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우리들의 이야기

마음공부 하는 이유

작성자空山 내려놓음 마음학교장|작성시간26.06.19|조회수53 목록 댓글 0

그거를 향상시키는 데는 관심이 없다. 자신으로 생각하는 당신은 유령일 뿐이며 당신의 본성 즉 진짜 당신은 이미 있습니다. 그랬어요? 어 우리 생각에는 이제 또 우리 많은 부자분들이나 절이 오는 분들은 음 향상되고 싶어서 온단 말이에요. 지금의 나 지금의 나 여기 뭔가 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서 아 이걸 조금 더 이제 변화시키고 싶어서 화가 많다든지. 욕심이 많다든지 번뇌망상이 많다든지 어 삶의 괴로움 고통 어떤 해결하지 못한 어떤 괴로운 고통으로 허덕인다든지. 그런 것들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으로 뭔가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변할 수 있을까? 이런 마음으로 이제 저를 찾아오죠. 그런데 뭐랄까 이 공부는요. 음 방편으로는 그렇게 이제 여러분 인생의 향상을 좀 가다듬는 그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어요. 근데 그리고 또 실제로 이 공부를 하면 삶에 좀 좋아지는 게 많이 있어요. 그런데 그걸 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걸 보고 내가 공부가 잘하고 있구나. 저래 갔더니 인생이 좀 잘 풀리는구나. 힘든 일이 없어지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내 공부가 뭔가 이렇게 진척되는 것 같은 뭔가 부처님의 가피를 받는 것 같은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는데 아 이게 방편을 얘기하지 않고 아 근본을 말씀을 드린다면 어 내가 향상되는 공부가 아니에요. 내가 향상되는 공부는 어 이 모양의 세계 이 몸이 나다. 몸과 마음 이게 나다라고 생각하면 얘를 향상되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잖아요. 얘가 좀 더 건강해지고 싶고 좀 예뻐지고 싶고 또는 남들한테 욕 안 먹고 싶고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고 집에 돈이 좀 있었으면 좋겠고. 이런 여러 가지 향상되는 모습들은 전부 다 이에 대한 이야기죠. 이 몸뚱이에 대한 이야기란 말이에요. 나에 대한 이야기란 말이에요. 아상 내가 나라고 믿었던 그 같잖아. 걔는 끊임없는 향상을 원해요. 끊임없이 나아지고 싶어 해요. 끊임없이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갖고 싶어 하고 만족하는 법이 없어요. 끝까지 뭔가를 추구하고 쫓아갑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좋은 인생을 향해서 그런데 보세요. 내가 어떤 걸 생각하는지 사람마다 다 다르죠. 어떤 사람은 돈 어떤 사람은 명예 어떤 사람은 건강 원하는 건 다 다를지라도 그 원하는 걸 얻고 싶어서 추구하고 달려가다가. 원하는 거를 탁 얻었어요. 오끝나서 기뻐요. 절에 가서 기도했더니 내가 원하는 걸 얻게 됐다. 기쁘단 말이야. 근데 그게 영원한 기쁨이 아니죠. 임시로 막 만들어낸 기쁨이잖아요. 조작해 낸 기쁨이란 말이에요. 생겨난 기쁨이에요. 그러면 생겨난 것은 없다가 생겨난 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은 전부 다 똑같은 과정을 겪거든요. 생노병사 성주계공 생주이멸 2년생 이념별 즉 생겨난 건 전부 다 멸해요. 그럼 여러분 인생에 뭔가 원하는 거 있잖아요. 돈 명예 권력 지위 건강 다 좋은데 그걸 원해서 어떤 건데 원해가지고 달성했어요. 추구해서 얻었어요? 그거는 추구해서 얻은 것이기 때문에 2년이 다 하면 사라져요. 반드시 전부 다 본 명의 권력 집이 무엇이든 내가 추구해서 얻은 것은 반드시 사라져요. 그런데 이 똑같은 원리예요? 인연따라 생겨난 모든 것은 잠시 머물러 있다가 2년이 다 하면 반드시 사라진다는 법칙 그런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이 법칙 속에서 속것도 속고 또 속고 또 속으면서도 계속 요구하는 거 사는 거예요. 간단하게 유치원 때는 좋은 장난감을 원하다가 얻었는데. 내가 마음이 뜨거나 내가 이제 더 이상 장난감이 필요 없을 수 있잖아요. 초등학교 올라가면 내가 싫어졌거나 그 장난감이 없어졌거나. 그래서 사라져요. 내가 추구하던 것 더 이상 그걸 추구하지 않아요. 학창 시절에는 성적을 추구하다가 취직하고 나면 그 추구심이 사라져요. 무엇이든 내가 추구해서 만들었던 모든 것 만들어낸 모든 것 이 세상에서 내가 원해서 그걸 가지고 싶었는데 그렇게 해서 가지게 된 모든 것은 반드시 사라진다. 너무나 명명백백한 거예요. 반드시 사라진다. 그러면 이제 이 게임이 뭐 그러잖아요. 무슨 저 그 뭐 이 게임을 많이 해봤다. 이거 뭐 무슨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소린가? 뭐 정치에서도 막 하는 것 같고 이게 맨날 해본 게임인데 맨날 농담 없는 거예요. 우리는 집착하는 걸 가지려고 죽어라고. 노력해 가지고 가져가지니까 기쁘다고 생각해요. 근데 가져봤는데 좀 이따 그게 그렇게 깊은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놓고 그다음에 내가 이제 원하는 거 다 가져봤어 하고 이제 또 다른 걸로 원하는 거예요. 다른 거 못 좀 좀 재밌는거 없을까? 쌈빡한 거 없을까? 근데 원리가 어떠냐? 내가 원하는 것은 2년 따라 생겨났을 때 뜯고 생겨나지 않을 수도 있고 심지어 원한다고 생겨나지도 않아요. 어떤 건 생겨나고 어떤 건 안 생겨나요? 자기 자기 없다라. 이거는 이제 자기 인연 따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내가 원한다고 다 되지도 않아요. 전 세계 모든 사람이 부자를 원하지만 모두 다 부자가 되지 않거든요. 그럼 자기가 부자가 된 씨앗을 심어 놨으면 인광보로 많이 베풀었고 나누고 복을 짓고 이렇게 살았으면 오프제가 될 수도 있겠죠. 원했더니 부자가 되더라. 이럴 수도 있어요. 근데 그 씨앗이 없는 사람은 나는 아무리 원해도 부자가 안 되던데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원하는 것은 첫째 될지 안 될지 모르고요. 우리가 절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내가 죽어라고 원해도 내가 인연이 그 인연 10만원 2년이었으면 이 우주법계가 연으로서 도와주질 않으면 조그맣게 하나도 그 성취를 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원하는 것도 그니까 성취가 될지 안 될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그리고 성체가 되었다. 한들 그게 성취가 아니에요. 기쁨이 아니 진정한 기쁨이 아니에요. 왜냐면 성취하고 나서 기쁘다가 금방 또 다른 걸 원할 거니까요.
