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반갑습니다. 네. 이제 지난번에 이 화성의 비율을 얘기를 하면서 이 화성의 비율은 2승과 10지 등각 묘각 이것을 얘기한다 알겠어요.
그러면서 어 화엄경의 52개 위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고 드리는 중이었고요. 화엄경에서 말하는 이제 52개위라는 것이 52가지. 깨달음으로 가는 길
그러니까 단계 뭐 이런 식의 어 의미이거든요.
근데 이제 이걸 감안해 보면 이제 어 단계 아닌 단계를 서로 있어요.
이제 단계라는 방편을 써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에요.
그래서 이걸 이런 단계가 실제 하는구나. 이렇게 착각하면 되는 게 아니라
사실은 1단계부터 52단계라고 했던 모든 단계가 이 돈오의 자리에서 보면
이 견성의 자리에서 보면 어
다 다르지 않은
같은 거예요. 不異
그래서 단계라고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 중생의 어 번뇌망상 습의 입장에서 보면 아
이렇게 좀 단계적 측면을 무시할 수도 없단 말이죠.
그러다 보니까 경전에 가르침은 어 중생들에게 펼치는 방편이잖아요.
경전은 한마디 말도 어.
이거 자체로 진실일 수가 없어요.
말로 표현됐기 때문에
말로 표현된 것은 방편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이 화엄경에 52계도
우리들이 공부해 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단 말이죠.
그래서 어 이걸 잘만 보면 우리가 공부해 나가는 과정 하고 딱 들어맞아요.
그래서 이제 지난번에 얘기했죠.
처음에 십신 10주 10행 10회향
이래서 이 40까지 단계를 얘기를 할 수 있는데
하나하나 다 볼 필요는 없고
10신 처음에 믿음의 단계에 있어요.
그러니까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이 공부를 시작도 안 하겠죠.
52계위에 아예 첫발도 못 딛는 거겠죠.
근데 이제 처음 이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은 믿음부터 시작한다. 아
나 부처님 믿어 볼까?
불교를 좀 믿어 볼까?
그래서 이제 믿음이 점점 이제 깊어가는 단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처음에 이제 불교를 믿는 십신의 단계라면
그다음에 십주
이 믿음이 깊어지면 이 부처님 가르침에 좀
이제 뭔가 더 깊은 믿음이 생기고 아 여기에 이제 머물러서
내가 이제 더 찾아다닐 필요 없겠다.
뭐 이 정도 저 종교 이거 가르침 저 가르침을 찾아다니면서 왔다 갔다
우왕정 할 것 없이
이 공부처에 머물러서
이 공부를 이제 꾸준히 하면 되겠구나
하고 어 믿음이 이제 머무름의 단계 믿음이 이제 딱 굳건해지는 단계 기초가 튼튼해지는 단계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 공부처에 머물러서 이 공부를 이제 시작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고
또 경전에서 보면 요 10주의 단계
단순한 믿음의 단계였다가
10주의 단계 이 견고하게 이제 머무르는 단계가 되는
그 전환점은 어 이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다가 법문을 듣다가
혹은 기도하고 염불하고
공부를 하다가 나름의 어떤 그 기도 체험
또는 뭐 수행의 체험 내지는
공을 언뜻 보는 것 같은
완전히 견성
이렇게 얘기하긴 뭐 하더라도
알 수 없는 어떤 크고 작은 다양한 어떤 체험들
공을 언뜻 본 것 같은 체험들
뭐 이런 것 정도가 보통 동반을 한다.
이렇게 표현을 해요.
그래서 뭔가 단순하게 믿기만 하다가
처음에는 나는 불교 믿어요.
이러고 있는 저렴한 다니잖아요.
그러다가 뭔가 모르게
절에 다니면서 기도도 하고
절에서 다양한 뭐 수행도 하고
하다 보면 뭔지 모르게 그 기도의 공덕
수행의 공덕
뭐 깨달음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어떤 변화하는 어떤 이런 약간의 체험적 그 경험을 한단 말이죠.
