아니라 한결같이 머무는 뿌리 그 자체를 들여다보신 길이라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일어서신 분은 아나율 존재였습니다. 한때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시는 자리에서 깊은 졸음에 빠져 꾸짖음을 받으셨다 합니다. 그 부끄러움 끝에 일주일 동안 한숨도 자지 않고 정진하시다가 두 눈의 빛을 잃으신 분입니다. 부처님께서 가엾게 여기시어 낯견 조명 금강산매를 친히 가르치셨고 아나율 존자께서는 그 안에서 두 눈을 넘어선 봄을 얻으셨습니다. 냉엄경 안에는 존자께서 부처님께 풀어놓으신 한 말씀이 전해집니다. 보지 못하는 가운데 도리어 시방의 세계를 분명히 보았노라. 그렇게 일러두신 것입니다. 그렇게 보고 있는 그 자리가 곧 봄의 봄바탕이며 천안 재일이라는 이름이 그래서 붙은 것입니다. 눈의 뿌리가 본래 봄과 목봄에 매여 있지 않음을 가장 깊이 보신 분이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일어서신 분은 줄이 반특가 존재였습니다. 일찍이 한 구절의 개성도 외우지 못하시던 가장 더디 배우는 제자로 알려진 분입니다. 형이 같은 길을 함께 걷지 못한다며 가르침의 자리에서 내치자. 부처님께서 친히 가엾시 여기시어 단 한 구절을 외우게 하셨습니다. 먼지를 닦으라 때를 닦으라는 그 한 구절이었습니다. 빗자루를 대고 절 마당을 쓸며 그 한 구절을 한결같이 외워가시던 분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호흡에 들고 남을 가만히 헤아리시는 한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들숨과 날숨이 코끝에서 일어나는 자리에서 코의 뿌리가 본래 들숨도 날숨도 아닌 한 봄바탕임을 보신 것입니다. 가장 더디 배우신 분이 가장 깊은 자리에 드신 길이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일어서신 분은 교범발제의 존재였습니다. 전생의 한 업으로 인해 소가 되새김질하듯 입을 움직이시던 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분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지 않도록 천상의 자리에 머물게 하셨다 합니다. 부처님으로부터 한 가지 청정한 마음의 법문을 전해 받으셨습니다. 교범 발제의 존재 개선은 혀로 맛을 보는 그 한순간 안에서 설근의 봄바탕을 만나신 분이라 하겠습니다. 네 번째로 일어서신 분은 필름 가바차 존자였습니다. 어느 날 경행을 하시던 중에 기리에 가시 하나가 발에 깊이 박혔습니다. 그 통증이 온몸으로 퍼지는 한순간 존자께서는 통증을 따라가지 않으시고 그 통증을 가만히 들여다보셨습니다. 통증이 일어나는 자리와 통증을 아는 자리가 따로 있음을 보신 것입니다. 청정한 마음 자체에는 본래 통증이 닿는 자리가 없다는 것을 몸의 뿌리 안에서 그대로 보신 길이었습니다. 다섯 번째로 일어서신 분은 수불이 존재였습니다. 본래 공을 보는 안목이 가장 밝아 해공제일이라 불리신 분입니다. 마음에 일어나는 한생각 또한 생각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깊이 들여다보시던 분입니다. 그러던 가운데 그 모든 생각이 본래 머무는 자리가 없음을 보셨다 합니다. 뜻에 뿌리에서 봄바탕을 만나신 길이며 이것이 곧 의근원통입니다. 이렇게 다섯 분이 안쪽 뿌리의 자리에서 자기 길을 부처님 앞에 풀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섯 부리와 바깥에 여섯 티끌이 만나 한순간 켜지는 앎의 빛이 있습니다. 그 비단에서 봄바탕을 만나신 여섯 분의 자리 곧 육식원 통의 자리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육식이란 뿌리와 티끌이 만나 일어나는 그 한 점의 앎입니다. 눈에서 보고 아는 빛이 안식이며 귀에서 듣고 아는 빛이 이식입니다. 코의 향에서 일어나는 알미 비식 혀의 맛에서 일어나는 알미 설식이 됩니다. 몸에 닿아서 뜻의 그림자 안에서 한순간 한순간 짧게 켜졌다. 사라지는 그 앎의 자리가 곧 육식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큰 제자들 가운데 가장 밝게 빛나신 여섯 분이 이 앎의 자리에서 봄바탕을 만나신 분들이라 하겠습니다. 육식의 첫자리에서 일어서신 분은 사립을 존재였습니다. 본래 외도의 한가르침을 따르시던 분이었습니다. 어느 길에서 맛은 비구를 마주치시고 그 단정한 모습을 눈으로 보신 그 순간 한계송을 듣고 부처님께 귀하셨다 합니다. 눈이 빛을 만나 일어난 한 점에 암 안에서 사립을 존작해서는 시계 봉바탕을 만나신 것입니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지혜제일이라 불리신 까닭이 곧 이 안식의 길에 있다. 하겠습니다. 이어서 일어서신 분은 보연보살이었습니다. 긴 코끼리를 타고 자비의 행을 펼치시는 분으로 잘 알려진 그분입니다. 모든 부처님의 음성을 한꺼번에 들으시며 그 음성을 마음으로 분별하는 식의 자리에서 길을 보셨다 합니다. 