처음에 다섯 평대는 원룸에 살다가 다섯 평대 원룸도 아니에요. 처음에 한 두 평 세 평대는 독서실 같은 데와 가지고 살다가 그런 경우 있죠. 한 2평밖에 안 되는 독서실에 딱 누우면 끝나는 진짜 두 평인 것 같아. 두 평밖에 안 되는 독서실에 살다가 짐도 없죠. 뭐 서울까지 와서 두 평의 뭔 짐을 놓겠어요? 가방 안에서 짐 뺏 옷 빼 가지고 입고 빨아서. 가방 안에 듣고 이 책상 위에 올리고 그거밖에 못 해요. 그 그 2평짜리 독서실에서는 그런데 살면 이제 한 6평쯤 되는 원룸에 가면 진짜 살 것 같단 말이야. 이 드넓은 이 원룸에 뭘로 채워야 되지 싶고 이제는 이제 조금 조금씩 살림을 갖다 채운다니까요. 밥통도 갖다 놓고 두 세 평짜리 독서실에는 밥통을 못 갖다 놔요. 나가서 먹어야지. 그도 한 8평쯤 되는 좀 더 넓은 뭐 이런 데 가면요. 되게 넓다니까요. 그럼 이제 산림살이가 다 막 생긴다니까요. 근데 그래 봐요. 이제 15평으로 날 것이고 그렇게 해서 살다 보면 또 25평으로 나날 것이고 원하는 건 이룬데 자꾸 더 넓은 걸 원하고 더 좋은 뭐 무슨 비싼 동네 이런 걸 원한단 말이에요. 끊임없이 원하는 것이 계속될 뿐이지 완전한 만족이 없어요. 여기서 이제 눈치를 채야 되는 거예요. 무슨 눈치를 채냐면 아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운이 좋아서 얻었다 하더라도 그게 진짜 행복은 아니구나. 예를 들어 꿈에 그리든 예를 들어 뭐 한 50평짜리 아파트에 비싼 아파트에 드디어 성공해서 갔어요. 그리고 내가 정말 대학 다닐 때 너무너무 사랑했던 그런데 내가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나를 거들떠도 안 보든 친구를 결국 5년 10년을 쫓아다녀서 결국 결혼을 해서 그 사람과 50 형 아파트에 산다. 모든 게 이루어졌잖아요. 근데 그게 이루어지지 않은 거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어요. 50평짜리 아파트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지옥까지 살 수도 있죠. 너 집안 청소를 이렇게밖에 안 하냐? 아기 너 기저귀를 왜 네가 해야지 나한테 시키냐. 청소를 네가 해야지 나한테 내가 이거 네가 하냐. 내가 하냐 뭐 이러면서 그런 거 가지고 싸울 수 있잖아요. 막 그냥 계속 싸우느라 그냥 그 부잣집 꿈에 그리는 그 아름다운 최상의 조건 속에서 그 안에서 지옥처럼 살 수 있죠. 그런 사람 많거든요. 그런가 하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데 돈도 없고 뭐 그냥 살림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그냥 반지하 월세에서 처음 신혼을 시작해도 두 사람이 사람이 서로 좋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서로 도와주고 싶고 그러니까 결혼해서 내가 저 사람 덕 좀 봐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결혼하면은 다 괴롭게 살잖아요. 근데 서로가 아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참 행복하게 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힘들지 않게 해 줄 수 있을까? 저 사람이 힘든 거는 내가 힘든 게 낫지. 그 서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면 반자방에서도 너무나 행복할 거 아니에요. 그건 보세요. 우리가 원하던 것을 이루었어도 그게 행복인 건 아니거든요. 또 다른 걸 끊임없이 추구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딱 눈치 채는 것이 뭐냐 하면 아 추구하는 걸 이루는 것이 행복이 아니구나. 원하던 것을 이루는 것이 행복이 아니구나. 그러면 뭐가 사라질까요? 추구심이 사라지잖아요. 그건 추구심이 사라진다라는 말은 뭐죠? 물질적 정신적 뭐 일체 모든 원하고 바라고 하는 것이 그 추구심이 추구하지도 않는다는 게 아니라 추구하되 추구하는 법없이 추구한다. 즉 원하는데 거기에 집착 없이 원한다는 소리예요. 그러면 이제 이번 생 이제 졸업이에요. 졸업 왜냐하면 그 추구심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면 어떤 삶을 살까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지금 지금 온전해요. 그래서 사실은 삶은 이대로 완전합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지금 눈앞에서 안전하다는 소리거든요. 아 잠깐만요. 제가 요 돈만 좀 벌고 나면 그때 완전 노릴게요. 뭐 제가 뭐만 하고 나면 안전해질지도 몰라요. 그거는 불안전이에요. 진짜 안전한 게 아니에요. 삶은 이대로 완전하다 그랬잖아요. 이대로 지금 이대로 지금 완전함을 느끼지 못하고 지금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지금 행복을 느끼고 누리고. 만끽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걸 소유하더라도 못 느껴요. 누리지 못해요. 왜냐하면 이 진정한 행복은요 어 지금 있는 것을 누리는 감각의 행복이거든요. 