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없애지 않아도 깨달음은 드러난다. 깨달음의 노래 마모더라. 생각을 멈추려 할수록 생각은 더 강해집니다. 불안을 없애려 할수록 불안은 더 깊어집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려 할수록 마음은 오히려 더 소란스러워집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 우리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각을 밀어내려합니다. 감정을 없애려 하고 마음을 깨끗하게 고치려 하고 어떻게든 고요한 상태를 붙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억지로 고치려는 그 마음이 이미 또 하나의 집착이다
붙잡지 않으려고 애쓰는 마음조차 다시 하나의 집착이 되는 것입니다. 마하무드라는 말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만들려 하지 말라 생각을 적으로 삼지 말라. 감정을 밀어내지 말라. 다만 보라 일어나는 것을 보라 사라지는 것을 보라 붙잡으려는 마음을 보라. 그리고 끝내보라. 자신 안에 당연히 있다고 믿었던 그 나마저 본래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이것이 마무드라입니다. 마하무드라는 대수인 즉 큰 인장이라는 뜻이죠. 모든 현상 위에 이미 찍혀있는 공성과 광명의 인장 무엇이 일어나도 우리 마음의 본성은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다는 대지의 표식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도 그 생각은 마음 밖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감정이 일어나도 그 감정은 우리의 본성을 더럽히지 못하지요. 구름이 아무리 일어나도 허공을 파괴할 수 없듯이 생각이 아무리 일어나도 우리 마음의 본성을 훼손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음을 없애는 길이 아니라 마음의 본성을 보는 길로 들어갑니다. 생각을 죽이는 길이 아니라 생각의 본성을 보아 생각에 더 이상 속지 않는 길로 들어갑니다.
깨달음은 먼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생각을 붙잡지 않는 바로 그 자리 지금 이 마음을 조작하지 않는 바로 그 자리 거기에 이미 깨달음의 문은 열려 있습니다. 지금부터 밀교의 깨달음 마하무드라의 노래를 시작합니다. 생각이 없을 때만 평화롭다면 그 평화는 조건에 묶인 평화입니다. 하지만 생각이 일어나도 그 생각의 본성이 비어 있음을 안다면 그 평화는 더 이상 생각에 묶이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마우드라의 깊은 맛이 있습니다.
생각을 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생각은 오히려 길이 됩니다. 왜냐하면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 생각의 본성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없으면 생각의 공성을 볼 기회도 없습니다. 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바의 공성을 볼 기회도 없죠. 불안이 일어나지 않으면 불안의 공성을 볼 기회도 없습니다. 그러니 수행자는 생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속지 않을 뿐입니다.
도반 여러분 마무드라.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다음 개송을 들어 보십시오. 생각이 일어나면 그 자리에서 보라. 생각은 어디서 왔는가? 어디에 머무는가? 어디로 사라지는가? 아무리 찾아봐도 온 곳이 없고 머무는 곳이 없고 간 곳이 없다. 그러나 분명히 나타났으니 그것은 완전한 없음도 아니다. 나타났으나 잡히지 않으니 그것은 실체가 아니다. 이 둘을 함께하는 것이 마하모드라의 무리다. 마음은 공합니다. 그러나 알지요.
생각은 비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타납니다.
감정은 실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경험되죠.
그러므로 공은 없음이 아닙니다. 공은 나타나는 모든 것이 스스로의 고정된 실체를 갖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마음은 비어 있으나 밝고 마음은 밝으나 붙잡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마무드라의 문이 열립니다. 먼 곳의 깨달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 활동하는 내 마음의 본성을 보는 수행입니다. 잠부 마음은 비어 있으나 밝다.
마하모드라의 핵심은 비어 있음과 밝음이 돌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비어 있기만 하면 허무로 떨어지고 밝기만 하면 영원한 참나. 즉 아트만 사상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본성은 비어 있으면서 밝습니다. 밝으면서 비어 있죠. 이것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만 지금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소리가 들립니까? 들립니다. 그들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들음을 손으로 잡을 수 있습니까? 잡을 수 없습니다.
