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과 꾸중
성공과 실패의
기억이 겹겹이 쌓여 한 장의 그림이 되었습니다.
수십 년을 두고 굳어진 것이라
이것이 그림인 줄도 모르고
이것이 나라고 믿게 됩니다.
상이 무서운 것은
스스로 상인 줄 모른다는 점에 있습니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상은 한 가지만 작동하지 않습니다.
나라는 상이 서면
곧바로 남이라는 상이 따라 일어납니다.
나와 남이 서면
세상을 편으로 가르기 시작하며
세상이 나뉘면
시간 속에서
내 편이 지고 있다는 초조함이 올라옵니다.
네 가지 상은 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일어나면 나머지가 줄줄이 딸려옵니다.
마치 실타래의 한 올을 당기면
엉킨 실 전체가 함께 풀려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괴로움이 한 가지에서 끝나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며 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의 생각이 시작되면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생각이 다른 생각을 불러오고 그 생각이 또 다른 감정을 깨우며 사상이 연쇄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이 바로 이 밤의 뒤척임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사상을 놓으라 하신 것은 세상을 모른 척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마음이 만들어낸 그림에 끌려다니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그림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는 것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면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이 분노가 상황 때문에 일어난 것인지 내 안에 상이 부딪혀서 일어난 것인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서운함이 밀려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가 잘못한 것인지 내가 세워 놓은 기대가 무너진 것인지 한 발짝 물러서면 구별이 됩니다. 이 한 발짝이 금강경이 가리키는 첫 번째 자리입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물으신 장면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동쪽 허공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수보리 존재가 답하였습니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요.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남쪽과 서쪽과 북쪽과 위와 아래의 허공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수보리 존자는 그 또한 헤아릴 수 없다고 답하였습니다. 허공은 끝이 없고 동서남북 위와 아래 어디를 가도 경계가 없으며 나눌 수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허공의 비유를 드신 뒤에 말씀하십니다.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그 독벽도 이와 같이 해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산에 머물지 않을 때 마음이 허공처럼 됩니다. 경기가 없어지고 나와 남의 구분이 얇어지며 가르고 나누던 마음이 비로소 쉬게 됩니다. 허공은 무엇이든 품을 수 있으며 구름이 와도 바람이 와도 비가 와도 막지 않고 붙잡지 않습니다. 그저 품고 있을 뿐입니다. 반대로 상에 머물면 마음은 항아리처럼 됩니다. 나라는 테두리 남이라는 테두리 옳고 그름의 테두리 시간의 테두리 안에 스스로를 가둡니다. 항아리 안에 담긴 물은 판아리 모양대로만 존재할 수 있고 그 밖의 세상을 보지 못합니다. 항아리가 작을수록 답답하고 항아리가 단단할수록 깨지기 어렵습니다. 상을 놓는다는 것은 이 항아리를 깨뜨리는 것이며 그때 물은 비로소 흘러갈 곳을 찾게 되고 마음이 허공처럼 트이게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금 마음이 무거우신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서운한 마음이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가 잠을 쫓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폭은 내일에 대한 걱정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으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 무거움의 안쪽에 사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괴로움만 해도 네 가지 상이 겹쳐져 있는 경우가 많기에 괴로움이 크도록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이것을 말씀하셨다는 것 자체가 몸이 외로입니다.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에는 이름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름 모를 괴로움처럼 막막한 것은 없습니다. 무엇이 나를 괴롭히는지 모를 때 우리는 괴로움 전체에 짓눌립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상에서 온 것이구나. 이것이 인상에서 비롯된 것이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순간 괴로움은 더 이상 이름 없는 덩어리가 아니게 됩니다. 