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아니라 같은 자리에서 먼저 출발한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견성이 멀리 있어야 도리어. 마음이 편했는지도 모릅니다. 알 수 없는 것이라 여기면 닿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멀찍이 밀어둔 사이에 정작 내 안의 마음은 한 번도 들여다보지 못한 채 세월만 흘렀습니다. 견성성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볼견의 성품성 곧 성품을 본다는 뜻이며 그 뒤에 이룰 성과 부처불이 붙습니다.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는 한마디입니다. 선종이 가장 앞세워온 이 짧은 구절 안에 견성의 본뜻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무언가 신비한 빛을 보거나 허공에서 거룩한 모습을 만나는 일이 아닙니다. 자기 성품을 다시 말해 제 마음의 본바탕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깥 어딘가에서 새 것을 구해오는 일이 아니라 늘 나와 함께 있던 이 마음을 비로소 똑바로 돌아보는 일입니다. 여기서 왜 굳이 본다고 하였는지 그 까닭이 깊습니다. 듣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경전에서 읽고 법문에서 들은 것은 아무리 쌓여도 결국 남의 살림일 뿐입니다. 그 마음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 그 한 번의 봄이 바로 견성입니다. 그러니 견성은 머리로 외워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사무쳐 아는 것입니다. 평생 남의 등불만 멀찍이 바라보다가 비로소 제 손에 등불 하나를 켜는 일과 같습니다. 그 불은 누가 대신 켜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제 마음만이 제 등불을 켤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견성을 신통이나 초능력쯤으로 오해하셨을 것입니다. 견성을 하면 남의 속을 훤히 읽고 앞뒤를 내다보고 병을 단번에 고치는 줄로 아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견성은 그런 재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제주가 하나 더 늘어나는 일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 자체가 바뀌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평생 흐린 안경을 끼고 살아온 사람이 어느 날 그 안경을 벗는다고 합시다. 세상이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네 그 자리에 있던 세상이 전혀 다른 빛으로 다가올 뿐입니다. 상품을 본다는 것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보이는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는 일입니다. 한번 스스로에게 가만히 물어보십시오. 나는 지금까지 마음이라는 것을 단 한 번이라도 고요히 바라본 적이 있었는가? 우리는 늘 바깥만 보고 달려왔지. 정작 그 바라보는 마음 자체를 돌아본 적은 드뭅니다. 견성은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나는 일이 아닙니다. 제자리에 선 채로 바깥을 향하던 시선을 안으로 한번 돌려세우는 일입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이 실은 늘 내 안에 있었음을 알아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구절의 끝에 놓인 부처라는 말을 다시 새겨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부처라는 말을 들으면 거의 반사적으로 신을 떠올립니다. 하늘 위 어딘가에 계시며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전능한 존재를 그립니다. 그러나 부처라는 말의 본뜻은 그 통념과는 사뭇 다릅니다. 부처 곧 불이라는 글자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인도 말 붓다를 소리 그대로 옮긴 것이 부처이며 붓따란 잠에서 깨어난 자 미옥에서 벗어난 자를 가리킵니다. 부처님께서도 본래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같은 땅을 밟고 같은 밥을 드시며 살아가셨던 분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아신 채 태어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이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삶을 보시며 어찌하여 사람에게 이런 괴로움이 따르는가를 물으셨습니다.
묻고 또 물으며 오래 헤매신 끝에
마침내 그 답을 스스로 찾으신 것입니다.
훗날 사람들이 그를 신으로 받들려 하자
부처님께서는 자신은 다만 깨어난 사람일 뿐이라 밝히셨습니다.
우러러 받들어 달라 하신 것이 아니라
누구든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다고 이르신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라는 이름은 굳게 닫힌 문이 아니라 활짝 열린 문이었습니다.
그 사실이 오히려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닿을 수 없는 신이 깨달은 것이 아니라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이 깨달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가지가 달랐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벗지 못한 미옥을 먼저 벗으셨습니다.
어둠 속을 더듬던 그 마음에 한 발 앞서 불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와 우리 사이의 차이는 신과 인간 사이의 까마득한 거리가 아닙니다.
눈을 먼저 뜬 사람과 아직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의 차이일 뿐입니다.
눈을 감은 사람과 눈을 뜬 사람 사이의 거리는 사실 그리 멀지 않습니다.
손가락 하나 들어 올린 만큼도 못됩니다.
눈꺼풀 하나의 두께 그것이 미혹과 깨달음 사이의 거리입니다.
그 거리가 천 리처럼 아득하게 느껴진 것은
정말로 멀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눈뜨기를 지레 단념해버린 까닭입니다.
이 대목이 오늘 우리가 가장 단단히 새겨두어야 할 자리입니다.
부처는 우리가 그저 우러러 보기만 해야 할 먼 신이 아닙니다.
미옥을 벗은 사람 마음의 어둠을 걷어낸 사람
바로 그 분이 부처입니다.
그리고 견성이란 바로 그 미옥을 벗는 첫자리를 말합니다.
어둠 속에서 눈을 한 번 뜨는 그 순간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그 한 찰나가 견성입니다.
그런데 눈을 뜨는 일에 따로 자격이 있을 리 없습니다.
산속에 사는 사람만 눈을 뜰 수 있고
책 많이 읽은 사람만 눈을 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까지 들으시면서 마음속에 작은 의문 하나가 일어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가까운 것이라면
어째서 나는 평생 그 마음을 한 번도 또렷이 보지 못했는가?
참으로 귀한 물음입니다.
그 물음을 가슴에 한 가지만 마음에 새기면 됩니다.
하늘을 두껍게 덮은 먹구름을 떠올려 보십시오.
며칠을 내리 흐려 해를 한 번도 보지 못하는 날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구름 위에서 해는 단 한 순간도 빛을 멈춘 적이 없으며 다만 구름에 가려 우리 눈에 닿지 못했을 뿐입니다.
오래 닫지 않은 거울도 그러합니다.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으면 코 앞에 얼굴조차 비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비추는 그 성질마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먼지에 덮여 잠시 잠들어 있을 뿐이며 한 번 닦아내면 그 자리에서 다시 환히 비춥니다.
우리 안에 부처도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살면서 가장 캄캄하던 밤 더는 못 견디겠다 싶던 그 순간에도 아내 빛은 한 번도 꺼진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두꺼운 구름과 먼지에 가려 그 빛을 까맣게 잊고 살았을 따름입니다. 잃은 적 없는 것을 잃었다. 여기는 그 마음이 가장 안타까운 가난입니다. 이 사실을 가만히 받아들이면 견성이라는 말이 전혀 다르게 다가옵니다. 견성은 어딘가에서 없던 부처를 새로 얻어오는 일이 아닙니다. 이미 내 안에 있던 것을 덮은 그 가림을 한겹 한 겹 걷어내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작은 차이처럼 들리지만 실은 모든 것을 뒤바꾸는 차이입니다. 만일 견성이 새로 얻어야 하는 무엇이라면 가진 것 없는 사람은 영영 그 앞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러나 본래 갖춘 것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형편이 어떠하든 누구에게나 그 길은 똑같이 열려 있습니다. 모자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다 갖추고도 잊은 채 살아온 것뿐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한 가지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나는 바탕이 모자란 사람이라는 그 오랜 믿음을 이제 가만히 내려놓으십시오.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두꺼운 가림이 드리운 그림자였을 뿐입니다.
가림은 걷어낼 수 있고 그림자는 빛 앞에서 절로 쓰러집니다.
그러니 밖을 향해 두리번거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 거룩한 곳 더 높은 스승 더 큰 공덕을 찾아 멀리 헤매의 까닭도 없습니다. 오늘 이 한 가지만은 또렷이 품고 계십시오. 부처는 멀리서 데려와야 할 귀한 손님이 아니라 본래 이 집의 주인이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제 집의 주인이 있는 줄도 모른 채 오래도록 문간에 서서 떨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 주인을 다시 알아보는 일 그 한 가지에서 모든 것이 비로소 풀려. 나갑니다. 잃어버린 적조차 없는 그 자리를 우리는 이제 다시 마주하려는 것입니다. 그 주인을 다시 알아보는 일에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 많은 분들이 이렇게 여기십니다. 경전을 두루 읽고 어려운 교리를 꿰뚫고 오랜 세월 돌을 닦아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배움이 짧은 이들은 그 문 앞에서 지레 주저앉곤 합니다.
그러나 아주 오래전 그란자 모르던 한 나무꾼이 그 생각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혜능이라 하였습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늙은 어머니를 모시며 살았습니다. 나무를 해답하라. 겨우 끼니를 입던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글을 배운 적이 없어.
경전한 줄
제 대로 읽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자면 깨달음과는 가장 먼 자리에 있던 처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터에서 나무를 팔고 돌아서던 길에
누군가 금강경 있는 소리가 우연히 그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응무소주 이행기심
應無所住 以行己心
그 한 구절이 귀를 스치는 순간 혜능의 마음이 환하게 열렸습니다.
배워서가 아니라 들은 그 자리에서 무언가가 통째로 밝아진 것입니다.
가만히 헤아려 보십시오.
평생 산에서 나무나 하던 사람
글이라곤 한 자도 모르던 사람이
단 한 구절의 마음이 열렸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바는 분명합니다.
깨달음의 문은 많이 배운 사람에게만 열리는 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단순하고 비어 있는 이에게. 그 문은 더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글을 몰랐기에
오히려 더 곧게 들은 것입니다.
머릿속에 따져볼 것이 적었기에
그 한 구절이 에두르지 않고
곧바로 가슴에 내려앉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많이 알수록 진리에 가깝다. 여기지만
때로는 적게 하는 마음이 더 환히 열립니다. 어른보다 아이가 먼저 활짝 웃는 까닭과도 같습니다.
그한 구절을 들은 뒤로 혜능의 마음은 더는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늙은 어머니를 두고 먼 길을 나선다는 것은 가난한 그에게 더없이 무거운 결심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 열린 마음은 좀처럼 다시 닫히지 않았습니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그를 끝내 움직인 것은 오직 가슴에 켜진
그 환함이었습니다.
자격이 있어 나선 길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저 따라나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 걸음이 보잘것 없던 한 사람의 평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혜능은 마침내 큰 절을 찾아가 스승 밑에서 행자가 되었습니다.
그를 모르니 법당에 들지도 못한 채 방아를 찧고 허드렛일을 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는 모두가 우러르는 으뜸 상자가 있었습니다. 배움이 깊고 수행이 높아 누구나 그가 스승의 자리를 이으리라 여겼습니다. 어느 날 스승이 제자들에게 저마다 깨달은 발을 한 수의 개성으로 지어보라 이르셨습니다. 으뜸 상자가 오랜 정성을 담아 게송을 지어 벽에 붙였습니다.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기에 부지런히 닦아 티끌이 안지 않게 하라
는 내용이었습니다. 모두가 입을 모아 훌륭하다 감탄하던 그때 글도 모르는 행자 혜능이 남의 손을 빌려 그 곁에 한수를 붙였습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티끌이 앉겠느냐
는 게송이었습니다. 두 게송을 가만히 견주어 보십시오. 한쪽은 인생 갈고 닦은 배움의 결정이었고 한쪽은 글도 모르는 이의 짧은 한마디였습니다. 그러나 스승의 마음 깊이 가닿은 것은 배운 자의 정연한 개성이 아니라 못 배운 행자의 바로 그 한 줄이었습니다. 깨달음은 머릿속에 쌓은 지식에 많고 적음으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책을 더 읽었다고 먼저 닦고 더 읽었다. 웃으라는 그런 줄 세우기가 애초에 없는 것입니다. 스승은 그 한마디에서 해능이 무엇을 보았는지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가르침의 자리를 으뜸 상자가 아니라 글 모르는 행자에게 가만히 물려주었습니다. 훗날 해능은 수많은 사람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큰 스승이 되었습니다. 나무를 지고 산을 오르내리던 그 사람이 1000년이 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밝히는 길잡이가 된 것입니다. 세상은 그 일을 시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글도 모르는 나무꾼이 큰 스승의 자리를 잇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한 사코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눈은 늘 신분과 배움을 먼저 따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사람이 매겨둔 그런 등급을 묻지 않습니다.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았는지 누가 더 많이 배웠는지는 진리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마음이 열렸는가. 그 한 가지만의 볼 따름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만은 분명히 해두어야 합니다. 으뜸 상자가 결코 어리석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누구보다 성실하였고 그 개성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가 평생 쌓아온 것이 마지막 한 자리에서 도리어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배움이 잘못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그 배움이 마지막 한 자리에서는 도움이 되지 못했을 뿐입니다.
여기에 견성의 묘한 이치가 숨어 있습니다.
세상의 공부란 모르던 것을 하나씩 더해 가는 일입니다.
글자를 익히고 지식을 쌓고 모르던 것을 알아가며 차곡차곡 채워 나갑니다.
그러나 견성은 그렇게 더해서 닿는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편에 있습니다.
잔뜩 쌓아둔 것을 한 생각 내려놓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무거운 짐을 잔뜩 진 사람과 빈손으로 선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좁은 문을 지나야 할 때 짐이 많은 사람은 그 짐에 걸려 쉬이 들어서지 못합니다.
빈손인 사람은 가진 것이 없어 그대로 쑥 들어섭니다.
배움이 많다는 것은 때로 그 짐이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글 모르던 혜능이 단번에 들어선 그 문 앞에서 배원이들은 제가 짊어진 지식에 걸려 한참을 서성했습니다.
그러니 배움이 짧다는 것은 견성 앞에서 조금도 흠이 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비워낼 것이 적어 한결 가벼울 수 있습니다.
견성은 높이 쌓아 올린 탑의 꼭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탑을 한순간 내려놓은 빈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경전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어. 늘 마음 한 켠이 챙기셨을 수 있습니다.
남들은 다 아는 것을 나만 모른다고 속으로 늘 부끄러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견성은 아는 것의 양을 겨루는 시험이 아닙니다.
많이 외운 사람이 높은 점수를 받는 그런 일이 아니라 한 생각 비운 사람이 그 자리에서 곧바로 보는 일입니다.
그러니 모른다는 그 부끄러움부터 가만히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이쯤에서 마음 한 구석에 오래 접어두었던 생각을 꺼내어 보십시오.