지금 생각이 일어납니까? 일어납니다. 그 생각은 분명히 경험됩니다. 하지만 그 생각의 모양을 꺼내서 보여 줄 수 있습니까? 보여 줄 수 없습니다. 그건 불가능하죠. 마음은 구체적인 실체도 아니지만 분명하게 작용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물건처럼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것도 역시 아닙니다 일체로서의 자아는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의 본성입니다
다음 개송을 들어 보십시오. 마음은 찾으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안다. 아무것도 없는 무도 아니고 구체적인 실체가 있는 물건도 아니다. 비어 있으나 팔고 밝으나 머물지 않는다. 이빈 밝음이 본래의 자리다. 이것을 밖에서 찾지 말라. 지금 하는 이 마음이 깨달음의 문이다.
여기서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하는 이 마음이 깨달음의 문이다라고 하면 어떤 영원한 참나를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가면 불교가 아닙니다. 마하모드라는 영원한 자아를 세우지 않습니다. 붙잡을 수 있는 마음 소유할 수 있는 참나 변하지 않는 영혼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상상을 놓게 합니다. 마음은 밝습니다. 그러나 자아라는 주인이 없는 것이죠. 앎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소유한 자는 찾을 수 없습니다. 보는 작용은 분명히 있죠. 그러나 보는 잘하는 실체는 없습니다. 불안은 일어납니다. 그러나 불안을 아는 자리에도 불안이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습니다. 화는 일어납니다. 그러나 화를 나는 자리에도 과내는 주인공 즉 자아는 끝내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유입니다. 없습니다. 바로 그 무화의 자리가 마음의 본성을 여는 분입니다. 자부 붙잡는 차를 찾아보라.
젠감 그 자체가 괴로운 것은 아닙니다. 생각을 자신과 동일시할 때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죠. 이걸 똑뛰기 이해해야 합니다. 감정이 문제가 아닙니다. 감정의 내 감정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괴로움은 깊어집니다. 그러므로 마음우드라의 수행은 생각을 분석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깊이 들어갑니다. 이 생각을 못 잡는 차는 누구인가? 화가 났을 때 내가 화났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날은 어디에 있습니까? 몸입니까? 느낌인가요? 생각입니까? 기억인가요? 의식입니까 찾아보십시오
화는 있습니다. 그러나 화난 자는 잡히지 않습니다. 불안은 있습니다. 그러나 불안한 차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슬픔은 생겨납니다. 그러나 슬픈 자는 찾으면 없습니다. 괴로움을 겪는 실체로서의 자아는 없다.
이 말은 고통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너는 없다라고 차갑게 말하라는 뜻도 역시 아니죠.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비는 더 깊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괴로워하는 이유가 못난 나가 있어서가 아니라 본래 없는 나를 있다고 믿었기 때문임을 정확하게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왜 일이 못났을까? 나는 왜 이렇게 실수를 많이 할까?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많을까? 이렇게 자책하지 마십시오. 다만 보십시오. 생각이 일어났다. 불안이 일어났다. 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나라고 붙잡을 만한 실체는 없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자기 자신에게 벳푸는 가장 깊은 자비입니다. 안개와 싸우지 않습니다. 빛을 보되 빛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서 마음은 스스로 길을 드러냅니다. 함께 공부해 주십시오. 이 채널은 괴로움의 뿌리를 부처님의 지혜로 비추고 생각과 감정에 속지 않는 길을 함께 나누는 수행의 자리입니다. 이곳은 불교 전문 채널 괴로움은 허구다입니다. 6부 움직임과 고요함은 둘이 아니다.
초보 수행자는 고요함을 좋아하고 움직임을 싫어합니다. 생각이 없으면 수행이 잘 된다고 느끼고 생각이 많으면 수행이 망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고요함도 마음이고 움직임도 마음이다.