볼 수 있으면 비로소 놓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네 가지를 가리키신 것은 꼬집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괴로움의 자리를 정확히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아픈 것을 알아야 치료할 수 있듯 괴로움의 뿌리를 알아야 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뿌리를 모른 채 가지만 잘라내면 같은 부위에서 또 세 가지가 자라납니다. 몇 번을 잘라내어도 끝이 없는 것이 바로 이 까닭입니다. 지금 마음이 어디에 매여 있는지를 아는 것 그것이 놓아버림의 첫걸음입니다. 같은 괴로움이 반복되는 이유는 같은 상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상이 바뀌지 않으면 괴로움도 바뀌지 않으며 상을 놓으면 괴로움도 함께 놓이게 됩니다. 네 가지 산 가운데 가장 먼저 부처님께서 가리키신 것이 아상이며 나라는 상 내가 있다는 침착을 뜻합니다. 아산이 무엇인지 알려면 우리 안에서 가장 자주 올라오는 말 하나를 떠올려 보면 됩니다. 내가 내가 해줬는데 내가 참았는데? 내가 이 말한 사람인데 이 말이 올라오는 순간 아산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며 말로 내뱉지 않아도 마음속에서 도는 것만으로 괴로움의 불씨가 짙어지기 시작합니다. 돌아오지 않을 때 마음이 상하고 알아주지 않을 때 서운함이 차오르며 결과가 따르지 않을 때 억울함이 올라옵니다. 이 모든 감정의 출발점에 나라는 글자가 서 있습니다. 감정이 먼저 있고 나가 따라온 것이 아니라 나가 먼저 서 있었기에 감정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 함 한번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하루 동안 마음속에서 내가라는 말이 몇 번이나 올라오는지를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내가 해야 할 일 내가 걱정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이 쉴 틈 없이 돌아갑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고 사람을 만나면서도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를 살핍니다. 잠들기 전까지 이 나라는 축을 중심으로 하루 전체가 돌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아상에 대해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되 실로 중생을 제도한 바가 없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중생을 구하면서도 내가 구했다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왜 놀라운 말씀입니까? 좋은 일을 하면 의뢰 내가 했다는 마음이 따라붙기 때문입니다. 무시를 하면 내가 보시겠다는 마음이 붓고 기도를 하면 내가 기도했다는 마음이 따라오며 남을 도우면 내가 도왔다는 뿌듯함이 생깁니다. 이 마음이 붓는 순간 선행이 집착이 됩니다. 내가 베풀었다는 마음이 있으면 돌아오는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감사를 기대하고 인정을 기대하며 최소한 알아주기를 바라게 됩니다. 기대가 채워지지 않으면 서운해지고 서운함이 쌓이면 원망으로 바뀝니다. 선행에서 시작된 마음이 원망으로 끝나는 까닭입니다. 절에 오래 다니신 분들 가운데에도 이 마음을 겪으신 분이 적지 않으실 것입니다. 봉사를 하고 보시를 하고 기도를 하면서도 내가 했다는 마음이 남아 있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 경험을 하셨을 것이며 이 모든 과정의 씨앗이 바로 아상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주상 보시가 바로 이것입니다.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는 뜻이며 내가 주었다는 마음 누구에게 주었다는 마음 무엇을 주었다는 마음까지 모두 놓고 베푸는 것을 가리킵니다. 죽어도 준 줄 모르는 마음. 그것이 금강경이 가리키는 도시의 참뜻입니다. 이것은 보시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며 삶 전체가 이와 같습니다. 일을 하면서 내가 했다는 마음이 붙으면 인정받지 못할 때 무너집니다. 사랑을 하면서 내가 사랑한다는 마음이 붙으면 사랑이 돌아오지 않을 때 상처받게 됩니다. 자식을 키우면서 내가 키웠다는 마음이 붙으면 자식이 멀어질 때 배신감이 밀려옵니다. 내가 라는 마음이 붓는 모든 자리에 괴로움의 씨앗이 심어집니다. 아산이 깊은 사람에게는 세상 전체가 나를 향한 평가처럼 느껴집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나를 인정해 주는 말인지 아닌지를 먼저 따지게 되고 누군가의 행동이 나를 존중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살피게 됩니다. 칭찬에는 들뜨고 비난에는 무너지며 무관심 앞에서는 불안이 밀려옵니다. 하루종일 나라는 저울이 쉬지 않고 기울었다. 돌아오기를 반복합니다. 이렇게 살면 마음이 쉴 날이 없습니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하루의 기분이 결정되니 마음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바깥에 있게 됩니다. 누군가 칭찬해야 기분이 좋고 누군가 인정해야 마음이 놓이며 누군가 알아줘야 비로소 괜찮아집니다. 나라는 것에 매여 있으면서도 정작 나의 마음은 늘 남의 손에 쥐어져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아산의 역설이기도 합니다. 나를 세우면 세울수록 나의 평안은 멀어지고 나를 지키려 하면 할수록 상처받을 자리만 넓어집니다. 나를 단단하게 세워야 흔들리지 않을 것 같지만 실은 단단하게 세울수록 작은 바람에도 크게 요동치게 됩니다. 