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아보려 애쓰셨을 것입니다. 가족에게는 좋은 부모로 이웃에게는 좋은 사람으로 그렇게 한평생 마음을 다해 살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조용한 저녁 가만히 앉아 계시다 보면 이상한 마음 한 자락이 가슴위에 내려앉습니다. 분명 베풀었는데 분명 잘해주었는데 사람들은 자꾸만 멀어져 갑니다. 자식도 그러하고 오랜 친구도 그러합니다. 심지어 평생을 함께한 그 사람조차도 어느 순간부터 마음의 거리가 한켭씩 멀어진 듯한 그 서늘한 기분이 가슴을 스쳐갑니다. 저는 이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볼 때마다 한 가지 물음을 떠올리곤 합니다. 정말 베품이 부족했던 까닭이었는가. 정말 더 잘해 주지 못한 탓이었는가. 그렇게 가슴 한 편을 자주 만져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이미 2500년 전에 바로 이 마음의 매듭을 풀어낼 네 가지 길을 일러 주셨습니다. 그 길의 이름이 바로 오늘의 주제 사서법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람을 끌어안는 네 가지 마음. 이 채널 불교의 밤은 이 사소법을 단순한 인간관계의 기술이 아니라 내 마음을 가만히 거두어 가는 수행의 길로 풀어들이려 합니다. 오늘 이한자락 법문을 끝까지 들으시면 여러분은 한 가지를 얻고 가실 것입니다. 사람이 곁에 자연이 머무는 자리 그 자리를 짓는 마음의 길을 가슴에 새기게 되십니다. 외롭지 않게 그러나 매달리지도 않는 그 자리 말입니다. 자 그러면 사서법 이 네 글자부터 가만히 짚어 보겠습니다. 사섭이라는 말을 오늘 처음 들으시는 분도 계실 것이며 절에서 한두 번 들어보신 분도 계시리라 잠작합니다. 한자를 한 글자씩 풀어 드리겠습니다. 넉살 라는 글자는 네 가지를 의미하고 거둘 섭이라는 글자는 거두어 품는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바로 이 거둘 섭이라는 한 글자가 오늘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할 핵심입니다. 여러분 이 거둘 섭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들여다 보십시오. 손수 변에 끌어 모은다는 뜻의 글자가 함께 붙어 있습니다. 손으로 잡되 꽉 쥐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거두어 품는다는 의미 어머니가 잠든 아이의 이불자락을 소리 없이 끌어 덮어 주듯이 그렇게 품어내는 듯이 바로 섭이라는 글자의 본래 뜻입니다. 여기서 제가 한 가지를 짚어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을 얻는 일을 붙잡는 일로 알고 살아갑니다. 자식을 붙잡으려 하고 배우자를 붙잡으려 하고 친구를 붙잡으려 애를 씁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섭이라는 글자는 붙잡는 마음이 아닙니다. 자연이 모이게 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손에 모래를 꽉 쥐면 다 빠져나가지만 손바닥을 가만히 펴두면 그 위에 모래가 머무는 이치 바로 그 별을 부처님께서는 섭이라 일러두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보살리 중생을 가만히 안아내는 길로 이 사섭을 네 가지로 일러 두셨습니다. 그 네 글자를 오늘 처음으로 함께 짚어 보겠습니다. 보시 에어 이행 동사 이 네 글자입니다. 보시는 베푸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단순히 물질을 건네는 일이 아닙니다. 에어는 사랑의 말이라 풀이 됩니다. 그러나 단순히 듣기 좋은 말이 아닙니다. 이행은 이로운 행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단순히 도와주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동사는 함께 일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단순히 같이 있어 주는 일이 아닙니다. 이 네 글자가 왜 그토록 깊은 뜻을 품고 있는지 그리고 왜 부처님께서 이 네 가지를 사람을 끌어안는 마음이라 이르셨는지 그 깊은 결은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한 분씩 차분히 풀어 드리겠습니다. 오늘 이 첫 시간은 그 네 문 앞에 함께 서 보는 시간입니다. 여러분 자리에 편히 기대어 들어 주십시오. 이 법문 한 자락 안에서 부처님이 일러 주신 네 가지 마음의 문 앞에 우리 함께 가만히 서 보겠습니다. 자 이제 그 첫 번째 문을 열어보겠습니다. 사서법의 네 문 가운데 가장 먼저 펼쳐지는 자리 부처님께서는 그 입구에 보시섭이라는 한마디를 새겨두셨습니다. 사람을 거두는 길에 맨 처음에 베품이 놓여 있다는 사실 여기에 이미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지나온 시간을 한번 솔직하게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평생을 헤아려 보면 적지 않게 베풀며 살아오신 자취가 가득하실 것입니다. 자식에게는 아낌없이 내어 주셨고 손주에게는 무엇이라도 더 쥐어주려 하셨고 이웃에게는 긴치한 포기 떡 한 접시라도 나누며 살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한평생 베풀고 또 베풀었는데 어느 순간 가슴 한 촨이 이상하게 가난해지는 기분이 들곤 합니다. 분명 손은 비웠는데 마음은 도리어 무거워진 듯한 그 감각 그런 자리가 가만히 찾아올 때가 있으셨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자리 이 어긋남의 자리를 정확히 짚어 주셨습니다. 보시는 그저 무언가를 건네는 행위가 아니라 건네는 마음 그 자체를 다스리는 수행이라 가르치십니다. 베풀이 잘못된 결로 흐르게 되면 천문에서부터 모든 것이 뒤틀려 버립니다. 자 그러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보시에는 어떤 결이 있는가? 경에서는 보시를 세 가지로 나누어 일러두셨습니다. 첫째가 제시이고 둘째가 법시이며 셋째가 무의시입니다. 제시는 가장 흔히 떠올리시는 보시로 제물과 물건을 나누는 일을 가리킵니다. 손주의 손에 쥐어주는 용돈 절에 올리는 공양미 한 대법 어려운 이웃에게 슬쩍 건네는 봉투 한 장 이 모두가 제시의 결에 속하게 됩니다. 법실은 가르침을 나누는 일을 이룹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가셔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자식이나 며느리에게 던지는 충고가 곧 법신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신은 받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한 호흡이라도 편안해지는 가르침을 가리킵니다. 듣는 사람의 마음이 도리어 무거워지는 가르침이라면 그것은 법시가 아니라 짐이 되어 버립니다. 노년의 입에서 흔히 새어 나가는 한마디가 법시인지 짐인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뜻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무의식입니다.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시라는 뜻인데 저는 이 무의식을 풀이할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곤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어르신들이 50대 60대 70대를 살아오시며 사실은 가장 많이 베풀어 오신 도시가 바로 이모의 시이기 때문입니다. 손주가 올 때 말없이 안아주시는 그 품을 떠올려 보십시오. 며느리가 힘든 표정을 지을 때 말은 없어도 옆에 그저 앉아 주시는 그 자리도 그러합니다. 늦은 밤 자식에게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 아무것도 캐묻지 않으시고 그저 괜찮다. 다 괜찮다 한마디 건네 주시는 그 음성 이 모두가 무의식의 결에 닿아 있습니다. 이 보시는 돈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받는 사람의 가슴 깊은 곳에 가장 오래 머무는 보시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평생 그렇게 살아오셨고 본인이 그렇게 살아오신 줄도 모르신 채 묵묵히 그 길을 걸어오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한 가지 더 짚어 드리고 싶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옛 가르침의 무죄 치시라 하여 재물이 없어도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가 전해 내려옵니다. 첫째는 화한씨 부드러운 얼굴로 사람을 대하는 보시입니다. 둘째는 언씨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보시이고. 셋째는 심시 마음을 열어 진심을 내어 드리는 보시입니다. 넷째는 안시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보시이며 다섯째는 신시 몸으로 슬쩍 거들어드리는 보시가 됩니다. 여섯째는 자식 자리를 양보해 드리는 보시이고. 일곱째는 첼시 상대의 마음을 미리 헤아려 드리는 보시를 가리킵니다. 이 일곱 가지를 가만히 헤아려 보십시오. 손에 무엇 하나 쥐지 않으셔도 사람을 거두는 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보시를 결코 가난한 자가 못하는 일이라 두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손이 비어 있을수록 마음으로 베풀 수 있는 결이 더 깊어진다고 일러 주십니다. 자 그런데 이 세 가지 보시의 결을 안다고 해서 마음이 다 풀리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위에 또 한 겹을 더 얹어 두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금강경이 나오는 무주상 보시라는 가르침입니다. 무주상보시 이 말을 글자 그대로 풀어보면 머무름 없이 베푼다는 뜻이 됩니다. 머무름이 없다는 표현 처음에는 이것이 무슨 뜻인가 싶으실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서 이렇게 일러 주십니다. 