그러면 이 믿음인지
더욱더 굳건해지면서
딱 머무는 단계
이 공부에 이제 내가 더 이상 어디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지 않고
이 공부처에서 머물러서
이 공부를 굳건히 해내겠다는
어떤 믿음이 더욱더 실제화되고 굳건해지는 단계
그걸 10住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다음에 이제 10 行이라고 그랬어요. 이렇게 부처님 가슴에 머물러서
이제는 요즘으로 따지면
불교대학도 다니고
사찰도 다니고
각종 기도나 수행도 해보고
또 법문도 듣고
그러면서 이제 절을 열심히 열심히 오래오래 다니면서
꾸준히 법문을 듣다 보면
이게 이제 단순히 믿고
이 공부가 맞구나 해서
여기 머무르는 것에 머무는 게 아니라
이제 이것이 저절로 실천되어 진단 말이죠.
부처님 가르침이 조금씩 현실에서 실천되어지는
거슬러 느끼게 된단 말이야.
그래서 뭔지 모르게
이제 여러분이 절을 열심히 다니면
어 그전에 믿음의 단계만 있을 때는 좀 이게 행동이 되지 않다 보니까
이럴 수 있죠.
절에 오래 다녔는데
믿음의 단계에서만
계속 십信의 단계에서만
절을 다니면 여러분 우리 옛날에 그런 노보살님들 많이 보잖아요?
믿음은 아주 간절해요.
불교에 대한
아주 법에 대한
스님에 대한 믿음은
아주 그 누구보다 뛰어난데
그 믿음이 너무 이렇게 체험되지 않고 실천되어지진 않고
맹목적인 믿음이기만 해서
스님이 얘기하면 뭔 말이라도 다 믿고
불교에서 뭐 한 말이면
막 무조건 다 믿고
이 이렇게 해서 불교는 무조건 맞아.
이런 맹목적 믿음?
그러다 보니까 좀 좀 고집 불통이 될 수도 있어요.
내 나같이 믿음 센 사람이 어딨어 하고 이제 막 들어온 신도님들을
좀 위에서 군림하게도 할 수도 있고
또 내가 맞다.
이 얘기를 좀 이래 할 수도 있고.
그래서 처음 본 사람들이 보기에는
신심 있는 노보살님인데
우리가 보기에는 저분은 별로 닮고 싶지 않은 분
이럴 수도 있단 말이죠.
이게. 이게 공부가 머물러지고
행동으로 나와지지 않으면
그냥 단순한 믿음에만 머물고
그 믿음이 공부로 되어지지 않고
깨달음의 공부로 되어지진 않고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그 믿음에 독선이 생길 수 있어요.
그래서 내가 이 절에 대보살이야.
약간 앞자리 그 내자리야.
어디저 남의 자리를
어른의 자리를 네가 앉아
이럴 수도 있고
뭔가 이제 그런 약간의 신앙에 대한 오만함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러다 보면 이제 막 처음에 절에오신 분들이
그런 분들을 보면서 미안하네.
저 나는 나도 20년 30년 전에 다니면 저렇게 되나?
그럼 난 절에 안 다닐래?
이런 사람이 생길 수도 있는 거예요.
근데 이제 그래서 그런 분들이
그 믿음 기복 여기만 머물러 있으면
그 십신에서 50년 한 평생 십신에서만 머물다가
그냥 갈 수도 있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이제 뭔가 기도하다가
뭐 체험을 하고 나면
이제 십주의 단계로 넘어가는 듯
하지만서도 실행까지 안가 놓으니까
야 내가 옛날에 기도하다가 이런 것도 체험했고
저런 것도 체험했다면서
그게 오히려 더 기고만장해지고
그냥 그 신심은 깊은데
뭔지 모르게 뭔지 모르게
좀 깨름직한 이런 느낌을 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오히려 더 고집이 더 세지는
자기 생각이 노연하지는 싫잖아요.
집착에 노연아지고
모든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자비가 저절로 실천되어 주고
이런 실천은 좀 부족하면서
공부에 대한 오만함이 생길 수도 있단 말이죠.
그래서 그렇게 뭔가
이렇게 십신 10주가 10행으로 넘어가지 않으면
그런데 그 이 세속에
아직 깨달음 이전에
공부를 안 하는
그 지금은 아직 견성 이전에
공부를 말한단 말이에요.
견성 이전에 공부에서도
그래도 뭔가 실천하려고 하는 단계까지 가는 게 있고
그것도 못 하고 그냥 그 기복의 수준에서만 머물러 있는 수도 있단 말이죠.
