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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본래무일물 ㆍ부모미생전

작성자空山 내려놓음 마음학교장|작성시간26.06.14|조회수39 목록 댓글 0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어쩌면 이 영상을 보면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떠올리고 계실지 모릅니다. 내일 해야 할 일 어제 있었던 일 누군가와 나눈 대화 혹은 막연한 불안이나 걱정 우리의 마음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각을 믿지 마라.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생각은 우리 삶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허상에 가깝습니다. 오늘 우리는 함께 생각의 본성을 깨닫고 그 속에서 진실을 보는 방법을 탐구해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법구경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앞서고 마음이 주인이며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더러운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따르나니 마치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 하느니라. 깨끗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따르나니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 하느니라. 이 구절은 우리 삶의 생각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품느냐에 따라 우리의 말과 행동이 달라지고 결국 우리의 삶 전체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은 정말 우리 자신일까요? 생각이 곧 나 자신이라면 우리는 생각을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요? 우리는 생각을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없고 원하지 않는 생각이 떠오를 때 그것을 막을 수도 없습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었을 때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걱정과 불안에 경험해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생각의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생각의 노예가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생각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 수행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인연에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입니다. 마치 하늘에 떠가는 구름처럼 생각은 잠시 나타났다가 흩어집니다. 구름이 하늘 자체가 아니듯 생각 또한 우리 본래 마음 자체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생각을 실체라고 믿게 되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무명 즉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을 나의 생각이라고. 여기고 그 생각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나는 불안하다. 나는 화가 난다. 나는 외롭다라고 말하면서 생각과 감정을 나 자신으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생각은 그저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기분이 좋다가도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기분이 나빠지는 경험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 순간 나는 기분이 나쁘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잠시 후 좋은 소식을 듣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다시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처럼 생각과 감정은 외부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그렇다면 나쁜 기분이라는 생각은 진짜 나 자신일까요? 아니면 그저 특정 조건이 만들어낸 일시적인 현상일까요?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연기법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 저것이 멸한다.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조건이 갖추어지면 생각이 일어나고 그 조건이 사라지면 생각도 함께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의 본성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첫 번째는 관찰입니다. 생각을 믿지 말고 생각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생각이 일어나면 즉시 그 생각 속으로 빠져듭니다. 화가 나는 생각이 들면 그 화를 정당화하는 또 다른 생각들을 만들어내고 결국 분노에 휩싸이게 됩니다. 불안한 생각이 들면 그 불안을 키우는 상상들을 더해가며 점점 더 깊은 불안 속으로 빠져듭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생각을 지켜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지금 나에게 화가 나는 생각이 일어났구나. 지금 나에게 불안한 생각이 일어났구나. 이렇게 생각을 관찰하는 순간 우리는 생각과 나 사이에 약간의 거리를 만들게 됩니다. 이 거리가 바로 자유의 시작입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찰나라는 비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오랜 수행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안 한다. 존자를 찾아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저는 수행을 하면 할수록 더 괴롭습니다. 제 마음은 끊임없이 번뇌로 가득 차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고요해지지 않습니다. 안 한다. 존재는 찰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번뇌를 없애려고 하는가 아니면 번뇌를 지켜보고 있는가? 찰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번뇌를 없애려고만 했지. 번뇌를 지켜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입니다. 안 한다. 존재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번뇌를 없애려고 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번뇌입니다. 그저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십시오. 그것이 어디서 오는지 어떻게 머무는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관찰하십시오. 찰나는 그날부터 번뇌를 없애려 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번뇌를 지켜보는 순간 번뇌는 더 이상 힘을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을 없애려 하지 마십시오. 