보살이 보실 행할 때에는 마땅히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행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만약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가이 헤아릴 수 없다고도 서라십니다. 여기서 상에 머문다는 표현은 베풀었다는 자치가. 마음에 남는 일을 가리킵니다. 조금 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언가를 누군가에게 건네셨을 때 내가 주었다는 생각이 가슴에 한 줄 새겨지는 그 순간이 있습니다. 또한 저 사람은 내게 빚을 졌다는 그림자가 마음 한 켠에 드리우는 그 순간도 함께 따라옵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보시가 거래로 변해 버린다고 짚어 주셨습니다. 저는 이 가르침을 처음 들었을 때 등 뒤가 서늘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평생 베풀어 왔다고 자부해 온 그 많은 일들이 정말 보시였는가. 아니면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히 거래의 장부를 적어 왔던 것은 아닌가. 그 물음 앞에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던 시간이 떠오릅니다. 여러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베푸신 뒤를 가만히 헤아려 보시는 것입니다. 며칠이 지나도 그 사람이 별다른 인사 한마디 없이 지나갈 때 가슴 어딘가에 살짝 서운함이 올라오신 적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바로 그 한 줌의 서운함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머무름입니다. 베품이 거래로 바뀌는 자리는 거창한 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저 한 줌의 서운함. 내가 해 줬는데 하는 한마디 안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부처님 가르침이 우리 생활 속으로 가만히 내려옵니다. 베푸실 때 마음의 한 박자 차분히 두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무언가를 건네신 그 다음 그 사실 자체를 바람결에 흘려보내듯 놓아두시는 연습 자식에게 용돈을 건네셨거든 건넨 그 자리에서 잊으십시오. 며느리에게 김치 한 통을 보내셨거든. 보낸 그 순간에 그 일도 함께 마무리하시면 충분합니다. 이웃에게 한 끼를 차려 주셨거든. 그릇이 비는 자리에서 그 마음도 비워내시면 됩니다. 이 연습이 처음에는 쉽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베풀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 자체를 마음에 남기는 일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호흡씩 풀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가슴 한 켠이 정말로 가벼워지는 자리를 만나게 되십니다. 여기에 작은 수행법을 하나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무언가를 베푸시고 난 그 직후 짧은 호흡 한 번을 두십시오. 들으시며 그 일을 가슴에 한번 모으시고 내쉬며 모래알 흩어지듯 가만히 내려놓는 호흡입니다. 단 세 번이면 충분합니다. 이 짧은 회양 안에서 백품이 거래로 굳어지는 자리가 가만히 풀어지는 결을 만나게 되십니다. 옛 선지식들께서는 베푼 그 자리를 스스로조차 잊으라 일러오셨습니다. 이 말이 멀리서 들으면 단지 겸손의 미덕처럼 보이지만 부처님 가르침 안에서 살펴보면 훨씬 깊은 결이 함께 들어 있는 한마디가 됩니다. 베풀매 자취를 내 마음에서조차 지우는 일 그것이 바로 무주상보시이며 그래야 비로소 보시섭의 본래 자리가 살아납니다. 여러분 보시섭은 두 손의 일이 아니라 결국 마음의 일입니다. 손은 누구나 내밀 수 있지만 그 손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 마음은 닦아야 비로소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사서법의 천문에 베풀을 두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을 거두는 첫걸음은 베푸는 일이 아니라 베풀고도 베풀었음을 잊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첫 번째 문 보시섭의 결을 함께 짚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거두는 일이 베풀 하나로만 갈물이 된다면 부처님께서 굳이 내 문을 열어 두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손이 아무리 따뜻해져도 입에서 차가운 바람이 새어 나오면 모처럼 데워진 마음의 온도가 금새 다시 식어 버립니다. 그래서 두 번째 문이 이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 이제 두 번째 문을 함께 열어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자리에 에어섭이라는 한마디를 두셨습니다. 사랑의 말로 사람을 거둔다는 뜻입니다. 따뜻한 손 다음에는 따뜻한 말이 따라가야 한다는 결 부처님께서는 이미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베풀의 다음 자리에 곧바로 말의 결을 새겨두신 것입니다. 여러분 평생을 돌아보시면 이런 자리가 한두 번은 있으셨으리라 짐작합니다. 분명 옳은 말을 했는데 분명 자식을 위해서 며느리를 위해서 형제를 위해서 한 말이었는데 그 말 한마디가 끝나고 나면 사람이 슬그머니 식어 가고 공기가 어색해지고 결국에는 마음의 거리가 한뼘씩 멀어지는 자리 그 어긋남의 자리가 어딘가 한 곳쯤 있으셨을 것입니다. 저는 이 자리를 들여다볼 때마다 오른발의 함정이라는 한마디가 떠오릅니다. 오른발은 옳기 때문에 마음이 놓입니다. 다 너 잘되라고 한 말이고 다 너를 위해서 한 말이고 한마디 틀린 말도 없는 말이라고 본인은 그리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받는 사람의 가슴 안에서 그 오른발이 도리어 칼이 되어 박히는 일이 일어납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자를 오름과 사람 사이에 어긋남의 자리를 짚어내시며 에어섭이라는 두 번째 문을 두셨습니다. 자 그러면 에어란 무엇인가? 한자를 풀어 보면 사랑의 말씀 어를 합쳐 사랑의 말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사랑의 말이라는 표현을 듣기 좋은 말로 받아들이시면 곤란합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시네어는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상대를 살리는 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가셔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보시의 한결로 잠시 언실을 말씀드렸는데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보시의 한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언씨와 오늘의 예언은 결이 다릅니다. 언씨는 한 번 건네는 말이고 애언은 한 번이 아니라 살아 흐르는 말의 결을 가리킵니다. 평소 말투의 온도 평소 말의 호흡 평소 누군가를 부를 때 묻어 나오는 극혈 전체 이 모두가 애어의 자리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에어는 한순간의 솜씨가 아니라 한평생 닦아 가는 마음의 무늬가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른 말의 모습을 풀이해주실 때 네 가지 결을 일러 주셨습니다. 첫째 때에 맞는가. 둘째 진실한가. 셋째 부드러운가 넷째 이로운가. 이 네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어긋나면 그 말은 옳더라도 에어가 되지 못합니다. 가장 흔히 빛나가는 자리가 첫 번째 때입니다. 자식이 회사에서 잔뜩 지친 얼굴로 막 들어왔을 때 며느리가 부엌에서 정신없이 손을 움직이고 있을 때 손주가 시험에서 한 번 미끄러져 풀이 죽어 있을 때 이런 자리에서 던지는 오른발은 어떻게 되는가? 옳지만 때를 놓친 말이 되어 버립니다. 때를 놓친 오른말은 받는 사람의 가슴위에 가만히 얹히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더 무겁게 내리누르게 되는 까닭입니다. 두 번째 진실의 결도 짚어 드려야 합니다. 진실하지 않은 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본인도 확신없는 말 짐작과 소문으로 옮기는 말 누군가의 입을 빌려 흘리는 말 이런 말들은 부처님 가르침 안에서 결코 애어가 될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부드러움입니다. 같은 내용이라도 어떻게 건내느냐에 따라 그 말은 전혀 다른 자리에 가담습니다. 옛 어른들께서 일러두신 한마디가 있습니다. 말은 약이 되기도 하고 칼이 되기도 한다는 한마디입니다. 오른발이 칼이 되어 박히는 자리가 어디인가? 바로 부드러움이 빠진 그 자리입니다. 네 번째 결은 이로움을 가리킵니다. 그 말이 끝난 자리에서 받는 사람이 한 호흡이라도 편안해지는가? 아니면 한 호흡 더 무거워지는가? 그 한 호흡의 차이가 곧 에어와 짐을 가르는 자리가 됩니다.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따로 또 다른 자리에서 우리가 피해야 할 말의 결도 정확히 일러두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선업도 가운데 들어 있는 네 가지업 즉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잘못된 말의 모습입니다. 첫째는 망어 사실이 아닌 말 다시 말해 거짓말을 가리킵니다. 둘째는 기어 듣는 사람의 마음을 화려한 표현으로 흔드는 알맹이 없이 꾸민 말이 됩니다. 셋째는 양설 한 사람에게는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는 저렇게 옮기는 이간의 말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넷째는 악고 거칠고 험한 말 사람의 가슴을 베어내는 말을 일컫습니다. 이 네 가지 어업을 가만히 들여다보시면 한 가지 사실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좋은 말을 새로 만드는 일보다 마음을 다치게 하는 말을 먼저 거두는 일을 더 깊이 가르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의 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치게 하는 말을 거두면 그 자리에 사랑의 말이 자연스럽게 자리잡게 되는 까닭입니다. 