아마 이제 일반 사찰을 다니던 분들은
이걸 보면 아버님이 참 몇십 년 동안 그래 왔구나
이런 걸 느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다 이제 10행에 가면 이 공부를 했으니까
마음 공부를 하고 불교 공부를 하고
수행을 했으니까.
부처님 가르침이 뭔지를 이제 이해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 탐진치 3독이 있으면
하여간 저 공부가 아니구나.
계속 들어오니까
저절로 훈습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 탐심이 좀 줄어들고.
단 안 봐서 정확히 모르겠는데
그 무슨 어떤 무슨 상담 관련된 프로그램에서 보니까 어
이 보살님은 자식을 잘 키워야 되겠다라는 집착이 크단 말이에요.
그래서 핸드폰은 이 만큼만 하듯
그 이상은 절대 하면 안 되는 그 룰을 정해
정하고. 공부를 해야 된다라는
또는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는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아야 된다라는
누가 봐도 맞죠.
맞는 롤이죠.
자식을 그렇게 키워야 된다라고
딱 우리가 어리석을 때 우리 젊었을 때 어리석을 때 자식들을 그렇게 키우지 않나요?
자식들을 그렇게 키울 수 있어요.
왜? 내가 올바른 부모니까 자식을 올바르게 키워야 돼.
그러니까 절대 스마트폰 사주면 안 돼. 4줘도 나중에 중학교 올라가면 사준다든지. 애들이 스마트폰이나 보게 하고 있을 순 없어.
그리고 애들한테 썩은 음식들 덩크푸드라고 불리는 햄버거 피자 뭐 예를 들어 아이스크림 이런 거는 절대 사줄 수 없어.
그거는 애를 망치는 거야.
애 몸에 몸에다 쓰레기를 집어넣는 거랑 똑같아.
부모가 돼서 자식한테 그러면 되겠어?
틀린 말은 아닐 수 있어요.
근데 그 생각에 너무 과도하게 집착하고 고집을 하면
자식들이 엄마를 싫어하다는 말이죠.
이 어 2호선 상담 시 생각 어제 나온 거 보니까 엄마들 싫어한다.
그러고 엄마가 집에서 혼자만 왕딴 거 같애요.
엄마는 원리 원칙이 너무 뚜렷하니까. 그렇게 안 되면 자식이 크게 망할 것 같고 사식이 막 삐뚤어지는 게 엄마 눈엔 보이니까 내 자식이 문제가 있다고 스스로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근데 남편 입장에서 보기에는 전혀 내 자식한테 아무 문제가 없어요. 오히려 아내인 당신이 너무 얘한테 애들한테 집착이 세고 반드시 해야 된다고 하니까 나라도 엄마한테 화가 나겠다. 근데 엄마는 내가 옳다라는 생각이 굳건하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걸 내가 잘한다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근데 저도 똑같아요. 저도 우리 장병들 때문에 이 제가 옳다는 고집 제가 환경을 공부해 드리잖아요. 20대 중반에 군에 왔는데 장병들이 퍼펙트 끝나고 간식을 콜라의 햄버거를 아니 콜라에 초코파이를 주는 거예요. 콜라도 안 좋은 음식이고 이게 다 이래 안 좋은 음식이고. 그래서 녹차도 줘 본 적이 있고. 몸에 좋은 떡떡 같은 거 위에 조면 조면 조섭죠. 그러면서 애들의 몸을 절여오는 아이들을 더욱더 청정하게 해 줘야지. 되겠네.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어떤 우리 집에 군정병 친구 빅스비 솔직히 말씀드려도 돼요. 그래서 어 괜찮아. 어 괜찮아. 마음껏 얘기를 해야 되는데. 저는 콜라 먹고 몸이 망가지더라도 콜라를 너무너무 먹고 싶습니다. 프로그램에서. 그리고 그건 뭐 몇 번 군에서. 일주일 동안은 거의 못 먹는데 저자에서 한 번 먹는다고 망가지겠습니까? 어 그런 뭐 이런 식의 얘기를 이 친구죠? 친구 몇 사람한테 듣다가 제가 하는 얘기를 의도를 모르는 친구들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데도 그 얘기를 가만히 듣고 나서 꼼꼼히 이 친구들 떠나고 혼자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제 허물이 보이더라고요. 