생각을 통제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저 생각을 지켜보십시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에 잠들기 전까지 우리 마음속에는 수천 수만 가지의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 생각들을 하나하나 붙잡고 싸우려 한다면 우리는 평생 전쟁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을 지켜보기 시작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생각은 우리가 지켜보는 순간 스스로 힘을 잃고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마치 어둠 속에 빛을 비추면 어둠이 사라지듯 생각의 알아차림의 빛을 비추면 생각의 힘이 약해집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각을 지켜볼 수 있을까요? 먼저 호흡을 관찰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의 호흡을 느껴보십시오. 들숨이 들어올 때 들어온다라고 알아차리고 날숨이 나갈 때 나간다라고 알아차립니다. 호흡을 관찰하는 동안 분명히 생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점심은 뭘 먹지? 내일 회의 준비는 했나 같은 생각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때 생각과 싸우지 마십시오. 그저 아 생각이 일어났구나라고 알아차리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십시오. 이것이 바로 생각을 지켜보는 수행입니다. 처음에는 생각이 일어난 지 한참 후에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생각 속에 빠져5분 10분을 보낸 후에야 아 내가 또 생각에 빠져 있었구나라고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의 시작입니다. 계속해서 연습하다 보면 점점 더 빨리 생각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생각이 일어난 지 1분 후 30초 후 10초 후 그리고 마침내 생각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중부 경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마치 숙련된 목수나 그의 제자가 나무를 깎을 때 긴 획을 그으며 나는 긴 획을 긋고 있다고 알고 짧은 획을 그으며 나는 짧은 획을 긋고 있다고 알듯이 비구는 긴 들숨을 쉬며 나는 긴 들숨을 쉬고 있다고 알고 짧은 들숨을 쉬며 나는 짧은 들숨을 쉬고 있다고 압니다. 이처럼 알아차림은 단순하지만 강력합니다. 생각을 판단하지 않고 분석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좋은 생각 나쁜 생각이라고 구분하지 않고 그저 생각이라고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생각을 지켜본다는 것은 생각을 억압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행을 시작하면서 생각을 하면 안 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자책하고 생각을 억지로 밀어내려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수행이 아닙니다. 생각을 억압하는 것은 마치 물속에 공을 억지로 누르는 것과 같습니다. 힘을 주는 동안에는 공이 물속에 가라앉아 있지만 손을 놓는 순간 공은 더 강하게 튀어오릅니다.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압하면 할수록 더 강하게 되돌아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억압이 아니라 관찰을 가르치셨습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되 그 생각에 휩싸이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을 손님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손님이 찾아오면 정중히 맞이하지만. 손님이 집에 주인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습니다.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어서 오세요라고 맞이하지만. 그 생각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도록 두지 않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생각의 내용이 아니라 생각의 과정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생각의 내용에 집중합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내일 회의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내 인생은 왜이 모양일까? 이렇게 생각의 내용을 분석하고 판단하고 더 많은 생각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진정한 수행은 생각의 내용이 아니라 생각이라는 현상 자체를 보는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판단하는 생각이 일어났구나. 지금 나에게 걱정하는 생각이 일어났구나. 지금 나에게 분석하는 생각이 일어났구나. 이렇게 생각의 과정 자체를 관찰하는 순간 우리는 생각의 본성을 직접 경험하게 됩니다. 생각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이라는 것을요. 자바 안경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비구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면 마음의 번뇌를 끊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비고요 번뇌를 끊으려 하지 마라. 반내에 일어남과 사라짐을 지켜보라. 마치 연못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듯 번뇌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그저 지켜보라. 그러면 자연스럽게 번뇌는 힘을 잃을 것이다. 이 가르침은 생각해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생각을 없애려 하지 말고 생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지켜보십시오.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도 피곤하다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십시오. 출근길에 회사가기 싫다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십시오. 누군가와 대화하면서 저 사람 말이 마음에 안 든다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십시오. 그리고 그 생각들이 어떻게 사라지는지도 지켜보십시오. 아무리 강렬한 생각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분노도 불안도 슬픔도 모두 시간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이것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 바로 무상을 깨닫는 것입니다. 무상을 깨닫는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으로 직접 체험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수백 번 수천 번 지켜보다 보면 어느 순간 깊은 통찰이 일어납니다. 아 생각은 정말 실체가 없구나. 생각은 그저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구나. 이 깨달음이 일어나는 순간 우리는 생각의 노예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모든 생각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더 이상 생각에 휩쓸려 괴로워하지 않게 됩니다. 생각은 여전히 일어나지만 우리는 그 생각을 관찰하는 자유를 갖게 됩니다. 