저는 부처님이 일러두신 말의 내 모습을 처음 만났을 때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평생 오른발을 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해 온 그 많은 자리들 그것이 사실은 때를 놓치고 부드러움을 잃은 채 그저 내가 옳다는 한 줄을 새기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 물음이 가슴안에 한참을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면 일상에서 어떻게 닦아 가야 하는가? 부처님 가르침을 받아 오신 옛 어른들께서는 한 가지 연습을 일러두셨습니다. 한마디 던지기 전에 세 번 마음에 묻는 연습입니다. 첫째 지금이 그때인가. 둘째 그 말이 사실인가? 셋째 그 말이 정말로 이로운가. 이 세 물음을 가슴에 가만히 던져 보십시오.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라도 흐릿하면 그 한마디는 잠시 거두어 두십시오. 입 밖으로 내지 않고 가슴 안에 한 번 더 묵혀두는 일 이것 또한 에어섭의 한결이 됩니다. 침묵 또한 사랑의 말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부처님께서는 이미 일러두셨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권해 드리고 싶은 수행법이 있습니다. 옛 어른들께서 무건이라 부르신 길입니다. 절에서 일정 기간 동안 입을 닫고 말을 줄이는 수행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깊은 산문에 들어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 하루 단 반나절만이라도 무건의 시간을 가져보시기를 권합니다. 특히 마음이 불편한 날 누군가에게 한마디 쏘아 주고 싶은 날 그날 하루는 가만히 입을 닫아 보시는 시간으로 가져가십시오. 식구들에게는 미리 일러 주십시오. 오늘은 마음을 다스리는 시간이라고. 그리고 가만히 듣기만 하십시오. 며느리의 부엌 소리도 자식의 한숨 소리도 손주의 웃음소리도 그저 듣기만 하는 그 하루 안에서 묘한 일이 일어나게 되십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별들이 그제야 가만히 모습을 드러내는 까닭입니다. 말을 줄이면 마음이 보이고 마음이 보이면 말의 결이 살아납니다. 이것이 무건히 단순한 침묵이 아닌 까닭입니다. 다음 한마디를 가장 따뜻하게 데우는 가장 적극적인 사랑의 준비가 곧 무건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한마디가 무엇이었는가? 그 한마디가 그 사람의 가슴위에 따뜻하게 내려앉았는가. 아니면 한 줄 자국으로 새겨졌는가? 가만히 살펴보시면 평생 닦아야 할 자리가 어디인가. 새삼 보이실 것입니다. 그 자리는 두 손에 있지 않고 입에 있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가슴에 담아 두시기를 청합니다. 한마디를 건네신 그 다음 그 말이 떠나간 자리를 잠시 헤아려 보시는 짧은 시간 이한 호흡의 헤아림이 다음 한마디의 결을 가만히 바꾸어 놓는 까닭입니다. 여러분 에어섭이 결국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입에서 비롯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결입니다. 입은 누구나 열 수 있지만 그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말의 온도는 마음을 닦아야 비로소 따뜻해집니다. 부처님께서 사서법의 두 번째 문에 사랑의 말을 두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을 거두는 두 번째 걸음은 오른발을 던지는 일이 아니라 그 오름안에 따뜻함을 함께 담아내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두 번째 문 에어삽의 결을 함께 짚어 드렸습니다. 그런데 베품이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사랑의 말이 사람을 살린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사람이 우리 곁에 오래 머물지 않는 자리가 있습니다. 마음과 말의 결이 살아 있더라도 손과 발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 자리는 어딘가 메마르게 되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세 번째 문을 또 하나 열어 두셨고 그 문이 이제 우리 앞에 가만히 펼쳐지고 있습니다. 자 이제 세 번째 문 앞에 함께 서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자리에 이행섭이라는 한마디를 새겨 두셨습니다. 한자 그대로 풀어 보면 이로울 이의 행할 행 상대에게 실제로 이로운 행을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마음만으로는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는 사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짚어 볼 가르침의 가장 첫 결입니다. 평생 마음으로 정말 많이 빌어오셨을 것입니다. 자식 잘 되라고 손주 건강하라고 이웃의 일이 풀리라고.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마음 위에 한결을 더 얹어 두셨습니다. 마음만 있고 손과 발이 따라가지 않으면 자비라는 이름은 아직 절반에서 머문다는 가르침입니다. 저는 이 가르침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 살짝 마음이 따끔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빈자리마다 마음을 모아오긴 했는데 그 마음 가운데 정작 손과 발이 움직여 닿은 자리는 얼마나 되는가? 가만히 돌아보니 비는 일은 많았으나 닫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 앞에서 한참을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자 그러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행이란 정확히 어떤 결인가? 한 가지 오래된 비유 보살의 손이라는 비유로 풀어 드리겠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사람을 향해 멀리서 손을 모으고 비는 손과 가까이 다가가 어깨 밑에 손을 받쳐주는 손은 같은 손이 아닙니다. 멀리서 비는 손은 마음의 손이고 가까이 받쳐주는 손은 이행의 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보살이 중생을 거두는 자리에 비는 손이 아니라 받쳐주는 손을 두라고 가르치십니다. 여러분 부처님께서 직접 보이신 이행의 한 모습을 짚어 드리고 싶습니다. 율장에 전에 내려오는 가르침 가운데 부처님께서 병든 비구를 손수 돌보신 일이 있습니다. 오랜 기간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한 비구가 있었습니다. 같이 수행하던 비구들 가운데 누구도 그를 가까이서 돌보지 않은 까닭에 그 비구의 몸은 더러워지고 자리는 거칠어진 채로 그저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자리를 보시고는 다른 누구에게 맡기지 않으시고 직접 옷소매를 걷어 그 비구의 곁으로 다가가셨습니다. 더러워진 몸을 손수시키시고 자리를 새로 펴 주시고 따뜻한 물을 떠다가 입에 적셔 주신 것입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비구들에게 일러두셨습니다. 병든 자를 돌보는 일이 곧 부처를 돌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저는 이 가르침을 만날 때마다 한 가지 사실 앞에서 마음이 차분해지곤 합니다. 이행이란 거창한 자리가 아니라 손에 물 한 그릇을 떠서 누군가의 입에 적셔 주는 자리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결국 거두어지는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이라는 사실 한 자락이 함께 따라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가셔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받쳐주는 손이라 해서 무조건 큰 도움을 가리키는 일은 아닙니다. 도리어 큰 도움 한 번보다 작은 손길이 꾸준히 닿는 결이 부처님 가르침에 더 가깝습니다. 한 번에 큰 도움은 받는 사람에게 빚을 남기기 쉬운 까닭입니다. 그러나 작은 손길이 꾸준히 닿으면 그것은 빚이 아니라 결이 됩니다. 여기에 한결이 더 따라옵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이행은 내가 주고 싶은 도움이 아니라 상대가 정말 필요한 도움을 가리킵니다. 2차이가 무척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본인 입장에서 좋다고 여기는 것을 건네곤 합니다. 그러나 받는 사람의 자리에서 보면 그것이 도리어 부담이 되거나 불편함이 되는 일이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차이를 깊이 짚어 주셨습니다. 자비라는 결은 주는 사람의 마음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자리에서 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행섭을 일상에서 어떻게 닦아 가야 하는가? 이번에는 가까운 가족 자리에서 잠시 시선을 떼어 보십시오. 한 걸음 바깥의 인연으로 옮겨 보시는 것입니다. 이웃 예토반 오랜만에 떠오르는 친구 평소 마음에서 잠깐씩 스쳐 지나가지만 손과 발은 닿지 않았던 그 사람들 말입니다. 오늘 작은 이행 하나를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떠오르는 한 사람의 이름 앞에서 마음으로 빌기보다 한 번의 안보 전화를 먼저 걸어 보십시오. 그저 잘 지내시는지 별일 없으신지 그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길에서 마주친 이웃에게 먼저 한마디 인사를 건네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자리 손이 모자라는 자리에 슬그머니 한쪽 손을 받쳐 드리는 일도 그러합니다. 