나는 이 나이에 무얼 새삼스레 나는 배운 것이 없어서 나는 너무 늦어서 그 모든 말 앞에서 혜능의 이야기는 조용히 일러줍니다.
나이도 배움도 가진 것도 견성의 자격을 따지는 잣대가 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평생 자식 키우고 살림을 꾸리느라 경전한 건 펼칠 결을 없이 살아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이제와 무얼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스스로 마음의 선을 그어두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은 진리가 그어준 것이 아닙니다.
한 번 스스로에게 가만히 되물어 보십시오. 정말 자격이 없어 못한 것인지 아니면 자격이 없다고 믿어. 아이의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것인지를 말입니다. 그 둘은 전혀 다릅니다. 길이 막힌 것과 길 앞에서 제발로 돌아선 것은 같지 않습니다. 해능에게 자격이 있어 문이 열린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만 자격을 묻지 않고 그 앞에 섰을 뿐입니다. 부처님과 옛 스승들께서도 누구에게 자격을 물어? 그 문을 열어 주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 문은 누구에게도 그 손이 거친지 고운지를 묻지 않습니다. 평생 흙묻은 손으로 살아온 이에게도 그 문은 똑같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니 불자 여러분 나는 자격이 없다는 그 한 가지 생각만은 이제 가만히 떨치십시오. 그를 몰라도 나이가 깊었어도 그 문은 우리 앞에 똑같이 열려 있습니다. 그란자 모르던 나무꾼이 걸어 들어간 그 문이 우리에게라고 닫혀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 문은 자격을 갖춘 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마음을 돌이킨 일을 기다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정직한 물음 하나와 마주하게 됩니다. 자격이 문제가 아니라면 부처가 본래. 내 안에 있다면 어째서 나는 평생 그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살아왔는가. 앞서 그 까닭을 잠시 뒤로 미루어 두었습니다. 이제는 그 자리를 똑바로 들여다볼 때입니다. 부처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토록 두껍게 그 빛을 가리고 있었을까? 가린 것의 정체를 보지 못하면 그것을 걷어낼 수도 없는 법입니다. 우리 마음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무엇이든 둘로 가르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든 좋다 싫다를 먼저 나눕니다. 옳다 그르다 내 편 내 편 이롭다. 해롭다. 쉴 새 없이 둘로 쪼겱니다. 이것을 분별이라 합니다. 분별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재주입니다. 그러나 그 재주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돌아갈 때 우리는 무엇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길가에 핀 풀꽃 하나를 본다고 해 보십시오. 부보는 그 순간 마음은 벌써 판단을 내립니다. 예쁘다 혹은 시시하다 꽃이다 혹은 잡초다. 그 한 번의 판단이 끼어드는 순간 팔꽃 그 자체는 사라지고 내 머릿속 평가만 남습니다. 우리는 풀꽃을 본 것이 아니라 풀꽃에 붙인 이름표를 본 것입니다. 사람을 마주할 때도 다르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보는 순간 저 사람은 어떻다는 판단이 먼저 달려나갑니다. 그 판단의 안경 너머로는 그 사람의 첫 모습이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분별하는 마음이 쉬지 않는 한 내 안에 부처도 똑같이 가려집니다.
좋고 싫음의 소란 속에서는 고요한 봄바탕이 제 모습을 드러낼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분별을 멈춘다는 것은 바보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려야 할 때는 가리되 그 판단에 끌려다니지 않는 것입니다.
불꽃의 잡초라는 이름을 붙이고도 그 이름 너머의 풀꽃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것 그것이 분별에 갇히지 않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름을 붙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이름이 그것의 전부라 믿어버립니다.
바로 거기서부터 읽는 그대로의 세상과 멀어집니다.
분별이 멈추지 않으면 마음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좋은 것은 더 붙잡으려 하고 싫은 것은 기여이 밀어내려 합니다.
그 붙잡고 밀어내는 사이에서 마음은 온종일 출렁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이 흔들리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본래 잔잔하던 물이 끊임없는 분별의 바람에 좀처럼 잔물결을 멈추지 못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가르고 있습니다. 이 법문조차 와닿는다. 와닿지 않는다. 저울질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저울질을 잠시 멈추고 말이 그저 흘러가도록 가만히 두어 보십시오. 가르려는 그 손을 한 번만 내려놓아도 마음은 잠시나마 제 본래의 고요로 돌아갑니다. 두 번째로 우리를 가로막는 것은 안다는 생각 그 자체입니다. 이것을 옛 어른들은 아르마리라 부르셨습니다. 무언가를 듣고 우리도 이해하면 우리는 곧 그것을 다 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안다는 마음이 가장 단단한 빗장이 되어 버립니다. 안다고 여기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더는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이미 답을 손에 쥐었다고 믿기에 새로 볼 마음이 절로 다쳐 버립니다.
견성도 부처도 마음도 다 안다고. 여기는 그 순간 박제가 되고 맙니다.
살아 숨 쉬는 것을 머릿속 개념 하나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래서 다 안다고 여기는 마음이 굳을수록 도리어 그 알매 더 단단히 갇히기도 합니다. 오래전에 다니고 법문도 숱하게 들었는데 어째서? 내 마음은 그대로일까? 이렇게 답답해 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답답함에 한 켠에는 바로 이 안다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들은 것은 많아 머리는 가득 찼는데 그 가득 찬 것이 오히려 새 것을 막아섭니다. 빈 그릇에는 무엇이든 담기지만 이미 넘치도록 찬 그릇에는 한 방울도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게다가 안다는 마음은 가르침 앞에서도 평가부터 하려 듭니다. 이 말은 맞고 저 말은 틀렸다. 이 법문은 깊고 저 이야기는 얕다. 그렇게 따지고 견주는 사이에 정작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스며들 자리가 사라집니다. 머리가 부지런할수록 가슴은 도리어 굳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 안다는 그 빗장만 가만히 풀어도 마음에는 한 줄기 틈이 생깁니다. 꽉 닫았건 마음에는 빛이 들 수 없지만 살며시 열어둔 마음에는 빛이 스며들 자리가 있습니다. 견성을 가로막는 것은 모자란 앎이 아니라 다안다고 믿어버린 그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깊고 더 두꺼운 벽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나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평생 나를 한가운데 두고 살아왔습니다. 내 몸 내 생각 내 감정 내 것 이 나라는 울타리 안으로 온 세상을 끌어들입니다.
어? 그리고 그 울타리를 지키느라 한 순간도 마음의 긴장을 풀지 못합니다.
눈 바탕 다는 것은 이 나라는 우주를 보는 일입니다.
그런데 평생 나를 끌고 살아온 사람은 그 울타리를 좀처럼 내려놓지 못합니다.
내가 옳아야 하고 내가 인정받아야 하고 내가 잃지 말아야 한다는 그 마음에 시야를 온통 나에게로만 좁혀 놓습니다.
좁은 창으로 바깥을 내다보면서 세상이 좁다는 탓하는 것과 같습니다.
평생을 남을 지키느라 참으로 고단하셨을 줄 압니다.
남보다 뒤처질까?
무시당하지는 않을까?
늘 마음을 곤두세우며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그 팽팽한 일상이 바로 가장 두꺼운 가림입니다.
나무와 움켜진 그 손이 정작 내 안에 도저히 가려운 것입니다.
더 깊은 함정도 있습니다.
깨달음마저도 나라는 마음은 슬그머니 제 것으로 삼으려 합니다.
내가 견성을 해야겠다.
내가 남보다 먼저 깨쳐야겠다.
이렇게 깨달음조차 나의 욕심으로 끌어안는 순간 그것은 또 하나의 두꺼운 울타리가 됩니다.
본래 나를 넘어서는 일을 나를 키우는 일로 삼고 있고 있기에 다가설수록 도리어 멀어지고 맙니다.
나라의 울타리는 좋은 것만 끌어안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날의 억울함 받은 상처 서러운 기억까지 그것이 곧 나라며 단단히 끌어안습니다.
놓으면 내가 사라질 것만 같아 아픈 것조차 차마 놓지 못합니다.
그렇게 끌어안은 것이 무거울수록 본래 가벼운 마음자리는 더 깊이 묻혀버립니다. 나를 내려놓으면 내가 없어질까 두려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내려놓이는 것은 나 자체가 아니에요.
나를 둘러싼 그 팽팽한 긴장 한순간도 풀지 못하던 그 움켜짐입니다.
손의 힘을 풀어도 손은 사라지지 않듯 긴장을 놓아도 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제야 가려져 있던 본래 얼굴이 드러납니다.
여기까지 듣고 마음이 도리어 무거워지셨을 수 있습니다.
분별도 아르마리도 나라는 집착도 어느 하나 평생 떼어 본 적 없는 것들입니다.
이 두꺼운 벽을 무슨 수로 다 허무느냐고 한숨이 나오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자 여러분 바로 그 자리에 뜻밖의 길이 나 있습니다.
무엇이 나를 가리고 있는지 그것을 또렷이 보는 것 그 한 가지가 이미 길의 시작입니다.
벽이 있는 줄도 모르던 사람은 벽을 허물 엄두조차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기벽이 있구나 하고 알아챈 사람은 비로소 그 앞에 마주 설 수 있습니다. 가림을 가림인 줄 아는 그 순간 가림은 이미 절반쯤 얇어지기 시작합니다. 한 번 가만히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지금 무엇을 옳다? 가르고 있는가? 무엇을 다 안다? 여기고 있는가? 무엇을 나라고 카토록 움켜쥐고 있는가? 그 물음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웅 그 마음들에서 한 걸음 물러서게 됩니다. 살던 자리에서 가만히 바라보는 자리로 옮겼다. 그러니 이 마음들을 쓰며 억지로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떼어 내려하면 그 미움이 행복자의 분별이 되고 맙니다. 분별도 마련해도 나라는 생각도 기어이 없을 적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전부인 줄 알았고 평생 끌려다녀온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것들이 잠시 소름이 뿌님을 또렷이 알아채면 그 너머의 본래부터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 고요가 본래 내 자리라면 다시 묻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실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가? 많은 분들이 이 대목에서 눈을 질끈 감고 깊은 산속이나 고요한 선방을 떠올리십니다.
무언가 거룩하고 특별한 자리를 비로소 그 고요가 열린다고.
그러나 옛 선사들의 답은 뜻밖에도 아주 가까운 곳을 가리킵니다.
마조라는 옛 선사께서 도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아주 짧게 답하셨습니다.
평상시 곧 보다 평상의 마음 날마다 살아가는 그 예사로운 마음이 그대로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별다른 마음을 실현시키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대로의 마음 바로 그 자리에 이미 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평상심이란 무엇인가 하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고 졸리면 잠을 자는 그 담담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무슨 신비가 따로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 선사들께서는 도를 묻는 이에게
차 한 잔을 통하거나 밥은 먹었느냐 되물으셨습니다.
도가 멀리 있지 않고 바로 그 밥 한 술 물 한 모금 안에 가르침이었습니다.
평상시에는 한 가지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오히려 애쓰지 않고 무엇이에요?
지도 않는 있는 그대로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평생 남에게 그럴듯해 보이려 마음먹고 꾸며왔습니다.
그 꿈이 꿈임을 다 내려놓은 자리 가장 순수하고 담박한 그 마음이 바로 평상심입니다.
돈인가요?
거기 애쓰지 않는 그 꾸밈없는 자리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돌을 만나는 자리는 잘못된 거룩한 무대가 아닙니다.
아침에 그 자리 밥상을 차리는 그 자리 자세한 감정에 한숨 쉬는 그 자리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 일상이 바로 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서 있는 그 자리가 그대로 수행의 마당입니다.