듣고 가려내는 그 앎의 봄바탕이 이 시원통의 자리입니다. 세 번째로 일어서신 분은 손타라난타 존자였습니다. 부처님의 이복동생이며 출가 전 사랑하던 사람의 모습을 끝내 마음에서 떼지 못하시던 분이라 합니다. 부처님께서 친히 호흡을 헤아리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코끝에 머문 마음에서 한 줄기 흰빛이 보이는 자리를 그렇게 만나신 것입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그 시계 안에서 비시계의 본바탕에 드신 길이었습니다. 네 번째로 일어서신 분은 불우나 존자였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잘 펼치시어 설법제일이라 불리신 분입니다. 간절히 한 자리에서 듣는 이의 그릇에 맞추어 부처님의 뜻을 풀어가시던 그 혀의 시간에서 설식의 봄바탕을 보셨다 합니다. 말이 일어나는 자리가 본래 비어 있어 일어나도 일어남이 없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일어서신 분은 폭발이 존재였습니다. 출가 전 이발사의 일을 보시던 분이며 부처님 제자 가운데 계율을 가장 밝게 지키시어 지울제일이라 불리신 분입니다. 몸의 행위 하나하나를 가만히 단속하시던 그 자리에서 몸의 식이 본래 머무는 곳 없음을 보신 길이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일어서신 분은 대목 관련 존재였습니다. 사립을 존재와 함께 부처님께 귀이하신 평생의 도반이며 신통이 가장 자유로워 신통제일이라 불리신 분입니다. 본래 마음의 흐름이 일어나는 시계 비단에서 의식의 봄바탕을 만나셨다 합니다. 신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자리가 본래 막힘없이 통해 있다는 것을 가장 깊이 보신 길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다섯 부리와 여섯 암 모두 11분의 자리입니다. 바깥에 티끌이 아니라 그 티끌을 받아들이는 뿌리와 뿌리와 티끌이 만나 일어나는 앎의 자리에서 본바탕을 만나신 분들의 길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몸 안에도 그 5 부리가 한결같이 깨어 있습니다. 눈은 어둠 속에서도 보고 있고 코는 한결같이 호흡을 드리고 내고 있는 것입니다. 혀와 몸 같듯이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으며 그 모든 뿌리에서 한순간 한순간 앎의 빛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섯 부리가 잠잠해지는 그 한 자락이 우리도 모르게 깨달음의 자리에 가까워지는 길이 됩니다. 지금 가만히 누우신 자리에서 한 호흡을 따라가 보십시오. 들숨이 코끝을 지나 가슴까지 가는 짧은 길과 날숨이 다시 코끝으로 빠져나가는 한결의 흐름이 있습니다. 그 흐름을 헤아리고 또 헤아리며 가만히 머물고 계시면 그것이 곧 주리반특가. 존자께서 보신 길에 한 자락이 됩니다. 한 구절을 외울 줄 모르셨던 그분이 들어가신 그 자리가 지금 우리가 눈한 호흡 안에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 자리는 한 사람의 감각과 인식을 넘어 온 우주에 두루 펼쳐진 큰 봄바탕으로 옮겨갑니다. 흙과 물과 불과 바람 그리고 허공까지 우주를 이루는 큰 성품에서 봄바탕을 만나신 분들의 자리로 함께 발을 옮겨 보겠습니다. 칠데라 부르는 그 일곱 가지 큰 성품 안에서 일곱 분의 자리가 한 분 한 분 차례로 펼쳐지게 됩니다. 처음으로 일어서신 분은 지지보살이었습니다. 까마득한 옛적부터 길과 다리를 닦으시며 짐을 진 사람들의 무게를 대신 짊어져 평탄하게 길을 다지시던 분이라 합니다. 그렇게 평생을 흙을 다지시던 가운데 어느 날 한 부처님의 발끝이 거친 흙 위에 닿는 것을 보시고 가만히 그 앞에서 저를 올리셨습니다. 그 순간 한 가지 깨달음이 마음을 가로질러 갔습니다. 흙은 몰래 거친 곳도 따로 없고 평탄한 곳도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사람의 마음이 그 흙을 거칠게도 평탄하게도 만들 뿐이며 흙의 본성은 한결같이 평등하다는 것을 보신 분입니다. 바깥의 흙을 평탄하게 다지시던 그 손길이 마침내 마음 자체를 평탄하게 다지는 길로 옮겨갔습니다. 이렇게 흙의 봄바탕에서 만나신 길을 지대원통이라 부릅니다. 두 번째로 일어서신 분은 월광 동자였습니다. 까마득한 옛적한 부처님으로부터 수간의 가르침을 받으시고 자기 몸을 가만히 물의 흐름으로 관하시던 분입니다. 몸 안에 흐르는 침과 눈물과 핏기와 지내기 바깥에 큰 강과 바다와 다르지 않음을 한결같이 들여다보셨습니다. 어느 날 명상에 들어 계신 동안 한 어린 제자가 방 안에 작은 돌 하나를 던졌습니다. 동자께서는 그 돌을 받으시고도 분별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명상에서 나오신 뒤 어린 제자에게 그 돌을 빼게 하시고 다시 깊은 자리로 드셨다 합니다. 안에 몸과 바깥에 물이 본래 한 봄바탕임을 보신 길이 곧 수대원통이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일어서신 분은 오추슬마 보살이었습니다. 