이 작은 손길 하나하나가 곧 이행섭의 결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작은 행위 결코 큰 공덕보다 가벼운 일이 아니라고 일러두셨습니다. 도리어 매일 작게 닫는 손길이 한 번에 큰 일을 일으키는 성보다 깊다 가르치십니다. 한 번 크게 베풀고 잊혀지는 손이 아니라 자주 작게 닿아 결이 살아나는 손 그것이 보살의 손이라는 가르침의 본래 모습이 됩니다. 여기에 한 가지 작은 수행법을 함께 닦아 가시기를 권합니다. 일주일에 한 사람씩 마음에 떠오르는 인연을 정해. 그 사람에게 작은 손길 하나를 닿게 해 보시는 연습입니다. 찻주는 옛도반 다음 주는 오래 연락이 끊어진 옛 친구 그 다음 주는 가게 단골 어르신 매주 한 사람의 이름 위에 작은 행을 한 번씩 얹어 가시면 됩니다. 이 단순한 연습 안에서 1년이 지나면 그 가슴들이 가만히 쌓여한 마을이 되는 결을 만나게 되십니다. 여기에 한결을 더 얹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작은 이행 하나를 닦으셨거든. 그 자리에서 회양의 마음을 가만히 한번 얹어 보십시오. 회양이란 내가 닦은 결을 다른 이들에게로 흘려보내는 마음이 됩니다. 오늘 한 사람에게 닿은 작은 손길이 그 사람의 가슴에서 또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기를 가만히 빌어보시는 것입니다. 이 회양의 한 호흡이 더해지면 이행은 한 사람에서 멈추지 않고 결의 강물을 따라 멀리까지 흘러가게 되십니다. 그런데 이 행에는 반드시 함께 따라가야 할 결이 또 하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자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치십니다. 자비에 반드시 지혜가 함께 따라야 한다는 결입니다. 자비만 있고 지혜가 빠진 이행은 어떻게 흐르게 되는가. 도와주려는 마음만 앞서서 정작 상대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거나 도리어 길을 막는 결이 되어 버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친구가 스스로 결단해야 할 자리에서 본인의 답을 미리 던져주는 모습 옛 도반이 천천히 일어서야 할 자리에서 그 걸음을 대신 떠내 가는 모습 이런 일들이 모두 자비는 있으나 지혜가 빠진 이행의 한결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늘 두 손을 함께 새기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한 손에는 자비 다른 한 손에는 지혜 자비의 손이 닿을 때 지혜의 손이 함께 따라가야 비로소 이행이라는 한결이 깊이 살아납니다. 자비 없는 지혜는 차갑고 지혜 없는 자비는 도리어 어그러지는 까닭입니다. 여러분 이행은 결코 손과 발만의 일이 아니며 그 손과 발은 반드시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마음과 손이 한 줄로 이어질 때 비로소 이행이라는 결이 깊이 살아나는 까닭입니다. 부처님께서 손과 발의 결을 사서법의 한가운데에 두신 까닭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 또 한 가지 결이 가만히 따라옵니다. 손과 발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해도 그 움직임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자세에 머물러 있으면 사람은 결국 다시 슬그머니 멀어져 갑니다. 도와주는 손은 닿았지만 그 손이 너무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는 손이라면 받는 사람의 가슴 한 촨이 가만히 닫혀 버리는 까닭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그 자리까지 미리 헤아리셨고 사서법의 마지막 문을 그 결 위에 새겨 두셨습니다. 그 마지막 문 안으로 이제 우리가 한 걸음 더 들어가게 됩니다. 자 그 마지막 문안으로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자리에 동사섭이라는 한마디를 두셨습니다. 사서법의 네 문 가운데 가장 깊은 자리이자 풀어내기 가장 어려운 결이기도 합니다. 환자를 그대로 풀어보면 같을 동의 일사 같은 일을 함께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함께한다는 표현을 단순히 같이 있어 주는 일로만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동산은 같은 자리에 나란히 앉는다는 결입니다. 의에서 내려다보는 자리가 아니라 옆에서 어깨를 맞대고 같이 그 일을 살아내는 자리 그것이 동사섭의 본래 뜻입니다. 여러분 부처님 일생을 가만히 따라가 보면 이 동사섭의 모습이 곳곳에 새겨져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왕족으로 태어나셨지만 깨달음을 얻으신 뒤 평생 신분 낮은 이들의 곁에 나란히 앉으셨습니다. 농부와도 빨래하는 이와도 길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사람들과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마음으로 함께 머무신 모습이었습니다. 부처님 일생에서 가장 인상 깊은 모습이 한 자락 떠오릅니다. 어떤 자리에서든 부처님께서는 따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풀밭이든 길가든 사람들이 앉아 있는 그 자리에 함께 앉으시고 같은 흙 위에서 가르침을 펼치신 것입니다. 가장 큰 스승이라는 분이 가장 낮은 자리를 골라 앉으셨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 자리 자체가 이미 하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부처님께서 평생 보이신 한 모습을 더 얹어 드리고 싶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평생을 비구들과 함께 탁발을 다니셨습니다. 그 큰 스승의 자리에 머물지 않으시고 손수 발호를 들고 마을마다 한 집 한 집 돌며 음식을 받으셨습니다. 어느 집에서는 맛있는 음식을 어느 집에서는 거친 음식을 받으시고도 그 어떤 집의 음식도 가리지 않고 똑같은 마음으로 드셨습니다. 비구들은 그 모습을 곁에서 함께 따라 익혔습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단위에 앉아 시중을 받으시는 분이셨다면 그 가르침은 결코 비구들의 가슴에 그토록 깊이 새겨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늘 같은 길을 걸으시고 같은 흙 위에 발을 디디시고 같은 바로 안에 받은 같은 음식을 드셨습니다. 그 발걸음 하나하나가 이미 가장 깊은 동사섭이었던 까닭입니다. 저는 이 모습을 가만히 떠올릴 때마다 한 가지 사실 앞에서 마음이 숙연해지곤 합니다. 부처님께서 사서법의 마지막 문에 동사를 새겨 두신 까닭은 결국 한 가지 사실을 가장 깊이 일러 주시기 위함입니다. 사람을 거두는 일은 위에서 내려가는 길이 아니라 나란히 가는 길이라는 사실 한 자락이 그것입니다. 자 그러면 어른의 자리에서 동사섭이 왜 가장 어려운가? 우리가 살아오신 자리에는 자연스럽게 어떤 위치가 새겨져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 위에 어른은 아랫사람 위에 베풀어 온 사람은 받는 사람 위에 그 위치 자체가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위치를 그대로 둔 채 사람을 거두려 하면 동사섭은 처음부터 닫혀 버리고 맙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한국 사회에서 이 동사섭이 유난히 어려운 까닭이 또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어른의 자리 위의 자리를 오래 받들고 살아온 문화 안에 머물러 왔습니다. 그 자리 자체는 분명 귀한 자리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귀한 자리 안에서도 한 호흡 잠시 옆자리로 옮기는 결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일러 주십니다. 그래야 비로소 사람이 그 어른을 진심으로 따르게 되는 까닭입니다. 주위에 머물러 있기만 한 어른은 존경은 받을 수 있어도 곁을 내어 주는 친구는 끝내 얻지 못한다는 사실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르신 동사섭에는 세 가지 결이 들어 있다. 풀이하곤 합니다. 첫째는 모르는 척 묻기입니다. 이미 답을 알고 계셔도 상대가 풀어내는 그 자리에 함께 머물러 다시 묻는 결이 됩니다. 둘째는 가르치지 않고 듣기입니다. 어른의 입은 가르침을 던지는 입이지만 동사섭의 입은 잠시 그 가르침을 거두고 듣는 입이 되는 까닭입니다. 셋째는 함께 서툰 사람이 되어 주기입니다. 본인은 능숙해도 상대가 서툰 자리에 있다면 그 옆에서 함께 서툴러 주는 결 그래야 비로소 상대의 손이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이 세 가지 결을 가만히 들여다보시면 한 가지 공통점이 드러납니다. 모두 위를 잠시 내려놓는 결이라는 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동사섭이라는 마지막 문 안에서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일을 맡겨 두셨습니다. 그 일이란 평생 쌓아 오신 어른의 자리를 잠시 내려놓는 일입니다.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보살이 닦아야 할 네 가지 깊은 마음을 따로 또 일러두셨습니다. 이를 사무량심이라 부릅니다. 자비이사라는 네 글자가 그것입니다. 자는 모든 이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며 비는 모든 이의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피는 다른 이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고 산은 그 모든 마음 이해에 가만히 얻는 평등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저는 동사섭이라는 가르침을 가만히 들여다볼 때마다 이 사무량심의 마지막 한 글자 사라는 글자의 마음이 머무르곤 합니다. 사랑하는 글자에는
내려놓다는 결이 깊이 담겨 있습니다. 의에 머물던 자리 가지고 있던 자리 본인이 옳다는 자리 그 모든
자리를 가만히 내려놓는 마음. 동사섭의 본래 결이
바로 이사라는 한 글자 안에 새겨져 있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자비만으로는 다 되지 않는다고 가르치십니다.
