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쳬 무슨 일인지 도무지 줄지를 않습니다.
서운했던 말 한마디
끝내 사과받지 못한 일
잘해 주지 못하고 떠나보낸 사람
10년 전 20년 전 일인데도
새벽에 문득 떠오르면
어제 일처럼 가슴이 다시 뜨거워집니다.
그렇지요.
그 마음 한 번쯤 겪어 보셨지요.
밤의 자리에 누우면 그게 또 시작됩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떠오릅니다. 묻어뒀다고 믿었던 말이 다시 들립니다. 손에서는 다 놓았는데
마음에서는 끝내 놓지 못한 것들
부처님 앞에 앉아
다 비우겠노라.
절을 올리고 돌아서는데
그 응어리 하나만은 끝끝내 따라 일어섭니다.
법당문을 나서는 그 길까지
슬그머니 따라 나옵니다.
용서하고 싶은데 용서가 안 됩니다.
잊고 싶은데 잊히지가 않습니다.
그러다 결국엔 그걸 못 놓는
자기 자신이 또 미워집니다.
아무에게도 말 못 하셨죠.
이 나이 되도록
이렇게 오래 부처님을 믿어 왔는데
마음에 미운 사람 하나를 아직도 품고 있다는 말을
자식한테도 스님한테도
옆자리 보살님한테도
차마 어떻게 꺼내겠습니까?
그래서 그저 혼자 삼킵니다.
혼자 삭이고 혼자 끓이고 혼자 또 가라앉힙니다.
그 무거운 것을 가슴에 안고도 오늘도 여기까지 오신 분
바로 그분께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음의 활을 품고 있는 것은 뜨거운 수덩이를 손에 쥐고서 남에게 던지려는 것과 같다. 던지기도 전에 먼저 되는 것은 바로 내 손이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미운 사람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요? 어쩌면 그 일을 까맣게 잊고 두 달이 뻗고 편히 자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작 잠 못 들고 가슴을 태우는 것은 미움받는 그 사람이 아니라 미워하는 바로 나입니다. 부처님은 이걸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 화를 품는 것은 내가 독약을 마시면서 상대가 죽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독을 마시는 것은 나이다. 죽기를 바라는 것은 남이라니 이 얼마나 기막힌 노릇입니까? 그렇다면 부처님은 그 미운 사람을 억지로 용서하라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활을 꾹 참으라 하셨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평생 해온 그 방법 참고 삼키고 견디는 그 방법이 아닌 전혀 다른 길 하나를 일러 주셨습니다. 폭풍과 싸우려 하지 말라고. 다만 너 자신을 고요히 하라고 그러면 폭풍은 저절로 지나간다고. 도대체 싸우지 않고 어떻게 그 화를 내려놓을 수 있는지 손에 쥔 숯을 어떻게 대지 않고 내려놓는지 그 용서가 정말 그 미운 사람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평생 가슴 태워온 나 자신을 위한 것인지 그리고 그 응어리를 내려놓으라는 부처님 말씀이 오늘 밤 잠 못 드는 당신의 가슴에 정말로 가닿을 수 있는지 이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오시면 그토록 풀리지 않던 그 응어리가 오늘 밤만큼은 조금 느슨해지는 것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가슴에 묵은 응어리 하나가 떠오르신 분 이제는 그걸 좀 내려놓고 편히 살고 싶다 하시는 분 계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댓글창에 나무아미타 보여 이 한마디만 작은 발언으로 적어 주십시오. 길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짧은 한 줄이 손에 쥔 뜨거운 수를 가만히 내려놓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그 손을 천천히 펴는 이야기 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 보겠습니다. 2500여 년 전 인도 코살라국의 기원정사입니다. 해가 기울고 있었습니다. 기원종사 뜰에는 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고 그 그늘 아래 부처님이 앉아 계셨습니다. 비구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둘러 앉았습니다. 그날 따라 한 비구의 얼굴이 어두웠습니다. 무언가를 가슴에 잔뜩 담고 온 얼굴이었습니다. 부처님은 그 비구를 가만히 바라보셨습니다. 그러고는 천천히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그리 무겁게 쥐고 있느냐? 비구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함께 수행하던 도반이 자신에게 모짓말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면박을 주었고 그 말이 가슴에 박혀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수행을 하려고 앉으면 그 얼굴이 떠오르고 경을 외우려 하면 그 말이 다시 들린다고 했습니다. 도무지 떨쳐지지가 않는다고 비구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부처님은 잠시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되물으셨습니다. 그 도반이 너에게 모진 말을 한 것은 언제였느냐? 사흘 전이었습니다. 비구가 답했습니다. 부처님은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은 사흘 전에 한 번 있었던 일이 아니냐. 그런데 너는 그 한 번의 말을 사흘 동안 몇 번이나 다시 들었느냐? 비구는 멈칫했습니다.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자려고 누울 때마다 들었고 밥을 먹다가도 들었고 길을 걷다가도 들렸습니다. 사흘 동안 그 한 번의 말을 100번도 넘게 다시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도반은 너에게 화살을 한 번 쏘았다. 그런데 너는 그 화살을 빼지 않고 내 손으로 그것을 사흘 동안 100번을 다시 찔러 넣었다. 