티베트의 위대한 스승 파드 맞쌈빠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을 적으로 여기지 마라. 생각을 친구로 여기지도 마라. 그저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라. 그러면 생각은 스스로의 자리에서 해탈할 것이다. 이 말씀은 생각과의 올바른 관계를 보여줍니다. 생각을 적으로 여기면 우리는 생각과 전쟁을 하게 됩니다. 생각을 친구로 여기면 우리는 생각에 집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생각을 그저 지켜보면 생각은 자연스럽게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마치 물 위의 파도가 일어났다가 다시 물로 돌아가듯이요. 그렇다면 일상생활에서는 어떻게 이 수행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먼저 하루에 몇 번이라도 멈춰서 자신의 생각을 관찰하는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아침에 일어나서 점심시간에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잠들기 전에 단 몇 분이라도 좋습니다. 눈을 감고 호흡을 느끼면서 지금 이 순간 어떤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찰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관찰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매일 조금씩 연습하다보면 점점 더 명료하게 생각을 지켜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도 알아차림을 유지하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걸을 때는 걷는 것을 알아차리고 먹을 때는 먹는 것을 알아차리고 말할 때는 말하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매 순간 알아차림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도 자연스럽게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생각에 이름을 붙이는 연습도 도움이 됩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 생각 생각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걱정하는 생각이 일어나면 걱정 걱정 판단하는 생각이 일어나면 판단 판단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이렇게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생각과의 거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생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구름의 이름을 붙이면 그 구름이 하늘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듯이요. 마지막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수행이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부처님께서도 6년의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위대한 조사들도 수십 년의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의 본성을 깨닫는 것은 평생의 수행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여정의 매 순간이 그 자체로 의미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을 지켜보는 매 순간 우리는 조금씩 자유로워집니다. 생각에 휩싸이지 않는 매 순간 우리는 조금씩 평화로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길입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지금 이 순간부터 생각을 믿지 마십시오. 생각을 지켜보십시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고 생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점점 더 생각해 본성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 속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꽃 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생각을 지켜보는 수행을 시작하면 우리는 곧 하나의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됩니다. 생각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고요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파도가 거센 바다에서는 바닷속을 볼 수 없듯이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는 생각의 본성을 제대로 관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사마타 즉 고요함의 수행을 강조하셨습니다. 고유함은 단순히 생각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고요함은 마음이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마치 잔잔한 호수의 수면처럼 고요하지만 모든 것을 분명하게 비추는 상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시작할 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 수 있나요? 하지만 이 질문 자체에 이미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이미 노력이고 긴장입니다. 진정한 고요함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래 상태가 바로 고요함입니다. 다만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의 파도에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고요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파도가 잔잔해지도록 기다리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염척영에서 사념쳐 수행을 가르치셨습니다. 비구들이요. 이것이 중생을 청정하게 하고 슬픔과 비탄을 넘어서며 고통과 근심을 소멸시키고 바른 길을 얻어 열반을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니 이른바 사념처이니라 몸을 몸으로 관찰하고 느낌을 느낌으로 관찰하고 마음을 마음으로 관찰하고 버블법으로 관찰하되 열심히 분명한 앎으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관심을 버리고 관찰하라. 이 가르침의 핵심은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몸을 관찰할 때는 판단하지 않고 그저 몸의 감각을 느낍니다. 느낌을 관찰할 때는 좋고 나쁨을 따지지 않고 그저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마음을 관찰할 때는 마음의 상태를 바꾸려 하지 않고 그저 마음을 지켜봅니다. 이것이 바로 윗바사나 즉 통찰의 지혜입니다. 먼저 몸을 관찰하는 것부터 시작해 봅시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몸은 어떤 감각을 느끼고 있나요? 의자나 바닥에 닿아 있는 엉덩이의 감촉 옷이 피부에 닿는 느낌 손과 발의 온도 뱃속의 느낌 우리는 하루종일 몸과 함께 살아가지만 정작 몸이 보내는 신호를 제대로 느끼지 못합니다. 머릿속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몸을 관찰하기 시작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생각이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마음이 고요해지기 시작합니다. 