평생을 부엌에서 논밭에서 고된 일터에서 보내 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고런 하루하루가 도안은 무관한 그저 다른 시간이라 여겨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조 선사의 말씀대로라면 이미 미토의 자리였습니다. 평범한 살림 속에 진리가 고스란히 깃들어 있어요. 우리만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을 때 그런데 우리는 돌연 어렵고 멀고 대단한 것이라야 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너무 가까이 너무 쉽게 있다고 하면 도리어 믿기지 않아 고개를 쳤어요. 진리가 평범한 얼굴로 바로 곁에와 있어도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대단한 것만 찾는 눈에는 가장 가까운 것이 늘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견성을 무슨 황홀한 체험징으로 오해합니다. 눈앞에 환한 빛이 쏟아지고 시달리고 하늘이 활짝 열리는 듯한 신비한 소리를 기다립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야 비로소 나는 것이라 여기며 그런 날만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러나 바로 그 기다림이 도리어 함정이 됩니다. 특별한 무엇을 찾는 그 마음은 네 지금 이 자리를 시시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오늘은 깨달음이 아니라 여기고 어딘가 다른 곳에 진짜가 있으리라 믿으며 평생 엉뚱한 곳만 더덤게 됩니다. 정작 또는 발 밑에 있는데 눈은 저 먼 하늘만 헤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드신 적은 없으십니까? 나는 아무리 기도하고 절을 해도 남들이 말하는 그런 신비한 경험 한 번 없었다고. 그래서 나는 글렀다고. 그런 인연이 없다고 집에 단념하신 적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글러서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찾을 곳을 잘못 짚은 것뿐입니다. 남이 겪은 신비를 부러워할 일도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렇게 온 것이고 우리에게는 또 우리의 방식으로 찾아옵니다. 견주고 부러워하는 그 마음부터가 돌을 가리는 또 하나의 분별일 뿐입니다. 이렇게 화려한 체험을 쫓는 마음은 결국 또 하나의 욕심일 뿐입니다. 무언가 특별한 것을 움켜쥐려는 그 마음 자체가 가장 담박한 평상심과는 정반대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평상의 마음 어디에서 도가 모습을 드러내는가? 바로 분별이 잠시 뚝 끊기는 그 한순간입니다. 우리 마음은 늘 쉴 새 없이 제잘거립니다. 그런데 어쩌다 한 번 그 제잘거림이 문득 먹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저녁 노을이 너무 고와. 너클 놓고 바라보던 그 한순간 선주의 웃는 얼굴에 모든 생각이 멈추어 버리던 그 찰나 첫눈을 올려다보며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던 그 잠깐 그때 우리는 좋다 싫다를 가르지도 않고 무엇을 안다 따지지도 않고 그저 눈앞에 그것과 하나가 됩니다. 바로 그 자리가 분별이 잠시 쉰 고요한 자리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무언가를 더 가지지도 더 알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쥐고 있던 생각을 잠시 다 내려놓았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 잠깐이 평생 가장 충만하고 편안한 한 때로 마음에 남습니다. 비우는 그 자리가 곧 가득 찬 자리라는 이치가 그 짧은 고요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 고요한 자리는 멀리서 애써 끌어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끄럽던 마음이 한꺼풀 가라앉으면 그 자리에서 저절로 드러납니다. 흙탕물을 휘젓기를 멈추고 가만히 두면 흙이 천천히 가라앉으며 맑은 물이 절로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맑음을 새로 부어 넣는 것이 아니라 휘젓기를 멈추기만 하면 본래의 맑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누구나 살면서 그런 순간을 몇 번쯤은 겪으셨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그저 흘려보내셨을 따름입니다. 견성이란 그 고요한 자리를 어쩌다가 아니라 또렷이 알아보는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고요를 만날 줄 몰랐던 것이 아니라 만나고도 붙잡을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노을 앞에서 잠시 마음이 멎었다가도 곧 이런저런 생각이 다시 밀려들어 그 자리를 덮어 버립니다. 그 짧은 고요가 어떤 자리인지 한번 알아두면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기가 한결 수월해집니다. 그러니 그 자리를 만나려 멀리 떠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해 볼 수 있습니다. 불자 여러분 마음이 가장 시끄러울 때가 도리어. 가장 좋은 자리입니다.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를 때 까닭 모른 불안이 몰려올 때 그 순간을 가만히 붙들어 보십시오. 팔을 억지로 누르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아 지금 내 안에 화가 일어나는구나 하고 가만히 알아차려 보십시오. 그렇게 한 번 알아차리면 화와 나 사이에 한 뼘의 틈이 생깁니다. 그 틈 안에서는 화가 더 크게 자라지 못합니다. 바에 휩쓸려 끌려가는 대신 그것이 잃었다. 쓰러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안도 외로움도 서러움도 다르지 않습니다. 밀어내려 안간힘 쓰지 말고 일어나는 그대로 가만히 지켜보십시오. 처음에는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미 화에 휩쓸려 있기 일수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한참 지나서야 아 내가 또 화해 끌려갔구나 하고 뒤늦게 깨달아도 그 깨달음 자체가 이미 알아차림입니다. 잘했다 못했다를 또 따지지 마십시오. 그저 알아차렸다는 것 그 한 가지로 넉넉합니다. 설거지를 하실 때는 그저 그릇을 씻는 그 손길에 마음을 두어 보십시오. 길을 걸으실 때는 발바닥에 닿는 그 감촉에 마음을 모아보십시오. 거창한 수행이 아닙니다. 아던 일에 마음을 온전히 두는 것 그 작은 멈춤 하나가 곧 평상심의 수행입니다. 그렇게 하루에 단 몇 번이라도 흩어진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시간을 가만히 가져보십시오. 나이가 들어 기력도 없는데 무슨 수행이냐? 그리 여기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알아차림에는 젊음도 건강도 따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리에 누워서도 수만 번 고요히 들이쉬고 내쉬는 그 자리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깨어 있는 그 자리가 그대로 도량입니다. 견성은 어느 먼 산꼭대기에 따로 숨겨둔 보물이 아닙니다. 밥 먹고 길겁고 설거지하는 이 평범한 하루 한복판에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곳으로 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대로의 자리에서 마음 한 번 돌이키는 그 순간 돈은 이미 우리 우리 곁에와 있습니다. 늘 그 자리에서 우리가 알아보기만을 가만히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한번 돌이켜 본래 그 자리를 알아보는 일 그 봄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는 것인가? 많은 분들이 이것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 마침내 꼭대기에 닿는 일이라 여기십니다. 오래 닦고 또 닦으면 어느 날 조금씩 밝아지리라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옛 스승들이 전하는 견성의 결은 그와는 사뭇 다릅니다. 견성은 동이 트듯 조금씩 밝아오는 새벽 같은 것이 아닙니다. 캄캄하던 방에 한순간 불이 확 켜지는 것에 가깝습니다. 스위치를 올리는 그 찰나 바로 절망만 밝아지는 법은 없습니다. 즉시 구석구석이 단번에 환해집니다. 견성의 봄도 그러합니다. 오랜 더듬거림 끝에 어느 한순간 문득 모든 것이 또렷해지는 것입니다. 본래 갖춘 것을 알아보는 일이기에 담박일 수밖에 없어. 없던 것을 새로 지어내는 일이라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미 있는 것을 가린 것만 거두고 알아보는 일은 다릅니다. 두 눈을 가렸던 손을 떼기까지는 오래 망설여도 손을 떼고 알아보는 그 순간은 찰나입니다. 깨달음을 옛 어른들이 도노 곧 담박의 깨침이라 부르실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평생을 닦아야만 겨우 한 자락 볼 수 있으리라 미리 겁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봄은 멀고 아득한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림이 거치는 바로 그 순간에 있습니다. 누구에게든 그 한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단박에 온다고 해서 아무 준비 없이 거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 묵고 또 물으며 마음의 그 자리에 두고 살아온 그 모든 시간이 한순간에 봄을 위한 밑거름입니다. 물이 끓어오르는 것은 마지막 한도의 열 때문이지만 그 한 돈은 앞서 데워진 99도가 있어야 비로소 끓음으로 터집니다. 견성의 한순간도 그 앞에 보낸 무수한 마음의 시간 위에서 퍼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 한순간이 언제 올지는 누구도 미리 알지 못합니다. 깊은 새벽 자선 중에 올 수도 있고 무심히 마당을 쓸다가 올 수도 있습니다. 정해진 자리도 정해진 모양도 없습니다. 다만 마음이 활짝 열려 있을 때 그 열린 틈으로 문득 들어서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그 봄에는 크고 작음이 따로 없습니다. 조금 깨치고 많이 깨치고가 나뉘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알아본 그 자리는 그 자체로 이미 온전합니다. 다만 그 온전함을 우리가 얼마나 또렷이 그리고 얼마나 어리진이고 사느냐가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큰 오해를 짚고 가야 합니다. 한순간 그 자리를 보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한 번 깨치면 그날로 모든 번뇌가 씻은 듯 사라지고 다시는 흔들리지 않으리라 여깁니다. 그러나 실제의 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한순간 본 것은 분명하지만 평생 길든 옛습가는 그리 쉽게 물러나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환히 보았는데 몸과 마음은 여태 살던 버릇대로 또 화를 내고 또 욕심을 부립니다. 그래서 옛 조사들께서는 본 뒤에도 그 자리를 오래 지키고 길들이라 이르셨습니다. 이것을 보임이라 합니다. 한번 본 그 자리를 잊지 않고 거듭 돌아보며 천천히 익혀 가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한쪽으로 굽어 자란 나무를 떠올려 보십시오. 어깨 펴야 함을 단번에 깨달았다 해서 구분 줄기가 그 자리에서 펴지지는 않습니다. 날마다 조금씩 묶어 바로 잡아가야 비로소 곧게 섭니다. 우리 마음에 깊이 팬 묵은 버릇도 꼭 이와 같습니다. 본 것은 한순간이지만 그 봄을 몸에 베개하는 데는 오랜 정성이 듭니다. 그러니 한 번 보고도 여전히 흔들리는 자신을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보았는데 어째서 또 일어나 하고 자책하는 큰 마음은 견성을 무슨 마법처럼 여기로 데서 옵니다. 본 자리를 잊지 않고 자꾸 돌아보는 것 그 거듭함이 바로 길입니다. 어쩌면 살아오며 마음이 환히 열리던 학대를 겪고도 얼마 못가 도로 예전으로 돌아간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때. 아 역시 나는 안 되는구나 하고 단념하신 적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누구나 거쳐가는 자연스러운 길목입니다. 본 것이 흐려지는 까닭은 그 봄이 가짜여서가 아니라 묵은 숲이 아직 두텁기 때문입니다. 밤범과 목길은 두 번째 걸을 때 한결 또렷해집니다. 본자리도 그와 같습니다. 처음에는 가물가물 멀게만 느껴지던 그 고요가 자꾸 돌아볼수록 점점 또렷하고 가까워집니다. 그렇게 낯익어 가는 것 그것이 곧 익힘이며 뿐입니다. 한순간에 크게 깨친 옛 스승들조차 그 뒤로 산중에 들어 오래도록 그 자리를 익히고 또 익히셨습니다. 첫 공이 곧 완성은 아님을 그분들이 앞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물며 우리가 한 번 보고 단박의 모든 것이 끝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입니다. 다 뒤고 가득 든 그 익힘이 바로 한순간의 봄을 헛것으로 만들지 않는 길입니다. 그래서 보조국사 진을 스님은 담박의 봄과 오랜 닦음을 한 자리에 두셨습니다. 일을 도노점수라 하니 단박에 깨치되 그 뒤로 오래도록 이겨간다는 말씀입니다. 이 한마디가 우리 어깨를 한결 가볍게 해 줍니다. 다 깨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본 그만큼 오늘부터 살아가면 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온전해진 뒤에 비로소 발을 떼는 것이 아니라 발을 뗀 그 자리에서 조금씩 온전해져 가는 것입니다. 봄은 한순간이지만 그 봄을 살아내는 일은 평생에 걸친다는 말씀입니다. 깨침이 길의 끝이 아니라 도리어 참된 길에 첫걸음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새겨 두셔야 합니다. 오래 닦는다는 것은 깨치지 못해 모자란 것을 메우는 일이 아닙니다. 이미 본 그 자리를 흐려지지 않도록 거듭 비추어 보는 일입니다. 처음 본 그 자리가 작은 불씨라면 가끔은 그 불씨가 사위지 않게 가만히 지켜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봄과 가끔은 둘이 아니라 결국 한 길입니다. 그러니 그 닦음을 무거운 숙제처럼 여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것은 이미 한 번 만나 본 그 편안한 자리로 자꾸 돌아가. 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고향을 한 번 알고 나면 길을 잃고 헤매다가도 자꾸 그쪽으로 발길이 향하는 법입니다. 본자리를 한번 안 마음도 그와 같이 저절로 그리로 돌아서려 합니다. 그러나 본 것에만 취해 머물고 익히기를 게을리하면 어찌 되는가. 그 몸은 한낮 지나간 추억으로만 남는 삶은 슬그머니 예 첫 차례로 되돌아갑니다. 그래서 본 뒤에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처음에 본 못지 않게 귀한 것입니다. 이 이치는 우리가 살아온 경험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한순간 환히 깨달은 적은 누구에게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깨달은 대로 살아내는 데는 또 얼마나 긴 시간이 들던지요. 안다는 것과 그대로 산다는 것 사이에는 늘 그만한 거리가 놓여 있습니다. 견성의 길도 그 거리를 한 걸음씩 좁혀가는 일입니다. 그러니 불자 여러분 이 이야기가 도리어 큰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 번의 모든 것을 이루지 못했다 해서 그것이 실패는 아닙니다. 본래 그 길은 한 번에 끝내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잠시 보았다가 내일 또 놓치고. 그래서 다시 돌아보는 그 되풀이 전부가 길입니다. 이 길에서는 더디 가는 것이 결코 흠이 아닙니다. 넘어졌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서는 그 마음 하나가 이미 길 위에 굳건히 선 사람의 마음입니다. 또 다라는 가야 할 길이 까마득해 보여. 언제 저 끝에 다 가겠느냐 막막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끝까지 다 걸어야만 비로소 상을 받는 길이 아닙니다. 한 걸음 그 자리로 돌아서는 그 순간순간이 이미 그 자리에 닿아 있음입니다. 남은 길이 얼마나 되느냐가 아니라 지금 마음이 어느 쪽으로 돌아서 있느냐가 전부입니다. 그러니 한순간에 봄을 너무 조급히 조지도 아직 멀었다며 미리 주저앉지도 마십시오. 그 봄은 담박에 찾아오고. 그 길은 평생에 걸쳐 천천히 익어갑니다. 한번 알아본 그 자리를 잊지 않고 자꾸만 그리로 돌아서는 것 그 한 가지가 견성 뒤에도 우리 앞에 고요히 놓여 있는 길입니다. 그렇게 본 자리로 자꾸 돌아서며 살아가면 우리 삶에는 과연 무엇이 달라질까? 견성을 한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신통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 조용하지만 분명한 변화가 일기 시작합니다. 그 변화 가운데 으뜸은 평생 우리를 짓눌러 온 두려움이 슬며시 놓이는 일입니다. 사람이 평생 짊어지는 두려움 가운데 가장 무겁고 깊은 것은 죽음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 그림자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언젠가 이 몸이 쓰러지지 나라는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그 생각이 밤마다 가슴을 서늘하게 합니다. 평생 쌓은 것도 사랑한 사람도 끝내 다두고 떠나야 한다는 그 사실 앞에서 누구도 온전히 담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봄바탕을 한번 본 사람은 그 두려움을 사뭇 다른 눈으로 보게 됩니다. 죽는 것은 이 몸과 이 생각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봄바탕은 볼리나고 죽음이 없습니다. 태어났다 하여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고 죽는다 하여 아주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바다 위 파도가 잃었다. 쓰러져도 바다 그 자체는 늘 그대로인 것과 같습니다. 이 사실이 가슴 깊이 사무치면 죽음을 바라보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한 줄기 파도가 본래의 바다로 돌아가는 일임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통째로 없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그 두려움이 예전처럼 나를 송두리째 집어삼키지는 못하게 됩니다. 한밤중 문득 잠게요. 끝내 사라질 나를 떠올리며 막막했던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 막막함의 뿌리에는 이 한 몸이 곧 나의 전부라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몸이 나의 전부가 아님을 어렴풋이 보면 그 막막함도 조금씩 발 디딜 곳을 잃어갑니다. 예큰 스님들께서 떠나실 때를 미리 아시고 반정히 앉아 고요히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 담담함은 죽음을 억지로 외면해서가 아닙니다. 죽음 너머에도 변치 않는 무엇이 있음을 몸으로 아셨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모르는 데서 가장 크게 자랍니다. 그 자리를 한번 본 사람에게는 죽음조차 영영 캄캄한 낭떠러지만은 아니게 됩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그 두려움에 끌려 평생 종종거리며 살 것인지 그 너머의 한 자리에 가만히 기대어 담담히 설 것인지 그 갈림이 바로 그 자리를 한번 보았느냐 못 보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두려움과 더불어 외로움도 그 자리에서는 빛깔이 달라집니다. 나이가 들수록 곁을 지키던 이들은 하나둘 줄고 홀로 보내는 시간은 길어집니다. 그 적막이 사무쳐. 나는 끝내 혼자라는 생각에 마음이 시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내 그 자리를 한 번 안 사람은 혼자 있어도 텅 비지 않습니다. 바깥의 인연은 오고 가도 그 자리만은 단 한 번도 나를 떠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늘 곁에 있었으나 돌아본 적 없던 그 자리가 가장 깊은 동무가 되어 줍니다. 두려움과 외로움만이 아닙니다. 평생 가슴에 맺혀있던 미움도 어느새 조금씩 헐거워집니다. 누구에게나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사람 하나쯤은 있으십니다. 용서해야 한다고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많은 도무지 풀리지 않던 그 응어리입니다. 그런데 옷자리로 자꾸 돌아서다 보면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토록 단단하던 미움이 어느 순간 슬며시 힘을 잃기 시작합니다. 억지로 용서하려 안간힘을 써서가 아닙니다. 나를 둘러싼 울타리가 헐거워지니 그 울타리에 매여 있던 미움도 함께 느슨해지는 것입니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펴면 손 안에 든 것이 절로 흘러내리는 이치와 같습니다. 평생 미워하던 사람을 끝내 용서하지 못한 채 떠나 보낸 일이 있어.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용서가 무거운 의미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미움이 스스로 무게를 잃어 어느새 내가 그것을 들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게 됩니다. 떨쳐내려 그토록 S던 그것이 실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손에서 놓지 못하던 집착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가져야만 마음이 놓이고 잃을까. 늘 조리던 그 조바심이 차츰 옅어집니다. 이미 가장 귀한 것을 안에 품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기에 바깥의 것을 그 악슬에 움켜쥐던 손에서 슬그머니 힘이 빠지는 것입니다. 잃을까 떨던 마음이 한결 너그러워집니다. 자식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그 바람이 어긋날 때마다 서운해 하던 마음도 그러합니다. 가진 것을 더 움켜쥐려. 한평생 마음 편할 날이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 움켜짐이 느슨해지면 곁에 사람도 내 소유가 아니라 그저 고마운 인연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소유하려는 마음이 옅어진 그 자리에 도리어 잔잔한 정의 흐릅니다. 미움과 집착이 옅어지면 곁에 사람을 대하는 눈빛부터 달라집니다. 다그치고 바라던 마음이 잦아든 자리에 능 그대로를 보아주는 너그러움이 들어섭니다. 나를 덜 내세우게 되니 사람과 사람 사이도 한결 부드러워집니다. 이런 변화는 거
창한 자리에서가 아니라 사소한 일상에서 먼저 드러납니다
가라앉습니다. 일을 겪어도 마음이 예전만큼 크게 출렁이지 않습니다. 누가 거친 말을 던져도 정 같으면 며칠을 끙끙 앓았으리 잠시 일렁이다 이내 가라앉습니다. 감정이 사라져서가 아닙니다. 그 감정을 가만히 지켜보는 자리가 더는 감
휩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화도 나고. 서운함도 여전히 생깁니다. 다만 그것이. 잠시 머물다가는 손님일 뿐임을 알기에 예전처럼 거기에 오래 붙들려 있지 않게 됩니다. 그 머무름이. 짧아진 만큼 삶이 한결 가쁜해집니다. 전에는 누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가시처럼 박혀 며
방을 뒤척이게 했습니다. 이제는. 그 말이와 닿아도 가시로 박히기 전에 스르륵 미끄러져 지나갑니다.
