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우리들의 이야기

중생상 수자상

작성자空山 내려놓음 마음학교장|작성시간26.06.16|조회수28 목록 댓글 0

그러니까 세상은 중생상이며 세상 전체를 풀이로 나누는 마음입니다. 아상이 나를 세우고 인상이 너를 세웠다면 중생상은 그 너를 넘어 세상 전체를 가릅니다. 저쪽 편과 이쪽 편 윗사람과 아랫사람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모든 존재를 범주에 넣고 줄을 세우는 마음. 이것이 중생상입니다. 인생이 한 사람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괴로움이라면 중생상은 세상 전체를 향한 괴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느낌 왜 착한 사람만 손해를 보는가 하는 부담이 올라오는 것도 중생상입니다. 저 사람들은 왜 저런 식으로 사는가 하는 답답함까지. 이 모든 감정의 바탕에 중생상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세상을 가릅니다. 뉴스를 보면서 저쪽이 옳고 이쪽이 그르다고 나누고 사람을 만나면서 이 사람은 괜찮고 저 사람은 아니라고 나눕니다. 절에서 법문을 들으면서도 저 사람은 신심이 깊고 저 사람은 얕다고 나누기도 합니다. 가족 모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집은 잘 되고 우리 집은 왜 이런가? 저 자식은 효도하고 내 자식은 왜 이런가? 이렇게 끝없이 나누게 됩니다. 이렇게 나누는 것이 왜 괴로움이 되는지 나누는 순간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누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고 분별할 줄 아는 것이 지혜라고. 여기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나눌수록 세상에서 마음 편한 자리가 줄어듭니다. 이쪽이 아닌 저쪽을 볼 때마다 불편해지고 문제가 아닌 아닌 아래를 볼 때마다 안타까워지며 나누면 나눌수록 마음을 놓을 곳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 분별 안에 괴로움이 숨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금강경에서 이렇게 설하셨습니다. 보살이 중생을 멸두하여 무요열반에 들게 하되 실로 멸도한 중생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중생을 구하면서도 구해야 할 중생이 따로 있다고 나누는 마음 자체가 중생상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매우 미묘한 말씀입니다. 좋은 일을 하면서도 누구를 위해 하는가를 나누는 순간 분별이 생깁니다. 이 사람은 도와줄 만하고 저 사람은 아니라고 가르는 마음 이 중생은 제도할 가치가 있고 저 중생은 없다고 나누는 마음이 분별입니다. 선한 의도 안에도 분별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처님께서 가리키고 계십니다. 그 자리에서 기도할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기도하면서도 내 기도는 간절한데. 옆사람의 기도는 형식적이라고 느끼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에 이미 중생상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며 기도의 자리에서조차 세상을 나누는 마음이 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중생상이 얼마나 깊이 우리 안에 뿌리내려 있는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세상을 가르는 마음이 얼마나 단단한지 한번 살펴보십시오.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다고 믿는 마음이 있으며 오른쪽과 그른쪽 위와 아래 안과 밖을 나누는 마음도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나눔이 단단할수록 나와 다른 쪽에 있는 사람을 보면 거슬리고 거슬리면 판단하게 되며 판단이 쌓이면 분노가 됩니다. 뉴스를 보면서 화가 나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도 되는 건가? 왜 저런 사람들이 저렇게 하고 있는 건가? 이런 부담이 올라오셨을 것이며 밤에 누워서도 그 분함이 가시지 않는 경험을 하신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세상을 둘로 갈라놓고 저쪽이 잘못하고 있다는 판단이 그 분함을 끝없이 지켜줍니다. 세상에 잘못된 일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불의가 존재하며 바로 잡아야 할 것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불의를 외면하라 하신 적이 없으며 고통 앞에서 눈을 감으라 하신 적도 없습니다. 다만 중생상의 문제는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의 구조에 있습니다. 저쪽이 그르고 이쪽이 옳다는 나무만에 갇히면 분노는 끝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잘못이 바로 잡혀도 또 다른 잘못이 눈에 들어오며 세상 전체가 잘못된 것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잡으려는 마음이 어느 순간 분노로 바뀌어 있고 분노가 또 다른 나눔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중생상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괴로움입니다. 나 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향한 괴로움이기에 규모가 크고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한 사람에게 서운한 것은 그 사람과의 관계를 돌보면 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전체가 잘못되었다는 느낌 앞에서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해지고. 그 막막함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느낌이 드실 때가 있으셨을 것입니다. 아상의 괴로움은 내가 라는 말에서 시작되고 인상의 괴로움은 한 사람과의 사이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중생상의 괴로움은 아침에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작됩니다. 