근데 아무리 많은 걸 소유해도 그걸 즐길 줄 모르면 그걸 누릴 줄 모르면 많은 걸 가지고서도 끊임없이 허덕일 수 있어요. 억다 없다 하면서. 그 지금 이미 있는 거 지금 있는 이대로의 나 내 조건을 바꾸고 나서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내 조건이 바뀌고 나야 지금 눈앞에서 바뀌고 나야 그 행복을 느끼고 누리고 만끽하는 그 감각이 살아나요. 본연의 감각이 그래야 그걸 더 많이 느낄 수 있도록 인과 홍보가 펼쳐져요. 미래에도 지금부터 마음에 안 들고 부족하고 없고 결핍돼 있고 이런 걸 계속 느끼면 지금 느끼는 걸 그대로 느낄 수밖에 없도록 미래가 펼쳐지거든요. 그게 인과 안보거든요. 그래서 이런 게 있어요? 이제 그 선생님들 이제 큰 절에 찾아가 가지고 스님 제가 이런 게 되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해 달라 그랬잖아요. 기도해 달라고 하면은 이제 스님이 기도문 이렇게 써 가지고 추검 카드 빼 가지고 추검 카드 무슨 발언 이래 가지고 기도를 해 줘요. 특별히 독불공을 해 줘요. 독불공 이렇게 혼자 그 사람 혼자 그 사람이 발언만을 위한 기도를 회전단 말이에요. 그렇게. 해주면 이게 이게 되게 감동스러운 거예요. 와 우리 가족을 위해서 우리 아이의 건강을 위해서 시험 합격을 위해서 스님이 저렇게 한 시간 동안 더운 여름날 더 죽겠는데. 저 저 저기 반팔도 아닌 긴팔에 옷을 입고서와 가지고 땀볼 벌리면서 목탁을 치면서 절까지 하면서 막 관심버사를 하면서 저렇게 해 줬다니 얼마나 고마운가 하고 막 감동을 하고 감사합니다 하고 간단하게. 그러고 나서 어 기도 될 사람은 되고 안 될 사람은 안 되거든요. 저래서 기도를 해줘도 대학교 합격할 사람은 합격하고 합격 안 할 사람은 합격 안 해요. 아이 그렇지 않아요 만약에 그게 아니면 그건 여러분 저래 다니면 안 돼요. 절에 가서 기도했더니 절에 가서 기도하는 모두가 전부 다 원한데 합격했다. 그런 불교 그게 불교면 빨리 도망쳐 나와야 돼요. 그게 뭐냐 뭐와 비슷하냐면 학교에 100명이 다 같이 공부를 해요. 공부 열심히 하는 애들 있고 열심히 안 한 애들 있어요. 열심히 안 한 애가 절에 가서 기도해 가지고 좋은 대학 갔어요. 이거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잖아요. 이건 올바른 사회가 아니거든요. 그거를 조장하는 게 불교가 아니에요. 인간복 공부 열심히 한 사람은 잘 되고 열심히 안 한 사람은 좀 안 되고 아 그게 정당한 인간부죠. 그래서 어 우리 생각에 애철에 가서 물론 기도하고 또 우리 아이 병원에서도 플라시보 약이 있잖아요. 그냥 아무 아무 약이나 그냥 덩어리 뭐 설탕 덩어리 같은 거 하나 줘도 야 이게 의사 선생님이 명의께서 의사 선생님이 나한테 준 약이야. 그 먹고서 돌아올 때 이미 약국 갔다 병원 갔다가 약을 먹고 집으로 걸어 가는 동안 괜찮아진 거 같아요. 그래도 키키잖아요. 여기 플라시보 효과가 센 이유가 있어요? 플라시보 효과가 어마어마해요. 왜냐하면 이 세상이 통으로 다 플라시보예요. 그 무슨 말이에요? 이 세상이 전부 다 자기 마음 마음으로 만든 세계거든요. 마음으로 두려워하면 그 두려움이 실제 벌어질 것 같이 느껴지고 그러면 그 일이 벌어질 수 있어요. 마음이 만들어낸 세계예요. 이 세상은 그래서 보세요. 음 진짜 제가 이제 엊그제 수요 목표 때 이제 1년 목표 때 그 말을 했어요. 예 뭐 선도제를 해 달라든 괴로움이 있든 뭐 시험에 합격해 달라든 어떤 힘든 일이 있어서 절에 와서 축원해 주세요. 이렇게 하면 하거나 이런다. 근데 진짜 축어는 진짜 축어는 그렇게 뭐 마음을 내고 아 돌아가신 부모님과 제가 둘이 아니니까 한 마음이니까 한 마음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내는 게 진정한 1000분 천도일일까요? 어 말은 좋은데 그것도 좋은데 그 또한 부모님이 있고 내가 있어서 우리 둘이 하나라고 말하는 거는 이미 본래 하나가 아니란 소리잖아요. 그렇게 마음을 내는 것도 벌써 둘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말을 했어요. 아니 그냥 눈빛만
마주쳐도 벌써 기도가 끝나고 추근이 끝난 거지. 그렇게 얘기를 했단 말이에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측면이 있잖아요. 이 말이 그러니까 이제 이 말을 낙
못 알아듣고는 그 말을 듣고 누가 이제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와? 대박 역시 스님들은 대박 야 저 저는 언제쯤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언제쯤 사람들을 보고 눈빛만 탁 봐도 그 사람 기도 기도를 해 주고 축언을 해 주고 내가 기도한 게 이루어지게 해 주고 그 사람에게

성취하게 해 주고와 그 정도 힘이 있는 게 스님이군요. 역시. 불교는 대단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더란 말이죠. 제가 그 얘기를 한 게 아니에요.

그 절에 가서 기
이러이러한 고민이 있습니다. 털어놨더니 스님의 눈빛을. 한번 딱 쏴 가지고 그러고 나서 딱 돌아가니까 이루어졌더라 이 얘기를 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 절에 가서. 기도해 주세요 했단 말이야. 그런데 스님이 이렇게. 얘기를 해요. 아 기도가 이미 다 이루어졌습니다.