무뎌진 것이 아닙니다. 그. 말 한마디에 일일이 나를 갖다 붙이지 않게 된 것뿐입니다. 밤이. 한결 고요해집니다. 지난. 일을 곱씹고 닥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느라 뒤척이던 그 맘들이 조금씩 잦아듭니다.
생각이 멈추어서가 아니라 그 생각에 더는
끌려다니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제 무게를 덜
때 비로소 깊은 잠이 찾아듭니다. 2. 모든 변화는 큰 소리 없이 조용히 찾아옵니다.
어느 날 문득 예전 같으면 무너졌을 일 앞에서 담담한 자신을 보며
내가 조금 달라졌구나 하고 가만히 깨닫게
됩니다. 그 조용한 깨달음 하나가 그 무엇보다 깊은 위안이 됩니다. 평생 작은 일에도 마음을 졸이며 살아오.
이 변화는 더없이 큰 안식입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 며칠을 앓고 지난 일을 곱씹으며 스스로를 갉아오셨을 것입니다. 그 무거운. 마음의 짐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자리 그것이 견성이 우리 일상에 가만
건네는 가장 따뜻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짚어두어야 합니다. 견성은. 모든 괴로움 슬픔을 모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은 여전히 아프고 사랑하는 이는 여전히 떠나가고 삶의 고단함은 그대로 찾아옵니다. 달라지는 것은 그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맞이하는 마음입니다. 견성은 거센 물결을 먹게 하는 신통이 아니라 그 물결 속에서도 제자리를 잃지 않을 깊은 탓 하나를 마음에 내려주는 일입니다. 물결이 치는 것은 막을 수 없어도 닻을 내린 배는 멀리 떠내려가지 않는 법입니다. 겉모습만 보면 견성한 이의 삶도 우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똑같이 밥을 먹고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웃고 옵니다. 달라진 것은 바깥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을 겪어내는 안쪽 자리입니다. 그래서 견성은 남에게 내보일 표적이 생기는 일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마음 밑바닥이 든든해지는 일입니다. 그러니 불자 여러분 괴로움이 여전하다 하여 견성이 헛것이었다. 여기지 마십시오. 괴로움이 와도 그 한복판에서 끝내 무너지지 않는 것 설령 무너졌다가도 다시 딛고 일어설 바닥이 있는 것 두려움에 덜 흔들리고 미움에 덜 끌려가고 작은 일에 덜 무너지는 그 잔잔하고도 단단한 평온 거창한 기적이 아니라 바로 그 평온이 견성이 우리에게 건네는 참된 얼굴입니다. 여기까지 참으로 긴 이야기를 함께 걸어왔습니다. 처음에 우리는 견성이라는 말 앞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는 마음으로 이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것은 큰 스님이나 산속 부인의 일이지.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 여기며 저만치한 걸음 물러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계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밤 고요히 여기까지 귀 기울여 오신 그 마음 안에서 이미 무언가 작은 것이 움직였을 것입니다. 처음에 그 위축감도 어느새 한 자락쯤 옅어지셨을 줄 압니다. 그 작은 움직임 하나가 실은 멀게만 느껴지던 견성이라는 말이 내 곁으로 다가서기 시작한 첫 신호입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있는 모든 목숨 안에 부처가 깃들어 있다는 그 선언을 들었습니다. 그란자 모르던 나무꾼이 그 자리를 본 이야기를 만났고 그 빛을 가려온 것이 바로 내 마음의 분별과 지차림도 들여다보았습니다. 오토가 뭐에 있지 않고 밥 먹고 길 걷는 이 평상의 자리에 깃들어 있음을 보았으며 그 봄이 단박에 찾아오되 평생에 걸쳐 천천히 익어가는 일임도 새겼습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두려움과 외로움이 함께 가벼워지는 자리까지 더듬어 왔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마침내 한 것을 가리킵니다. 견성은 저 높은 어느 누군가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처음 고개를 숙이게 하던 그 무거운 마음이 이제는 한결 가벼워지셨을 것입니다. 나는 안 된다던 그 한마디도 이제는 조금씩 헐거워지고 있습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자격이 없다던 그 믿음은 처음부터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오래도록 그렇게 믿어. 스스로 그 앞에서 돌아섰을 따름입니다. 그 한 가지 오해가 거치는 것만으로도 평생 닫혀 있던 마음 한 구석이 비로소 숨을 틔웁니다. 지금 이 순간에 한 번 가만히 느껴 보십시오. 나는 안 된다는 그 한마디를 슬며시 내려놓았을 때 가슴 한 켠이 얼마나 가벼워지는지를 말입니다. 그 가벼움이 바로 본래의 나에게로 한 걸음 다가선 자리임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 불자 여러분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가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하는 일입니다. 깨달음을 먼 훗날로 미루지 마십시오. 더 환가해지면 더 채비가 갖춰지면 그때 시작하겠다는 그 마음이 평생 그 자리를 미뤄오게 한 바로 그 핑계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시작했다가 안 될까 두려워 아예 발을 떼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길에는 자라고 못하고가 따로 없습니다. 어설프게 뗀 한 걸음이라도 끝내 떼지 못한 백걸음보다 낫습니다. 서툴러도 좋습니다. 그저 시작하는 그 마음 하나면 그것으로 넉넉합니다. 거창한 결심도 대단한 채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늘 마음이 한번 출렁이는 그 순간 일어나는 그 마음을 가만히 알아차려 보는 것 평생을 미뤄온 그 길이 바로 그 한 번에서 열립니다. 오늘 밤 잠자리에 드시거든. 무슨 거창한 것을 하려들지 마십시오. 그저 하루를 보낸 이 마음 안착을 가만히 안아 주듯 알아차려보면 그뿐입니다. 그 조용한 한 번 오늘 우리가 때는 첫걸음이 됩니다. 그렇게 하루에 한 번씩만 그 자리로 돌아서도 마음은 어느새 길을 익혀갑니다. 내일 아침 눈을 뜨시거든.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잠시만 아 또 하루가 주어졌구나 하고 가만히 맞아 보십시오. 그 한 생각의 돌이킴으로 하루를 여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침과 밤 하루에 두 끝에서 한 번씩만 안을 돌아보아도 그것으로 넉넉합니다. 설령 오늘 그 자리를 또렷이 보지 못하셨더라도 괜찮습니다. 나는 본래 부처라는 그한 사실만 가슴 깊이 품고 살아도 하루하루를 대하는 마음이 달라집니다. 스스로를 함부로 깎아 내리던 그 오랜 버릇이 그 한 사실 앞에서 차츰 설자에 있기 때문입니다. 평생 고생만 하다 끝내 무얼 이루지 못했다. 여기며 내 마음 한 켠이 허터하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구비진 세월이 바로 오늘 이 피한 마음에 가닿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지나온 어느 한 걸음도 내 헛된 것은 하나도 없어. 가장 좋은 때는 따로 오지 않습니다. 평생을 돌아보면 더 나으니 기다리다 여기까지 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더 나은 때는 끝내 따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저녁 바로 이 순간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이른 때이자 가장 좋은 때입니다. 처음에 우리는 나는 안 된다는 한마디를 내려놓으면 마음의 문이 손가락 너비만큼 열린다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그 좁은 문틈에 가만히 한 발을 들여놓으실 자세입니다. 문을 활짝 열어젖히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 한 발이 들어서는 순간 문은 저절로 조금씩 더 열립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를 기다려 온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본래의 나 자신입니다. 이 한 걸음을 떼는데 무슨 큰 용기가 드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평생 마음의 방향을 바깥에서 안으로 한 번 돌이키면 그뿐입니다. 밖을 향해 두리번거리던 그 눈길을 가만히 안으로 거두어 드리는 것 그 사소해 보이는 한 번의 돌이키 만에 사실은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 돌이키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좋으며 떠들썩한 자리도 지켜보는 눈도 따로 필요치 않습니다. 깊은 밤 홀로 가만히 마음을 안으로 돌리는 그 조용한 한 번이면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유한 그 한 걸음이 한 사람의 평생을 안에서부터 바꾸어 놓습니다. 그리고 이 길은 결코 혼자 걷는 길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마다의 자리에서 같은 마음으로 안을 돌아보는 이들이 곳곳에 계십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같은 자리를 향해 돌아서는 그 마음들은 보이지 않게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 사실 하나가 외로운 걸음에 잔잔한 인기가 되어 줍니다. 오늘 마음의 깊이 잔잔함을 내일 곁에 사람에게 한 번의 너그러움으로 건네 보십시오. 굳이 짐을 입에 올리지 않아도 좋습니다. 조금 더 따뜻해진 눈빛 하나 한 박자 늦춤만 걸으면 됩니다. 그것이 오늘 드라이버에 가장 곱게 살아내는 길입니다. 긴 시간 이 고요한 이야기에 마음을 들어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안을 향한 걸음을 한 발 떼신 것입니다. 들으시는 동안 잠시라도 마음이 가만히 가라앉으셨다면 바로 그 고요가 우리가 그토록 멀리서 찾아 헤매던 본래 자리의 얼굴입니다. 그러니 그 자리를 다시 만나려 부디 먼 곳을 헤매지 마십시오. 그 자리는 늘 거기 가장 가까운 가슴 안에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함께 나눈 이 마음이 부디 헛되이 흩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작은 공격이 여기 함께한 모든 분들과 그 곁에 사랑하는 이들에게로 두루 번져가기를 나아가 캄캄한 어둠 속을 홀로 더듬는 누군가에게도 작은 등불이 되어 주기를 비옵니다. 저마다의 가슴 안에 본래 깃든 그 빛이 더는 가려지지 않고 환히 드러나기를 두 손 모아입니다. 멀리 있던 견성이라는 말이 이제는 우리에게 한 뼘 더 가까이와 있습니다. 부처는 여전히 이 가슴 안에 고요히 머물러 계십니다. 그 자리를 가만히 한번 돌아보는 일 오늘 그 한 가지를 시작하신다면 이 긴 이야기는 이미 제 몫을 다한 것입니다. 오늘 이 밤은 어쩌면 여느 평범한 밤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한 생각을 돌이켜 처음으로 안을 들여다본 이 밤은 지나온 소나무 밤과 분명히 다른 밤입니다. 자란 무엇이 일어나서가 아니라 평생 바깥만 완전히 비로소 안을 향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나지만 우리 각자의 길은 도리어. 이 자리에서 비로소 시작됩니다. 그 길에서 우리가 끝내 만날 것은 새로 된 어떤 거룩한 부처가 아닙니다. 본래 부처였던 나 자신을 비로소 알아보고 확인하는 일일 뿐입니다. 이 법문이 마음 한 구석에 작은 올림픽으로 남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로 함께해 주십시오. 그 작은 손길 하나가 더 많은 분들의 가슴에 이 잔잔한 빛을 전하는 귀한 인연이 됩니다. 틱톡 오늘 닫지 않은 대목이 있거든. 더러 이 이야기를 다시 들으며 강하게 곱씹어보십시오. 그리고 또 아래로 그 자리를 한번 돌아보시는 평안한 거리시기를 두 손 모아빕니다.