생각이 없을 때 고요함도 마음의 나타남이고 생각이 일어날 때의 움직임도 마음의 나타남입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만 취하고 하나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고요함에 집착하면 그 고요함은 또 하나의 감옥이 됩니다. 생각 없는 상태만 좋아하면 삶의 현장에서 무너집니다. 누가 한마디만 해도 마음이 흔들리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생기면 바로 괴로워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요함만 수행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죠. 마하모드라는 고요함 속에서도 자신의 본성을 보고 움직임 속에서도 마음의 본성을 보라고 합니다. 앉아 있을 때도 마음을 보고 걸을 때도 마음을 보고 말할 때도 마음을 보고 화가 날 때도 마음을 보고 웃을 때도 마음을 봅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알게 됩니다. 움직임은 고요함을 떠나 있지 않고 고요함은 움직임을 막지 않는다. 파도가 바다를 떠나 있지 않듯이 생각은 마음의 본성을 떠나 있지 않다. 음 다음 개송을 들어 보십시오. 고요할 때도 마음이고 시끄러울 때도 마음이다. 파도가 일어나도 바다이고 파도가 잠잠해도 바다이다. 움직임을 버리고 고요함을 찾지 말라. 고요함을 못 잡고 움직임을 두려워하지 말라. 움직임의 본성을 보면 그것이 곧 고요합니다. 고요함의 본성을 보면 그것도 머물 곳이 없다. 이것이 깊어지면 수행자는 삶을 피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피해서만 평화로운 것이 아닙니다. 소리를 피해서만 고요한 것이 아니죠. 생각을 피해서만 깨끗한 것이 아닙니다. 소리 속에서도 소리의 공성을 봅니다. 관계 속에서도 관계의 무화를 봅니다. 일 속에서도 일어나는 마음의 본성을 봅니다. 이때 삶 전체가 수행처가 됩니다. 어 부엌도 수행처이고 길위도 수행처이고. 대화 속도 수행처이고. 고통의 순간도 수행처입니다.
마하모드라가 깊어지면 따로 깨달음의 방을 찾 찾지 않습니다. 지금 이 마음이 문이고 지금 이 생각이 기리고 지금 이 괴로움이 마음의 본성을 드러내는 거울입니다. 정말 멋지죠? 이런 게 바로 마하드라의 심오한 매력입니다. 79. 내 문과 한 맛 마하모드라에서는 주행의 깊이를 네 문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흩어진 마음이 한 곳에 모이는 분 분별의 이름표가 떨어지는 분 모든 경험이 한 맛으로 열리는 분 마침내 닦는 자와 닦을 법이 함께 쉬어지는 분 처음에는 마음이 흩어짐. 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봅니다. 다음에는 생각과 감정에 붙은 이름표가 떨어져 나갑니다. 이건 좋다 나보다 내 것이다 나를 해친다. 나는 안 된다. 이런 이름표들이 조금씩 힘을 잃습니다. 그러다 더 깊이 들어가면 모든 경험이 한마스 열립니다. 한 맛이라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똑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천과 악을 구분하지 말라는 뜻도 아니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의미도 역시 아닙니다. 한 맛은 윤리의 부정이 아닙니다. 분별없는 방종이 아닌 거죠? 한 맛은 모든 경험의 본질 본성이 공하다는 뜻입니다. 기쁜 경험도 공하고 슬픈 경험도 공합니다. 칭찬도 공하고 비난도 공하죠. 전공도 공하고 실패도 공합니다. 물론 현실에 나타나는 모양은 다릅니다. 그러나 본성은 모두 동일하며 모두 붙잡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는 내재된 구체적인 실체가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본성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경험은 한 마시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머리로만 알면 위험합니다. 다 공허하다 하면서 타인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한 맛이다 하면서 업과 인과를 무시하면 안 됩니다. 진짜 한 맛을 본 사람은 오히려 더 조심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공학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서로 의지에 일어남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마음의 씨앗이 됩니다. 내 행동 하나가 이념의 그물 속에서 다시 돌아옵니다. 공은 무책임이 아니죠. 공은 깊은 책임입니다. 붙잡을 실체가 없기에 모든 것은 서로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깊어질수록 자비도 깊어져야 합니다.
이어지는 멋진 개성을 들어 보십시오. 기쁨이 오면 기쁨의 본성을 보라. 슬픔이 오면 슬픔의 본성을 보라. 칭찬이 오면 칭찬의 빈 울림을 보라. 비난이 오면 비난의 빈 울림을 보라. 모양은 천갈래이나 본성은 모두 한 맛이다. 한 맛을 안 자는 아무렇게나 살지 않는다. 공을 안 자는 더 깊이 자비롭다.
도반 여러분 여기서 잠시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아직도 좋은 경험만 수행해. 재료로 삼고 있지는 않은가. 평화로운 순간만. 마음 공부라고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괴로운 일이 오면 주행이 깨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은가
마하무드라는 말합니다. 그 순간을 보라 바로 그때 보라. 마음이 흔들릴 때 흔들림의 본성을 보라. 억울함이 올라올 때 억울함의 본성을 몰아. 미움이 올라올 때 미움 안에서 나라고 붙잡을 것이 있는지 보라.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며 괴로움은 해탈의 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