집에 가서 편안하게 이제 사시면 됩니다. 이러면 뭔지 모르지만 뭔가 저 스님만의 어떤
뭐 비법 가지고 이뤄줬게 했나 보다 하고 이제 믿음을 가지고 갈 거 아니에요. 그럼
그거 큰 팀들만 할 수 있는 보수들일까요? 기도를 이루어지게 하는 그
축언 놀라운 추원은 누가 할 수 있는 걸까요? 큰 세림만 하는 걸까요
돌만 하는 걸까요? 그럴 것 같으면 도인한테 못 부탁해. 가지고 도인이 추가해주면 다 되게요? 다 안 된다니까요. 부처님이 비서실장으로 데리고 있

한 존재 평생 사촌동생이고 메시저였단 말이에요. 얼마나 아끼는. 얼마나 고맙겠어요. 내 수발을. 다 들었는데 평생 그럼 부처님 입장에서

딴 사람은 못 깨달아도 아 얘는 깨닫게 되고 싶을 거 아니에요. 안. 한 존재는 근데 무침 결국은 못 깨닫게 하고 돌아가셨어요. 부처님. 열반신고 날 때 열번 하실 때까지 안 한 존재는 못 깨달았어요

그러니까 부처님도 본인이 원하는 거 못 해요 하는 건 하고 못하는 건 못해요

그게 진짜 못 한 걸까요? 부처님이? 아는 전자를 구질 못 한 걸까요? 이게? 무슨 말이냐면요. 부처님 뭘 깨달으신 분이냐 하면 삶은 지금 이 모양의 세계를 뜯어고치고 나서 행복해지는 게 아니고

지금 마음에 안 들면 마음에 안 드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이미 있는 이대로 이것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나를
나에게 있어서 가장 온전한 삶의 이 삶인 거야. 어 스님 제 인생은 마음에 안 드는데요. 그 마음에 안 드는 삶을 지금 경험해야 돼요. 그 사람은 그래. 그걸 통해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고 성장할 수 있고 업장 소멸할 수 있고 그걸 통해

나아갈 수 있는 한 발을 내딛을 수 있단 말이에요. 고통이. 왜 우리에게 괴로움이란 성스러운 진리가 되는 줄 아세요? 고성재? 사성재의 첫 번째 고성재 괴로움은 성스러운 진리예요. 우리. 생각엔

나쁜 거잖아요. 근데. 나쁜 거다라고 생각하는 사람한테 죽을 때까지 나쁜 거예요. 그러니까. 그 나쁜 괴로움을 고성재는 모르고 고밖에 모르는 거예요. 그렇게. 죽을 때까지도 괴로움을 없애고 괴로움을 행복으로 바꾸려고 온갖 것을 찾아 나선단 말이에요.

여름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다는 것은 지금 지금 있는 이대로의 자기에게 갖춰진 이 조건 있는 이대로의 이 조건 여러분 그 이렇게 막 좀 더우신 분도 계신 것 같고 좀 오늘 좀 에어컨이 고장이 났대요. 그래가지고. 나름 막 해 보는 데도 지금 안 되는가 봐요. 다음. 주까지는 아마 어떻게든 고쳐볼 것 같고 미세하겐 나온대요. 예 세게는 안 나와도 그러니까 이거 어떻게 다 같이 이렇게 한꺼번에 나갔나 모르겠네. 예 그러니까 좀 좀 참아 주세요. 오늘 제가 조금 일찍 끝낼게요. 어. 그래서요. 지금이라니까요. 지금 눈앞이에요. 눈앞에 깨달음은 온전히 있고 이미 있고 부처의 삶은 지금 여기에 이루어져 있고 불국토는 저 서방 정토가 아니에요. 지금 여기가 불국토고. 그런데 지금 여러분이 이 인민들을 그 여러분 현실이 진실이라고 얘기하죠. 현실이 진실이다. 제법이 실상이다. 현실이 진실이거든요. 여러분 제 얘기를 딱 집중해서 들으면 더위가 없어요. 아니 실제 그래요 실제 더위를 생각하면 또 떠워요. 근데 요 여기 집중을 해서 듣다 보면 그 까먹어요. 그거를 글쎄요. 보세요. 이 말이 뭐냐면 현실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제가 하는 말을 지금 어 그냥 어 그렇다니까 그럴 수도 있겠고 뭐 뭐 아닐 수도 있는데 뭐 저 저런 얘기를 하나보다. 여러분 불교는요. 여러분이 공부할 때 그래서 여러분 이게 종교인 이유가 이거예요. 다른 사상이나 철학을 공부할 때는 어떤 철학자의 가르침을 공부할 때는 나는 뭐 노자가 더 좋은가 맹자가 더 좋은가 뭐 공자가 더 좋은가 아니면 뭐 필라테스가 더 좋은가? 그 사람의 가르침은 이렇대 이렇게 듣잖아요. 다들 그 사람의 가르침이 이런 거래. 그럼 그게 맞는지 틀린지 모르지만 그 사람은 그렇다고 얘기하더라 이 얘기잖아요. 근데 이 불교 공부는 종교잖아요. 아직 깨닫지 못해서 자기 스스로 이걸 완전히 확인하지 못했어도 이 법문을 들을 때 아 불교에서는 저렇게 얘기하는구나 이렇게 들으면 안 돼요. 아 불교 교리는 저런 건가 보네. 그거는 그냥 머리로 공부하겠다는 얘기잖아요. 이걸 정말 믿고 이걸 내가 하나가 되겠다라는 마음은 없는 거거든요. 그렇게 들으면 안 되고 이건 진짜 진실이 저런 거구나. 근데 내가 이 진실을 아직 못 봤을 뿐이구나. 확인하지 못했을 뿐이지 정말 진실은 이것이구나. 이걸 완전히 믿어 버리면 그걸 볼 확률이 높아지죠. 그래서 믿음이 깨달음의 어머니가 되는 거예요. 굳게 믿어야 되는 거예요. 정말 그래요 정말 왜냐하면 여러분 괴로울 때 힘들고 괴로울 때 괴로워서 죽겠어요. 막 하루 종일 힘들었어요. 막 계속 힘들고 우울하고 막 깜깜했어요. 최근 한 달 동안 막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다 하더라도 그런다 하더라도 지금 지금 갑자기 그 괴로운 괴로움을 생각하는 그 생각을 잠깐 내려놓고 괴로움에 대한 생각을 잠깐 내려놓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있으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있으면 괴롭지가 않아요. 한번 해보세요. 실제로 분명히 괴로움이 방금 전까지 있었는데 그 괴로움이 있는 동안은 그 괴로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을 거거든요. 그 괴로움에 대한 해석 판단 생각이에요. 그 생각을 탁 내려놓고 그냥 지금 눈앞에 딱 돌아오면 지금 여기서 아무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그냥 있으면 괴롭지 않아요. 신기하게도 그리고 괴로움이 있어요. 괴로움. 