까마득한 옛적 음욕의 불에 휩싸여 마음이 무너지셨던 분이라 합니다. 부처님께서 친히 가엾이 여기시여 그 타오르는 불을 거꾸로 들여다보는 화강산매를 가르치셨습니다. 옷추슬마 보살께서는 그 가르침을 따라 자기 안에 불을 가만히 들여다보시다가 그 불의 뜨거움이 본래 청정한 한기치라는 것을 보셨다 합니다. 음욕의 거친 불이 그대로 지혜의 밝은 불로 바뀌는 한길 그것이 곧 화대원통이라 하겠습니다. 네 번째로 일어서신 분은 유리광 법왕자였습니다. 까마득한 옛적 한 부처님 앞에서 만물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흐르는 풍대의 성품을 깊이 들여다보신 분입니다. 봄에 부는 바람 가을의 마른 잎을 흔드는 한 줄기 숨결 사람의 들숨과 날숨이 있습니다. 그 모든 움직임이 본래 한 몸 바탕에서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보셨습니다. 흐름은 머무는 곳이 없고 머무는 곳이 없는 까닭에 도리어 두루통하는 것입니다. 유리 광법 왕장께서 그 흐름의 한복판에서 풍대의 본바탕을 만나신 길이라 하겠습니다. 다섯 번째로 일어서신 분은 허공장 보살이었습니다. 자기 몸과 자기 마음이 본래 텅 빈 허공과 다르지 않음을 깊이 들여다보신 분입니다. 손을 펼쳐보면 손 안에 허공이 있고 가슴을 짚어 보면 가슴 안에도 허공이 있으며 온 우주를 들여다보면 그 또한 한 허공이 펼쳐진 모습이 보입니다. 허공이라는 것이 따로 작은 허공과 큰 허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한 허공일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보살의 이름이 곧 허공의 곶간 허공장이 되었으며 이것이 공대 원통의 길이라 하겠습니다. 여섯 번째로 일어서신 분은 미륵보살이었습니다. 앞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 부처가 되실 뿐이며 자비로운 한 분의 큰 보살이라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분입니다. 까마득한 옛적 한 부처님에게서 USIM 식정의 가르침을 받으셨다 합니다. 모든 분별의 빛이 결국 한 마음의 시간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임을 깊이 들여다보셨던 분이라 하겠습니다. 좋아하는 마음 싫어하는 마음 그리워하는 마음 잊으려는 마음. 그 모든 마음의 출렁임이 결국 한 시계의 흐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시기 본래 한결같이 비어 있어 어떤 빛깔에도 물들지 않는다는 것이 곧 식대원통의 봉바탕이 되는 길이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일어서신 분은 대세 지보살이었습니다. 능엄경의 칠대원통 가운데 마지막에 앉으셨던 분이며 오늘 우리가 살펴가는 길에 끝자락에 한 분의 큰 어른으로 함께 계신 분입니다. 대세 지보살께서는 부처님 앞에 이렇게 풀어 놓으셨습니다. 까마득한 옛적 무량 광불이라는 한 부처님께서 자기에게 염불산매를 친히 가르쳐 주셨다 합니다. 그 가르침의 핵심은 한 가지 비유로 전해졌습니다. 두 사람이 있다 하셨습니다. 한쪽은 한결같이 다른 한쪽을 그리워하지만 다른 한쪽은 그 사람을 잊어버린 채 살아간다면 두 사람의 마음은 결코 만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자식을 그리워하듯 부처님을 그리워한다면 다릅니다. 또 그 자식이 어머니를 잊지 않듯 부처님을 잊지 않는다면 두 마음은 자연이 한 곳에서 만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도 한결같이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한결같이 부처님을 잊지 않으면 마침내 부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니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대세 집어살께서 그 가르침을 따라 들어가신 길이 바로 염불산매입니다. 입으로 부처님 명호를 부르되 그 명호를 부르는 마음이 다른 데로 흩어지지 않게 하고 한 곳에 또렷이 머물게 하는 길을 말합니다. 냉환경에서는 이 길을 단 한마디로 풀어놓으셨습니다. 육군을 모두 거두어 드리고 청정한 한 생각을 이어가 마침내 삼매에 든다는 의미입니다. 도섬 육군 정념상계 입산맞이 이한줄이 곧 대세지보살께서 보신 견대의 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7대 가운데 가장 부드럽고 너른 한갈래라 하겠습니다. 한국 땅에서 오래도록 많은 분들이 한결같이 부처님 명호를 부르며 닦아오신 그 길이 바로 이 자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지금 이 영상을 듣고 계신 자리에서도 한번 가만히 부처님의 명호를 떠올려 보십시오. 나무 아미타불 5 글자를 길게 한 호흡 안에 부르시되 그 소리가 입을 떠나