텔레비전을 켜면 시작되고 이웃의 소식을 들으면 시작되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피할 곳이 없기에 이 괴로움은 하루 종일 마음 한 구석에 머물러 있게 되며 밤에 잠이 들어야 비로소 잠시 쉬게 됩니다. 그래서 중생상의 무게는 세월이 쌓일수록 더 무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중생상의 무게가 더해지는 경험을 하신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젊을 때는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믿었는데 살아가다 보면 바뀌지 않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만큼 살아왔는데 세상은 왜 이 모양인가?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왜 달라지지 않는가? 세상을 마땅히 일해야 한다와 실제로 이렇다로 나누어 놓은 뒤 그 틈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구조입니다. 이 틈이 좁혀지지 않을수록 세상에 대한 피로감이 쌓이며 어느 순간부터는 세상 이야기 자체를 듣고 싶지 않아지기도 합니다. 그것이 중생상이 빚어내는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깊은 괴로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분별의 마음을 놓으라 하십니다. 노후라는 것이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 구별에 갇히지 말라는 것이며 구별한 뒤에 그 구별을 다시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칼로 비유하면 음식을 자르는 데에 칼이 필요하듯 삶을 살아가는 데에 분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음식을 다 자른 뒤에도 칼을 손에 쥐고 있으면 그 칼이 위험해집니다. 분별도 이와 같아서 쓸데쓰고 쓴 뒤에는 내려놓아야 합니다. 필요할 때 들어 올리고 쓰고 나면 곧바로 놓는 것 이것이 금강경이 가리키는 분별의 지혜입니다. 여러분 지금 나를 가장 괴롭히는 판단이 무엇인지 떠올려 보십시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판단일 수도 있고 사람들이 이기적이라는 판단일 수도 있으며 내가 평생 손해만 보며 살았다는 느낌일 수도 있습니다. 그 판단을 잠시 내려놓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대로이고 사람들도 그대로이며 나의 삶도 그대로입니다. 달라지는 것은 단 하나 그 판단에 묶여 있던 분노가 쉬게 된다는 것뿐입니다. 작은 변화처럼 보이지만 실은 큰 변화이기도 합니다. 분노가 시면 마음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드러납니다. 판단이라는 격자창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기에 격자 사이로 빠져나간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 격자를 내려놓으면 잘못된 것만 보이던 눈에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시끄러운 소리 속에서 고요한 선의가 들리게 되며 같은 세상인데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중생상을 놓는다는 것은 세상을 가르던 칼을 내려놓는 것과 같습니다. 칼을 들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배 대상으로 보입니다. 칼을 내려놓으면 같은 세상인데 보이는 것이 달라지며 나무도 보이고 꽃도 보이며 바람도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비가 오면 풀이 자라며 세상은 늘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칼을 쥐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칼을 들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칼을 놓았을 때 비로소 눈에 들어옵니다. 여러분 오래지고 있던 칼은 손에 굳은 살이 박혀서 쥐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됩니다. 세상을 나누는 마음도 이와 같아서 너무 오래 나누어 왔기에 나누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세상을 어떻게 나누고 있는지 가만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칼의 무게를 느끼실 수 있을 것이며 그 무게를 느끼는 순간이 바로 놓아 버림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 뿌리인 중생상이 힘을 잃기 시작하면 세상을 향한 분노가 조금씩 가라앉습니다. 분노가 가라앉으면 그 자리에 고요함이 찾아오며 고요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비로소 나누어져 있지 않은 이는 그대로의 세상이 보이게 됩니다. 네 번째 세상은 수자상이며 시간에 매달리는 마음입니다. 네 가지 산 가운데 가장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가장 뿌리 깊은 집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자상은 앞에 세 가지 상과는 결이 다릅니다. 시간에 매이는 것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 이 상태가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 또는 지나간 것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더 오래 살고 싶다는 마음이 수자상이고. 시간이 없다는 조바심도 수자상이며 젊었을 때는 좋았는데 하는 그리움도 수자상입니다. 시간이 나를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 남은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불안 이 모든 것에 밑바닥에 수자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수자상이 네 가지 상 가운데 마지막에 놓인 데에는 깊은 까닭이 있습니다. 앞에 세 가지 상을 다 놓아도 수자상은 남기 때문입니다. 나에 대한 집착을 놓고 남에 대한 집착을 놓고 세상을 가르는 마음까지 놓았는데 그 고요한 자리에서 이런 마음이 올라옵니다. 이 상태가 영원했으면 이 평안이 계속되었으면 이 순간이 지나가지 않았으면 바로 그 마음이 수자상입니다. 앞에 세 가지 상은 알아차리면 보이기 시작합니다. 네가라는 말이 올라오면 아산이 보이고 남을 바꾸려는 마음이 올라오면 인상이 보이며 세상을 나누고 있으면 중생상이 보입니다. 