괴로움 어떤 뭐 공황 장애가 오든 우울증이 오든 뭐 힘든 상황이 막 감정적으로 막 왔다 쳐보단 말이에요. 그럼 스님 이건 좀 감정적으로 너무 세게 와서 내가 생각 안 해도 괴로워요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 또한 분별인 이유가 그 괴로워서. 지금 막 힘들 그 그 상황 속에 놓여 있어요. 층간 소음이 막 꽁꽁 거리는 그 상황 속에 놓여 있거나 뭔가 그 괴로움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때 직접 확인해보세요. 경험해 보세요. 제가 하는 말이 맞나 틀리나. 어떤 결혼도 상관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요. 고성재 하잖아요. 무슨 고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모든 괴로움이 전부 다 똑같아요. 해결 방법은 해결 방법은 똑같아요. 이 방법 아닌 방법 근데 이건 진짜 해결 방법은요 여러분 진짜 위대한 해결 방법은 중도여야 되거든요. 중도라는 말은 중도는 이쪽 극단도 아니고 저쪽 극단도 아니라는 얘기잖아요. 이제 이쪽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저쪽으로 가는 것도 아니라는 얘기예요. 즉 이렇게 하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하는 것도 아니라는 소리예요.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건 유의 조작이에요. 조작해서 저렇게 하려고 하는 거예요. 저렇게 열심히 하려고 하는 것도 유의 조작이에요. 정도는 어떤 것도 조작하지 않는 거예요. 일로 가려고 하지도 않고 저로 가려고도 하지 않는 거예요. 추구심 1로 가야 되겠다. 저로 가야 되겠다. 그 생각 자체가 탁 사라진 그걸 정도라고 해요. 그러나 내가 중도 자리에만 딱 있어 보면 이 정도가 정말 진실인지 아닌지를 스스로 알게 돼요. 깨닫게 돼요. 그럼 그 어떤 결혼도 상당하지 마세요. 어떤 결혼도 상관하지 마세요. 그냥 그 괴로움을 중도 자리에서 보는 거예요? 정도로 그 괴로움을 보는 거야 어떻게 하는 걸까요? 그 괴로움에 대해서 괴로운 감정에 대해서 해석하지 않고 판단하거나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그냥 맨 느낌으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그걸 허락 말하자면 허락해 주는 거죠. 근데 내가 허락해야 돼요? 내가 허용하고 수용해야 돼요? 이미 그 괴로움이 수용돼 있는 상태잖아요. 근데 내가 허락하라고 굳이 수용하라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는 항상 허락하지 못한 상태에 있거든요. 이 나를 찾아온 이 괴로움을 없애야 된다라는 생각 없애야 된다. 이거는 이쪽 극단이에요. 이 괴로움 좋은 것에 대해서 좋아서 더 갖고 싶다 하는 건 있죠 극단이에요. 더 취하려는 생각도 극단이고 없애야 돼 하는 것도 극단이란 말이에요. 그거는 중도의 길이 아니에요. 그니까 지금 나를 찾아온 괴로움을 해결하는 가장 중도적인 길은 그 괴로움을 없애려고 하지 않는 거예요. 우리는 그 괴로움 없애려고 절여왔잖아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괴로움을 없애려고 하는 사람은 없앨 수 없어요. 임시를 없앨 순 있으나 유의 조작의 방법을 통해 없앨 순 있으나 반드시 재발해요. 그걸. 반드시 제발 해요. 심리치유 100년 동안의 심리학의 발전에서 수많은 심리치유 기법을 만들었는데 100년 만에 심리치유학회에서 우리들의 모든 노력은 실패했다. 인정을 했어요. 인정을 하고 인정을 하고 아 이걸 문제라고 여기고서 장애라고 여기고서 그걸 해결하려는 모든 기법은 일시적일 뿐이다. 근원적이지 않더라. 그 100년 동안 연구해 보니까 잠깐은 나은 거 같았는데 나중에 다시 재발하더라. 거의 대부분 그 인종을 했다니까요. 그러고 나서 3세대 심리학자 제가 문을 닫고 이제 4세대 심리학에 나온 거예요 그 사 세대 심리학에 뿌리를 어서 찾았느냐 이 불교 법문에서 찾았단 말이에요. 마인드 플레이에서 찾았단 말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분별심을 따라가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그 문제와 하나되어서 문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본다. 그 자리에 있는 그대로 본다가 마인드 플리스예요. 해석 판단 분별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냥 있는다. 멈춘다. 지 관 생각을 멈추고 조작하려는 마음을 멈추고 없애려는 마음을 멈추고 더 좋은 곳으로 가려는 마음을 멈추고 빵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난다 하듯이 괴로움 있는 그 자리에 있는 거예요. 존재하는 거예요. 그런데 화날 때 화를 내면서 있는 거는 있는 게 아니에요. 허용하는 게 아니에요. 활을 허용하라니까 화날 때 활을 바로바로 내고 나서 화를 허용했다. 그러더라고요. 꼭 화를 허용하는 게 아니에요. 활을 따라가서 끌려다닌 거예요 화에 화가 난다는 사실을 보는 거예요. 직면하는 거예요. 아 여기서 지금 화가 일어나고 있구나. 아 우울 우울증 비슷 우울증이 일어나고 있구나 이거는 해석이죠. 판단 본별이죠. 정도가 아니죠. 우울증이라고 이미 규정했잖아요. 우울증이란 말 자체가 벌써 별로 안 좋다는 소리잖아요. 어떤 증세 어떤 문제가 일어났다는 소리잖아요. 그 이름을 다 빼는 그래서 진정한 명상에는 이름과 모양을 다 빼야 돼요. 그래서 아 이 우울증을 있는 그대로 봐야지. 이건 분별이에요. 정도가 아니에요? 실제 일어나는 일을 실제로 경험하면 이게 놀랍지 않나요? 우리는 어떻게 할 때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치유가 되느냐? 