나이가 들면 아상은 더 교묘한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젊을 때의 아상은 드러나기라도 합니다. 내가 잘났다. 내가 옳다 이렇게 겉으로 나오기에 알아차리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아상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안으로 파고듭니다. 내가 이만큼 살아왔는데 내가 이 나이에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내가 평생 참고 살았는데 이런 마음은 아상이라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자존심이라고 느끼고 당연한 권리라고 느끼며 살아온 세월에 대한 존중이라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아내도 내 이름은 축이 단단히 서 있으며 그 축이 흔들릴 때마다 괴로움이 올라오는 구조는 같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런 경험이 있으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별것 아닌 일이었는데 마음에 오래남아 잠자리에까지 따라온 적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며칠이 지나도 마음속에서 되풀이되며 그때 느꼈던 감정까지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경험도 있습니다. 그것이 떠나지 않는 이유는 그 일이 나라는 그림에 부딪혔기 때문입니다. 아상이 단단할수록 지나간 일도 쉽게 놓이지 않습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인육선인의 이야기를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이뉴선이는 전생의 부처님이시며 몸을 칼로 베이면서도 분노하지 않으셨던 분입니다. 그때 내게 아상이 있었다면 반드시 분노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몸을 베이는데도 분노가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것이 없었기에 상처받을 주체도 없었고 상처받을 주체가 없었기에 분노가 일어날 자리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참는 것과 다릅니다. 참는 것은 나라는 것이 서 있는 상태에서 분노를 억누르는 것이고 아상이 없는 것은 분노가 일어날 바탕 자체가 사라진 경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참는 것을 수행이라 여깁니다. 화를 삼키고 서운함을 눌러 담고 억울함을 속으로 사깁니다. 그러나 삼킨 화는 사라지지 않고 몸 어딘가에 쌓여. 갑니다. 오래 참으면 병이 되기도 하고 어느 순간 한꺼번에 터지기도 합니다. 참는 것은 불을 덮어 놓는 것과 같아서 겉으로는 꺼진 것 같지만 안에서는 여전히 타고 있습니다. 아상을 놓는 것은 불의 장작을 넣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장작이 없으면 불은 스스로 꺼지게 됩니다. 억지로 끄려하지 않아도 탈 것이 없으면 저절로 사그라집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같은 일을 겪어도 어떤 날은 화가 나고 어떤 날은 괜찮을 때가 있습니다. 같은 말을 들어도 컨디션이 좋을 때는 흘려보내고 지쳐 있을 때는 깊이 꽂히기도 합니다. 화가 나는 것은 그의 자체 때문이 아니라 나라는 상이 그 순간 얼마나 단단하게 서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같은 칼이 와도 나라는 것이 얇으면 스쳐 지나가고 나라는 것이 두터우면 깊이 베이게 됩니다. 아상의 두께가 바로 상처의 깊이를 결정합니다. 그렇다면 아상을 놓는다는 것은 나를 부정하는 것입니까? 나라는 것을 아예 없애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를 없애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나에 갇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물 위에 뜬 나뭇잎을 떠올려 보십시오. 나뭇잎은 물 위에 분명히 있으되 물에 달라붙어 있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면 움직이고 물결이 치면 흔들리지만 물에 매여 있지 않기에 어디로든 흘러갈 수 있습니다. 아상을 놓는다는 것은 이 나뭇잎처럼 되는 것이며 내가 이때 나의 달라붙지 않고 느끼되 그 느낌의 끝까지 끌려가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나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며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그리움도 함께 사라져 버립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길이 아닙니다. 금강경이 말하는 아상을 놓음이란 느끼면서도 메이지 않고 알면서도 붙잡지 않는 경지입니다. 비가 오면 저때 비가 그치면 마르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되 바람이 지나가면 고요해집니다. 여러분 지금 마음속에 내가 라는 말이 도는 자리가 있으신지 살펴보십시오. 그 말이 어떤 모습으로 올라오든 그것이 도는 자리가 바로 아상이 서 있는 자리입니다. 괴로움의 첫 번째 뿌리가 내려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 자리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뿌리는 조금씩 힘을 잃게 되며 알아차림이 깊어지면 내가 라는 말이 올라오는 순간 한 발짝 물러설 수 있게 됩니다. 그 한 발짝이 쌓이고 모여 괴로움의 첫 번째 고리가 풀리게 됩니다. 아산이 괴로움의 첫 번째 뿌리라면 두 번째 뿌리는 인상이며 남이라는 상 나와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나가서면 남이 생깁니다. 