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일을 마음이 미리 만들어 내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 일이 실제로 올지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마음은 이미 그 일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며 이것도 수자상이고 시간이 만들어낸 그림에 매달려 있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허무한 말씀이 아니며 오히려 자유로운 말씀입니다.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 붙잡으려는 힘이 빠지며 힘이 빠지면 지금 이 순간이 비로소 열립니다. 수자장에 매여 있을 때 우리는 지금을 살지 못합니다.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걱정하거나 둘 사이를 오가며 지금이라는 시간을 놓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바람이 불고 있고 숨이 들어오고 나가고 있으며 이 법문이 흐르고 있는데 마음은 이 순간에 잊지 않고 어딘가를 헤매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순간을 가만히 느껴보십시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느껴지실 것이며 몸이 여기에 놓여 있다는 것이 느껴지실 것입니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아닌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수만화의 마음을 두어 보십시오.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해지실 것입니다. 시간에 매달리던 마음이 잠시 쉬었기에 고요함이 찾아온 것이며 그 고요함이 바로 수자상이 얇어진 자리의 맛입니다. 수자상을 놓는다는 것은 시간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며 시간의 흐름을 부정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시간에 끌려다니지 않는 것이며 과거에 묶이지 않고 미래에 쫓기지 않으면서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머무는 것을 가리킵니다. 강물을 떠올려 보십시오. 강물은 끊임없이 흐릅니다. 그러나 강물을 바라보는 사람은 강가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흐르는 것은 흐르게 두고 여기 앉아 그것을 고요히 바라봅니다. 시간도 이와 같습니다. 시간은 흐르되 그 흐름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으며 흐름 속에 있으면서도 흐름밖에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헐러가는 강물을 멈추려 하면 손만 아플 뿐이지만 흘러가는 대로 두면 강물 소리가 오히려. 고요하게 들려옵니다. 네 번째 뿌리인 수자산이 얇어지면 과거의 후회가 힘을 잃고 미래의 불안이 힘을 잃으며 지금 이 순간이 비로소 충만해지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나를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시간 안에 온전히 머물게 됩니다. 그때 지금 이 수만 번이 과거의 수십 년보다 깊어지며 지금 이 고요함이 미래에 어떤 약속보다 확실하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시간에 쫓기던 마음이 비로소 쉬게 되는 자리입니다. 그곳이 바로 수자상을 놓은 뒤에 찾아오는 고요입니다. 지금까지 네 가지 상을 하나씩 살펴보았습니다. 아상과 인상과 중생상과 수자상 이 네 가지가 괴로움의 뿌리라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을 읽다 보면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같은 네 가지를 경전의 앞부분과 뒷부분에서 다른 글자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앞부분에서는 사상이라 하셨습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상이라는 글자를 쓰셨습니다. 그런데 뒷부분에 가면 같은 네 가지를 사견이라 하십니다. 악연 인견 중생견 수자견 산이 견으로 바뀌었습니다. 똑같은 네 가지인데 왜 글자를 바꾸셨을까? 이것이 매우 중요한 물음이며 이 물음 안에 금강경에 깊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산과 견은 환자부터 다르며 상은 모습상 자이고 견은 볼견자입니다. 상은 마음이 만들어낸 모습이며 견은 마음이 보고 있는 관점을 가리킵니다. 상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집착이라면 견은 안으로 숨어 있는 집착입니다. 상은 알아차리기 쉽습니다. 감정이 올라오고 말이 나오며 행동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만큼 잡을 수도 있고 고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견은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화를 내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아도 세상을 나누지 않아도 마음 깊은 곳에서 여전히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이 견입니다. 겉으로는 놓은 것 같은데 안으로는 놓지 않은 상태이며 이것이 산과 견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비유하면 산은 연못 위에 떠 있는 낙엽과 같아서 눈에 보이기에 건져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견은 연못 바닥에 가라앉은 진흙과 같습니다. 물이 맑아 보여도 밑바닥에 여전히 남아 있으며 낙엽을 다 건져냈다고 해서 연못이 깨끗해진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이 있으신지 살펴보십시오. 화를 참으려 노력해서 실제로 화를 내지 않게 되었는데 마음속에는 여전히 불편함이 남아 있는 경험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했는데 속으로는 아직 끝나지 않은 느낌이 드셨을 것이며 그것이 바로 견의 모습입니다. 