진실을 만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근데 뭐가 진실이에요? 자기가 진실이에요? 진실은 없었던 게 아니라 본래부터 있던 거예요. 그럼 어떻게 진실을 만나는 거예요? 지금 힘들고 괴롭고 어떤 문제가 일어나더라도 그 문제가 일어날 때 그걸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는 거예요. 바라보는 거예요. 도망치려고도 하지 않고 집착하려고도 하지 않고 취하려고도 하지 않고 버리려고도 하지 않고 그 어떤 조작을 하려고 하지 않고 거기 있고 그것과 함께 하는 거예요. 함께 있는 거 있어 주는 거예요. 아무 분별 없이 경험해 주는 거예요. 분별 없이 경험해 준다. 해서 판단 없이 그걸 그대로 거기에 있어 준다. 어떤 말도 이렇게 딱 들어맞진 않아요. 지금 일어나는 이 현실을 해석하면 자기 분별 속으로 들어가는데 일어나는 현실을 거기에 있는 거예요. 왜? 현실이 진실이거든요. 진실이 모든 치유의 약이에요. 부처님 법문은 응병 여약이라고 해서 모든 병을 치유한 약이라고 하잖아요. 중도 법문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약이에요. 그런데 병원에 약국 가면 병에 따라 약을 주잖아요. 근데 이 약은 오로지 하나의 병이기 때문에 분별이라는 하나의 병이기 때문에 하나의 약을 줘요. 그 중독의 약이에요. 근데 중독의 약인데 우울증 있는 사람은 그 우울증 거기 있는 거고 공황장애 있는 사람은 공황장애 거기 있는 거예요? 근데 그걸 아 우울증인데 우울증 속에 있어야지. 이거는 중독 아니에요. 우울증이라고 이름 붙였잖아요. 공황장애라고 이름 붙였잖아요. 그 모든 이름 붙이는 걸 다 빼고 지금 처음 경험하는 것처럼 난생 처음 경험하는 것처럼 갓난아기가 어떤 증상이 일어났을 때 그냥 경험하는 것처럼 즉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사실 이런 건 없죠. 그건 자기 생각이죠. 특정한 증세가 일어났을 때 그걸 내가 우울증이라고 이름 붙이는 습관이 일어난 거죠. 큰 이른바 모양 따라가는 거잖아요. 분별 따라가는 거잖아요. 실제 일어나는 현상 실제 일어나는 현실에 있는 거예요. 실제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예를 들면 이런 거야. 이것도 이름이지만 말이지만 말로 하면 다 어긋나지만 어쩔 수 없이 말로 해 본다면 지금 우울증 공황 장애 뭐 갱년기 증상이 일어나는 게 아니고 예를 들면 이름 붙일 수 없는 알 수 없는 어떤 몸의 어떤 열이 일어났다. 그럼 몸에 열이 일어났네 이것도 이름 붙인 거죠. 몸에 여기 일어나는 걸 관찰할 거야 아 열 열이 일어나네 열이 이거 분별이잖아. 이것도 그 분변을 또 하지 않고 이런 붙이지 않으면 어때요? 무언가가 알아차려지고 있죠 지금 열기라고 우리가 보통 이름 붙이는 어떤 것이 알아차려지고 있다라는 이게 느껴져요. 그 알아차림 거기 있는 거예요. 이 즉 알아차림은 뭐냐면 화가 날 때 열이 날 때 열이 있잖아요. 이 즉 처음에는 방편으로 둘로 나누어서 볼 필요가 있는 이유가 뭐냐면 화가 나거나 몸에 몸에서 어떤 열기 열감이 일어나요? 열감이 일어날 때 그 열감을 알아차리고 있는 열감이 일어나는 줄 알죠. 그죠 그런데 이 열감이 있고 열감이 있다라고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죠. 여기 둘로 처음에 구분이 된단 말이에요. 화가 난 화가 나는데 그 화라고 이름 붙이기 전에 뭔가 불덩이 같은 뭔가가 여서 이렇게 일어나고 있어요. 근데 이렇게 가만히 있는 그대로 보면 화가 일어나는 게 아니고 어떤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가 일어나는 것이 있고 그 일어나는 것을 무언가가 보고 있어요. 그죠? 그럼 보세요. 이 일어나는 내용물을 따라가면 분별 따라가는 거예요. 이 내용을 따라가지고 화가 난다. 이렇게 이름 붙여도 벌써 내용물 따라간 거죠? 근데 탁 둘로 나누었을 때 이 화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화를 보고 있는 이 마음. 분명히 명백하게 있잖아요. 화가 있는 그 자리에서는 불덩이처럼 뭔가가 훅 올라올 때는 그걸 보고 있는 놈이 거기 있단 말이야. 바로 거기에 처음에는 이렇게 하는 게 쉬워요. 즉 이 화를 이름 붙이지 않은 채 어 이게 올라오네. 근데 이걸 보고 있네. 어 이 보고 있는 마음은 이 마음은 아니지. 그렇게 들어 딱 구분이 되잖아요. 그래야 얘를 안 따라갈 수 있단 말이야. 구별해 나요. 얘는 안 보여요. 이 비추어 보는 알아차리는 마음은 안 보여요. 확인할 수 없어요. 만날 수 없어요. 그런데 이 마음이 작용하고 있단 말이에요. 살아 있단 말이에요. 이 생명 현상으로 작용하고 있는 걸 알아차리고 있어요. 그런데 보이는 건 이 부덩이 같은 감정밖에 안 보여요. 그런데 처음에 연습 방편으로 이 불똥이 같은 감정을 따라가면 습관적으로 분별을 따라가니까 이걸 따라가지 말고 이걸 보고 있는 그게 있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 알아차리는 마음은 불똥이 같은 감정을 보다가 또 좀 있다가 다리가 어디가 간지러워요? 그럼 또 좀 있다가 그 간지러울 때 보면 간지러운 걸 알아차리고 있죠. 그럼 얘는 여기에 가만히 여유분하게 있다가 불덩이 같은 마음도 보다가 좀 이따 간지러운 마음도 보다가. 똑같이 머리가 아파요? 그럼 머리가 아프다는 생각이고 해석이잖아요? 그냥 여기 어딘가에서 허공에 요쪽 어딘가에서 붙덩이 올라왔다가 그걸 알아차리고 있어요. 얘가. 여기 간지러운 걸 알아차리고 좀 이따 머리가 아픈 걸 알아차려요. 근데 이 이름을 다 빼면 이 알아차리는 놈은 여기 불덩이가 올라올 때 이걸 알아차리고 있죠? 간지러울 때 여기도 알아차리고 있죠? 머리가 아플 때도 머리가 아프다라는 이름만 빼고 이걸 보고 있어요. 그럼 어때요? 이 알아차리는 마음은 어디든 다 있는 거 같아요. 