왜 그럴까요? 몸의 감각은 항상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과거나 미래에 대한 걱정은 생각 속에만 존재하지만 몸의 감각은 오직 현재에만 존재합니다. 그래서 몸을 관찰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현재 순간으로 데려옵니다. 호흡은 몸을 관찰하는 가장 좋은 수단입니다. 호흡은 우리가 살아있는 모든 순간 함께하면서도 평소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면 호흡은 우리를 현재 순간으로 고요함으로 이끕니다. 코끝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공기의 감촉을 느껴보십시오. 배가 부풀었다가 꺼지는 움직임을 느껴보십시오. 가슴이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을 느껴보십시오. 처음에는 호흡을 느끼는 것조차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몇 번의 호흡을 느끼다가도 금방 생각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생각 속에 빠진 것을 알아차렸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수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부드럽게 판단하지 않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십시오. 이것을 100번 천 번 반복하십시오. 태국의 위대한 스승 아잔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명상은 마치 나무를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기다려야 합니다. 매일 땅을 파서 씨앗이 자라는지 확인하면 씨앗은 결코 자라지 못합니다. 명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조금씩 수행하고 기다리십시오. 서두르지 마십시오.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인내심을 가르칩니다. 고요함은 강요할 수 없습니다. 고요함은 저절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조건을 만드는 것뿐입니다. 규칙적으로 앉아서 호흡을 관찰하고 생각이 일어나면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는 것 이것을 매일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은 저절로 고요해집니다. 고요함 속에서 우리는 더 깊은 관찰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느낌을 관찰해 봅시다. 부처님께서는 느낌을 세 가지로 분류하셨습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우리는 하루종일 이 세 가지 느낌을 경험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즐거운 느낌 누군가의 말에 상처받았을 때의 괴로운 느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의 평범한 느낌 하지만 우리는 이 느낌들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못합니다. 즐거운 느낌이 오면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며 집착하고 괴로운 느낌이 오면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며 회피하려 합니다. 이 집착과 회피가 바로 괴로움의 뿌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연기법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접촉이 있으므로 느낌이 있고 느낌이 있으므로 가래가 있고 가래가 있으므로 집착이 있고 집착이 있으므로 괴로움이 있다. 이 가르침은 우리의 일상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누군가 우리를 칭찬했을 때 귀로 소리를 듣는 접촉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즐거운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 즐거운 느낌에 대해 더 듣고 싶다. 이 기분을 유지하고 싶다는 가래가 일어나고 그 사람에게 더 좋은 인상을 주려는 집착이 생깁니다. 그러다가 다음번에 그 사람이 칭찬하지 않으면 우리는 실망하고 괴로워합니다. 반대로 누군가 우리를 비난했을 때는 어떨까요? 귀로 소리를 듣는 접촉이 일어나고 괴로운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 괴로운 느낌을 피하고 싶다는 가래가 일어나고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그 상황을 부정하려는 집착이 생깁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더 큰 괴로움 속으로 빠져듭니다. 하지만 고요한 관찰 속에서 우리는 다르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날 때 아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구나라고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그 느낌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곧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때도 아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구나라고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그 느낌 또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곧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느낌을 관찰하는 순간 우리는 느낌에 휩쓸리지 않게 됩니다. 느낌은 여전히 일어나지만 그 느낌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무상을 직접 체험하는 것입니다. 상했다 니까야에는 이런 비유가 나옵니다. 비구들이요. 마치 개가 뼈다귀를 물고 있듯이 어리석은 자는 느낌을 집착합니다. 뼈다귀에는 고기도 없고 영양도 없지만 개는 그것을 물고 놓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느낌에는 영원한 만족이 없지만 어리석은 자는 그것을 붙잡고 놓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깊은 통찰을 줍니다. 우리는 즐거운 느낌이 영원한 행복을 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즐거운 느낌도 곧 사라집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은 잠시뿐이고 칭찬받는 기쁨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해서 즐거운 느낌을 쫓아다닙니다. 마치 뼈다귀를 물고 있는 개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느낌을 느끼지 말아야 할까요? 즐거움을 거부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느낌을 억압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느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즐거운 느낌이 오면 즐거운 느낌으로 알아차리고. 괴로운 느낌이 오면 괴로운 느낌으로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그 느낌의 무상함을 그 느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과정을 관찰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두입니다. 느낌에 탑닉하지도 않고 느낌을 억압하지도 않으며 그저 느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음 자체를 관찰해 봅시다. 