제가 그 친환경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했단 말이죠. 이 친구들이 아 일주일에 한 번 콜라 먹는다고? 그게 어떻게 되겠어요? 그 그러면서 이제 그냥 아 몸에 안 좋은 음식을 마음껏 주기 시작했던 기억이 나는데. 어 이런 것과도 비슷한 것 같아요. 자기 생각이 옳다라는 것을 고집하는 게 어디석은 건지 자기는 못 보는 거예요. 자기는 옳게 하고 있고 남편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아이들이 잘못했다고만 생각하는 거예요. 이거랑 비슷하단 말이죠. 그래서 저래서도 음 내가 오랫동안 믿었고 나 같이 신심 있는 사람이 없어. 그렇게 내 생각이 맞고 내 견애가 맞다고 생각하는 독불장군. 스타일의 옛날 대보살님들이 있었단 말이죠. 저 대보면 절마다. 그 그 대보살님들은 자기가 하는 방식 그거 완전 집착각 고집이 심해서 저래 저래 공양 부처님 전에 올려도 되는 공약물과 올리면 안 되는 공약물이 있다고 옛날에 배운 게 있어 가지고 그걸 엄청 집착을 해요. 그래서 아니 뭐 그 어때요? 그건 정성으로 했으면 올려놓으세요. 이러면 안 됩니다. 이러면서 우리한테도 막 그거는 안 된다고 배웠고 그런 걸 하면 뭐 이런저런 억압이 있고 뭐 저거 뭐 이러면서 안 된다고 그런 게 유연함이 없어. 유연함이 그래서 내가 하는 방식을 옳다. 그걸 딱 쥐고 있는 그런 게 좀 심하더라는 말이죠. 근데 공부를 꾸준히 하면서 좀 유연해져요. 이게 저절로 실천이 돼요. 그러면 아 내가 옳다라는 생각도 내려놓게 돼요. 그래서 나중에는 그분들하고 처음에는 그렇게 독선적이셨다가 나중에는 하나하나 차근차근 앉아가지고 요렇게 이렇게 얘기를 하면서 절에는 본래가 사찰에서. 이건 이래야 되고 저건 저래야 되고 이거는 절대 하면 안 되고 저건 해도 되고 이런 룰이라는 게 애초부터 없었습니다라는 걸 하나하나 설명을 하니까 이제는 알아드리스트란 말이에요. 나중에는 처음에는 이상한 스님이와 가지고 이렇게 불교의 전통을 자꾸 깨려고 한다. 이러면서 막 이렇게 막 이러시다가. 이 공부를 꾸준히 오래오래 하시고 나니까 얘기를 하나하나 하면 이걸 그대로 알아들이시고 받아들이시고 그렇죠. 제가 너무 이렇게 고집했던 거 같습니다. 이것도 집착이죠. 이것도 집착이네요. 그러면서 그 생각을 이렇게 내려놓 있기도 한단 말이죠. 그 사실은 불교가 그래요. 절에서 일해야 된다. 저래야 된다는 게 없어요. 그냥 어떤 그것 그냥 절의 어떤 그 그 뭐 그 어디든 가면 그곳마다의 전통이 있으니까 그걸 무조건 억지로 무시할 필요는 없지만 거기 과도하게 집착할 필요도 없죠. 그렇게 유연해져요. 실천을 실천행위라는 게 기도자라고. 염보를 잘하고 도경 잘하고 막 절 옛날보다 더 잘하고 이런 걸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탐진치 삼독의 소멸을 얘기하는 그 실천이라는 것 무엇이든 탐짐에 대한 소멸 내 과도한 생각 집착에 대한 탐심이 소멸되고 진심 화내고 성내고 내 뜻대로 안 되고 내 생각대로 안 되면 화내고 분노하고 세상에 대한 불만이 많고 정치는 이 모양이냐 뭐 경제는 이 모양이냐 뭐 온갖 뭐를 봐도 막 불평불만이 많고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그게 진심이거든요. 그리고 자기 잣대를 가지고 이건 틀렸고 저건 넓고 이 사람은 잘했고 저 사람은 못했고 막 자기가 다 안다고 생각하면서 판단 분별이 심한 사람 그게 지심 어리석음이 큰 거예요? 자기만의 옳고 그른 게 견해가 강하면 그건 전혀 불교를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은 근데 이 마음 공부를 하면 저절로 이렇게 탐진지? 삼독이 소멸하게 되어서 세상을 바라보는 게 상당히 유연해지고 마음이 열리고. 그러면 모두에게 사랑받게 돼요. 그 사람이 과도하게 고집하지 않으니까 반드시 일해야 된다. 저래야 된다. 꺾이는 스타일에서 유연한 스타일이 바뀌니까. 그 사람 앞에 누구 누구라도 가기 좋은 거예요. 