인과
고요한 한 걸음마다 본래의 부처가 늘 함께하고 있습니다. 인과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를 다니시는 분이든 다니지 않으시는 분이든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쯤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고통 앞에서 흔들립니다. 왜 나만 이런가? 왜 나에게가 이런 일이 오는가? 이 말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그것은 인과를 모르는 것이 나의 잊지 않는 것입니다. 불자 여러분 고가를 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콩심은 돼 콩나물 심은 데에 판난다. 자업자득이라는 말까지 인과는 속담으로도 아예 사자성어로도 압니다. 불교를 모르는 사람도 인과응보라는 말은 압니다. 그만큼 흔하게 아는 말이기에 오히려 아무도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낙토에 따르면 벌을 받는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인과입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것만으로는 인과를 아는 것이 아니라 맞았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새해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네 선행하면 복
악행하면 벌
이것이 인과의 전부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거시를 하고 나서 복이 오기를 기다렸고 복이 오지 않으면 인과가 틀렸다고 말했습니다. 부처님을 찾아와 공향을 올리고는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랐고 좋은 일이 생기지 않으면 부처님을 탓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과를 믿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요구하는 거래에 가깝습니다. 인과의 이치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메아리입니다. 산을 향해 소리를 지르면 그 소리가 돌아옵니다. 좋은 소리를 내면 좋은 메아리가 돌아오고 거친 소리를 내면 거친 소리가 그대로 울려옵니다. 산이 판단해서 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낸 것이 그대로 돌아올 뿐이에요. 돌아오는 것을 바꾸고 싶다면 내가 이것을 바꾸면 됩니다. 그런데 거꾸로 하고 있습니다. 거세게 돌아오면 산을 탓합니다. 이 자리는 잊어버리고 돌아온 소리만 붙들고 괴로워합니다. 저 산이 왜 나에게 이런 소리를 돌려주는가?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메아리 앞에서 산을 원망하는 사람은 없는데 인과 앞에서는 모두가 세상을 원망합니다. 똑같은 이치인데도 레알은 받아들이고 인간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여기에 안닿아 믿는다의 갈림길이 있습니다.
왜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인과를 진짜 받아들이면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의 원인이 밖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탓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운이 나빴다는 핑계도 사라집니다.
오직 내가 뿌린 것이 돌아왔다는 사실만 남게 되며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두렵기에 우리는 아는 자리에 머물면서 믿는 자리로 가지 않는 것입니다.
인과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 내 삶의 책임을 온전히 내가 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머리로 아는 사람은 남에게 인과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 업보는 피할 수 없다.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일이 되면 그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내 아이가 아프면 왜 우리 아이가 내 사업이 무너지면 왜 하필 나에게 이 질문이 올라옵니다. 남에게는 인과라 하면서 자기 일에는 인과를 적용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안타와 믿는다의 차이입니다. 믿음이 시험대에 오르는 것은 평온한 날이 아닙니다. 일이 잘 풀릴 때는 누구나 인과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내가 노력했으므로 잘 된 것이라고 기꺼이 인과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일이 무너질 때는 다릅니다. 좋은 결과는 내 덕이고 나쁜 결과는 세상 탓이라면 그것은 인과를 믿는 것이 아니라 인과를 골라서 쓰는 것입니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같은 잣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인과에 대한 믿음은 바로 이 지점에서 판가름이 납니다.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자기 일에서도 인과를 봅니다. 아이가 아프면 이 아픔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묻고 사업이 무너지면 어떤 원인이 이 결과를 만들었는지를 살핍니다. 원망 대신 관찰이 먼저 오고 분노 대신 성찰이 먼저 찾아옵니다. 똑같은 고통 앞에 서 있으되 반응이 완전히 달라지며 이 차이 하나가 삶 전체를 바꾸게 됩니다. 절의 수십 년을 다니신 어른들 중에도 이 자리에 서지 못하신 분이 계시고 불교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분 중에도 벌써 이 자리에 서신 분이 계십니다. 경력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지식처럼 쌓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마음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배운 사람이 앞서는 것도 아니고 늦게 시작한 사람이 뒤쳐지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 법문을 듣고 계신 이 순간에도 마음이 열리면 그 자리에서 건너갈 수 있는 것이 인과의 믿음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나를 깎아내리는 말을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머리로만 인과를 아는 사람은 그 말에 상처를 받습니다.
억울함이 분노가 되고 분노가 원망이 되어 밤새 그 말을 곱씹게 됩니다.
말 한마디로 시작된 고통이 네 개 5개로 풀어나는 것입니다.
반면 인과를 받아들인 사람은 그 말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살핍니다. 상대가 자신의 고통 때문에 그런 말을 내뱉은 것일 수 있고 내가 과거에 뿌린 씨앗이 지금 돌아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원망으로 갈 이유가 사라지며 고통은 하나로 왔다가 하나로 지나가게 됩니다. 몸이 아플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리로만 아는 사람은 병이 찾아오면 하늘을 원망하며 몸의 병 위에 마음의 병을 하나 더 얹습니다. 인가를 받아들인 사람은 같은 병 앞에서 다르게 묻습니다. 내 몸을 어떻게 써왔는가? 무엇을 먹고 어떻게 잤으며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가를 돌아봅니다. 원인을 돌아보는 사람은 지금부터 무엇을 바꿀지가 보이지만 하늘을 원망하는 사람에게는 보이는 것이 원망밖에 없습니다. 똑같은 병상에 누워도 한 사람은 길을 찾고 한 사람은 길을 잃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특별히 수행이 깊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만 인과를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뿐이며 그것 하나가 고통 앞에서의 태도를 통째로 바꿔 놓았습니다.
같은 비가 내려도 우산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하루가 다르듯
같은 고통이 와도 인과를 품은 사람과 품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인간은 고통을 막아 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견디는 자리를 바꿔주는 것입니다. 불자 여러분 인과를 안다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고통 앞에서도 인과를 놓지 않는 것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원망 대신 인과를 떠올리는 것 이것은 머리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온 마음이 받아들여야만 가능한 일이며 그래서 안다와 믿는다.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인과를 머리에서 마음으로 옮기는 일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저를 30년을 다녀도 경전을 수천 번 읽어도 삶에서 부딪히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인과를 진짜 믿기 시작하면 고통 앞에서의 첫 반응이 달라집니다. 왜 나에게가 아니라 이것은 어디서 온 것인가? 이 질문이 먼저 올라오는 순간이 옵니다. 그 순간이 머리에서 마음으로 건너간 첫 번째 증거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잠깐이었다가 다시 왜 나에게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한 번 경험한 사람은 두 번째가 쉬워진다.
세 번째는 더 빨라집니다.
혹시 지금 인과가 정말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드는 분이 계셔도 괜찮습니다.
의심하면서 묻는 것이 외우면서 안 믿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무조건 믿으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직접 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살펴서 확인하라고 하셨습니다. 인과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어지지 않으면 믿어질 때까지 삶에서 살펴보면 됩니다.
오늘 이 법문이 그 살펴봄의 시작이 되면 충분합니다.
원망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줄어들고 말과 행동이 달라지는 그 변화를 지금부터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씩 걸어가 보겠습니다.
그 변화를 보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인과가 어떤 구조로 움직이는가 하는 것이며 구조를 모르고 믿으려 하면 믿음이 자꾸 흔들리게 됩니다. 분명히 좋은 일을 했는데 결과가 다르게 나오면 인과가 틀렸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인과를 말씀하실 때 두 글자가 아니라 세 글자로 설하셨습니다. 인연과학 원인과 조건과 결과 이셋이 부처님께서 밝히신 인과의 온전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흔히 원인과 결과 이 둘만 생각합니다. 씨앗을 심으면 열매가 열린다. 이렇게 둘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그 사이에 하나를 더 놓으셨습니다. 연꽃 조건입니다. 씨앗이 인이고 열매가 과라면 그 사이에 물과 햇빛과 흙이 있어야 하며 이것이 바로 연입니다. 씨앗 하나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들여다보십시오. 그 안에 분명히 열매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씨앗을 책상 위에 두면 10년이 지나도 싹이 트지 않습니다. 씨앗이 가짜라서가 아니라 연이 없기 때문입니다. 흙을 만나야 하고 물을 만나야 하며 햇빛과 떼를 만나야 비로소 씨앗 속에 잠들어 있던 것이 깨어납니다. 일은 가능성이고 여는 그 가능성을 깨우는 손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농사의 비유로 설하셨습니다. 씨앗을 심어도 물과 햇빛이 없으면 싹은 트지 않습니다. 똑같은 접시를 심어도 기름진 논에 심은 것과 메마른 자갈밭에 뿌린 것은 가을에 거두는 양이 다릅니다. 벽씨가 달라서가 아니라 만난 조건이 달랐던 것입니다. 결과가 다르다고 해서 씨앗탑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불자 여러분 이연이라는 한 글자를 모르면 인과 전체가 거짓말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똑같은 행동을 했는데 결과가 다른 경우를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봅니다. 똑같이 열심히 일했는데 한 사람은 성공하고 한 사람은 무너집니다. 똑똑같이 자식을 정성으로 키웠는데 어느 집은 화목하고 어느 집은 등을 돌리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묻습니다. 인과가 있다면 어째서 같은 원인의 다른 결과가 오는가? 세상이 공평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연을 모르면 이 질문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연을 알면 답이 보입니다. 똑같은 씨앗이라도 떨어진 땅이 다르고 만난 비가 다르며 거쳐온 계절이 달랐던 것입니다. 내 눈에는 같은 행동으로 보여도 그 행동이 만난 조건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했는가? 어떤 때에 했는가?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 했는가? 이 모든 것이 연이 되어 결과를 빚어냅니다. 마음이라는 연이 특히 그렇습니다. 똑같은 보시를 해도 아까워하며 내놓은 손과 기뻐하며 내놓은 손은 씹는 씨앗부터 다릅니다. 겉으로 보이는 행동은 하나여도 그 안에 담긴 마음이 연이 되어 전혀 다른 열매를 맺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행동보다 마음을 먼저 보라 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과가 늦거나 다르게 온다고 해서 인과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연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겨울의 심은 씨앗이 봄을 기다리듯 어떤 원인은 조건이 물의 있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인간은 없다고 단정해 버리면 씨앗을 심어 놓고 밭을 갈아엎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사실이 하나 나옵니다. 연을 안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지나간 원인은 바꿀 수 없고 이미 심어진 씨앗은 뽑아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는 다릅니다. 지금 이 순간의 조건은 내 손으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메마른 밭이라면 물을 대면 되고 그늘진 자리라면 가지를 쳐서 볕이 들게 하면 됩니다. 과거에 어떤 씨앗을 심었든 그 씨앗이 어떻게 자랄지는 지금부터의 연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운명론이 아니라 오히려 운명론의 반대편에 서 있는 가르침입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연이라는 글자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연을 말씀하신 것은 지금 여기서 바꿀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지금 어려운 시간을 지나고 계신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지금의 고통을 만들었다는 생각에 자책으로 밤을 보내신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책 속에 머물러 계시지 마십시오. 씨앗은 이미 심어졌어도 오늘 내가 어떤 물을 주는가에 따라 열매는 달라집니다. 거친 씨앗도 좋은 연을 만나면 독이 덜어지고 좋은 씨앗도 나쁜 연을 만나면 빛을 잃습니다. 오늘 하루의 마음가짐. 오늘 하루의 말 한마디가 전부 연이 되어 어제 심은 씨앗의 운명을 바꾸고 있습니다. 이제 인과에 대한 가장 깊은 오해 하나를 풀어야 합니다. 인과를 버리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그것입니다. 고통이 오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묻습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벌을 받는가 누가 나를 이렇게 버라는가 하고 말입니다. 이 질문 속에는 어딘가에 심판자가 있어서 나를 지켜보다가 벌을 내린다는 생각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이 오면 억울해지는 법입니다. 붙임판이 잘못되었다고. 나는 이런 벌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고 보이지 않는 심판자를 향해 항변하게 됩니다. 