마음을 관찰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탐욕으로 가득 차 있는지 분노로 가득 차 있는지 혼란스러운지 고요한지를 알아차립니다. 부처님께서는 염척영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탐욕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알고 탐욕이 없는 마음을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한다. 분노가 있는 마음을 분노가 있는 마음이라고 알고 분노가 없는 마음을 분노가 없는 마음이라고 한다. 이 가르침은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탐욕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탐욕이라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것은 내가 정당하게 원하는 것이야라고 합리화합니다. 분노에 빠져 있으면서도 저 사람이 잘못했어. 내가 화낼 만해라고 정당화합니다. 하지만 고요한 관찰 속에서는 마음의 상태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탐욕이 일어날 때 우리는 그것을 탐욕으로 알아차립니다. 아 지금 나에게 탐욕이 일어났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는 순간 탐욕은 이미 힘을 잃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탐욕은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만 힘을 갖기 때문입니다. 탐욕을 탐욕으로 보는 순간 우리는 탐욕과 거리를 두게 됩니다. 이것은 단지 일어난 탐욕일 뿐 나 자신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분노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노를 분노로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분노에 휩쓸리지 않게 됩니다. 분노는 여전히 있지만 우리는 분노를 지켜보는 관찰자가 됩니다. 미얀마의 위대한 명상 스승 마시 사야도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릴 때 이것은 좋은 마음이다. 이것은 나쁜 마음이다라고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저 이것은 환한 마음이다. 이것은 탐하는 마음이다라고 알아차리기만 하십시오. 판단하는 순간 당신은 다시 생각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이 가르침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수행 중에도 끊임없이 판단합니다. 내 마음이 왜 이렇게 산란할까? 나는 수행을 잘못하고 있는 건가? 다른 사람들은 금방 고요해지는데 왜 나만 안 될까? 이런 판단은 또 다른 생각의 흐름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생각의 미로 속으로 빠져듭니다. 하지만 판단 없이 그저 알아차리기만 하면 마음은 자연스럽게 고요해집니다. 마지막으로 법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밥을 관찰한다는 것은 현상의 본질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모든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움의 성질을 가지며 실체가 없다는 것을 직접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책으로 배우는 지식이 아니라 직접 경험하는 지혜입니다. 예를 들어 통증을 관찰해 봅시다.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 다리나 허리에 통증이 생깁니다. 보통 우리는 이 통증을 피하려고 합니다. 자세를 바꾸거나 움직이거나 통증에서 주위를 돌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통증을 고요히 관찰하면 어떻게 될까요? 통증 속으로 깊이 들어가 봅니다. 통증을 잇는 그대로 느껴봅니다. 그러면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통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감각의 흐름이라는 것을요. 때로는 날카롭고 때로는 둔하며 때로는 강하고 때로는 약합니다. 통증이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습니다. 단지 순간순간 변화하는 감각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상을 직접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깊이 관찰하면 통증과 나 사이에도 분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통증은 그저 일어나는 감각일 뿐 나 자신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무화를 직접 체험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고승 성철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 짧은 말씀 속에 깊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고요한 관찰 속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 그대로 봅니다. 통증은 통증이고 기쁨은 기쁨이며 슬픔은 슬픔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이야기를 더하지 않을 때 우리가 거기에 판단을 더하지 않을 때 우리가 거기에 저항을 더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은 그저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 그것이 바로 진실을 보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이 수행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먼저 하루 중 정해진 시간에 앉아서 수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10분이라도 자기 전 10분이라도 좋습니다. 조용한 곳에 앉아서 호흡을 관찰하고 몸의 감각을 느끼고 느낌을 알아차리고 마음의 상태를 관찰합니다. 처음에는 몇 분도 앉아 있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다리가 아프고 마음이 산란하고 온갖 생각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매일 조금씩 연습하다 보면 점점 더 오래 더 깊이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도 알아차림을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걸을 때는 발이 땅에 닿는 감각을 느낍니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이렇게 걸음걸음을 알아차리며 걷습니다. 설거지를 할 때는 물의 온도 그릇의 감촉 손의 움직임을 느낍니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는 상대방의 말을 듣는 동시에 내 마음이 일어나는 반응을 알아차립니다. 지금 나에게 방어적인 마음이 일어났구나. 지금 나에게 판단하는 마음이 일어났구나. 이렇게 매 순간 알아차림을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또한 정기적으로 명상 수련회에 참가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일상의 분주함에서 벗어나 며칠 동안 오롯이 수행에만 전념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이런 집중 수행 기간 동안 우리는 훨씬 더 깊은 고요함과 통찰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꾸준함입니다. 한 달에 한 번 하루 종일 명상하는 것보다 매일 10분씩 명상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마치 근육을 키우는 것처럼 알아차림의 능력도 매일 조금씩 훈련해야 강해집니다. 