자비 위에 사라는 한결이 더 얹혀야 비로소 그 자비가
위에서 내려가는 자비가 아니라 옆에서 함께 흐르는 자비로 살아
까닭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짚고 싶은 사실이 있습니다. 위를. 내려놓는다는 말이 본인을 낮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한. 깎아내리거나. 비굴해지라는 말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저 그 사람과. 같은 높이에 잠시 앉는 결을 가리킵니다. 어른은 어른이 되. 그 자리에서 한 호흡 옆자리로 옮겨오는 결 그것이 부처님께서 일러두신 동사섭의 정확한 자리입니다. 자 이제 사서법의. 네 문을 한 자락으로 모아 보겠습니다. 보시도 에어도 이행도. 동사도 결국 한 매듭으로 묶이는 까닭입니다. 그 매듭이 무엇인가. 바로 나란히 앉는다는 한결입니다. 베품도 위에서
내려가는 베품이라면 거래가 됩니다. 사랑의 말도 위에서 내려
말이라면 충고가 되어 버립니다. 손과. 발의 행동 위에서 내려가는 행위라면 도리어 짐으로 변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동사섭은 그 모든 결에 가장 깊은 뿌리를 한 자리로
모아 내는 문이 되는 것입니다 사서법의 내문이 따로 넷이 아니라 결국 한 매듭으로 모인다는 사실이 여기에 있습니다
작은 수행법 하나를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평소 가르치는 자리에 계셨던 분께 잠시 묻는 자리로 옮겨가 보
그저 잘. 모르는. 일에 대해 진심으로 물어보시고 손주에게는 그 또래만 아는 세상을 가르쳐 달라 청해 보십시오. 그저 잘 모르겠다고. 좀 알려 달라고 한마디 건네 보시는 것입니다. 그 한마디가 위와. 아래를 가만히 풀어 주는 작은 매듭이 됩니다. 여러분 불교에서는 함께. 수행하는 동료를 도반이라 부릅니다. 도반은 위와 아래가. 없는 자리에서만 비로소 도반이 됩니다. 한 사람이 위에. 머물러 있고 다른 사람이 아래에 머
물러 있다면 그 자리에는 스승과 제자 시주와 시봉의 관계
있을 수 있어도 도반의 관계는 끝내 자리 잡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부처님께서. 사람을 거두는 마지막 문에 동사를 두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을 거둔다는 일이 결국 도반을 얻는 일이고 도반을 얻는 일이
결국 의와 아래를 함께 내려놓는 자리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가슴에 얹어 두시기를 청합니다. 봉사섭이 깊
외어도 이행도 자연이 살아납니다. 베풀문 자체를. 남기지 않게 되고 말은 따뜻함을 잃지 않게 되고 손과 발은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 결로 움직이게 되는 까닭입니다. 사서법의 내문이. 결국 동사섭이라는 마지막 한 매듭으로 모이는 자리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사서법의 내문을 함께 짚어 보았습니다. 못이에요. 이행동사.
사람을 거두는 내결이 한 매듭으로 모이는 자리에 우리가 이제 함께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한 매듭이 가장 안 풀리는 자리가 있습니다.
평생 가장 깊이 사랑해 온 사람들 앞에서 도리어 이 내결이 가장 어긋나는
자리가 한곳쯤 자리 잡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 어긋남의 자리가 어디인지
이어지는 시간 안에서 함께 들여다보겠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그 어긋남의 자리를 함께 들여다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일러 주신 사서법의 내 매
듭이 도대체 어느 자리에서 가장 안 풀리는가? 그 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가 매일 마주 앉는 자리 가장 가까운 인연들 함 배우자 자식 며
며느리 형제 평생 가장 깊이 사랑해 온 그 얼굴들 앞에서 사서법이 가장
자주 무너지는 까닭입니다. 여러분 한번 가만히 떠올려 보십시오. 길에서 마주친 이웃에게는 그토록 부드러운 말 한마디를 건네셨을 것입니다. 멀리 사
토반의 안부에는 그렇게 살뜰한 마음을 보내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식탁 건너편에 앉은 그 사람 한 지붕 아래에서 평생을 함께 살아온 그 사람 앞
그 부드러움도 살뜰함도 어딘가 자취를 잃어버리는 자리 그런 자리가 한 곳쯤 분명히
있으셨을 것입니다. 저는 이 자리를 들여다볼 때마다 한 가지 사실 앞에서 마음이 조용해지곤 합니다. 우리는 가까울수록 더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가까울수록 더 어긋나기
자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을 거두는 가르침을 일러두시면서 바로 이 자리까지 미리 헤아리고 계셨던 까닭입니다. 자. 그러면 왜 가까운 인연 앞에서 사서법
그토록 무너지는가? 부처님 가르침의. 결을 따라 한 문씩 짚어 드리고 싶습니다. 사서법의 네. 문이 가족 앞에서 어떻게 일대일로 어긋나게 되는지 그 자리를 명확히 보아 두시기를 권합니다.