그 항변이 길어질수록 마음의 상처는 깊어만 갑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설하신 인과에는 심판자가 없습니다. 지켜보다가 상을 주는 이도 없고 장부에 적어두었다가 벌을 내리는 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불 위에 손을 올리면 손이 뜨겁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이 나를 버라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 성질이 뜨겁고 내 손이 그 불에 닿았을 뿐입니다. 거기에 미인도 노인도 없으며 이치가 작용했을 따름입니다. 인과의 작용도 이와 같습니다. 거친 말을 하면 거친 관계가 돌아오고 따뜻한 마음을 내면 따뜻한 인연이 모여듭니다. 누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무리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데 누가 시키지 않듯 원인이 결과를 낳는 데에도 심판이 없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오래 묵은 억울함 하나가 풀립니다. 누가 나를 벌주는가 라는 질문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벌주는 이가 없기에 항변할 곳도 없고 미워할 대상도 없게 됩니다. 남는 것은 단 하나 나는 지금 무엇을 심고 있는가 하는 물음뿐입니다. 하늘을 향해 따지던 고개가 비로소 내 손에 들린 씨앗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인과를 받아들인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유입니다. 심판자가 있다면 우리는 평생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 심판이 공정한지 아닌지 알 수 없기에 마음은 늘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치라서 속임수가 없습니다. 내가 심은 만큼 내가 만든 조건만큼 그대로입니다. 누구에게는 후하고 누구에게는 박한 법이 없으며 이 한결같음이 인과가 주는 가장 큰 위안입니다. 불자 여러분 인과 연과과 이 세 글자를 마음에 새겨 두십시오. 치안만 보고 열매를 단정하지 마시고 열매만 보고 씨앗을 원망하는 일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 사이에 연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연은 지금 내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것 이것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인과의 구조입니다. 이 구조를 마음에 담는 작은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 내가 심은 씨앗 하나와 오늘 내가 만든 연 하나를 떠올려 보는 것입니다. 오늘 누구에게 어떤 말을 심었는가? 오늘 어떤 마음으로 하루라는 밭을 일구었는가? 이렇게 단 일 분만 돌아보아도 충분합니다. 매일 2일 분이 쌓이면 인간은 책 속의 글자가 아니라 내 하루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줍니다. 거울을 매일 보는 사람의 얼굴이 단정해지듯 인과를 매일 비추는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단정해져 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연이 갖추어지기를 기다린다 하였는데 그 기다림이 어째서 이토록 긴가? 때로는 한생을 넘어가기까지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했는데 좋은 결과는 보이지 않고 나쁜 짓을 한 사람은 오늘도 잘만 살아갑니다. 이 시간에 문제를 풀지 못하면 인과에 대한 믿음은 또 한 번 흔들리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물음에도 분명한 답을 남기셨습니다. 그 답이 바로 삼시역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업이 읽는 시간을 스스로 나누어 설하셨습니다. 수년업은 이생에 지어 이생의 받는 업입니다. 순생업은 이생에 지어 바로 그다음 생애받는 업이며 순우업은 그보다 더 멀리 여러 생을 건너가 받는 업입니다. 인과에는 이렇게 시간표가 있습니다. 오늘 심은 것이 오늘 돌아오는 것도 있고 10년 뒤에 돌아오는 것도 있으며 이 생을 넘어 돌아오는 것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수년업은 우리 눈에도 자주 뜹니다. 아침에 가족에게 모집말을 내뱉으면 그날 저녁 밥상의 공기가 차가워집니다. 이웃에게 베푼 친절이 그 주의 따뜻한 인사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이렇게 빨리 도는 업은 누구나 인과라고 알아보지만 문제는 순생업과 순우업입니다. 이생에 심고 다음 생에 받는 업 여러 생을 건너가 받는 업은 우리 눈에 그 연결이 보이지 않습니다. 씨앗을 심는 장면과 열매를 거두는 장면 사이가 너무 멀어서 두 장면이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삼시업을 굳이 나누어 설하신 듯이 여기에 있습니다. 보이는 엄만 인과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도 인과는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인과를 의심하게 되는 이유가 대부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인과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인과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좋은 일을 하면 이번 주 안에 좋은 소식이 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나쁜 짓을 했으면 이번 달 안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아야 한다고 기대합니다. 그 기대대로 되지 않으면 인과가 없다고 단정해 버립니다. 그러나 농사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는 농사에서는 이 시간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봄에 물을 심고 그날 저녁에 쌀을 내놓으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를 심었으면 여름을 지나야 하고 가을이 되어야 거둔다는 것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감나무를 심은 사람은 몇 년을 기다려야 척감을 봅니다. 그 기다림을 두고 감나무가 거짓말을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마음의 농사에서는 침은 그날 거두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까? 곡식의 시간은 믿으면서 업의 시간은 믿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업에도 곡식처럼 저마다에 익는 속도가 있습니다. 상추처럼 한 달이면 거두는 업이 있고 벼처럼 한 해가 걸리는 업이 있으며 감나무처럼 여러 해를 기다려야 하는 업도 있습니다. 어떤 업은 한생을 넘어가기도 하지만 빠르고 늦음이 있을 뿐 잊지 않는 업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업이 백천겁을 지나도 없어지지 않으며 2년이 모이는 때를 만나면 그 열매가 반드시 돌아온다고 설하셨습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지어진 업은 어디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불자 여러분 이 시간을 알고 나면 그토록 우리를 괴롭히던 풍경 하나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악한 사람이 잘 사는 풍경입니다. 거짓말로 남을 속인 사람이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가고 모질게. 군 사람이 더 건강하게 웃고 다닙니다. 이것을 보는 마음이 무너집니다. 착하게 사는 것이 바보처럼 느껴지고 세상의 이치라는 것이 있기는 한가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면 분명히 그렇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오신 분일수록 이 풍경 앞에서 더 크게 흔들립니다. 내가 지켜온 것들이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벚꽃에서 부처님께서는 이 풍경의 비밀을 밝혀 주셨습니다. 아기 열매가 아직 잊지 않은 동안에는 악한 사람도 복을 누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악의 열매가 익었을 때 그는 비로소 재앙을 만나게 됩니다. 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의 열매가 있기 전에는 착한 사람도 화를 겪지만 그 열매가 익으면 반드시 복을 만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잘 사는 아기는 버릴 면한 것이 아니라 아직 열매가 있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가 누리는 복은 그가 과거에 심어둔 다른 씨앗의 열매이고 지금 짓고 있는 악의 씨앗은 그 곁에서 조용히 자라고 있습니다. 감히 있기 전에는 단맛을 알 수 없듯 업이 있기 전에는 그 과보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남의 밭의 한 계절뿐입니다. 그 밭에 어떤 씨앗들이 어떤 순서로 심어져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남의 밭을 보며 마음을 태우지 마십시오. 저 사람의 가을은 저 사람의 목숨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지켜보지 않아도 오고 내가 잊어버려도 옵니다. 우리가 들여다보아야 할 곳은 남의 밭이 아니라 내 밭입니다. 인과의 시간이 길어서 생기는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심은 씨앗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10년 전에 무심코 던진 말 20년 전에 누군가에게 준 상처를 심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 그 열매가 돌아왔을 때 이것이 무슨 날벼락인가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게 됩니다. 씨앗을 심은 기억이 없기에 열매가 이유 없는 재앙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이유 없는 고통은 없습니다. 다만 기억나지 않는 원인이 있을 뿐입니다. 인과가 틀렸다고 결론 내리기 전에 내 기억이 닿지 않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먼저 떠올려 보십시오. 그 한 생각이 억울함의 절반을 내려놓게 해 줍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과부가 늦게 온다는 것을 우리는 보통 답답한 일로만 여깁니다. 그런데 방향을 바꾸어 보면 이 늦음 속의 뜻밖의 소식이 들어 있습니다. 과부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바꿀 시간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씨앗이 심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열매가 맺히기 전까지는 연히 일을 합니다. 똑같은 씨앗도 만나는 조건에 따라 열매의 크기와 빛깔이 달라진다고 하였습니다. 과거에 어두운 씨앗을 심었더라도 오늘부터 맑은 연을 보태면 그 열매는 처음 심었을 때와 같지 않게 됩니다. 만약 모든 과보가 즉시 돌아온다면 우리에게는 돌이킬 틈이 한순간도 없었을 것입니다. 잘못을 깨닫기도 전에 과보가 떨어지고 참여할 겨를도 없이 다음 과보가 이어졌을 테니 말입니다. 늦게 오는 과보는 그래서 형벌의 유예가 아니라 자비의 시간입니다. 이친은 우리에게 말미를 주고 있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열매가. 있기 전에 너의 밭을 돌보라고 그 긴 침묵으로 일러주고 있는 것입니다. 겹치는 세월을 돌아보며 가슴이 무거운 분이 계실 것입니다. 젊은 날의 뿌려 놓은 말과 행동들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지 두려운 분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 무게를 짊어지고만 계시지 마십시오. 과보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이 바로 밭을 돌볼 때라는 신호입니다. 인과의 시간이 긴 것은 우리를 애태우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기 위함입니다. 그 말미를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같은 시간이 전혀 다른 시간이 됩니다. 걱정과 자책으로 채우면 그 세월은 형벌보다 무거운 기다림이 되지만 참외와 선업으로 채우면 그 세월은 밭을 가꾸는 봄날로 바뀝니다. 부처님께서는 어제의 잘못을 알았으면 오늘 고치라고 하셨지. 어제의 잘못을 평생 끌어안고 떨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참외는 과거를 향한 일이지만 그 힘은 전부 오늘의 쏟아집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마음 하나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 하나가 그 시작입니다. 거기에 오늘 베푸는 작은 선행 하나를 보태면 이것이 익어가는 열매 곁에 놓는 가장 좋은 연이 됩니다. 참회하는 사람에게 인과의 시간은 더 이상 무겁기만 한 시간이 아니라 새로 허락된 시간입니다. 이렇게 인과의 시간까지 알고 나면 이제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하나로 좁혀집니다. 수업 시간이 걸리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도 나는 착하게 살아왔는데 어째서 이렇게 힘든가 하는 그 오래된 물음입니다. 절에 다니고 베풀며 살아온 사람일수록 이 물음 앞에서 더 깊이 흔들립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물음속에 숨어 있는 함정 하나를 분명하게 가리켜 보이셨습니다. 나는 착하게 살았는데 어째서 이렇게 힘든가? 이 한 문장 안에 함정이 하나가 아니라 셋이나 숨어 있습니다. 하나씩 꺼내어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함정은 착하게 살았기에 복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 그 자체입니다. 절에 다니시는 분들 중에 이런 마음을 가져보신 분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3000배를 올렸으면 소원 하나는 이루어져야 하지 않는가. 백일기도를 회양했으면 집안의 좋은 일이 와야 하지 않는가. 그 정성 자체는 참으로 귀합니다. 무릎이 닳도록 절하고 새벽마다 일어나 기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정성 끝에 청구서를 들고 서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내가 이만큼 올렸기에 이만큼 주십시오. 이 마음이 붓는 순간 기도는 수행이 아니라 흥정이 되어 버립니다. 보시를 하고 나서 복이 오는지 자꾸 확인하는 마음은 씨앗을 심어 놓고 매일 흙을 파헤쳐보는 손과 같습니다. 찹쌀이 텄는지 궁금해서 파보고 또 파보고 그러는 사이에 씨앗은 마릅니다. 몹시 머스크면 덮어두고 기다리되 조건을 달지 않아야 합니다. 조건을 다는 순간 그 선행은 이미 순수한 씨앗이 아니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서 머무는 바 없이 보시아라. 무주상 보시를 설하셨습니다. 도시를 하되 도시에 따른 생각에도 머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죽었다는 생각 저 사람이 받았다는 생각 무엇을 주었다는 생각 이 세 가지에 마음이 머물면 어떻게 됩니까? 그 보시는 모양만 보실 뿐 속은 거래입니다. 반대로 대가를 바라는 마음 없이 행한 보시는 그 복덕을 헤아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똑같은 1000원을 내놓아도 돌려받을 것을 계산한 천 원과 그냥 건넨 천 원은 심어지는 씨앗의 종자가 다릅니다. 그러기에 착하게 살았는데 복이 없다고 느껴질 때 먼저 물어야 할 것은 하늘이 아니라 내 마음입니다. 나의 착함에 혹시 영수증이 붙어있지는 않았는가. 이것을 묻는 일이 첫 번째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길이
됩니다. 이 영수증은 절에서만 발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일상 가장 가까운 곳 가족 안에서 가장 많이 발행됩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 한마디 속에 그 영수증이 들어 있습니다. 자식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은 것은 사실입니다. 잠을 줄이고 먹을 것을 아끼고 평생을 내어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끝에 서운함이 밀려온다면 어딘가에서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사랑
으로 시작한 일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적금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적금은 만기에 찾지 못하면 억울하지만 그냥 준 사랑에는 만기가 없습니다. 부
내리 사랑이 위대한 것은 많이 주어서가 아니라 본래
돌려받을 생각 없이 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면 서운함이 설 자리가 줄어듭니다.