고요 속에서 관찰하는 이 수행은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점점 더 현재 순간에 머물게 됩니다.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불안이 줄어듭니다. 우리는 점점 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상황을 바꾸려는 강박이 줄어들고 있는 그대로의 삶과 평화롭게 공존하게 됩니다. 우리는 점점 더 자유로워집니다. 생각과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그것들을 지켜보는 여유가 생깁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요. 이 길을 가는 자는 순수해지고 슬픔을 극복하며 고통을 소멸시키고 바른 길을 얻어 열반을 실현하리라. 고요 속에서 관찰하는 이 길은 평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어렵고 때로는 지루하고 때로는 좌절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길을 꾸준히 걸어가면 반드시 진실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진실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생각을 지켜보고 고요 속에서 관찰하는 수행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는 깊은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생각도 아니고 느낌도 아니고 몸도 아니라면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관찰하는 이 의식은 무엇인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존재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공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공성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고정된 실체 없이 조건에 따라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공성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응무소주의 생기심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이 짧은 구절의 깨달음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머무는 바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어떤 생각에도 어떤 감정에도 어떤 대상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보통 무언가에 머물러 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이것을 좋아해. 나는 저것을 싫어해라는 고정된 관념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단지 조건에 따라 일어난 생각일 뿐입니다. 진짜 나는 이런 생각들 너머에 있습니다. 선불교의 조사들은 이것을 본래 면목이라고 불렀습니다. 부모가 낳기 전 본래의 얼굴은 무엇인가? 이 화두는 우리에게 생각 너머를 보라고 요청합니다. 우리가 평생 동안 만들어온 자아상 그 모든 관념과 믿음을 벗어던지고 본래의 나를 발견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본래의 나는 어떤 특정한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고정된 모습도 없는 것 그것이 본래의 나입니다. 마치 거울처럼 말입니다. 거울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이미지도 갖고 있지 않지만 모든 것을 비춥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도 그와 같습니다. 고요한 관찰을 깊이 해나가다 보면 우리는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생각을 지켜보고 있는데 문득 지금 누가 지켜보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그래서 그 지켜보는 자를 지켜보려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지켜보는 자를 찾을 수 없습니다. 단지 지켜봄이라는 알아차림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화의 직접적인 체험입니다. 우리가 평생 나라고 여겨온 것은 사실 고정된 실체가 아니었습니다. 단짐의 순간 일어나는 알아차림 그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중국 선불교의 6조 해능대사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리복무수 명경역 비대 볼레 모임을 합쳐야 지내. 깨달음은 본래 나무가 아니어. 밝은 거울도 받침대가 아니로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먼지가 끼겠는가? 이 개송은 우리에게 깊은 통찰을 줍니다. 우리는 마음을 깨끗이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번뇌를 없애고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청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해능 대사는 말합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무엇을 닦겠는가? 우리의 본래 마음은 이미 완전합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본래 마음을 보지 못하는 걸까요? 그것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과 집착 때문입니다. 마치 맑은 물에 진흙을 계속 휘저으면 물이 흐려지듯 우리 마음도 생각과 집착으로 흐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진흙을 휘젓는 것을 멈추면 진흙은 저절로 가라앉고 물은 다시 맑아집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에 집착하는 것을 멈추면 생각은 저절로 가라앉고 본래 마음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로 응무소주의 생기심의 의미입니다. 아무것에도 머물지 않을 때 본래 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 것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집착 없이 행동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가장 자유롭게 가장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어떤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 때 이것이 걸작이 되어야 해. 이것으로 유명해져야 해라는 집착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될
그의 창조성은 제한되고 그의 작품은 긴장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순수하게 창조하는 과정 자체에만 몰입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 진정한 걸작이 탄생합니다. 이것이 바로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바가바드 기타에서도 비슷한 가르침을 찾을 수 있습니다. 너는 행위를 할 권리는 있으나
그 결과에 대해서는 결코 권리가 없다.
이것은 우리가 최선을 다해 행동하되 결과에 집착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결과는 우리가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수많은 조건들이 모여서 만들어집니다
우리의 노력도 그 조건 중 하나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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