옛날에는 저 사람은 너무 자기 고집이 심해서 우리가 조선 앞에 가서 말도 한마디 못 했는데 어 이제는 마음을 열고 어 서로 의견 얘기해보라고 하고 그 얘기를 유연하게 듣고 이런 사람으로 바뀌는 거죠. 성격이 좋아지는 거예요. 이게 10 행이에요. 저절로 붙여낸 가르침을 실천하게 돼요. 그러고 나면 또 어떻게 바뀌냐면 저절로 10회형이 돼요. 내가 그러고 싶어 그러는 게 아닌데도 그전엔 보세요. 엄마가 어디죠? 혼자 왕따가 갖고 엄마만 오면 가족들이 막 그냥 바퀴벌레도 아니고 막 이방저방 들어가서 숨고 엄마랑 마주치기 싫다는 거죠. 그럴 수 있었는데 이제는 엄마가 그러지 않고 마음을 열고 탐짓지 삼독이 소멸하니까 아이 눈높이에서 아이 말을 들어주겠죠. 들어주고 그 아이 말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아 너도 그런 측면이 있겠구나. 아 그럴 수 있겠다. 그건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단 말이에요. 유연함이 생긴단 말이죠. 그러면 저절로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거예요. 세상을 상대방을 늦는 그대로 보는 걸 자기 식대로 자기 생각 해석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들이 내 앞에서 되게 편안해지죠. 어 그게 회향이에요. 그게 자비심이고 저 사람 앞에간 뭔가 불편하고 답답하고 깜갑했는데 이제 저 사람 앞에 가도 되게 편안하고 자유롭고 그렇게 바뀌었다. 그게 회향이죠.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로서 드러날 수 있도록 이렇게 허락해 주는 그러면 그 사람 앞에서 사람들이 편안함을 느껴요. 자비를 느끼는 평화를 느껴요. 그게 법을 회양하는 거예요. 자비를 회양하는 거고 지혜를 회양하는 거죠. 그러면 폐향이라는게 뭐예요? 주변 사람에게 나눠준다는 거잖아요. 옛날에는 이 사람들한테 이 사람 옆에 사람이 없었어요. 왜 그 사람 가까이 가면 뭔가 모르게 불쌍하니까 아들 슬금슬금 내뱉단 말이에요. 근데 이제 그 사람 옆에 있어도 전혀 불편하지가 않아요. 편안하고 그러면 사람들이 그 사람을 통해 기쁨 평화 자비 뭔가 좋은 것들을 느낀단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나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이제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전제나 판단범별 심판하는 존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바라보는 사람으로 바뀌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는 읽는 그대로 보는 사람으로 조금씩 바뀐단 말이죠. 그러면 그게 저절로 사람들한테 회항하는 거예요. 왜? 나라는 전제 자체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니까요. 나라가 존재 자체가 사람들을 점점 더 지혜롭게 만드니까요. 그게 저절로 해양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이제 뭐 조금씩 더 이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서 누가 힘들다고 하면 목 고민도 들어줄 수 있을 것이고 힘든 것들도 해결해줄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실제 쾌향이라는 말처럼 뭔가 내가 좋은 일이 있을 때 주변의 도로도로 나누고 베풀고. 거짓말하고. 뭔가 뭔가 모르게 이렇게 자꾸 베푸는 마음이 저절로 이렇게 체화되는 그런 삶으로 바뀌겠죠. 그렇게 되면 스스로가 또 주변에서도 야 저래 다니더니 참 좋아졌다. 저래 다니더니 참 참 유연해지고. 뭔 건 모르게 좀 따뜻해지고 사람이 좀 달라졌어. 뭔지 모르게. 그런 마음이 들고 저 그렇게 말하고. 그러니까 스스로도 야 이 공부부터 열심히 해야 되겠다. 생겨요. 그러면서 이제 이 마음이 한 단계 더 이제 이제는 그 중생심으로서 아르마니 지식으로 공부하면서도 이렇게 좋은데 그러다가 이제 여기서는 이제 과몰입 되는 건 아니에요. 