편만해 있어서 어디든 다 있어요. 저 멀리서 과광하고 번개 소리가 나도 그걸 알아차리고 있는 이 마음은 좀 전에 감각을 알아차리다가 느낌을 알아차리다가 소리를 알아차리다가 또 그러다가 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래서 죽는 거 아니야? 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을 또 알아차리죠. 그런 생각하고 아르타있는 놈하고 딱 둘로 나눌 수 있죠. 방편으로 그렇게 보면 어때요? 모든 현상이 일어날 때 그걸 이름 붙이고 개념 짓지 않으면 않고 그걸 그냥 보기만 하면 어때요? 그것을 보고 있는 이 자리 얘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얘는 불덩이가 나도 얘는 불덩이가 없으니까 불덩이를 비추고 있죠. 또 얘가 불덩이를 비추다가 머리 아픈 걸 비추고 있을 때는 머리 아픈 거를 알아차리고 있을 때는 이 불덩이 같은 걸 밖에 없어요. 여기 집중하고 있으니까. 그럼 얘는 어떠냐면 얘는 있는지도 모르겠고 없는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늘 알아차리고 있어요. 근데 얘는 모양도 없고 크기도 없고 빛깔도 없는데 얘는 변하지도 않아요. 그 모든 걸 다 비추기만 해요. 내가 아파도 얘는 안 아파요. 얘가 불덩이가 올라와도 얘는 불덩이가 없어요. 그래서 이걸 이 마음을 영화 스크린의 비유를 들어요. 전장 영화가 가서 불이 나도 스크린은 불이 나지 않는 것처럼 전쟁 영화 불나는 영화를 비추는 빛은 불에 물들지 않는 것처럼 이 마음도 이 마음을 우리 본성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이 본래 마음 본성의 마음은 일상 쪽을 일어나는 모든 괴로움들 괴로운 마음 괴로운 느낌 괴로운 생각 온갖 괴로움도 괴로운 어떤 상태 모든 괴로움이 올 때 그 괴로움은 왔다 가는 거잖아요. 진짜 내가 아니에요. 근데 내 몸에 불때 같은 우울증이 오면 내 우울증 나는 우울해. 그걸 난 줄 안단 말이에요. 근데 지금 보니까 어때요? 그거는 왔다 가는 거잖아요. 내가 비추는 대상이잖아요. 비추는 게 나여 비추어지는 대상이 나예요. 언제나 비추는 놈이 자기죠. 보는 놈이 자기지 보이는 게 내가 아니잖아요. 그건 내가 보고 있는 대상이잖아요. 아픈 것도 보고 있는 대상이죠. 불똥이 같은 것도 보고 있는 대상이죠. 생각도 보고 있는 대상이죠. 근데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대상 따라가면서 삶의 모양 따라가면서 부자일 때 나는 내가 부자구나 하는 알아차림 뭔가 모르게 이렇게 든든한 것 같고 풍요로운 것 같은 그 느낌 이런 걸로 부자라고 이름 붙인 그거를 보고 있다가 또 어느 날 가난해졌을 때 내가 아 난 가난해라는 생각을 또 보고 있지 않아요? 이 비추고 있는 마음에는 부자도 없고 가난도 없어요. 병도 없고 건강도 없어요. 언제나 여여부동해요. 말끔해요. 어떤 흔적도 없어요. 텅 비어서 깨끗하다. 이게 이게 바로 청정이란 말이에요. 이걸 자성 청정심이라고 이름 붙여요. 자기 성품이에요. 이게. 이건 청정한 마음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일들 좋은 일 나쁜 일 힘든 일 괴로운 일 행복한 일 불행한 일 성공 실패 전부 다 얘가 보고 있는 대상이잖아요. 대상의 특징은 인연따라 왔다 간다는 거예요. 왔다 갔다 가는 거잖아요. 왔을 때 저 좋은 날이잖아요. 보통 그런 뭐 그 사람은 떠나갈 때 괴로워 죽을 날 해요. 근데 이 여유동원이 진정한 자기에게 있으면 와도 남들은 호들갑 떴는데 호들갑 떨 일이 없다는 걸 알아요. 이 자리에 있으면 여러분 손자가 설대 붙었어요. 그럼 옛날 같았으면 막 저 죽을 건데 그 잎이 비추는 자리에서는 어느 대학 가나 뭔 상관이 있어요? 돈을 벌었던 잃었던 몸이 아프든 안 아프든 이 비추는 이놈은 아프지가 않아요. 건강하지도 않고. 그러니까 이 이게 난 거를 한번 깨닫고 나면 공부 끝 아니에요? 나머지는 저보다 내가 서가 왔구나라는 걸 깨닫게 돼요. 자기 허무를 보게 되는 게 깨달음이에요. 깨달음은 따로 찾는 게 아니에요. 추구하는 게 아니에요. 깨달음을 추구하거나 찾거나 수행해서 그 그 수행의 결과 깨달음을 얻는 그런 구조가 아니에요. 그거는 세간의 구조예요. 모양의 세계에서의 구조예요. 열심히 노력해서 얻는다는 구조 깨달음은 열심히 노력하며 못 얻어요. 노력하는 건 자기 분별만 노력할 수 있으니까. 분별해 가지고 분배를 얻을 분별밖에 못 얻지 분별해서 어떻게 무분별로 얻을 수 있어요? 못 얻어요. 그래서 이걸 무의법이라고 하는 거예요. 무위 S9 조작하는 게 없는 공부다. 그런데 삶의 모든 내용물은 전부 다 인연 따라 왔다 가는 거 찐떼기가 아닌 거 진짜가 아닌 진실이 아닌 거 거짓인 것들이 전부 다 나다 너다 다 커지세요 부모다 자식이다. 거짓이에요 심지어 부모다 자식이다. 더 거짓 아니에요 2년 동안 왔다 가는 거잖아요 진짜 고마워도 원수처럼 사는 사람도 많고요. 가짜 부모인데도 정말 아끼고 살아가면 사는 사람도 많잖아요. 대충 보면 가짜 부모일 때 오히려 더 잘 지내는 입영한 자식 정말 더 사랑한다 그러잖아요. 그러면서 그 그런 분들이 그러대요. 내 자식한테는 막 화도 내겠는데 이렇게 이렇게 어찌 2년 따라 오게 된 자식한테는 화도 못 내겠다고. 그래서 오히려 제 자식이 더 화를 냈다고 나만 이렇게 이러냐고. 진짜 아빠 엄마한테는 화를 벌어버리네요. 자식들이 근데 이제 새로 생긴 그 아빠한테 화를 그렇게 못 내요. 아 말하다 보니까 좀 이상한 얘기들 근데 그렇게 보세요. 진실이 무엇인지를 보는데 진실이 무엇인지. 우린 지금까지 거짓에 속아 왔어요. 모양으로 2년 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인형 관계가 진짜 인형 관계인 줄 알아요. 내 자식은 금생이 내 자식이잖아요. 내 자식이 경쟁상대 얘만 걔만 이기면 좋겠다 해도 그 걔 때문에 맨날 이 등밖에 못 하는 걔만 없으면 좋겠다 싶었던 미워 죽겠는 걔는 어쩌면 전 세계 내 차 세계였을 수 있어요. 