그러나 수자상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시간에 매달리는 마음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더 오래 살고 싶고 누구나 좋은 시간이 계속되기를 바라며 누구나 지나간 것을 그리워합니다. 이것이 집착이라고 느끼기 어렵기에 수자상은 가장 은밀하고 가장 뿌리 깊은 상입니다. 수행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더 교묘하게 찾아오는 상이기에 부처님께서 마지막에 놓으셨습니다. 여러분 시간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거울을 보면서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들었을까 하고 놀라신 적이 있으셨을 것이며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느끼면서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해지셨을 것입니다. 건강이 흔들리면 수자상이 급격히 올라옵니다. 병원에 다녀오신 뒤에 남은 시간이 갑자기 짧게 느껴지신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옵니다. 아직 하지 못한 것 아직 보지 못한 것 아직 전하지 못한 말 시간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온몸을 조여오게 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당연했던 하루가 갑자기 당연하지 않게 느껴지는 순간 그 자리가 바로 수자상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먼저 떠난 사람에 대한 그리움에도 수자상이 깊이 스며 있습니다. 그 사람이 여기 있었으면 그때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은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지나간 것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며 그 마음이 깊을수록 지금 여기가 텅 비어 보이게 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수자상의 깊은 뿌리에서 올라옵니다. 내가 사라진다는 것 이 의식이 끊어진다는 것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공포입니다. 이 두려움은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다가 건강이 흔들리거나 가까운 사람의 부고를 들을 때 갑자기 올라옵니다. 밤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가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나도 언젠가는 그 생각이 지나간 뒤에 마음이 서늘해지는 경험을 하셨을 것이며 그 서늘함이 쉽게 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자산이 만들어내는 가장 깊은 괴로움이 바로 이 죽음 앞에 서늘함입니다. 과거의 마음을 두면 현재가 사라지고 미래의 마음을 두면 현재가 또 사라집니다. 수자상은 이렇게 지금 이 순간을 빼앗아 가는 상입니다. 50대를 넘기면 시간의 속도가 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루가 빨라지고 한 해가 빨라지며 뒤를 돌아보면 수십 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 있습니다. 어제 갔던 일이 10년 전이고 엊그제 갔던 사람이 이미 세상에 없습니다. 이빨을 앞에서 마음이 서서히 조급해지기 시작합니다. 아직 해야 할 것이 남았는데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데. 마음만 잡고 뒤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이 조급함이 수자상의 가장 일상적인 모습이며 남은 시간을 새고 지나간 시간을 아까워하며 시간과 경주하듯 살아가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 안에서는 쉴 수가 없습니다. 쉬면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고 멈추면 뒤처지는 것 같으며 놓으면 다시 잡을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잠을 자는 것조차 아까운 밤이 있으셨을 것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불안한 오후가 있으셨을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마음이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느낌 몸은 쉬고 있는데 마음만 쉬지 못하는 느낌을 아시는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 불안 안에도 수자산이 조용히 작동하고 있습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이 수자상에 대해 깊은 말씀을 하십니다. 과거 심불가득 현재 심불가득 미래 심불가득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시간에 매달리는 마음 자체를 놓으라는 뜻입니다. 과거의 나는 이미 지나갔기에 붙잡을 수 없으며 미래의 나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만질 수 없습니다. 현재의 남마저도 이 순간 말하는 사이에 이미 지나가고 있기에 어디에도 붙잡을 수 있는 시간은 없습니다. 우리가 후회하고 있는 그 과거도 걱정하고 있는 그 미래도 따져보면 지금 이 마음이 만들어낸 그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거도 미래도 마음속에만 있으며 그 그림에 매달려 괴로워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지난 밤 잠자리에서 지나간 일을 떠올리며 마음이 아팠던 적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 일은 이미 끝났는데 마음속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장면이 되풀이되고 같은 감정이 되살아나며 마치 그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흔들립니다. 다시 수자상의 작동 방식이며 이미 지나간 시간을 마음이 놓지 않고 다시 불러와 괴로워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미래를 향한 걱정도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