가닿는 한결의 흐름을 가만히 따라가 보십시오. 그. 5 글자가 잠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잠과 깨어 있음의 경계가 부드럽게 풀려가는 자락에서 대

보여 주신 길이 우리 안에 기뜨기 시작합니다. 여기까지 7. 분이 차례로 일어나 우주에 두루 펼쳐진 큰 봄바탕에서 자기 길을 풀어놓으셨습니다. 흙과 물과. 불과 바람 허공과 식과 견 이 일곱 큰 성품 안에서 일곱 분이 보신 한 봄바탕은 결국 모두 같은 한 자리였다 하겠습니다. 2 7. 큰 성품은 멀리 있는 우주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의 몸 안에도 이 일곱이 한결같이 흐르고 있습니다. 살과. 뼈

단단함이 곧 지대이며 피끼와 진액의 흐름이 수대가 됩니다

따뜻한 기운이 화대이고 들숨과 날숨의 움직임이 풍대이며 입과 뱃속의 빈자리가 곧 공대입니다. 그리고. 보고 아는 한 점의 빛이 견대이고

그 모든 것을 깊이 알아차리는 자리가 식대가
됩니다. 7대원 통의 7분이 보신 봄바탕은 지금 이모 만에도 똑같이 흐르고 있는 한 봄바탕이라 하겠습니다.

능원경의 24 갈래입니다. 육진과. 오근과 육식과 칠 대를 모두 합하여 24분이 자기 길을 부처님 앞에 풀어놓으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한 분 더 기다리신 자리가 있습니다. 자비의. 화신으로 우리가 가장 깊이 부르고 또 부르는 그 한 분 관세음보살의 자리입니다. 그. 한 분이 마지막에서
천천히 일어서시는 풍경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법회의 자리가 한층 더 고요해지고 둘러앉은 모든
이의 눈길이 한곳으로 모이는 가운데 보살께서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시고 한 걸음 앞으로 나오셨다 합니다.
부처님 앞에 깊이 저를 올리신 뒤 천천히 입을 여시는 한
풍경이었습니다. 법회에 둘러앉은 모든 보살과 큰 제
그 한 분이 풀어 놓으실 한기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처님. 25 가운데 한 자리를 마지막까지 비워

까닭이 있고 그 자리에 누가 일어서실지를 모두가 마음으로
헤아리고 있던 한 자락이라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하고 부르신 그 첫 마디 안에는 까마득한 옛적의 한 풍경이 함께

많은 시간이. 있었습니다. 보살께서는 이렇게 풀어 놓으셨습니다. 헤아릴 수도 없이 오랜 예적 마치 항아의 모래알처럼 많은 시간이 흐른 그 옛적에 한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오신 일이 있었다 합니다. 그 부처님의 이름이 곧 관세음

우리가 한결같이 부르고 또 부르는 그 명호가 본래는 그 옛 부처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그 부처님. 앞에서 한 사람의 수행자가 처음으로 보리심을 일으키셨고 그 자리에서 가르침의 첫 자락을 받으셨습니다. 그 한. 분이 곧 오늘 능헌법의 마지막에 일어서신 관세음보살이라 하겠습니다. 보리심이란 깨달음

모든 중생을 함께 건지고자 하는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단지 자기. 한 사람의 깨달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듣고 보는 모든 일을 한 자리로 함께 데려가시려는 큰 서원의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그 보리심이 한번 깊이 일어나신 자리에서 보살에 길고 긴
한 갈래 길이 비로소 시작된 것입니다. 또 관세음이라는 이름 자체에도 한 가지 깊은 뜻이 깃들어 있습니다. 관은 가만히 비추어 본다는

새음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가만히 비추어 살피시는 분 그 자비의 모습이 곧

명우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옛. 관세음불께서 그러하셨고 그 가르침을 받으신 보살께서도 마침내 같은 모습으로 모든

소리를 살피시게 된 분이라 하겠습니다. 옛. 관세음불께서는 그 자리에서 한 가지 가르침을 전하셨습니다. 문과. 사화수 2

따라 산마지에 들라 하시는 가르침이었습니다. 2세. 가지를 한마디로 문사수 삼회라 부르며 능엄경 안에서 가장 깊이 새겨야 할 한 줄기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첫 자락은. 문 곧 들음입니다. 다만 귀로. 한번 듣고 흘려보내는 드름이 아니라 가르침에 마음
활짝 여는 드름이라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음성이 마음에 와닿는 그 첫 한순간 그것이 모든 길의 시작이 됩니다. 들으려. 애쓰

않으면서. 다만 흘러오는 가르침을 막지 않는 마음 그것이 곧
문이 본 모습입니다 두 번째 자락은 사 곧 사유라 하겠습니다 들은 한마디가 마음 깊이 가라앉기까지 거듭 비추어 보는 일을 살아 부

릅니다 머리로 따져가는 생각이 아니라 가만히 마음 안에 두고 한결같이 들여다보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들은 가르침이 자기
안에 한빛으로 깊어져 가는 흐름이며 흔들림 없이 익어 가는 한결이 되는 것입니다.