이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며 나라는 상이 세워지는 순간 그 맞은편에 남이라는 상이 함께 세워집니다. 거울 앞에 서면 그림자가 생기듯 나를 세우면 남이 생기고 남이 생기면 비교가 시작됩니다. 아상이 혼자서 일으키는 괴로움이라면 인상은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괴로움입니다. 사람 사이에서 상처받는 것 사람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 그 중심의 인상이 있습니다. 비교는 인상이 만들어내는 첫 번째 괴로움입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많이 가졌다. 저 사람은 나보다 인정받는다. 저 사람의 자식은 잘 되는데 내 자식은 왜 그런가? 이런 생각이 올라오는 까닭은 나와 남 사이의 선이 그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선이 없으면 비교할 대상도 없으며 비교가 없으면 부러움도 시기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비교해서 그치지 않고 판단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저 사람은 틀렸다. 저 사람은 옳지 않다. 저 사람은 왜 저런 식으로 사는가? 이 판단 안 해도 인상이 숨어 있습니다. 나라는 기준이 먼저 있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남을 재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판단이 깊어지면 상대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리게 되고 함께 있는 것 자체가 피곤해집니다. 절에서 봉사를 하다가도 함께 봉사하는 사람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괴로워지셨던 경험이 있으셨을 것이며 그것이 판단이라는 이름의 인상입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되 제도할 중생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앞서 아상에서는 내가 했다는 마음을 살펴보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내가 구한 것도 없고 구해 준 대상도 없다는 말씀이며 나와 남의 구분 자체를 놓으라 하십니다. 이것이 인상을 놓으라는 가르침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나와 남을 나누는 선이 단단할수록 관계에서 오는 괴로움이 깊어집니다. 그 선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기대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판단이나 원망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어떤 모습이든 그 밑바닥에는 나와 남을 가르는 선이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 가장 가까운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배우자이든 자식이든 오래된 벗이든 마음 깊이 두고 있는 사람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돌이켜 보면 바로 그 사람에게서 가장 깊은 상처를 받았던 적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먼 사람의 말은 흘려보내면서도 가까운 사람의 한마디에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던 적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며 가까운 사람일수록 인상이 깊기 때문입니다. 남이라는 상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에게 더 선명하게 세워집니다. 가까울수록 기대가 커지고 기대가 클수록 어긋날 여지도 함께 넓어집니다. 모르는 사람이 나를 무시해도 한 시간이면 잊히지만. 가까운 사람이 나를 무시하면 몇 달이 지나도 마음에 남아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만큼 마음을 주었으니 그만큼 돌아와야 한다는 기대감. 자기도 모르게 자라납니다. 그러나 상대는 그 기대의 무게를 모르며 알아도 같은 무게로 돌려주기 어렵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마음을 기다리다 지치면 한때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가장 먼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오래 함께 산 부부 사이에 말없이 벽이 생기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돌아보면 큰 사건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작은 어긋남이 겹겹이 쌓여 마음의 벽이 되었고 그 벽이 높아질수록 같은 공간에 있어도 말이 닿지 않는 답답함이 찾아옵니다. 같은 밥상에 앉아 있어도 눈을 마주치지 않게 되고 할 말이 있어도 입을 다물게 됩니다. 침묵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편안한 침묵과 차가운 침묵입니다. 인상이 단단한 사이의 침묵은 언제나 차갑기만 합니다. 형제 사이가 멀어지는 것도 부모와 자식 사이의 친목이 내려앉는 것도 따져보면 이 벽과 같은 구조입니다. 이 벽의 재료가 바로 인상이며 나와 남 사이의 선이 쌓이고 굳어진 까닭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이 인상은 특히 깊이 자리합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가장 큰 기대를 품는 존재이며 자식은 부모의 그 기대를 가장 무겁게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만큼 키웠기에 이만큼은 해 주어야 한다는 마음 내가 이만큼 희생했기에 알아주어야 한다는 마음이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인상으로 쌓여갑니다. 