누군가에 대한 원망을 놓으려 노력하여 실제로 원망의 말을 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 사람을 생각할 때면 마음 한 구석에 여전히 불편한 것이 남아 있는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용서한 것 같은데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직 용서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 이야기만 나오면 가슴이 미묘하게 뻐근해지는 경험을 아시는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중생견과 수자견도 이와 같습니다. 세상을 나누지 않으려 노력하였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옳고 그름의 기준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시간에 매달리지 않으려 하였지만 마음이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남은 시간을 세고 있습니다. 겉에 상은 거쳐 가는데 아내 견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차이를 정확히 짚어 주신 것입니다. 산에서 견으로의 전하는 수행이 겉에서 안으로 깊어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행동을 고치고 말을 고치며 드러나는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수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행동과 말은 고쳐졌는데 마음 안쪽에 여전히 미세한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느낌이 찾아왔다면 견해층이에 발을 디딘 것이며 금강경의 뒷부분이 비로소 읽히기 시작하는 자리입니다. 수행을 오래 하신 분들 가운데 이 경험을 더 깊이 아시는 분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아상을 놓으려 노력하였고 실제로 예전보다 화가 줄었으며 비교하는 마음도 많이 가라앉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마음이 올라옵니다. 나는 아상을 꽤 많이 놓았다. 나는 예전과 다르다. 이 마음이 올라오는 순간 새로운 집착이 생긴 것이며 아상을 놓았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악연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견의 가장 교묘한 점입니다. 놓으려고 하면 할수록 놓으려는 그 마음이 또 하나의 붙잡음이 됩니다. 집착을 넣으려는 집착 깨달으려는 집착 수행이 깊어지려는 집착 하나를 놓으면 놓았다는 마음이 일어나고 그 마음을 또 놓아야 하며 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끝없는 고리를 알고 계셨기에 상에서 견으로 글자를 바꾸신 까닭입니다. 상을 놓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며 상을 놓은 뒤에 놓았다는 마음까지 놓아야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상위 첫 번째 층이라면 나는 그 아래에 있는 두 번째 층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두 번째 층까지 꿰뚫어 보셨기에 상을 견으로 바꾸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금강경을 읽으면서 같은 말이 반복된다고 느끼셨던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아상인이 인상이니 하는 이야기가 앞에서도 나오고 뒤에서도 나오기에 같은 말을 되풀이하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같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앞에서는 상을 말씀하셨고 뒤에서는 견을 말씀하셨으며 경전이 점점 더 깊은 층위로 들어가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이것을 알면 금강경 전체를 읽는 눈이 달라집니다. 반복처럼 보이던 구절들이 사실은 나선형으로 깊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같은 자리를 도는 것이 아니라 같은 자리를 돌면서 한 층씩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를 그렇게 한 층씩 깊은 곳으로 이끌어 가고 계셨습니다. 산길을 떠올려 보십시오. 산을 오를 때 같은 방향으로 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풍경이 비슷하고 발밑의 길도 비슷하여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은 올라가고 있습니다. 한 바퀴 돌 때마다 더 높은 곳에 서게 되며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 조금씩 넓어집니다. 아까와 같은 방향인데 아까보다 넓은 세상이 보입니다. 금강경의 구조가 바로 이와 같으며 우리의 수행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수행에도 같은 구조가 있습니다. 한 바퀴 돌았다 싶으면 그 아래에 또 한 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크게 흔들리던 마음이 수행을 통해 잔잔해졌습니다. 그런데 잔잔해진 수면 아래에서 미세한 파문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전에는 큰 파도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파도가 잦아들자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며 이 미세한 파문이 바로 견입니다. 그때 좌절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이만큼 했는데 아직도 남아 있느냐. 언제까지 놓아야 하느냐 하는 마음이 올라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좌절할 일이 아닙니다. 