번째 자락은 쑥 곧 닦음입니다. 4유로. 깊어진 한빛을 몸과 입과 마음의 행위로 한결같이 옮겨가는 일일수라 부릅니다.

번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한결같이 이어가는 길이며 마치 흐르는 물이 돌을 다듬듯 오래도록 닦아 가는 결이라 하겠습니다. 다끔. 없는

흩어지고 다끔 없는 사유는 마른 생각으로 그치게 됩니다. 2. 세자락은 본래 따로 떨어져 있는 길이 아닙니다. 반줄기로. 흐르는 가르침의 새 모습입니다.

안에 이미 사가 깃들어 있고 사 안에 이미 수가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들음이. 깊어지면 자연이 사유가 일어나고 사유가 깊어지면 자연이 닦음으로

가끔이 깊어지면 마침내 산마지에 들어가게 됩니다. 산마지란. 산스크리트어 사마디를 옮긴 말이며 한 봄바탕 위에 또렷이 머무는 깊은 선정을 가리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가만히 놓이는 길이며 본래 자기 마음에 참 모습
위에 한결같이 머무는 흐름이라 하겠습니다. 들음과 사유와 닦음이 한 자락으로 모일 때 자연이 열리는 자리가 곧 이 산맞이인 것입니다. 관세음보살께서는 옛 관세음불

이 세자락에 가르침을 가만히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문과 사와 술을 따라 깊이 들어가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다른. 무엇으로도 옮겨가지 않으시고