번째 함정은 시간을 섞어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힘들다는 것과 지금 착하게 산다는 것을 우리는
같은 저울에 올려놓고 비교합니다. 오래 착하게 살았는데
오래 힘드니까 인과가 틀렸다는 결론으로 미끄러집니다. 그러나 업이 있는 시간에는 저마다의 속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겪는 고통은 지금의 선행과는 다른 줄기에서 온 것일 수 있습니다. 오래전에 심
씨앗의 열매가 이제야 익어서 도착한 것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밭으로. 보면 이 이치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좋은 씨앗을 부지런히 심었습니다. 그런데. 여름에 거두는 것은 올봄의 씨앗이 아니라 작년에 혹은 그 이전에 심어진 것들입니다. 올봄의. 씨앗은 아직 땅속에 있습니다. 지금. 밭에서 올라오는 쓴 열매를 보
올봄내 씨앗이 배신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다른 두 농사를 하나로 묶어버린 것뿐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지금의 고통이 지금의 선행에 대한 성
느껴집니다. 착하게. 살아봐야 소용없다는 생각으로 미끄러지고 그동안 쌓아온 선행마저 놓아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을 갈라서 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보입니다. 지금의. 고통은 옛 농사의 마지막 수확이고 지금
선행은 앞으로 올 계절의 씨앗이 됩니다. 둘은. 같은 밭에서 일어나지만 같은 농사가 아닙니다. 옛. 열매를
손과 새 씨앗을 심는 손이 한 사람의 두 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힘든 시절에 행하는 선행이야말로 가장 깊은 선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돋보기. 보이지 않는데도 씹는 사람 거둘 기약이 없는 데도 멈추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의 씨앗이 가장
좋은 땅에 떨어집니다. 지금 힘든 가운데서도 선을 놓지
않고 계신 분이라면 그 손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 손은
지금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큰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세 번째 함정은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습니다. 나는 착
살았다는 바로 그 생각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서 아산도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나라는. 상 내가 어떤 사람이
생각입니다. 나는 착한. 사람이다. 나는 베푸는. 사람이다 나는 절에. 오래 다닌 사람이다 이렇게 나를. 서비스록 원망은 기원이 됩니다. 마음의 평화 때문만은 아닌 것입니다. 불자 여러분 인과를 마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에게 바로 이 구조가 무너집니다. 인가를 믿으면 고통 앞에서 던지는 질문이 달라진다고 하였습니다. 질문이 달라지면 원인을 찾는 방향이 달라집니다. 저 사람이 왜 그랬는가만 묻던 마음이 이 일이 어떤 인연으로 내게 왔는가를 함께 묻게 됩니다. 그 순간 평생 바깥을 가리키던 손가락이 처음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남을 겨누던 손가락을 거두어 내 밭의 인연을 짚어보는 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탓이라며 자신을 때리는 일이 아닙니다. 타탈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탓하는 일 자체에서 손을 떼는 것입니다. 원인을 인연의 흐름 속에서 보기 시작하면 거기에는 탓할 자리가 없고 살필 자리만 남습니다. 그리고 인과를 믿는 사람은 상대를 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나를 아프게 한 그 사람도 자신의 인과 안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가 내게 한 일은 그의 밭에 심어진 씨앗이 되었습니다. 내가 나서지 않아도 그 밭의 열매는 그가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갚아 주지 않아도 이치가. 한 치의 오차 없이 돌아간다는 것을 알면 갚아 주려고 움켜쥐었던 손에서 힘이 빠집니다. 원망을 거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옳았다고 인정하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의 몫을 이치에게 돌려주고. 나는 내 삶으로 돌아오는 일입니다. 원망의 화살이 바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 있는 분도 계십니다. 그때 내가 왜 그 선택을 했을까? 그 때 내가 조금만 달리했더라면 이렇게 과거의 나를 수십 년째 탓하며 사는 마음입니다. 방향만 다를 뿐 같은 일입니다. 원인을 한 사람에게 못 박아두고 평생 그 사람을 때리는 일입니다. 다만 그 사람이 과거의 나일 뿐입니다. 인과의 눈으로 보면 그때의 나 역시 그때의 인연 속에 있었습니다. 그때 내가 가진 암과 그 때 내가 처한 형편과 그때 내 마음의 상태가 모여서 그 선택이 나온 것입니다. 지금의 눈으로 그때의 나를 심판하는 것은 가을의 눈으로 봄의 씨앗을 나무라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과거의 나를 놓아주는 것도 원망을 거두는 일에 들어갑니다. 어쩌면 가장 먼저 풀어주어야 할 사람이 그 시절의 나일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의 생애에 이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가 달다입니다. 제바달다는 부처님의 사촌이었습니다. 한때는 부처님을 따라 출가한 제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교단을 차지하려는 욕심에 사로잡혀 부처님을 여러 차례 해치려 들었습니다. 자객을 보내려 했고 사나운 코끼리를 풀어놓기까지 했습니다. 남도 아닌 피부치가 한 솥밥을 먹던 제자가 스승의 목숨을 노린 것입니다. 사람의 일 가운데 이보다 깊은 배신은 찾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제바달다를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미워하지도 저주하지도 교단해서. 그의 이름을 지우라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의 눈에 제가 달다는 응징해야 할 원수가 아니라 자신이 짓는 업의 무게를 알지 못한 채 그 업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한 어리석은 중생이었습니다. 미우미 설자리에 연민이 서 있었던 것입니다. 가장 깊이 아는 사람이 가장 깊이 가엾사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제가 달다가 짓는 업이 어떤 열매로 돌아갈지를 환히 보셨기에 분노 대신 안타까움이 먼저 일어났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셨습니다. 법화경 제바달다품에서 부처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난 세상에 제바달다는 나의 선지식이었다. 제바달다라는 좋은 벗으로 말미암아. 내가 깨달음을 빨리 이룰 수 있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평생 나를 해치려 한 사람을 나를 완성시킨 스승이라 부르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만든 역경 하나하나가 수행을 깊게 한 인연이었다는 뜻입니다. 원망은커녕 그 인연에 감사를 돌리신 자리 이것이 인과를 끝까지 믿는 마음이 도달하는 지점입니다. 우리가 단번에 그 자리까지 갈 수는 없습니다. 평생 나를 괴롭힌 사람을 스승이라 부르는 일은 부처님이기에 가능했던 경지입니다. 그러나 방향은 같습니다. 그 사람의 일은 그 사람의 인과에 맡기고 그 일이 내게 남긴 것을 내 공부로 삼는 것 여기까지는 우리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원망을 하루아침에 끊으려 하지 마시고 원망이 올라올 때마다 한 번씩만 돌려놓아 보십시오. 저 사람의 열매는 저 사람의 밭에서 읽는다이한 문장을 마음에 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한 가지. 분명히 해 둘 것이 있습니다. 원망을 내려놓는 일과 그 사람과 다시 잘 지내는 일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원망을 거두라고 하면 그 사람을 다시 만나야 하는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지내야 하는가 하고 부담을 느끼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만나지 않아도 되고 연락하지 않아도 되고 예전관계로 돌아가지 않아도 됩니다. 원망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의 문제입니다. 내 마음 안방에 수십 년 새 들어 살던 그 사람을 이제 내보내는 일일 뿐입니다. 방을 비웠다고 해서 그 사람을 다시 초대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멀리 두 대 미워하지 않는 것 거리는 유지하되 마음의 짐은 내려놓는 것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원망 내려놓기가 한결 가벼운 일이 됩니다. 이렇게 원망이 옅어지기. 시작하면 삶의 결이 눈에 띄게 달라집니다. 가장 먼저 잠자리가 달라집니다. 미운 얼굴을 천장에 그리며 뒤척이던 밤이 줄어들고 눕는 자리가 가벼워집니다. 거울 속 표정이 달라지고 입에서 나오는 말의 온도가 달라집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마음을 차지하고 있던 큰 짐 하나가 빠져나갔기에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수십 년 묵은 원망 하나를 내려놓은 사람의 얼굴은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부드러워집니다. 주변에서 먼저 알아봅니다. 요즘 얼굴이 좋아졌다는 말을 듣게 되는 때가 바로 그 때입니다. 원망이 빠져나간 자리는 비어 있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고요가 들어서고 그 고요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또 하나의 무거운 감정과 마주하게 됩니다. 지나간 사람을 향하던 원망과 달리 이 감정은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향해 있습니다. 인과를 믿는 마음은 이 감정 앞에서도 길을 냅니다. 그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원망이 지나간 시간을 향한 마음이라면 두려움은 다가올 시간을 향해 있습니다. 앞으로 건강이 나빠지면 어쩌나. 모아둔 것이 바닥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자식들에게 짐이 되면 어쩌나 혼자 남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 어쩌나의 목록은 길어집니다. 밤에 누우면 지나간 일보다 오지 않은 일이 더 무겁게 가슴을 누르는 때가 있습니다. 두려움은 그렇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오늘을 잡아먹는 감정입니다. 이 두려움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만히 짚어 보겠습니다. 두려움의 크기는 내 미래가 어디에 달려 있다고 믿는가에 따라 정해집니다. 미래가 운에 달려 있다고 믿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운이 좋으면 편안한 노년이 오고 운이 나쁘면 병과 가난이 온다고 믿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새해가 되면 점집을 찾고 사주를 보고 오래 운세가 어떤가에 마음을 겁니다. 그 마음을 나무랄 생각은 없습니다. 간치 앞을 모르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 어디에라도 기대고 싶은 심정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운에 맡겨진 미래는 본질적으로 캄캄한 길입니다. 오는 내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운이 오기를 바랄 수는 있어도 좋은 운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미래의 열쇠가 처음부터 내 손밖에 있는 탓에 그 길 위에서는 누구라도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점을 치고 기룡을 봐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점치는 일로 살아가는 것을 바른 생계가 아니라 하시며 분명하게 금하셨습니다. 길이를 잡아주고 운수를 봐주고 재앙을 점쳐주는 일들이 삿된 생계로 불린 것입니다. 미래를 점쳐주는 일이 왜 삿된 것인지 그 뜻을 헤아려 보면 깊은 자비가 보입니다. 점은 사람의 눈을 자신의 삶에서 떼어놓기 때문입니다. 올해 운이 어떤가에 매달리는 동안 정작 올해 무엇을 SIM을 것인가는 묻지 않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이 운세라는 바깥을 보는 대신 자신의 행위라는 안을 보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미래가 궁금하면 점쟁이에게 묻지 말고 지금 내가 심고 있는 것을 보라. 그것이 가장 정확한 점개라는 가르침입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두려움은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것 앞에서 자랍니다. 폭풍이 무서운 것은 막을 수 없기 때문이고 어둠이 무서운 것은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운의 영역에 두는 순간 미래 전체가 막을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 미래를 생각할수록 불안해지는 것은 그 사람이 약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둔 자리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불자 여러분 인과를 믿는다는 것은 미래를 두는 자리를 옮기는 일입니다. 인과의 눈으로 보면 미래는 운이 배달해 주는 소포가 아닙니다. 미래는 오늘까지 심어온 것들과 오늘부터 SIM을 것들이 자라서 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된다는 말은 아니며 세상에는 내 손이 닿지 않는 일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인과를 믿는 사람에게는 그 가운데 분명한 내 몫이 생깁니다. 오늘 무엇을 심을지는 전적으로 내가 정합니다. 어떤 마음을 낼지 어떤 말을 할지 어떤 일을 행할지? 이것만큼은 운도 팔자도 건드리지 못하는 나의 영역입니다. 내 몫이 생기는 순간 두려움의 성질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일은 운이 7알이고. 노력이 삼R이라는 뜻으로 나이가 들수록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과의 눈으로 보면 이 말에는 빠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의 운이라 불리는 그 치랄도 따져보면 지난날의 내가 심어 놓은 것들의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운은 없습니다. 다만 너무 오래전에 심어져서 심은 기억이 끊어진 열매가 운이라는 이름을 얻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오늘의 기삼은 내일의 운치를 만드는 씨앗이 됩니다. 운까지도 결국 내 손을 거쳐간다는 것 이것이 인과가 운명론과 함께 작용합니다. 미래가 통째로 캄캄한 어둠이었다가 그 안에 내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생깁니다. 어둠 전체를 걷어낼 수는 없어도 발밑 한 걸음은 늘 디딜 수 있습니다. 그 한 걸음이 모여서 길이 됩니다. 운의 기대는 사람은 어둠 전체를 보며 떨고 인과를 믿는 사람은 발밑 한 걸음을 보며 걷습니다. 똑같은 어둠 속에 있어도 한 사람은 멈춰서 있고 한 사람은 나아가고 있습니다. 걱정과 준비가 갈라지는 지점도 여기입니다. 미래를 운해둔 사람은 걱정을 하고 미래를 인과해 둔 사람은 준비를 합니다. 걱정은 같은 생각이 제자리를 도는 일이라 1000번을 해도 미래가 바뀌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의 기운만 갉아먹게 됩니다. 준비는 다릅니다. 걱정되는 그 일을 위해 오늘 씨앗 하나를 심는 것이 준비입니다. 건강이 걱정되면 오늘 한 끼를 바로 먹고 외로움이 걱정되면 오늘 한 사람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것 이것이 인과를 믿는 사람의 대응이 됩니다. 걱정이 올라올 때마다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지금 나는 돌고 있는가 심고 있는가? 이 물음 하나가 걱정을 준비로 바꾸어 줍니다. 이 길의 끝을 보여주신 분이 부처님이셨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늙으셨습니다. 여든의 몸은 낡은 수레와 같다고 스스로 말씀하셨을 만큼 마지막 길은 늙고 병든 몸으로 걸은 길이었습니다. 그 몸을 이끌고 마지막 유행을 떠나 쿠시나가라의 살아남은 두 그루 사이에 자리를 펴게 하셨습니다. 죽음이 눈앞에와 있었는데도 그 자리에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울며 슬퍼할 때 오히려 그들을 다독이며 고요히 마지막을 준비하셨습니다. 평생을 함께한 아난 존자가 문에 기대어 흐느낄 때도 그를 불러 위로하고 그동안의 시봉에 고마움을 전하셨습니다. 죽음을 앞둔 이가 남는 일을 위로한 자리였습니다. 그 평온은 어디에서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특별한 능력이 죽 입니다. 부처님의 평온은 걸어온 길 전체에서 왔습니다. 해야 할 일을 다 하였고
전해야 할 가르침을 다 전하셨습니다. 지워야 할 것을 평생에 걸쳐 다 SIM으신 분에게 죽음은 갑자기 들이닥치는 불청객이 아니라 예정된 손님이었습니다. 인과 안에서 흔들림 없이 걸어온 삶 그 삶 자체가 죽음 앞에서의 평온의 근거였던 것입니다. 미래를 운에 맡긴 적이 없는 분이었기에 마지막 미래인 죽음 앞에서도 떨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경지에 이를 수는 없어도 같은 원리는 우리 삶에서도 작동합니다. 오늘 하루를 인과 안에서 성실하게 산 사람은 그날 밤 내일이 덜 무섭습니다. 아내를 그렇게 산 사람은 다음 해가 덜 무섭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산 사람은 마지막 날조차 덜 무서워지는 법입니다. 두려움을 없애는 길은 미래를 점치는 데 있지 않고 오늘을 심는 데 있다는 것 이것이 부처님께서 당신의 마지막으로 보여 주신 가르침입니다. 나이 들어 찾아오는 불안들 건강과 외로움과 죽음에 대한 불안도 이 자리에서 다시 보게 됩니다. 그 불안들을 운의 영역에 두면 우리는 그저 떨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과의 영역으로 가져오면 각각의 불안 앞에 오늘 할 수 있는 일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불안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아도 불안의 성질이 달라집니다. 나를 얼어붙게 하던 막연한 공포가 오늘 해야 할 구체적인 일로 모습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동안 마음은 떨지 않게 됩니다. 씹는 손은 떨겨를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려움과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서 있을 자리에 할 일을 가져다 놓는 것 이것이 인과를 믿는 사람의 방식입니다. 원망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줄어든 사람에게는 이제 마지막 변화가 찾아옵니다. 마음 안의 변화가 마음 밖으로 흘러나오는 일입니다.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달라지고 그 사람의 손이 하는 일이 달라집니다. 인과를 믿는 마음은 결국 삶의 모양 자체를 바꾸어 놓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이 업을 짓는 자리를 새 곳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몸으로 짓는 신업
입으로 짓는 구업
마음으로 짓는 의업입니다.
손이 하는 일
입이 하는 말
마음이 일으키는 생각
이 새 곳에서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씨앗을 심고 있습니다.