너를 아프게 한 것은 도반의 화살이 한 발이고 너 스스로 찌른 화살이 백발이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듣고 계신 분들 가운데 가슴이 뜨끔하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꼭 이뤘습니다. 누가 한 번 한 말을 우리는 마음속에서 백 번을 다시 듣습니다. 한 번 받은 상처를 우리는 스스로 백번을 다시 헤짚습니다. 그 사람은 던지고 잊었는데 나는 죽고 또 춥습니다. 그 사람은 두 달이 뻗고 자는데. 나는 그 일을 끌어안고 밤을 새웁니다. 부처님 이 두 번째 화살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첫 번째 화살은 누군가가 나에게 순 것입니다. 그건 내가 어쩔 수 없습니다. 살다 보면 화살은 날아옵니다. 모진 말도 듣고 억울한 일도 당하고 서운한 대접도 받습니다. 그건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화살은 다릅니다. 두 번째 화살은 내가 나에게 쏘는 것입니다. 그 일을 곱씹고 되새기고 한 밤중에 다시 꺼내어 가슴에 질러 넣는 것 그것은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하는 일입니다. 부처님은 사람이 첫 번째 화살을 피하기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는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자바안경에 전하는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이는 첫 번째 화살을 맞고 고지어. 두 번째 화살을 스스로 만든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는 첫 번째 화살은 맞되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는다. 이 말씀이 참 매섭습니다. 매서운데 또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너에게 화살을 쏜 그 사람을 미워하라고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과 싸워 이기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너 스스로를 더는 찌르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사람으로부터 한 번 다친 것으로 충분하니 거기에 내 손으로 상처를 더 보태지는 말라고. 이것이 부처님의 자비입니다. 부처님의 자비는 늘 나 자신에게로 먼저 돌아옵니다. 여러분은 오늘 하루 두 번째 화살을 몇 발이나 쑤셨습니까? 아침에 일어나 누군가의 무심한 말 한마디를 떠올리며 한 발 점심을 먹다가 지난일이 생각나 또 한 발 저녁에 자식 전화가 없는 것을 서운해하며 또 한 발 자리에 누워 예시를 곱씹으며 또 한 발 그렇게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발씩 아무도 시키지 않은 화살을 스스로에게 쏘며 살아갑니다. 그러고는 말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마음이 편할 날이 없을까?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까? 그 답을 부처님은 이미 2500년 전에 일러 주셨습니다. 우리를 가장 많이 아프게 하는 사람은 우리에게 모질게 한 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그 일을 놓지 못하는 나 자신이라는 것을 여기서 잠시 우리 어머니들의 삶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 시대를 살아오신 어머니들은 가슴에 화살 한두 발쯤은 다 품고 사셨습니다. 모진 시집살이의 말 한마디 평생 사과 한 번 받지 못한 서러움 자식 때문에 삼켜야 했던 눈물 그것을 입학해 꺼내지도 못하고 그저 새벽 정화수 앞에서 혹은 법당 한 구석에서 혼자 사귀며 사셨습니다. 어쩌면 부처님의 이 말씀은 그렇게 평생 두 번째 화살을 견뎌온 우리 어머니들에게 이제는 그 화살을 내려놓으셔도 된다고 가만히 손을 잡아 주는 말씀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두 번째 화살을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여기서 많은 분들이 오해를 하십니다. 화살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그 일을 억지로 잇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다. 미운 사람을 억지로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잊으려고 애쓰는 것 그것 또한 하나의 애심입니다. 미워하지 않으려고 일을 악무는 것 그것 또한 하나의 화살입니다. 이 주려 애쓰면 애쓸수록 그 일은 더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미워하지 않으려 누르면 누를수록 미움은 더 크게 솟아오릅니다. 여러분도 겪어 보셨을 것입니다. 자려고 누워서 그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 하지 말아야지 할수록 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그 밤을 그것이 바로 애써 누르면 누를수록 더 솟아오르는 마음의 이치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누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잊으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폭풍을 진정시키려 하지 말라. 다만 너 자신을 진정시켜라. 그러면 폭풍은 저절로 지나간다. 이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우리는 늘 폭풍을 잠재우려 합니다. 나를 환하게 한 그 일을 어떻게든 정리하려 하고 그 사람을 어떻게든 바로잡으려 하고 그 상황을 어떻게든 바꾸려 합니다. 그런데 폭풍은 내가 잠재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벌어진 일은 내가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마음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어찌해 보려고 애쓰는 동안 우리는 폭풍 속으로 점점 더 깊이 휩쓸려 들어갑니다. 