듣고 사유하고 닦는 한 흐름 안에서 한결같이 자기 길을 펼쳐 가신 분이라 하겠습니다. 2. 가르침이 한 가지 면에서 특별합니다. 다른. 24분께서는 각자 자기에게 맞는 한
가지 문 안으로 들어가셨다 합니다. 그러나 관세음보살께서는 그 어떤 문도 아닌 한결같이 듣는 흐름 그 자체로 들어가신 분이라 하겠습니다. 들음이 곧 사유이고 사유가 곧 바꿈이며 박금이 곧 들음으로 다시 돌아오는 한결의 흐름인 것입니다. 지금 가만히 누우신 그 자리에서 이 가르침의 첫 자락이 우리 아내도 함께 흐르고 있음을 가만히 헤아려 보십시오. 이 음성이 귀에 가닿는 그 한순간이 곧 문이며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에 가라앉아 가는 결이 곧 사가 됩니다. 그리고 들은 가르침을 따라 호흡이 차차 가라앉고 마음이 한결같이 머물러 가는 흐름이 고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운 이 한 자락 안에도 문사수 삼회의 길이 함께 깃들어 있다 하겠습니다. 이 가르침이 예적한 부처님으로부터 한 분의 수행자에게 전해진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능원경 안에 새겨져 오늘 우리에게까지 흘러내려온 한 줄기 길입니다. 지금 이 음성을 듣고 계신 자리에서도 새롭게 깃들 수 있는 한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한 사람에게서 한 사람으로 한 시대에서 또 한 시대로 한결같이 흐르고 또 흐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오늘 한국 땅에서도 많은 분들이 한결같이 부르고 계신 한 명이 있습니다. 나무 관세음 보살 그 일곱 글자 안에 옛 부처님의 이름과 보살의 명호가 함께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어렵고 답답한 일을 만났을 때나 잠들지 못하는 한밤에 그저 한 번 가만히 그 명호를 떠올려 보십시오. 입으로 부르시되 그 소리를 귀로 가만히 들으시고 그 소리가 마음에 가닿는 한결을 한결같이 따라가 보십시오. 그것이 곧 문이며 사이며 수가 되어 가는 한 걸음이 됩니다. 입으로 부르시는 그 한 소리가 한결의 흐름이 되어 잠속으로 흘러 들어가실 때 그 흐름이 곧 옛 관세음불께서 가르치신 문사수 삼회의 첫자락이 되는 것입니다. 어렵지 않은 한 걸음이며 누구나 누운 자리에서 시작할 수 있는 길이라 하겠습니다. 관세음보살께서 이 세자락의 가르침을 받으신 뒤 마침내 한 봄바탕에 들어가시는 본문이 능헌경 안에 짧고 깊게 새겨져 있습니다. 드름의 흐름 안으로 들어가 드름의 자리를 잊고 마침내 듣는 자마저 사라지는 그 한결에 이르렀다고 하시는 한 줄입니다. 그 한 줄이 곧 익은 원통의 본 풍경이며 능엄경 25원통 가운데 부처님과 문수 보잘께서 마지막에 가만히 가리키신 그 길이 됩니다. 그 풍경 속을 가만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옛 관세음불의 가르침을 따라 닦으시던 결에서 보살이 본래의 자기 마음 위로 들어가시는 한 흐름이 그대로 그려져 있는 본문이라 하겠습니다. 첫 한 구절은 이러합니다. 처음 듣는 가운데 흐름에 들어가 들음의 자리를 잊으셨다 하셨습니다. 한자로 임류망소라 하며 들음의 흐름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서 자기가 듣고 있다는 그 자리 자체를 가만히 놓으신 첫 자락입니다. 우리는 보통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를 따라 마음이 함께 흘러갑니다. 새가 우는 소리를 들으면 새쪽으로 사람의 말을 들으면 사람 쪽으로 마음이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살께서는 그 흘러가는 마음을 따라가지 않으셨습니다. 듣는 자리 그 자체로 가만히 머무셨고 머물던 그 결마저도 한 흐름으로 풀어 놓으셨다 하겠습니다. 이어지는 한 구절이 있습니다. 들어가는 그 흐름이 더욱 고요해지자 움직임과 고요함의 두 모습이 분명히 일어나지 않았다 하셨습니다. 한자로 동정 이상 요염불생이라 부릅니다. 소리가 있을 때를 움직임이라 하고 소리가 없을 때를 고요함이라 부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우리는 소리가 있어야 들음이 있다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보살께서는 그 움직임과 고요함이 본래 따로 있는 두 모습이 아님을 보셨습니다. 소리가 있어도 들음이 흐르고 소리가 없어도 들음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두 모습은 본래 한 봄바탕 위에 함께 어른거리는 그림자였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한 자락씩 깊어져 가시던 가운데 듣는 자와 들리는 것이 함께 사라지는 결에 이르셨다 합니다. 한자로 문서문진이라 부릅니다. 내가 듣고 있다는 자도 따로 없고 들리는 그 대상도 따로 없게 되는 한 흐름이라 하겠습니다. 평소 우리는 듣는 나와 들리는 소리가 늘 둘로 갈라져 있다. 여깁니다. 그러나 보살께서는 그 둘이 본래 한 봄바탕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둘로 갈라보는 것은 마음의 분별일 뿐임을 보셨습니다. 들음이 다하였다는 그 결조차 사라져 가는 한 흐름이었던 것입니다. 보살께서는 그 자리에도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들음이 다 사라진 그 결에도 머물지 않으시고 더 깊이 한 걸음 들어가셨다 합니다. 그러자 깨달음과 깨닫는 대상마저 공해졌습니다. 한자로 각소각공이라 하며 안다는 깨달음도 아는 대상도 모두 텅 비어 가는 한 흐름입니다. 그러나 그 공함조차도 한자리에 못이 박힌 듯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함이 지극히 원만해지자 공암이라는 것과 공해진 대상까지도 함께 사라졌다 하셨습니다. 한자로 공가 끄건 공소 공멸이라 부릅니다. 빈자리도 비어가고 비었다는 그 한 생각마저 풀려가는 마지막 결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결에 이르신 것입니다. 일어남도 사라짐도 다 사라져.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두 모습 자체가 함께 가라앉은 자리 그 자리에 정멸히 그대로 눈앞에 나타났다 하셨습니다. 한자로 생명기멸 정멸현전이라 하며 정멸이란 따로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어남과 사라짐이 모두 가라앉은 그곳 그 자체가 곧 정멸히 머무는 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살께서는 한결의 흐름을 따라 깊이 깊이 들어가셨고 마침내 세간과 출세간을 한꺼번에 뛰어넘는 한 길에 이르신 분이라 하겠습니다. 