인과를 머리로만 아는 사람은 이 세 곳을 그냥 지나치지만
마음으로 믿게 된 사람은 이 세 곳을 살피기 시작합니다. 감시하듯 조이는 것이 아니라 농부가 자기 손을 들여다보듯 자연스럽게 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세 가지 억 가운데 부처님께서 특히 자주 경계하신 것이 구업입니다. 입으로 짓는 업입니다. 9 업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거짓을 말하는 망어 꾸미고 부풀리는 기억 이 사람과 저 사람 사이를 가르는 양설 거칠고 험하게 내뱉는 악구입니다. 부처님께서 열 가지 악업을 말씀하실 때 몸으로 짓는 것이 셋 마음으로 짓는 것이 셋인데. 입으로 짓는 것만 넷이었습니다. 사람이 짓는 업 가운데 가장 큰 몫이 혀 하나에서 만들어진다는 뜻입니다. 어째서 입이 이토록 위험한 자리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몸으로 남을 해치는 일은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몇 번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은 다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백마디를 쏟아냅니다. 그만큼 씨앗을 심는 횟수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게다가 말은 너무 쉽습니다. 힘도 들지 않고 돈도 들지 않고 준비도 필요 없습니다. 생각보다 먼저 튀어나오는 것이 말이라 씹는 줄도 모르고 심게 됩니다. 그리고 말은 즉시 상대에게 닿습니다. 몸의 업은 거리가 필요하지만 말의 업은 내뱉는 순간 이미 상대의 가슴에 박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우리 일상에 가장 깊이 스며있는 것이 험담입니다. 셋이 모이면 그 자리에 없는 넷째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 사람의 모임입니다. 험담이 무서운 것은 죄를 짓는다는 느낌이 전혀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히려 이야기가 잘 통한다는 즐거움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인과의 눈으로 보면 험담한 자리는 여러 개의 씨앗을 한꺼번에 심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깎아내렸고 듣는 사람의 마음에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을 옮겨 심었으며 내 입에는 남을 깎는 습관이 한겹 더 쌓였습니다. 말 몇 마디에 세 갈래 업이 심어진 것입니다. 인가를 믿게 된 사람은 이 험담 자리에서부터 달라집니다. 맞장구가 줄어들고 화재를 돌리는 일이 늘어납니다. 무엇보다 그 자리에 없는 사람 이야기를 시작하는 일이 줄어듭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 말들이 전부 내 밭에 떨어지는 씨앗이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입은 거꾸로도 쓸 수 있습니다. 험담이 한 자리에서 세 갈래 업을 심는다면 칭찬과 격려는 한 자리에서 세 갈래 복을 심습니다.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살리는 말 한마디는 듣는 이의 마음을 데우고 말하는 이의 입에 좋은 습관을 들이며 돌고 돌아. 언젠가 그 사람의 귀에까지 다 꽃이 됩니다. 같은 혀로 가시를 심을 수도 있고 꽃을 심을 수도 있다는 것 이것을 아는 사람의 입은 저절로 무거워지고 열릴 때는 따뜻하게 열립니다. 그런데 말과 행동보다 더 깊은 자리에 위협이 있습니다. 마음으로 짓는 업입니다.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그릇되게 보는 마음 이 셋이 마음자리에서 짓는 업이 됩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업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법구경의 첫 머리에서는 마음이 모든 것에 앞장이 되고 마음이 모든 것의 주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더러운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르고 맑은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즐거움이 그림자처럼. 그를 따른다는 가르침입니다. 입과 몸은 마음의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험한 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마음 안에서 먼저 험한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모진 행동이 나가기 전에 마음 안에서 먼저 모진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러니 말과 행동을 고치려는 사람은 결국 마음 자리까지 내려가게 됩니다. 뿌리에 물을 주면 가지와 잎은 저절로 푸르러지는 이치와 같습니다. 마음이 맑아지면 입단속을 따로 하지 않아도 말이 맑아집니다. 마음을 살핀다는 것이 어렵게 들릴 수 있으나 시작은 간단합니다. 성낸 마음이 올라올 때 그 마음을 따라가기 전에 한번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지금 내 안에서 성냄이 일어나고 있구나. 이렇게 한 발 떨어져서 보는 순간 그 성님은 이미 절반쯤 힘을 잃습니다. 알아차리지 못한 성님은 말이 되어 튀어나오지만 알아차린 성렘은 마음 안에서 잦아들 기회를 얻습니다. 씨앗이 입 밖으로 나가기 전에 마음 안에서 거두어 드리는 것입니다. 말이 달라진 사람에게는 행동도 따라 달라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분들이 걸려 넘어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행동을 바꾸라 하고 큰 것부터 떠올리는 것입니다. 큰 돈을 보시해야 할 것 같고 큰 결심을 해야 할 것 같고 삶을 통째로 바꿔야 할 것 같아. 시작도 하기 전에 지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정반대를 가르치셨습니다. 벚꽃경에 이르기를 물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져도 마침내 항아리를 가득 채우듯 작은 선이라도 쌓고 또 쌓으면 어진 서로 손으로 가득 차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항아리를 채우는 것은 폭포가 아니라 물방울입니다. 한 방울은 보잘것 없어 보여도 그치지 않고 떨어지면 반드시 항아리가 찹니다. 부처님께서는 악도 마찬가지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이까지 작은 잘못쯤이야 하며 가볍게 여긴 것들이 방울방울 모여 사람을 악으로 채운다는 말씀입니다. 작다고 무시한 것들이 결국 항아리의 내용물을 결정합니다. 그러니 인과를 믿는 사람의 하루는 거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소해집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오늘 하루를 어떤 마음으로 시작할지 잠깐 가다듬는 것 그것이 그날의 첫 물방울입니다. 마주치는 이웃에게 건네는 인사 한 마디 전화기 넘어 자식에게 보태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다음 물방울이 됩니다. 시장에서 병원 대기실에서 버스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는 부드러운 마음 하나하나가 전부 물방울입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이 작은 것들이 그 사람의 항아리를 채워 갑니다. 만남의 자리에서도 달라집니다. 인과를 믿는 사람은 사람을 만날 때 이 만남이 서로에게 무엇을 심는 자리인가를 어렴풋이라도 느끼게 됩니다. 만나고 헤어진 뒤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만남이 있고 만나고 나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만남이 있습니다. 내가 상대에게 어느 쪽 만남이 되고 있는가? 이것을 한 번이라도 돌아본 사람의 처신은 그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 곁에 잠시 앉아 주는 것 자랑하고 싶은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것 이런 것들이 만남의 자리에서 심는 씨앗입니다. 불자 여러분 여기까지 들으시면서 수행이라는 말의 무게가 조금 달라지셨을 것입니다. 수행은 산속에서 하는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입을 한번 다스리는 것이 수행이고. 인사 한마디 따뜻하게 건네는 것이 수행입니다. 절에 가는 날만 불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움직이는 모든 순간이 절이 되는 것 이것이 인과를 믿는 사람의 일상입니다. 같은 하루를 살아도 그 하루가 전부 밭이 됩니다. 그리고 이 변화에는 묘한 이치가 하나 숨어 있습니다. 말과 행동이 달라지면 주변이 달라집니다. 부드러운 말을 씹는 사람 곁에는 부드러운 말이 모이고 따뜻한 손을 내미는 사람 곁에는 따뜻한 손이 모입니다. 그렇게 달라진 주변이 다시 그 사람의 믿음을 굳혀줍니다. 인과가 정말 작동하는구나 하는 것을 책이 아니라 자기 삶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행동을 바꾸고 행동이 다시 믿음을 깊게 하는 선순환 여기에 들어선 사람은 더 이상 인과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의심할 필요가 없어진 자리 거기가 안다해서 출발한 사람이 마침내 믿는다에 도착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듣고 나면 마지막 물음 하나가 남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선하게 심으신 부처님께서는 그러면 아무 고통 없이 사셨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놀랍게도 경전은 그렇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에게도 피해 가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제바다에다가 영축산 위에서 큰 바위를 굴려 떨어뜨렸습니다. 바위는 부처님을 비켜갔지만 부서진 돌조각 하나가 부처님의 발에 박혔습니다. 발에서 피가 흘렀고 그 상처의 통증은 오래갔습니다. 깨달음을 이루신 분 천상천하의 스승이라 불리신 분의 발에서 붉은 피가 흐른 것입니다. 제자들이 놀라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여쭈었을 때 부처님께서는 담담하게 답하셨습니다. 이것은 내가 아득한 옛적에 지은 업의 과보가 이제 돌아온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고향 카펠라성의 석가족이 이웃 나라의 침공으로 무너지던 무렵 부처님께서 심한 두통을 앓으셨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그 밖에도 경전 곳곳에는 부처님께서 몸의 병과 통증을 겪으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때마다 부처님께서는 그 고통을 과거 업의 과보로 받아들이셨고 피하려하지 억울해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신통이 자제하신 분이었지만 그 힘으로 과부를 비켜가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받을 것은 받는다. 이것이 인과 앞에 선 부처님의 한결같은 자세였습니다. 이 기록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뜻은 가볍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과보를 면제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부처가 되면 지난 업이 다 지워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깨닫기 전에 심어진 씨앗은 깨달은 뒤에도 익어서 돌아왔습니다. 인간은 그만큼 철저합니다. 부처님에게도 봐주는 법이 없고 에누리가 없습니다. 어찌 보면 무서운 이야기로 들립니다. 부처님도 못 피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피하겠는가 싶어집니다. 그러나 방향을 바꾸어 보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든든한 소식입니다. 인과가 부처에게도 예외를 두지 않을 만큼 공평하다면 우리에게도 예외 없이 공평하다는 뜻이 됩니다. 내가 심은 선이 누락되는 일도 없고 힘 있는 누군가가 내 몫을 가로채는 일도 없습니다. 한 치의 오차 없이 돌아오는 이치라는 것은 한 치의 오차 없이 보증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인과의 무서움과 인과의 믿어움은 같은 곳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과부를 받는 자리에서 결정적인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똑같은 과보를 받아도 받는 모습이 달랐다는 점입니다. 발에서 피가 흘러도 부처님께서는 평정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아픔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몸의 통증은 부처님께도 통증이었습니다. 다만 그 통증 위에 분노와 한탄을 얹지 않으셨습니다. 경전의 전화기를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두 개의 화살로 설명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첫 번째 화살을 맞고 나서 괴로워하고 원통해하며 스스로 두 번째 화살을 맞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첫 번째 화살은 맞아도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삶의 첫 화살은 피할 수 없이 날아옵니다. 병이 오고 이별이 오고 뜻하지 않은 실패가 옵니다. 그 화살까지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 위에 얻는 한탄과 자책과 미움 이 두 번째 화살만큼은 정적으로 내 손에 달려 있습니다. 과보라는 첫 화살은 부처님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 얹히는 두 번째 화살 원통암이라는 화살만은 결코 맞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소금 한 줌의 비유도 남기셨습니다. 같은 소금 한 줌이라도 작은 잔에 물에 넣으면 짜서 마실 수 없지만 큰 강물에 넣으면 짠맛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업도 이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똑같은 무게의 업이라도 그것을 받는 사람의 그릇에 따라 전혀 다르게 닿습니다. 마음이 잔처럼 좁은 사람에게는 작은 과보도 견딜 수 없이 쓰지만 마음의 강물처럼 넓힌 사람에게는 같은 과보가 엮게 스쳐갑니다. 그래서 수행은 과보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그릇을 키우는 일입니다. 서너블 쌓고. 마음을 닦는 동안 소금의 양은 그대로여도 물이 불어납니다. 지난날에 업앞에서 한숨만 쉬시던 분들에게 이보다 큰 위로가 없습니다. 지울 수 없는 것을 지우려 애쓰지 마시고 오늘부터 물을 불리시면 됩니다. 여기에 더해 부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씨앗을 심지 않으셨습니다. 바위를 굴린 이에게 보복하지 않으셨고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옛 업의 열매는 받아내고 세업의 씨앗은 심지 않는 것 이것이 인과의 흐름을 끊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받기만 하고 심지 않으면 그 줄기는 거기서 마릅니다. 과부를 받으면서 분노로 되갚으면 새 씨앗이 심어져 흐름이 이어지지만 받아내고 멈추면 그 인연은 끝이 납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업의 흐름이 그치는 자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불자 여러분 부처님께서 인가를 믿으라 하신 까닭이 이제 온전히 드러납니다. 인과를 믿으라는 것은 정해진 운명에 엎드리는 말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지나간 것은 바다 내대 오는 것은 지금부터 내가 정한다는 선언입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어도 과거를 받는 내 모습은 바꿀 수 있고 미래에 올 것은 오늘 내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인과를 믿는 사람만이 진짜 자기 삶의 주인이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열반에 드시기 전 부처님께서는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남기셨습니다. 자등명 법등명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내 안에 등과 진리의 등 그 둘의 의지에서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스승이 떠난 뒤에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가 묻는 제자들에게 부처님께서는 밖이 아니라 안에 가리키신 것입니다. 인과를 믿는다는 것이 바로 이 등의 불을 붙이는 일입니다. 내 삶의 원인이 내 안에 있고 내 미래의 씨앗이 내 손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밖을 더듬던 마음이 멈추고. 내 안에 등이 켜집니다. 그 등은 운세가 꺼버릴 수 없고 세월이 흔들 수 없으며 죽음 앞에서도 꺼지지 않는 등입니다. 남이 들어주는 등은 남이 떠나면 어두워지지만. 내 안에 켜진 등은 내가 있는 한 꺼지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평생을 걸어 보여 주신 길이 2등 하나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긴 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인과를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에서 출발하여 인과 연과과의 구조를 보았고 과보가 더디게 오는 까닭과 착하게 살아도 힘든 이유 속에 숨어 있던 함정들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진짜 믿는 순간 찾아오는 세 가지 변화를 보았습니다. 미운 사람의 몫을 이치에 돌려주고 내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 첫 번째였고 미래를 운에서 거두어 오는 심는 손으로 가져오는 것이 두 번째였으며 입과 몸과 마음 세자리가 전부 좋은 씨앗을 심는 자리로 바뀌는 것이 세 번째였습니다. 처음에 들였던 그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왜 나만 이런가? 이 말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인과를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그 물음이 다르게 들리실 것입니다. 같은 고통이 와도 왜 나만 이런가? 대신 이것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묻게 되셨다면 오늘 이 법문은 제 할 일을 다 한 것입니다. 그 물음 하나가 바뀐 자리에서 안다는 이미 믿는다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오늘 밤보다. 내일 아침에 한 달 뒤에 삶의 마디마디에서 더 깊어질 것입니다. 인간은 한 번 믿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거듭 확인하게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의 법문을 회양하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은 공덕이 저와 여러분에게만 머물지 않고 2년 있는 모든 분들에게 두루 미치기를 바란합니다. 원망의 잠 못 드는 분들이 그 짐을 내려놓으시고 오지 않은 나를 걱정하는 분들이 오늘 심는 기쁨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가신 인연들도 좋은 곳에서 평안하시기를 빌며 모든 중생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기 안에 등에 불을 밝히시기를 바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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