부처님이 일러 주신 길은 정반대입니다. 폭풍은 그냥 두어라 폭풍은 본래 지나가게 되어 있다. 내가 할 일은 폭풍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폭풍 속에서 너 자신을 가만히 가라앉히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흙탕물과 같습니다. 막대기로 휘저면 휘절수록 더 흐려집니다. 어떻게 해야 맑아질까? 어떻게 해야 가라앉을까? 안달하며 자꾸 들여다보고 비조면 물은 영역 맑아지지 않습니다. 흙탕물을 맑게 하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그냥 두는 것입니다. 가만히 두면 흙은 저절로 가라앉고 물은 저절로 맑아집니다. 우리의 마음도 꼭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언가를 더 하는 것이 아니라 파던 것을 멈추는 것에 가깝습니다. 더 애쓰는 것이 아니라 애쓰기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화살을 더 잘 막는 법이 아니라 스스로 쏘던 화살을 멈추는 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야말로 이 멈춤의 진리를 가장 혹독하게 배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출가하신 뒤 깨달음을 얻기 위해 무엇이든 하셨습니다. 당대 최고의 스승들을 찾아가 배웠습니다. 그들이 도달한 가장 높은 경직까지 단숨에 따라잡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마음의 평화에 이르지 못하자. 이번에는 몸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고행의 길로 들어서셨습니다. 숨을 참고 음식을 끊고 잠을 줄였습니다. 누구도 견디지 못할 만큼 자신을 몰아세우셨습니다. 그렇게 6년이 흘렀습니다. 부처님의 몸은 마른 장작처럼 변했습니다. 살이 빠져 노는 깊은 우물처럼 패였고. 배를 누르면 등뼈가 만져졌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평화는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더 애쓸수록 평화는 더 멀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기진맥진하여 강가에 쓰러져 있던 부처님의 귀에 멀리서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강 위로 배 한 척이 지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배에 탄 늙은 악사가 젊은 제자에게 검은 고를 가르치며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줄을 너무 조이면 끊어진다. 그렇다고 너무 느슨하게 하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줄은 너무 조이지도 너무 풀지도 않은 바로 그 가운데에 맞추어야 가장 고운 소리가 난다. 그 평범한 한마디가 부처님의 가슴을 때렸습니다. 부처님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셨습니다. 깨달으신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이 검은 고 줄을 너무 조여왔다는 것을 깨달음을 얻겠다는 그 마음이 너무 팽팽하여 오히려 줄을 끊고 있었다는 것을 당나귀에 빠지는 것도 길이 아니지만 고행에 매달리는 것도 길이 아니라는 것을 진리는 그 양 끝에 어느 쪽도 아닌 가운데 길에 있다는 것을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첫 번째 깨달음이자 평생 가르치신 핵심 바로 중도입니다. 중도라는 말이 어렵게 들리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너무 조이지도 말고 너무 풀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너무 애쓰지도 말고 그렇다고 손을 놓아 버리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검은 고 줄처럼 딱 알맞게 그것이 가장 고운 소리를 내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이 평생 무언가를 너무 꼭 쥐고 살아오신 분들께는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늘 더 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더 애써야 하고 더 참아야 하고 더 견뎌야 한다고. 그래서 한 개에 다다랐다는 몸의 신호가 와도 그것을 애써 무시하며 줄을 더 조였습니다. 그러다 줄이 끊어지면 끊어진 자신을 또 탓했습니다. 왜 더 버티지 못했느냐고 스스로에게 또 하사를 쏘았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줄을 너무 조이면 끊어진다고. 끊어진 것은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줄을 너무 조였기 때문이라고. 이제는 그 줄을 조금 늦추어도 된다고 여기까지 들으시면서 마음 한구석이 조금 느슨해지는 것을 느끼셨습니까? 평생 팽팽하게 주여 온 그 추를 부처님이 가만히 손가락으로 눌러 풀어주시는 것 같은 그 느낌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걸어갈 길의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검은 고 줄을 알맞게 맞춘다는 것이 우리 삶에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요? 매일을 산다는 건 풀 한 포기처럼 그냥 산다는 것이 정말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 가운데 길이 가슴에 응어리를 품은 우리를 어떻게 자유롭게 해 줄까요? 그 이야기를 이제부터 한 걸음씩 풀어가겠습니다. 부처님이 검은고 줄의 비유로 깨달으신 그 중도의 길을 이제 우리 삶 한가운데로 가지고 들어와 보겠습니다. 