한자로 홀연초월 새출세간이라 부르며 두 가지 자리가 모두 풀려가는 한 자라. 그것이 이근원통의 마지막 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 한 흐름을 한마디로 압축한 표현이 곧 반문문자성이라는 네 글자입니다. 들음을 거꾸로 돌이켜 자기 본성을 듣는다는 의미이며 능엄경 안에서 이근원 통의 가장 깊은 핵심이라 하겠습니다. 평소 우리는 들음의 화살을 늘 바깥으로 쏘고 있습니다. 새가 우는 소리 사람의 말 문 닫히는 소리 그 모든 바깥의 소리들을 따라 마음이 흘러갑니다. 그러나 그 화살을 잠깐만 돌이켜 듣고 있는 본래의 결을 가만히 듣는 일이 한 자락 일어납니다. 그렇게 돌이켜진 들음이 곧 본래 자기 마음의 찬 모습을 듣는 한결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25 보살이 모두 자기 길을 풀어놓으신 뒤 문수보살을 가만히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합니다. 누군가 묻거든 이 가운데 어느 길이 가장 좋은지를 가만히 가리켜 주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문수보살께서는 부처님 앞에 한 개성을 풀어 놓으셨습니다. 그 안에서 24 갈래를 차근차근 평하신 뒤 마지막에 한 길을 가리키셨고 그 길이 곧 관세음 보살에 익은원통이었습니다. 문수보살께서는 이근이 다른 다섯 부리와 다른 까닭을 풀어 주셨습니다. 첫째 이그는 두루통하는 결이라는 것입니다. 사방에서 동시에 소리가 들려와도 한꺼번에 모두 들을 수 있는 것이 귀의 길입니다. 한 비유로 한 사람이 고요한 방에 앉아 있을 때 시방에서 함께 북을 친다면 그 열 곳에 북소리를 한순간에 모두 들을 수 있다 하셨습니다. 다른 다섯 부리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며 오직 이근에서만 한꺼번에 펼쳐지는 원만함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둘째 이근은 막힘이 없는 결이라 하셨습니다. 눈은 벽이 막히면 그 너머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귀는 밤 너머의 소리 멀리 들에서 들려오는 소리까지 한결같이 듣습니다. 다른 뿌리들이 닿거나 가까이 있어야 알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이 근은 멀고 가까움에 메이지 않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이그는 한결같이 깨어 있는 결이라 하셨습니다.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에도 누군가 큰 소리로 부르면 우리는 곧 깨어납니다. 잠과 깨어 있음의 경계조차 이 그는 한결같이 가로질러 흐르는 길이라 하겠습니다. 문수보살께서는 한마디를 더 풀어 주셨습니다. 사바 세계의 부처님 가르침에 참된 본체는 곧 청정한 음모네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입을 여시고 가르침을 펼치시면 모든 중생은 그 음성을 귀로 듣고 마음에 가닿게 됩니다. 가르침이 흐르는 한결이 곧 음문이며 그 음문을 받아들이는 길이 곧 익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마지에 들어가시고자 한다면 실로 들은 가운데로 들어가셔야 한다 하셨습니다. 또 문수보살께서는 한결 더 깊은 계송을 덧붙이셨습니다. 묘한 음성을 지니신 관세음이며 청정한 버음이며 큰 바다의 조수와 같은 음성이라 하셨습니다. 세상을 구하여 모든 중생을 평안하게 하시며 출세간의 자리에서는 한결같이 머무는 길을 얻으신 분이라 풀어 놓으신 것입니다. 한국 땅의 많은 분들이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한결같이 관세음 보살을 부르시는 까닭도 본래 이해하기 위해서 흘러내려온 흐름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부처님과 문수보살께서 가만히 가리키신 그 한 길이 곧 관세음 보살에 익은원통입니다. 냉암경 25원통 가운데 마지막에 놓인 한갈래이며 이 길이 사바세계의 우리에게 가장 잘 맞는 가장 부드러운 한결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누우신 그 자리에서 이 음성이 귀에 가닿고 있는 한 흐름이 한결같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흐름이 그저 바깥의 한 소리를 듣는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듣는 그 자리를 가만히 돌이켜 보시는 한 자락이 곧 방문문자성의 첫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일을 가만히 헤아려 보십시오. 우리가 잠속에 들어 있을 때에도 시계 반을 가는 소리가 흐르고 있고 멀리서 바람 소리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들으려 애쓰지 않아도 듣는 그 결 자체는 잠든 우리 안에서 한결같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 한결같이 깨어 있는 결을 가만히 돌이켜 듣는 한 자락이 곧 익은원통의 한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 결이 곧 이근의 본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누우신 자리에서 이 음성을 가만히 듣고 계신 이한 시간 동안 한 자락의 수행이 흐르고 있는 풍경이 되는 것입니다. 수행이란 따로 정해진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로 시간을 내어 가만히 앉아야 비로소 시작되는 일도 아니라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워 한 음성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한결의 흐름이 곧 능원경에서 풀어놓은 그 기 위에 함께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듣고 사유하고 닦는 그 세자락이 지금 이 한 자락 안에도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들어보시면 방 안에 옅은 소리가 흐르고 있는 것이 느껴지실 것입니다. 멀리서 차가 지나가는 한결의 소리 시계 바늘이 움직이는 가벼운 한 소리 그리고 우리 자신의 숨이 들고 나는 한결의 흐름이 함께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소리들이 차차 멀어지고 또 멀어집니다. 