문 보시섭 앞에서는 주었다는 자취가 가장 깊이 박힙니다. 가족에게. 베푸는 일은 멀리 있는 이에게 베푸는 일과 결이 다릅니다. 자식에게는. 평생을 베풀어 왔다는 자취가 가슴 깊이 새겨집
김치 한 통 반찬 한 그릇을 보내 드릴 때마다 작은 장부가 마음 안에 쌓여 갑니다. 그래서 가까운. 인연 앞에서는 보시섭이 거래로 바뀌는 일이 가장 자주 일어나게 됩니다. 둘째 문. 에어섭에서는 바른말이라는 명분이 가장 강하게 자라납니다. 가족이니까 바른. 말을 해 줘야 한다. 가족이니까 솔직히. 말해야 한다. 그 명분이. 가장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 곳이 바로 가족 앞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에어는 명분 위에 서 있는 말이 아닙니다. 가까운 인연일수록 바른말이라는 금영분이 가장 자주 사람을 다치게 하는 칼로 변해 버리고 많은 자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 문 이행섭 앞에서는 내가 더 안다는 위치가 가장 두텁게 쌓여 가곤 합니다. 부모는 자식보다 더 살아왔다고 여기시고 시어머니는 며느리보다 살림을 더 안다고 여기시고 형은 동생보다 세상을 더 안다 여기곤 합니다. 그 위치 자체가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위치를 그대로 두고 손을 내밀면 받쳐 주는 손이 아니라 누르는 손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넷째 문 동사섭 앞에서는 나는 너와 다르다는 거리감이 가장 깊이 박혀 있는 까닭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세대의 거리가 시부모와 며느리 사이에는 가풍의 거리가 부부 사이에는 살아온 자리의 거리가 보이지 않게 늘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거리감을 그대로 둔 채 함께 살아가게 되면 같은 집에 있어도 나란히 앉지 못하는 자리가 만들어지고 맙니다. 여러분 이 내문이 가족 앞에서 어긋나는 자리들 가만히 보시면 한 가지 공통점이 드러납니다. 모두 가까움 때문에 생긴 어긋남이라는 사실입니다. 가까워서 자취가 남고 가까워서 명분이 자라고 가까워서 위치가 굳어지고 가까워서 거리감이 익숙해지는 까닭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참으로 묘한결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잠시 한 호흡 가만히 머물게 됩니다. 그러면 이 어긋남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가?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간 옛 어른들 가운데 유마거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어른께서 일러 두신 한마디가 유마경에 전에 내려옵니다. 직심 시도량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직심 시도량 풀어 말씀드리면 고된 마음이 곧 도량이라는 뜻이 됩니다. 도량이 무엇인가 수행을 닦는 자리 부처를 만나는 자리를 도량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유마 어사께서는 그 도량이 산속 깊은 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된 마음이 깃드는 그 자리가 곧 도량이라 일러 주셨습니다. 저는 이 가르침을 만날 때마다 한 가지 사실 앞에서 가슴이 가만히 열리곤 합니다. 사서법을 닦으러 멀리 저를 찾기 전에 우리 부엌이 먼저 도량입니다. 거실이 먼저 도량이고 식탁이 곧 수행처가 됩니다. 가족 앞에서 사서법이 무너지는 그 자리가 사실은 가장 깊은 도량이 펼쳐지는 자리이기도 한 까닭입니다. 자 그러면 가족 앞에서 사서법을 어떻게 닦아 가야 하는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작은 네 가지 결을 가슴에 가만히 얹어 드리고자 합니다. 사서법의 내문에 응답하는 네 가지 작은 연습이 함께 따라옵니다. 첫째 칭찬보다 인정입니다. 칭찬은 자칫 뒤에서 내려가는 결이 되기 쉽지만 인정은 옆에서 가만히 건네는 마음이라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결이 됩니다. 자식이나 손주에게 잘했다. 장하다 대신 그 자리 마음이 많이 갔겠다라고 옆자리에서 한마디 건네 보십시오. 둘째 친구보다 침묵입니다. 친구는 바른 말이라는 명분 위에 서 있지만 침묵은 명분 없이도 사람을 거두는 결이 됩니다. 한마디 던지고 싶을 때 한 호흡만 거두시고 그 자리를 가만히 비워두는 연습 그것이 바로 에어에 살아 있는 결로 자리 잡는 까닭입니다. 셋째 걱정보다 믿음입니다. 걱정은 내가 더 안다는 위치에서 흘러나오지만. 믿음은 그 위치를 잠시 내려놓는 자리에서 솟아납니다. 자식이 어려운 자리에 들어섰을 때 그러게 내가 뭐라 그랬느냐 대신 내가 잘 풀어갈 것이라 믿는다라는 한마디를 건네 보시기를 권합니다. 넷째 가르침보다 곁에 앉기입니다. 가르치려 하면 거리감이 더 깊어지지만 그저 곁에 앉으면 거리감이 가만히 풀어집니다. 며느리가 부엌에 서 있는 그 자리에 함께 앉아 무한계를 같이 다듬어 보시는 일 배우자가 거실 한 켠에 앉아 있는 그 자리에 그저 옆에 앉아 같이 텔레비전을 보시는 일 그것이 동사섭의 가장 작고 가장 깊은 결이 됩니다. 여러분 이 네 가지 작은 연습을 가슴에 가만히 얹어 두시면 사서법은 거창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매일의 부업과 거실 안에서 살아 흐르는 결이 되어 갑니다. 부처님께서 사람을 거두는 가르침을 일러두시면서 결국 우리에게 맡겨두신 자리는 가장 가까운 그 자리였던 까닭입니다. 이렇게 사서법이 무너지는 자리와 그 자리를 다시 살려내는 결을 함께 짚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깊은 결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사서법을 닦아 사람을 거두려 한다고 했을 때 결국 그 가르침 안에서 가장 깊이 거두어지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자리가 사소법의 가장 마지막 결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결을 이어지는 시간 안에서 함께 들여다보겠습니다. 자 그러면 그 따로 있다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가? 부처님 가르침 안해서 가장 깊이 거두어지는 한 사람 그 답은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이 법문을 듣고 계시는 여러분 자신이 그 자리에 계십니다. 사람을 끌어안다 보면 끝내 끌어안기는 것은 결국 나라는 사실 그 자리에 부처님 사서법의 가장 깊은 결이 새겨져 있는 까닭입니다. 여러분 한번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사서법의 내문이 사람을 거두는 길이라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 문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한 가지 결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사서법이 사람을 거두는 동안 정작 가장 깊이 다스려지고 있는 자리는 내 안이라는 결입니다. 사서법은 바깥으로 흘러가는 가르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안으로 거두어 들어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자 그러면 사서법의 내문이 우리 안에 어떤 자리를 다스려 주는가? 단정해서 말씀드리는 가르침은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 가만히 살펴볼 수도 있다는 풀이로 들어 주십시오. 첫째 문 보시섭을 닦으시면 그 안에는 욕심을 잔잔히 가라앉히는 결이 들어 있습니다. 베풀이라는 결을 닦는 사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자연이 내려놓게 되는 까닭입니다. 보시는 결국 욕심을 가만히 다스리는 길이 됩니다. 둘째 문에어섭을 닦으시면 그 안에는 분노를 차분히 누그러뜨리는 결이 함께 따라옵니다. 따뜻한 말에 결을 닦는 사이 가슴 안에 솟구쳐 오르던 한마디 거친 말이 그 자리에서 잠시 가라앉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애어는 결국 분노를 다스리는 결이 되어줍니다. 셋째 문 이행섭을 닦으시면 그 안에는 게으름을 쓸며시 떨치는 결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손과 발로 가만히 닿아드리는 그 행 안에서 평소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던 미루는 자리가 한 자락씩 풀려갑니다. 이행은 결국 게으름을 다스리는 결로 살아납니다. 넷째 문 동사섭을 닦으시면 그 안에는 교만을 스스로 내려놓는 결이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옆에 나란히 앉는다는 그 한결이 평생 쌓아 오신 위의 자리를 가만히 풀어 주는 까닭입니다. 동산은 결국 교만을 다스리는 결이 됩니다. 여러분 이 네 가지 자리를 가만히 들여다보시면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납니다. 사람을 거두려 사서법을 닦는 사이 정작 거두어지는 것은 내 안에 묵은 자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사서법을 사람을 끌어안는 가르침이라 일러두시면서도 그 안에 결국 자기 마음을 거두는 결을 함께 새겨 두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가르침의 가장 깊은 결을 한 자락 짚어 드리고 싶습니다. 유마경의 전에 내려오는 한 모습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유마 거사가 병들어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문수보사를 보내어 그 병문 안에 가게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문수보살이 유마거사에게 병이 어디서 왔는지 묻자. 유마거사께서 일러 주시기를 중생이 아픔으로 나도 아프다 하셨습니다. 문수살이 문제품이라는 그 자리에 새겨져 있는 한마디입니다. 중생이 아픔으로 보살도 아프다는 가르침입니다. 처음 들으시면 도대체 무슨 뜻인가 싶으실 것입니다. 