그 아래층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만큼 수행이 깊어졌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층에 상을 놓지 않았다면 두 번째 층의 견은 보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보인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한 걸음 나아간 것이며 그 한 걸음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저를 오래 다니신 분들이 오히려 더 힘들다고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에 처음에는 마음이 편해졌는데 갈수록 더 미세한 괴로움이 보이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놓을수록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것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수행이 퇴보한 것이 아니라 수행이 깊어진 까닭이며 겉에 상이 거쳐져서 안에 견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파도가 잦아들어야 연못 바닥이 보이듯 산이 거쳐야 견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경이 보이기 시작한 분들은 이미 연못에 낙엽을 건져낸 분들이며 그 자리까지 오신 것만으로도 깊은 수행의 결실입니다. 여러분 나는 아직 멀었다는 마음에 드실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수행이 부족하다. 아직도 집착이 남아 있다. 이런 마음이 올라오실 때가 있으셨을 것이며 그 마음 자체를 가만히 바라보십시오. 부족하다고 느끼는 그 마음 안에도 나라는 것이 서 있습니다. 나의 수행 나의 경직 나의 부족함. 이것이 견이며 상을 놓은 뒤에 남아 있는 더 깊은 층에 집착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보인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한 걸음 들어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금강경에서 견을 말씀하신 것은 2층까지 내려가라는 뜻입니다.
수행하고 있다는 마음까지 말씀입니다. 그런 것이 남느냐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상도 놓고 견도 놓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인가. 그리고 또 놓으면 결국 남은 것만 남는 것인가. 아무것도 남지 않는 자리가 정말 부처님께서 가르키신 자리입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이 학문의 마지막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금강경이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점점 더 깊은 곳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상에서 견이로 겉에서 안으로 알아차림에서 알아차림마저 놓아 버리는 자리로 부처님께서 수부리 존자를 이끌어 가신 그 길 위에 지금 우리도 함께 서 있습니다. 산다 놓고 견둬 놓으면 무엇이 있냐고 물으셨습니다. 텅빈 것만 남는 것은 아닌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자리에 이르는 것은 아닌가. 이 물음이 자연스럽게 올라오셨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물음에 대해 금강경에서. 한마디로 답하십니다. 응모소주의 생기심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이것이 금강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며 사상을 벗어난 자리가 어떤 곳인지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낸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사랑하되 집착하지 않고 살아가되 매이지 않으며 행하되 행했다는 마음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텅 비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며 세상에 빠진 자리에 고요함과 자비가 함께 피어나는 것입니다. 꽃이 피려면 씨앗이 들어있던 껍질이 먼저 벗겨져야 합니다. 껍질이 벗겨지면 그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습니다. 사상이 벗겨지면 그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마음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가리키신 자리는 한 자리가 아니라 사상에 가려져 있던 본래 마음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 이르면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과 나 사이의 관계가 달라집니다. 슬픈 일이 생기면 슬퍼하되 슬픔에 빠져나오지 못하는 일이 줄어듭니다.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화를 느끼되 화에 끌려가는 일이 줄어듭니다. 감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끌려다니지 않게 되며 감정이 지나간 뒤 마음 다시 고요해지는 시간이 짧아집니다. 이전에는 한 번 화가 나면 며칠이 가도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서운한 마음이 들면 잠자리에까지 따라왔으며 후회가 시작되면 한없이 깊어지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상이 얇어지면 감정이 올라와도 지나가는 속도가 달라집니다. 구름이 하늘을 지나가듯 감정과 마음을 지나가며 구름이 지나간 뒤 하늘은 다시 맑아집니다. 여러분 비 온 뒤에 하늘을 떠올려 보십시오. 비가 내리는 동안 하늘은 구름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가 그치면 구름이 거치고 하늘이 드러납니다.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을 뿐 하늘은 늘 거기 있었습니다. 사상이 거쳐도 이와 같습니다. 사상이 거치면 마음의 하늘이 드러나네요. 그 하늘은 사상에 가려 있었을 뿐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찾으려 했던 평안은 어디에서 가져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 안에 있었으며 사상이라는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같은 하루를 살아도 세상이 거친 뒤에 하루는 다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해야 할 일이 떠오르기 전에 숨이 먼저 느껴집니다. 사람을 만나면 판단보다 먼저 그 사람의 얼굴이 보입니다. 밤에 누우면 후회보다 먼저 하루의 고요함이 찾아옵니다. 세상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서 세상이 거쳤기에 같은 세상이 다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