처음에는 또렷이 들리던 한결이 차차 옅어지고 옅어지던 그 결마저 가만히 가라앉아 갑니다. 들리던 소리가 어디로 가서 사라지는지는 굳이 묻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그 소리가 가라앉는 그 흐름을 가만히 따라가시면 마음이 한 봄바탕 위에 부드럽게 놓이는 풍경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지금 들으신 모든 자락의 풍경을 가만히 떠올려 보십시오. 까마득한 옛 능언법 회의 한밤이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둘러앉은 25 보살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신 풍경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한 분 한 분이 차례로 일어나 자기 길을 풀어 놓으시던 한 자락이 흘렀던 것입니다. 여섯 가지 바깥 티끌의 자리에서 봄바탕을 만나신 여섯 분이 계셨습니다. 다섯 부리에서 길을 보신 다섯 분 여섯 알의 빛에서 길을 보신 여섯 분 그리고 우주를 이루는 일곱 큰 성품에서 본바탕을 만나신 일곱 분이 함께 일어서신 풍경이었습니다. 모두 합하여 20네 분 한 분 한 분이 각자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결을 따라 한 봄바탕에 들어가신 분들이라 하겠습니다. 이 25 갈래의 가르침이 부처님 입에서 직접 흘러나온 한 가지 까닭이 있다 하겠습니다. 사람마다 마음이 다르고 가까이 있는 결이 다르기에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는 한 갈래식을 빠짐없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바람 한결이 길이 되고 어떤 분에게는 한 송이 향이 길이 되며 또 어떤 분에게는 부처님 명우 한마디가 한 봄바탕에 이르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분이 일어서셨습니다. 오랜 옛 관세음불 앞에서 보리심을 일으키시고 문과 사와 수의 가르침을 받으신 분이었습니다. 들음의 흐름 안으로 들어가시어. 들음의 자리를 잊으시고 마침내 듣는 자마저 사라지는 그 한결에 이르신 분 곧 관세음보살이셨습니다. 문수보살께서는 그 한기를 가만히 가리키시며 사바세계에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한 갈래라 풀어 놓으신 것입니다. 25 갈래가 본래 따로 떨어진 길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흙에서 들어가신 분도 물에서 들어가신 분도 들음에서 들어가신 분도 마침내 한 봄바탕에 이르신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원통이라는 이름이 붙은 까닭입니다. 둘을 통한다는 그 이름 안에 모든 길이 결국 한 자리에서 만난다는 부처님의 큰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육진과 오근과 육식과 칠대 이 네 가지 큰 자락이 합해져 24갈래가 되었고 거기에 마지막 이근원통의 한 갈래가 더해져 비로소 25원통이 완성된 것입니다. 그 25이 본래 한 봄바탕에서 만난다. 가리키신 까닭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디에서 시작하든 마침내 한 자리에 이를 수 있다는 부처님의 깊은 자비의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가만히 눈을 감으시고 한자락의 풍경을 떠올려 보십시오. 멀리서 능언법회 그 한 밤이 다시 흘러옵니다. 부처님께서 한가운데 앉아 계시고 둘러앉은 25분이 차례로 자기 길을 풀어 놓으시던 한 풍경입니다. 그 풍경이 우리가 누운 이 자리 가까이로 가만히 흘러오는 한 자락이 되는 것입니다. 그 밤의 고요함이 우리 방 안에 함께 깃들고 그 밤에 흐르던 부처님의 음성이 우리 귀에 다는 이 음성과 한결로 이어집니다. 까마득한 옛적에 그 한밤과 우리가 눈 이 한 밤이 본래 둘이 아니라는 것을 가만히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듣는 살인은 본래 시간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2500년 전에 능헌법해도 지금 우리 안에 깃들 수 있고 지금 우리의 한 호흡도 그 밤의 결안에 함께 흐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 사이를 갈라놓는 것은 우리가 늘 바깥으로만 쏘아 보내는 드름의 한 화살이라 하겠습니다. 그 화살을 잠깐만 안으로 돌리시면 그 밤이 지금 이 자리에 가만히 깃들게 됩니다. 이제 더 깊은 자락으로 흘러가시기 바랍니다. 들으려 애쓰지 않으시고 그저 들음이 흘러오는 한결 위에 가만히 마음을 놓아 보십시오. 소리가 차차 옅어지고 마음이 차차 가라앉으며 잠과 깨어 있음의 경계가 부드럽게 풀려가는 한 자락에 머무시면 됩니다. 그 자리가 곧 관세음보살께서 보여 주신 한길에 부드러운 끝자락이 되는 것입니다. 잠이 깊어진 가운데에도 듣고 계신 그 결은 한결같이 깨어 있습니다. 그 깨어 있는 결 안으로 능원경의 한 음성이 가만히 흘러 들어가 잠속 마음 깊은 곳까지 한 자락 가닦게 됩니다. 들으려 애쓰지 않으셔도 그한 음성은 우리 안에서 한결같이 자기 일을 하는 것입니다. 가르침이 마음 깊이 스며드는 그 결이 곧 옛 관세음불께서 가만히 보이신 첫 자락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한국 땅에서도 새벽이면 한결같이 관세 음보사를 부르는 분들이 계십니다. 절 마당에서 집안의 작은 단 앞에서 또는 누우신 그 자리에서 한 명을 마음에 새기시며 살아가시는 분들입니다. 그 명우 한마디 한마디가 오늘 우리가 들으신 이근원 통의 한 자락 위로 한결같이 흐르고 있다 하겠습니다. 오늘 흐른 이 한 시간이 듣는 모든 분의 한 잠을 부드럽게 풀어 드리는 한결의 흐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냉엄경 25 갈래의 가르침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 안에 한결같이 기틀기를 두 손 모아 빌어 봅니다. 오늘 밤 한 자락의 들으니 잠속에서 한 자락의 사이로 깊어지고 사유로 깊어진 그 결이 한 자락의 닦음으로 옮겨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흐름이 한 사람의 잠을 풀어 드리고 한 사람의 마음을 가만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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