저도 이 가르침을 처음 만났을 때 한참을 그 한마디 위에 마음을 얹어 두고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한마디 안에 부처님 가르침에 가장 깊은 결이 깃들어 있는 까닭입니다. 보살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깨달음에 머물러 있는 분이 아닙니다. 중생의 가슴이 아프면 그 아픔이 보살의 가슴 안으로 그대로 흘러들어옵니다. 그래서 남을 거두는 일과 나를 거두는 일이 끝내 둘이 아닌 한결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서법이 그 둘 아닌 결을 가장 깊이 살려내는 가르침이 됩니다.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이 가르침의 결을 자리 이탈하는 네 글자로 다시 한번 일러주셨습니다. 풀어 말씀드리면 자기를 이롭게 하는 일이 곧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이 곧 자기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처음 들으시면 자리와 이타 두 글자가 따로 있는 일처럼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 두 글자가 결코 둘이 아니라 한결의 양면이라 가르치십니다. 사서법이 바깥으로는 사람을 거두는 길이고 안으로는 자기 마음을 거두는 길로 흐르는 까닭이 바로 이 자리타라는 한결 안에 들어 있습니다. 저는 이 가르침을 가만히 곱씹어 볼 때마다 평생 살아온 시간이 다르게 보이는 자리에 들어서곤 합니다. 평생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왔다고 여겨온 그 시간들이 사실은 가장 깊이 나 자신을 거두어 온 시간이었던 까닭입니다. 자식을 키우는 동안 내가 키워줬고 이웃을 돕는 동안 내가 도움받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손을 잡아 들이는 동안 내 손이 따뜻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한 사실 앞에서 가슴이 가만히 조용해지곤 합니다. 여러분 이 사실 앞에서 노년의 마음 한 켠이 가만히 자리 잡게 됩니다. 사서법이 깊어진 노년에는 그토록 무겁던 외로움이라는 한자락이 어느 순간 적막으로 바뀌는 자리를 만나게 되십니다. 그리고 그 점막조차도 시간이 흐르면 고요로 풀려갑니다. 외로움이 정막으로 적막이 다시 고요로 바뀌어 가는 그 자리 시끄럽지 않으면서 텅 비지도 않은 결입니다. 그 결이 노년의 가슴에 가만히 안기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결을 일상 안에서 어떻게 닦아 가야 하는가? 노년의 자리에서 어울리는 짧은 회양 수행 하나를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가만히 자리에 앉으셔서 살아오신 시간 가운데 한 분의 인연을 마음에 떠올려 보시는 것입니다. 부모님이여도 좋고 먼저 가신 도반이어도 좋습니다. 그분의 얼굴을 가슴 안에 떠올리고 그분에게서 받았던 따뜻한 결을 가만히 더듬어 보시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 받았던 결을 다음 인연에게로 가만히 흘려보내 드리겠다는 마음 한 자락을 가슴에 얹어 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양입니다. 받은 자리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받은 결을 다른 인연에게로 흘려보내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사서법으로 닦으신 시간이 이 회양의 결안에서 비로소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여러분 가슴 안으로 거두어지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사서법이 담는 가장 깊은 자리입니다. 사람을 거두는 가르침이라 들으셨지만 그 가르침을 닦으시는 사이 가장 깊이 거두어지는 사람은 결국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 거두어짐이 외로움 위에 적막을 얹고 적막 위에 다시 고요을 얹어 주는 결로 흐릅니다. 부처님께서 사서법이라는 내문을 열어 2시면서 마지막에 우리에게 안겨 주신 가장 깊은 선물이 바로 이 자리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끌어안다 보니 끌어안기는 것이 결국 나 자신이라는 결을 함께 짚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가르침이라는 것은 듣는 자리에서 멈추면 결국 한 자라 흩어지는 바람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 가르침이 진짜로 가슴에 자리 잡는 자리는 잠자리에 들기 전 한 사람의 이름 위에 마음을 가만히 얹어 두는 그 짧은 한 호흡 안에 있습니다. 그 마지막 한 호흡을 함께 짚어 드리는 시간이 이제 우리 앞에 펼쳐지는 까닭입니다. 자 그 한 호흡 안으로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사서법이라는 내문을 우리에게 열어 2시면서 마지막으로 손에 쥐어 주신 작은 한결이 있습니다. 거창한 의식도 긴 정근도 멀리 있는 절도 아닙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 단 한 호흡 안에 한 사람의 이름을 얹어두는 결입니다. 사서법의 가장 깊은 결이 결국 이 작은 한 호흡 안에서 살아 흐르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함께 짚어 드린 보시에어 이행동사. 이 네 글자를 한꺼번에 닦으려 하지 마십시오. 그 일은 평생을 두고도 다 닦지 못하는 결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그 일을 한꺼번에 닦으라고 일러 두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매일 밤 그 가운데 한결만 가만히 가슴에 얹어 두라 가르치십니다. 오늘 들으시며 어느 한 글자에 가장 마음이 걸리셨는지 한번 가만히 떠올려 보십시오. 도시라는 글자에 머물렀다면 오늘 밤은 보시의 결을 가슴에 얹으시면 됩니다. 에어라는 글자에 머물렀다면 그 결을 가만히 품어보시는 것입니다. 이행이든 동사든 그저 한 글자만 골라 그 글자를 가슴에 살며시 안고 자리에 누우시는 일입니다. 한꺼번에 다 잡으려 하지 않을수록 오히려 사서법의 결이 가슴 깊이 자리 잡게 됩니다. 자 그 한 글자를 품으셨거든. 이제 한 사람의 이름을 그 위에 가만히 얹어 보시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며 옛 인연도 잠시 내려두시면 됩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오시면서 마음에 한 번이라도 스쳐 지나간 한 사람을 떠올려 보시면 됩니다. 그 사람이 누구여도 좋습니다. 오늘 통한 자식의 목소리여도 좋고 길에서 마주친 이웃의 얼굴이어도 무방합니다. 식탁 건너편에 앉아 있던 배우자의 옆모습이어도 좋고 오랜만에 마음에 떠오른 옛 친구의 이름이어도 좋습니다. 오늘 하루단 한 번이라도 가슴에 한자락 결리던 그 사람을 떠올려 2시면 됩니다. 저는 이 자리를 가만히 들여다볼 때마다 한 가지 사실 앞에서 가슴이 따뜻해지곤 합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사람을 마주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정작 잠자리에 들 때 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가슴에 안고 잠드는 일은 그토록 드뭅니다. 부처님께서 사서법의 마지막 결을 이 자리에 새겨두신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자 그 한 사람의 얼굴이 가슴 안에 떠오르셨거든. 그 위에 한마디 짧은 마음을 가만히 얹어 보십시오. 거창한 발언도 긴 회양문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평안하소서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평안하소서 이 한마디 안에 부처님 사서법의 내문이 한꺼번에 들어 있습니다. 그분에게 마음을 건네는 보시가 그 안에 있고 따뜻한 말 한마디인 에어가 그 안에 함께합니다. 그분의 평안을 비는 손길인 이행이 그 안에 머물고 그분과 같은 자리에서 빌어드리는 동사가 그 안에 가만히 자리 잡습니다. 사서법의 내문이 결국 이 한마디 안에서 한 매듭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이름 위에 마음을 얻는다는 일이 단지 그 한 사람만을 거두는 일은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에는 한 사람을 깊이 거두는 결이 결국 무수한 인연으로 흐른다는 한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 밤 가슴에 떠오른 그 한 사람의 자리에는 그 사람만이 외따로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가족이 있고 그 사람이 매일 마주하는 또 다른 인연들이 있고 그 사람의 가슴 안에 머무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이름 위에 평안하소서 한마디를 얻는 그러한 호흡 안에는 그 한 사람을 둘러싼 무수한 인연이 함께 거두어지는 결이 가만히 흐르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결을 일러주시면서 멀리 있는 모든 중생을 한꺼번에 거두려 하지 말라 가르치십니다. 다만 오늘 밤 가슴에 떠오른 한 사람을 깊이 거두시는 일 그 자리가 바로 보살의 첫걸음이자 마지막 걸음이 되기도 하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두고 사서법을 닦는다 해도 매일 밤 그 가르침은 결국 이 작은 한 호흡 안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어젯밤의 한 호흡이 오늘의 마음을 다듬어 주었듯 오늘 밤의 한 호흡이 내일의 마음을 가만히 길러 주게 되는 까닭입니다. 작은 한 호흡 안에서 사서법이라는 가르침이 매일 새롭게 깨어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안겨주신 가장 깊은 선물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작은 자비기도 호흡 하나를 더해드리고 싶습니다. 자비성이라 부르기도 하는 짧은 발언의 결입니다. 그 한 사람의 이름 위에 평안하소서 한마디만 얹어 두셔도 충분합니다만. 시간의 여유가 있으시다면 짧은 새 호흡을 함께 가져가 보십시오. 가만히 한 호흡을 들이마시며 이 사람이 평안하기를 마음으로 외워보십시오. 