검은 고 줄을 알맞게 맞춘다는 것 그것을 삶으로 옮기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바로 시간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주를 가장 팽팽하게 조이는 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바로 지나간 시간과 오지 않은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미 지나가 버린 어제를 붙들고 줄을 조이고.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을 당겨오며 줄을 조입니다. 그러느라 정작 지금 이 순간 손에 쥔 오늘은 놓치고 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밤에 잠 못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의 대부분은 둘 중 하나입니다.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이거나 오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이거나 그 사람한테 그 말을 하지 말걸 그때 그렇게 하지 말걸. 이것이 후회입니다. 자식이 잘못되면 어쩌나. 내가 아프면 어쩌나? 돈이 떨어지면 어쩌나. 이것이 걱정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십시오. 후회는 이미 지나가서 손댈 수 없는 일이고 걱정은 아직 오지 않아서 손댈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손댈 수 없는 두 가지 때문에 손에 쥔 오늘 밤에 잠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것을 정확히 보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나간 것을 슬퍼하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동경하지 말라. 과거는 이미 사라졌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다만 지금 일어나는 현재의 일을 그때그때 잘 관찰하라. 이것은 중분 이까야의 전하는 이례연자라는 가르침의 한 대목입니다. 하룻밤만 지혜로워도 현자가 된다는 그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흔들리지 말고 동요하지 말고 다만. 오늘 해야 할 일을 부지런히 하라고. 어찌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겠으며 어찌 내일을 오늘 끌어다 걱정하겠느냐고? 이 가르침을 한 줄로 줄이면 이렇게 됩니다. 인생은 매일 사는 것이다. 그뿐이다. 이 짧은 말이 사실은 부처님 가르침에 가장 깊은 곳에 다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너무 크게 짊어지려 합니다. 70년 80년 인생 전체를 한꺼번에 어깨에 올려놓고 그 무게에 짓눌립니다. 남은 평생을 어떻게 살지 노후를 어떻게 보낼지 죽을 때는 어떨지 그 모든 것을 오늘 한꺼번에 다 해결하려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렇게 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인생은 오늘 하루씩만 사는 것이다. 오늘 하루를 살고 또 내일이 오면 그 하루를 살고 그렇게 하루씩 하루씩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다 그뿐이다. 여러분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버거운 날이 있으셨지요. 그런 날 평생을 다 살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일어날 힘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루만 살면 된다고 생각하면 그 하루는 어떻게든 사라집니다. 밥 한 끼 먹고 마당 한번 쓸고 햇볕 한번 쬐고. 그렇게 오늘 하루는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 하루가 모여서 어느새 한 평생이 됩니다. 우리가 살아 낸 그 모든 고비도 돌아보면 결국 하루씩 하루씩 살아낸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마음에 새겨 둘 말씀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상황도 영원하지 않다고 좋은 일도 영원하지 않고 나쁜 일도 영원하지 않다고 그러니 좋을 때는 그저 온전히 즐기면 그뿐이고 나쁠 때는 이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곧 지나간다는 것을 기억하면 된다고 이 가르침을 부처님은 무상이라는 한마디로 모셨습니다. 각 무상 항상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한 자리에 그대로 머무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상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쩐지 쓸쓸하고 허무하게 들리실지 모릅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모든 것이 사라진다니 그런데 부처님이 무상을 가르치신 뜻은 우리를 쓸쓸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무상은 우리에게 가장 큰 희망을 주는 가르침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좋은 일만 영원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나쁜 일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 바로 이것이 무산이 주는 위로입니다. 지금 이 고통이 영원할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지금 이 외로움이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가슴을 짓누르는 이 무거움이 영영 풀리지 않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그것이 무상입니다. 오래 살아오신 분들은 이 무상의 이치를 미미몸으로 하십니다. 죽을 것 같던 고비도 지나고 보니 지나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