자식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찾아오는 괴로움은 사랑이 아파서가 아니라 인상이 흔들려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금 누군가에게 서운한 마음을 품고 계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왜 알아주지 않는지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지 속으로 사귀고 계시는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 서운함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거기에 인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나와 다른 존재이며 저 사람은 내 기대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는 마음. 그것이 인상의 모습입니다. 서운함을 오래 품고 있으면 상대의 모든 행동이 그 서운함의 틀 안에서 해석됩니다. 좋은 말을 해도 뒤가 있을 것 같고 잘해 주어도 전에 못 해준 것이 먼저 떠오릅니다. 인상이 만든 틀이 단단해지면 상대가 무엇을 하든 그 틀 안에서만 보이게 되며 이는 그대로의 모습이 가려지게 됩니다. 인상이 만드는 괴로움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상대를 바꾸고 싶어진다는 것이며 저 사람이 달라지면 괜찮아질 것 같고 내 마음을 알아주면 문제가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말을 하고 설득을 하고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상대는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바뀌지 않는 상대를 바꾸려 하면 할수록 괴로움만 깊어지게 됩니다. 바꾸려는 시도가 실패할수록 무력감이 찾아오고 무력감은 다시 원망으로 돌아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문제는 상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바라보는 내 마음의 구조에 있다고 하십니다. 나와 남을 나누고 남에게 기대를 걸고 기대가 어긋나면 괴로워하는 이 구조 자체가 인상입니다. 이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상대가 바뀌어도 같은 괴로움은 반복됩니다. 상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바라보는 틀을 바꾸는 것이 금강경이 가리키는 길입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같은 패턴이 되풀이되는 경험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처음에는 좋았다가 시간이 지나면 같은 자리에서 같은 감정이 올라옵니다. 사람이 바뀌었는데도 괴로움이 같다면 그 괴로움은 상대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인생에서 비롯된 것이며 나와 남 사이에 그어놓은 선의 모양이 같기에 같은 고통이 반복되는 까닭입니다. 인상을 놓는다는 것은 상대를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며 관계를 끊으라는 뜻도 아닙니다. 나와 남 사이에 그어놓은 선의 힘을 줄이라는 뜻입니다. 선을 없앨 수는 없어도 그 선에 매이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 선의 힘이 줄어들면 상대를 바꾸려는 마음이 쉬기 시작합니다. 바꾸려는 마음이 시면 비로소 상대가 보입니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드러납니다. 저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로 아상에 매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 사람도 내가 라는 말에 시달리고 있으며 인정받고 싶고 알아주기를 바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보이는 순간 서운함의 빛깔이 달라지며 원망이 있던 자리의 이해가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이 내 기대에 못 미친 것이 아니라 저 사람도 저 사람 나름의 짐을 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한 발짝 물러서면 관계가 달라집니다. 싸움이 줄고 함께 있는 시간이 편해지며 편해지면 비로소 상대의 말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말이 선이 얇어진 뒤에야 들리게 됩니다. 상대가 변해서가 아니며 내 안에 인상이 얇어졌기에 같은 말이 다르게 들리고 같은 사람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랜 세월 함께해 온 사람과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앉아 있어도 편안한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에는 나와 남 사이의 선이 얇어져 있습니다. 기대도 없고 판단도 없으며 바꾸려는 마음도 없는 그 자리에서 관계는 가장 깊은 평화를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 지금 마음에 떠오르는 사람이 한 분 있으실 것입니다. 그 사람을 향한 서운함이나 원망이 아직 남아 있다면 잠시 그 마음 아래를 들여다보십시오. 나와 남 사이에 선이 얼마나 단단하게 그어져 있는지가 보일 것입니다. 그 선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면 인상이라는 두 번째 뿌리도 서서히 힘을 잃게 됩니다. 세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