이렇게 십신 집행 10회형까지는 홍보 불교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여까지는 다들 왔단 말이에요. 열심히 하다 보면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올 수 있어요. 물론 십신에서 그다음 단계로 못 나가고 한 50년 70년 절여다니다가 그냥 돌아가시던 분들이죠. 지금 계시겠지만 그 그분들은 쉽게 말하면 그런 거예요. 세세생생 한 10세를 그러고 열심히 십신의 수준에서 한 열 열생을 낙오주고 반복하면 저희도 다니다가 한 111살쯤 됐을 때 이제 10주로 넘어가고. 그럴 수도 있단 말이죠. 단기적 차별심으로 바라보면 그러니까 그때는 주로 사람들이 뭐라 그랬어요? 세세생생 공부하겠다. 세세생생 갈고 닦겠다. 이런 말을 했단 말이에요. 이렇게 십신 10주 10행 10회안까지는 누구나 공부할 수 있다 했잖아요. 근데 여기서 십지까지는 공부하는 애는 십지의 첫 번째는 환희지 일당입니다. 10 10신 10초 10행 10회항은 이 중생들이 내가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건데 십지부터는 보호사야 십지라는 표현을 써요. 보산십지. 이제 중생의 단계 중생의 단계에서 이제 보호 살해 단계로 탁 보살은 뭐예요? 보리 살탕 그 전에는 살타 중생을 상타 살타라 그랬거든요. 중생의 단계에서 중생이 불교를 신앙하는 단계였어요. 그러다 이제는 부처가 되기 전에 살해 단계를 거쳐요. 보살은 보리 살다. 보리 깨달음이라는 게 딱 중심이 되지만 여전히 살다. 중생 중생의 없습을 아직 다 떼지는 못한 그래서 그 중간 단계랄까요? 부처가 되기 전에 돌이 살타의 과정을 겪는단 말이야. 그게 보살의 첫 번째 단계 고47 첫 번째 환희지부터 시작을 해요. 근데 이 보사십지까지 10년까지 이르는 건 누구나 어느 정도 할 수 있지만 여기서 이제 보살십지 단계까지 넘어가는 데는 이거는 이제 쉽지는 않은 2년이 있어요. 2년이 진짜 2년이 지금까지 불교 역사 속에서 이 십신십주 시행시피앙까지는 와다 갔다 할 수 있지만 십지 이상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어요. 거의 부처님 당시와 선의 황금기 때 이 버섯지 단계를 거쳐 갔던 훌륭한 훌륭한 조사선입니다. 깨달았던 스님들 깨닫고 보임 수행까지 원활하게 마치 인식해 말하면 그런 정도의 대도인들이 있었던 아주 국소적인 특정 지역의 특정 시기에만 이런 법을 공부할 수 있었던 시기였단 말이죠. 그러니까 놀랍게도 인류 역사 그 오랜 역사만을 전부 다 이 십지에는 넘어가지도 못한 채 나는 것만 구경도 못 한 채 전부 다 크면 이 중생세관 속에서 열심히 실천하고 해양하고 이런 것만 배웠단 말이에요. 그런데 두 시대에는 무짐 당시 화산의 한 금기 때 즉 스승이 있었던 시대 다른 스승이 있었던 시대에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그 많은 지역에서 그 많은 시대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코틀 욕구를 하고 하고 또 하고 수행하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거의 다 못 깨달았어요. 99.9 프로가 다 못 깨달았어요. 모든 시대가. 모든 시대 모든 불교 공부하던 사람들이 경전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못 깨달았다니까요. 신기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부처님이라든지 조사 스님들이 계시니까. 그래서 그분들이 법문을 서랍할 때는 아무것도 애쓴게 없어요. 사람들이 그냥 그분하고 인연이 되었을 뿐이고 그분의 법문을 들었을 뿐인데 애쓰고 노력한 것도 없는데 뭔가 들었을 뿐인데 저절로 깨닫는 일이 벌어져요. 그것도 한두 명만 깨닫은 게 아니라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저절로 깨닫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해요. 