다시 한 호흡을 내쉬며 이 사람이 모든 시름을 내려놓기를 가만히 빌어 주시는 결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호흡을 더 가져가시며 이 사람의 가슴안에 부처님의 자비가 머무시기를 한마디 얹어 두시는 것입니다. 새호흡이면 충분합니다. 그 짧은 새호흡 안에 자비성이 살아 흐르고 그 자비성이 잠자리에 드시는 가슴안으로 그대로 따라 들어가게 됩니다. 여러분 처음 이 법문을 시작할 때 함께 짚어 드린 결이 있었습니다. 사람 마음을 얻는 데 평생을 바쳤는데 왜 점점 외로워지는가? 그 외로움 안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외롭지 않게 그러나 매달리지도 않는 그 자리를 함께 찾아 나서자는 권청이었습니다. 그 자리가 어디였는가? 바로 오늘밤 한 사람의 이름 위에 마음을 가만히 얹어 두는 이한 호흡 아닙니다. 이한호 반에서 외로움이 적막으로 풀려가고 적막이 다시 고요로 깊어집니다. 메달리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은 그 자리 부처님께서 사서법으로 우리에게 안겨 주신 가장 깊은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이 작은 한 호흡 안에 살아 흐르고 있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한 호흡을 함께 가져보겠습니다. 가만히 가슴에 한 글자를 품으시고 그 위에 오늘 마음 쓰인 한 사람의 이름을 얹으시고 그 이름 위에 평안하소서 한마디를 얹어 보십시오. 그 한 호흡 안에서 오늘의 사서법이 가만히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내일 밤이 오면 또 다른 한 사람의 이름 위에 또한 호흡을 가만히 얹어 드리시기를 권합니다. 여러분 오늘 부처님께서 일러두신 사람을 끌어안는 네 가지 마음을 함께 짚어 드렸습니다. 이 가르침이 가슴 한 켠에 작은 등불 하나로 자리 잡으시기를 마음 깊이 빌어 드립니다. 그 등불이 매일 밤 한 사람의 이름 위에 가만히 얹혀가는 결로 살아나기를 함께 발언합니다. 이 채널 불교의 밤은 매일 밤 부처님 말씀 한 자락을 함께 펼쳐드리는 자리입니다. 오늘 이 가르침이 가슴에 한결로 닿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로 이 자리를 곁에 두어 주십시오. 내일 밤에도 또 다른 가르침 한 자락을 가지고 다시 곁에 다가오겠습니다. 오늘 밤 한 사람의 이름 위에 마음을 가만히 얹어 두십시오. 그 이름 위에서 모두 평안하시기를 빌어 드립니다. 그리고 그 빌어드림 안에서 여러분 자신도 함께 평안하시기를 마음 깊이 발언합니다. 나무 마냐 바라밀 이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넷째 베푼 것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으세요. 씨앗을 심었다고 바로 열매를 기대하지 마세요. 어떤 씨앗은 싹을 틔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자연의 이치입니다. 보살영 낙포 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살은 중생을 제도하되 제도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라고요. 이것이 진정한 베풀매 경지입니다. 했다는 생각도 받아야 한다는 기대도 없는 상태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자연스러운 태풍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신 세월을 후회하지 마세요. 베풀고 희생한 모든 순간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제는 방법을 조금 바꿔 보시면 어떨까요? 무작정 주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주기 무조건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분별력 있게 선택하기 남을 돕대 자신도 함께 돌보기 한노스님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나무는 자신의 그늘로 남을 시게 하지만 뿌리는 굳건히 땅에 박고 있다라고요. 여러분도 그런 나무가 되셨으면 합니다. 남에게 그늘을 제공하되 자신의 뿌리는 든든하게 베풀되 흔들리지 않고 도우되 무너지지 않는 진정한 복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평화롭고 자유로울 때 그것이 바로 복입니다. 남의 인정이나 감사에 매달리지 마세요. 내 마음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라고요. 베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착 없이 기대 없이 조건 없이 하지만 무분별하게가 아니라 지혜롭게 여러분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 보세요.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남을 대하세요. 줄 수 있을 만큼만 주고 할 수 있을 만큼만 하세요. 마치 물을 담는 그릇처럼 그릇이 깨지면 물을 담을 수 없듯이 자신이 건강해야 남도 도울 수 있습니다. 때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용기. 때로는 거절하는 지혜 그것도 사랑의 한 형태입니다.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해결해 주려 하지 마세요. 그들도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실패도 경험이고 어려움도 스승입니다. 부모의 역할은 안전망이 되어주는 것이지 모든 길을 대신 걸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지켜봐 주는 것 그것도 큰 사랑입니다. 한 제자가 마지막으로 부처님께 여쭤봤습니다. 그럼 언제 베풀고 언제 거절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내 마음의 평화가 있을 때 베풀어라. 내 마음에 부담이 있을 때 멈추어라. 마음의 소리를 듣는 건 그것이 제 시작이니라. 여러분 오늘부터라도 실천해 보세요. 작은 것부터 시작하세요. 무리한 부탁은 정중히 거절하기 자신을 위한 시간 하루 30분 만들기 베푼 것에 대한 보다 기대하지 않기 이런 작은 변화가 쌓이면 큰 변화가 됩니다. 마음이 가벼워지고 몸도 건강해집니다. 진정한 복이 찾아오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 우리가 살아온 세월 충분히 베푸셨습니다. 이제는 자신도 돌보며 살아가세요. 그것이 진정한 지혜이고 그것이 진정한 폭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 전해드립니다. 베풀대 비우고 도대 잊으세요. 그러면 마음은 항상 가볍고 자유롭습니다. 여러분의 남은 인생이 더욱 평화롭고 행복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친절하면 오히려 이용만 당하는 이유 여러분은 살아오시면서 이런 경험 있으실 겁니다. 마음 좋게 도와줬더니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 정성껏 베풀었는데 고마워하기는 커녕 더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들 친절하게 대했더니 만만하게 보고 이용하려 드는 사람들 이런 일들을 겪으며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선한 마음으로 살아왔는데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지 답답하셨을 겁니다. 차라리 냉정하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드셨을 거예요. 어느 날 한 제자가 부처님을 찾아왔습니다. 스승님 저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려 노력하는데 사람들이 저를 이용만 합니다. 제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건가요 하고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잠시 침묵하시더니 물으셨습니다. 너는 왜 친절하려고 하느냐? 제자가 답했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입니다.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입니다. 부처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이용당하는 이윤이라 제자는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부처님께서 설명하셨습니다. 진정한 자비는 조건이 없느니라. 하지만 너의 친절에는 조건이 있구나.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칭찬 이런 마음이 있을 때 그 친절한 약점이 되느니라. 이 말씀이 바로 핵심입니다. 우리가 베푸는 친절히 진정한 자비인지 아니면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인지 구분해야 합니다. 법구경에 일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자비를 베풀듯 지혜가 없으면 고통을 받는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깊이 새겨 보세요. 자비만 있고 지혜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마치 등불 없이 어둠 속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 절벽에서 떨어질 수도 있죠. 여러분이 살아오시면서 경험하셨듯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남을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도 있지만 받기만 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무조건 친절하기만 하면 어떻게 될까요? 물이 낮은 곳으로만 흐르듯 여러분의 에너지가 한쪽으로만 빠져나가게 됩니다. 결국 지치고 상처받게 되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처님께서 제자에게 다시 물으셨습니다. 농부가 씨앗을 뿌릴 때 어떻게 하느냐 제자가 답했습니다. 좋은 땅을 골라서 뿌립니다. 그렇다 돌밭의 씨앗을 뿌리면 어떻게 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