이거는 실제 역사적 진실이거든요. 이걸 보면 오히려 당연하지 않나요? 뭐가 당연할까요? 정부는 불교 공부는 내가 노력해서 하는 공부가 아니에요. 내가 애석하게도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 공부가 안 돼요. 공부하는 내가 있잖아요. 수행하는 내가 있잖아요. 십신 10초 10행 10회형 요 단계에서는 단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내가 공부 잘한다. 내가 성격이 좋아졌어. 내가 탐진치 삼독이 많이 없어졌어. 그러면서 회양을 잘하는 자비로운 사람들조차도 속마음속에 내가 너희들보다 공부 잘해. 인간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렇게까지 좋아졌어. 너희들은 한참 먹었구나. 우월감 같은 내가 공부하는 내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놀랍게도 우리말의 중요한 말이에요. 역사 속에서 검증된 부분 자기가 수행해서 깨달을 수 없어요. 자기가 혼자 공부해서 깨달았어. 거의 희박해요. 완전 없다고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독학이라는 분들이 가끔 하나씩 나오니까. 독학이 혼자 깨닫는 사람들 가끔 하나씩 나오니까. 근데 주로 독학은 괴로움 속에서 혼자 죽을 것 죽을 똥을 싸다가 아무리 먼짓을 해도 안 되다가 그냥 푹 깨닫는 게 보통 독학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괴로움 속에 10년 20년을 결혼 속에서 벗어나겠다고 하면서 막 이렇게 마음을 쓰기가 쉽지가 않아요. 그래서 독학이 쉽지가 않아요. 혹은 대부분 아주 순탄하고 쉽게 그냥 공식적인 길이 있단 말이에요. 스승 만나는 거야. 그냥 부처님 바바로 바른 법을 만나는 거고 다른 법문을 듣는 거예요. 솔직히 말하면 이거밖에 없어요. 따른 걸로는 안 되니까요. 애착을 해봐서 알잖아요. 어릴 때 20대 때 대학원도 가보고 뭐 뭐 온갖 교수님들하고 막 오온가 공부도 하고 그래서 기도도 엄청 해 보고 수행도 엄청 해 보고 다 다 별짓을 다 해 봤단 말이에요. 1단계도 안 나가요. 이게 푹 올라서지를 못해요. 그래서 이때부터는 이제는 2년이 있어야 돼요. 시절 인연이 좀 있어야 돼요. 선거 공덕이 좀 있어야 돼요. 이 법과의 인연 선근 공덕 그래서 지금 이제 선근 공덕에 있는 사람들 같으면 이제 다른 법을 만나고 다른 스승을 만나서 바른 법문을 듣게 된단 말이에요. 그러면 이제 그때 발심을 하게 돼요. 아 내가 왜냐하면 바른 세상을 못 만나면 발심을 못 해요. 책을 젊었을 때 불교계의 분위기 지금 20년 전 불교계 분위기는 단심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스님들조차 어지간한 발심을 거의 안 했어요. 발심이 뭐예요? 금생에 나는 깨달아 부처가 되겠다. 가능하다. 확신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 마음의 발신이거든. 그래서 나는 금생의 나는 반드시 부처가 되겠다. 굳은 믿음을 가지는 게 발심해. 이렇게 말하면 근데 그게 가능하겠어요? 내 눈으로 깨달은 부처를 이렇게 뭐랄까. 이 이 마음을 깨달은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그때는 어떤 생각을 하느냐면 깨달음이라는 건 2500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는 독특한 사람 그분이니까 깨달은 거지. 그 이후에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깨닫노 아 맞어 임제 황벽 육조 스님 있을 때 곧 독특한 스님들이 있을 때만 깨달은 거지. 그다지 지금은 그 간 불가능한 건 깨달음이라는 건 저 고리적인 날 옛날 옛적의 이야기와 이야기. 옛날 이야기 진짜 아니잖아요. 옛날 온갖 이야기들만 제 할머니가 애한테 해줬던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이 진짜 아니잖아요. 그냥 하는 거잖아요. 그거 안 믿잖아요. 옛날에 모두가 알에서 태어났다. 그 누가 진짜 몇 년 말이에요? 안 믿어요. 그 이야기는 저렇게 하나보다 다른단 말이야. 그렇게 믿었다니까요. 불교를 부처님 깨달았다 이러면 어 그래 부처님 깨달았지. 옛날에 그 그분 그분 깨달으신 분이지. 우리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라고 생각해요. 교과서가 뭐 아래서 나왔다. 뭐 그쪽은 나왔나 보지 뭐 알 순 없지만 뭐 그랬지 이런 것처럼 부처님이 깨달았다고? 어 그럼 부처님이 깨달았나 보지.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얘기가 돼 버려요. 항상 그래 왔어요. 인류 역사 속에서. 믿을 수가 없으니까요. 내 눈으로 보지 않고 안 믿거든요. 그러니까 그때는 신심이라는 게 이런 진짜 신심이 아니었어요. 불교 교대에 대한 믿음 같은 제대로 된 믿음이 아니었고 발심을 해도 진정한 발심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제가 진짜 발심한 사람을 난생 처음 만나던 순간을 잊었었다니까요. 대학교 때 친구랑 아주 부심이 깊은 친구였는데 그 친구랑 불교 유기를 한참 하다가 그 친구가 나는 금생을 넘기지 않을 거라고. 너무 다친 이게 지금 맥주 먹다 할 소리란 말이에요. 이 젊은 애가 금생에 나는 부처가 되는 거 이외에는 아무 뜻이 없다. 그다음 나는 분명히 이번 생에 부처가 될 거다. 어 나 그런 얘기 하는 사람 태어나 처음 봤거든요. 너무 충격이었어. 진짜. 아 그러면서 제 마음속에서 이 이 불교적 우월감 같은 거에 제가 좀 쩔어 있었거든요. 내가 불교적 공부를 잘해. 이런 생각 내가 최고여야 되는데 얘가 왜 나보다 더 이런 발신이 더 뛰어나지? 나는 이런 거 생각도 안 해. 봤는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그 몸 했어요 너무 충격이었어요. 이렇게 이 마음을 확인할 수 있구나. 내 벌레 면목을 확인할 수 있구나 확인하는 사람은 분명히 바뀌는구나. 이걸 자기 눈으로 봐야 그때 믿음이 생겨요. 진짜 믿음이 생겨요. 법에 대한 그리고 진짜 발신을 하게 돼요. 그런 시대가 인력사속에 없었다니까요. 이제야 일기 부처님 당시 2기 선사시대의 시대였다면 지금이 3기라고 볼 수 있어요. 여기서 이제 이때부터는 이제 이 다음 단계 십지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이게 2년이 좀 맞아야 돼요. 시절 2년 또 맞아야 되고 그러니까 옛날에 경전에 내가 아무리 발심한 보살이 태어나면 부처님 떠난 이후고 태어나서 보니까 부처님이 아직 안 오셨고. 몇생을 태어나고 나고 죽은 나머지 그 수행자가 돼도 부처님 만나기 하늘의 별따기는 법을 불법선 삼보 만나게 하늘의 별따기다. 이렇게 얘기를 하면서 한탄하는 장면이 경전에 많이 나와요. 그게 왜 그렇게 나오는지인지 알겠다. 그게 진짜 중요한 일이었던 거예요. 그렇게 해서 진정으로 말씀을 해서 다른 법문을 듣기 시작하면 부진 당시에 주로 일주일에서 2주일이면 깨달았단 말이에요. 선사 선생님들 시대에도 수많은 선생님들이 빠르게 빨리 깨달은 사람이 1 2주일 깨닫고. 좀 감기가 좀 안 되거나 좀 아직 2년이 없는 사람은 몇 년 걸리기도 했고. 그러나 누구나 깨달았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을 해가지고 정말 깨달을 수 있겠구나 하고 굳은 믿음을 가지는 이게 중요한 거예요. 그러고 나서 오래오래 이제 이 바른 법은 그곳에 가서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법문을 듣기 시작하면 드디어 아 이거를 얘기했구나. 내가 이걸 보고 나라고 했구나. 몸과 마음이 내가 정말 아니었구나. 이게 이게 나고 이게 진정한 나의 본래 명목이구나 하는 걸 문득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때는 이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