전생에 내가 너무나 사랑하던 자식인데 전생의 자식을 잃었어요. 그래가지고 죽을 때까지 울며 울며 자식 만나고 싶었는데 그러다 결국 죽었어요. 근데 다음 생에 옆집 아들로 만난 거야? 내 자식은 그런데 뭐해요? 쟤만 이겨라. 어우 쟤는 어떻게 저렇게 괴물같이 공부 잘하냐 하면서 야 너 쟤 이길 수 있어. 이럴지도 모르잖아요. 말하자면 꼭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게 무슨 말이냐면 부처님께서 길을 가다가 제자들과 길을 가다가 사람 뼈와 뭉치를 보고는 거다 절을 했다니까요. 아 그 3개 자부이신 부처님께서 어찌 저 모든 신도님들의 선배를 받아야 될 부처님께서 뼈에다가 절을 하세요. 그랬더니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또 이 세상 모든 뼈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이 세상 일체 모든 존재는 어느 생애인가? 언젠가 나의 부모였고 나의 자식이었고 이런 식의 방편의 이야기를 한단 말이에요. 즉 나와 둘이 아니다라는 얘기를 하는 거거든요. 둘이 아닌 이 구리법의 진실의 관점에서는 그 사람은 믿고 내 자식은 예쁠 수 있죠. 근데 그 생각 따라가서 그런 거예요. 생각 따라가지 않으면 생각은 진실을 몰라요. 그 옛날에 옛날에 아 병원에서 애가 바뀌는 일이 있었다 그랬잖아요. 옛날에는 요즘엔 없겠지만 그 얘가 바뀌어 가지고 이 바꿔가지고 자식인 줄 알고 키우는데 나중에 20년 만에 알게 됐으면 어때요 그러면 갑자기 내 자식 아닌 것 같을까요? 아주 2년을 맺었는데 모든 건 그냥 인연을 맺을 때 인연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2년도 내가 이렇게 2년을 맺기로 마음을 냈을 때 2년이 형성되는 거거든요. 그것도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생각의 생각 전부 다 모든 것들은 분별이에요. 진실은 생각 속에는 진실이 없어요. 생각만 따라가지 않으면 지금 눈앞에 있으면 생각판단 분별 따라가지 않으면 여러분 그냥 스스로 한번 확인해 보세요. 인생에서 하루 종일 뭐 기분 좋았을 때도 그 나빴을 때도 있고 뭔가 우울할 때도 있고 두려울 때도 있고 막 온갖 것들이 오고 가잖아요. 온갖 마음이 오고 가잖아요. 근데 그 마음이 오고 갈 때 가만히 보면 어떤 생각을 따라가고 있어요. 본인이 아 내가 나중에 몸이 아프면 어쩌지? 병든건 어쩌지? 죽으면 어쩌지? 뭐 큰 병 걸리면 어쩌지? 뭐 이런 식의 생각 따라가면 갑자기 두려워져요. 노후가 아 아직 온전하지 않은데 아 내가 얼마 만다 했으면 노후가 좋을 텐데 이런 식으로 생각 따라가면 갑자기 노후 전 삶 전체가 두려운 거 같아요. 근데 그 생각한다고 뭐 노후가 갑자기 또 좋아져요. 그냥 눈앞에 현지에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래서 이 마음 공부라는 것은 깨달음이라는 것은 깨달음이라는 어떤 물건을 우리가 찾는 게 아니고 깨닫는 게 아니고 가지는 게 아니고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늘 있어요. 지금 있어요. 지금 지금 제가 얘기하는 걸 여러분 듣고 있잖아요 듣고 있는 게 이게 부처라고 제가 항상 얘기를 하죠 왜 그렇겠어요? 제가 말하고 있는 말의 내용을 잘 듣는 분들 있고 안 듣는 분도 있어요? 이해를 잘하는 분도 있고 못하는 분도 있어요. 근데 그것과 상관없이 제가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이 제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 말을 이 말이 들리고 있다라는 사실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있죠 비추고 있죠 그 날을 얘기를 한 거예요 그 마음. 그 비추는 거울 같은 마음. 그 마음은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알아들을 때도 그 마음이고 알아듣지 못할 때도 이 마음이죠. 잘 이해해도 이 마음이고 못 이해해도 이 마음이 아니에요. 잘 이해하고 못 이해한 거는 분별심이 하는 일이거든요. 근데 못 이해했을 때도 이 마음이라니까요. 즉 여러분이 이 마음을 듣고 문득 깨달았을 때 깨달음이 뭔지 이 마음이 먼저예요. 깨달은 줄 아는 깨달은 조금 전까지 못 깨달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어요? 근데 내가 문득 본문득 때 확 깨달았어요. 그러면 이 마음이 깨달은 줄 알아요. 조금 전에 이 마음이 깨달은 줄 모르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이 체험이 하고 왔다가 잠시 조금 있다가 정신 차려 보니까 또 이게 쓱 사라졌어요. 깨달은 마음이 사라졌어요? 그럼 어 없어졌네 하고 알아요 그럼 보세요. 이 깨달음의 체험은 왔다가 환희심 났다가 좀 이따 사라져요. 왔다 갔잖아요. 그럼 그 환희심 나는 그게 깨달음이에요? 나는 못 깨달았어 하고 알다가 어 지금 깨달았네. 어 이렇게 드디어 깨닫는구나 하고 알다가 좀 이따 깨달음이 싹 사라지고 나서 이럴 수가 또 없어졌어 하고 알잖아요. 그 아는 마음은 언제나 있죠. 깨닫지 못했을 때 두고 깨달았을 때도 언제나 있죠. 이게 진짜 깨달음이라니까요. 그래서 보유 금유라고 해? 본래 있던 마음이 지금도 있는 그것만이 진짜 귀한 거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그렇게 깨달음의 체험 체험하는 얘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거예요. 체험을 왔다 가는 거잖아요. 일시적인 거잖아요. 근데 이 체험은 이 진짜 마음은 늘 체험하고 있어요. 깨닫지 못했을 때도 깨달았을 때도 아플 때도 안 아플 때도 괴로울 때도 행복할 때도 그렇잖아요. 괴로울 때 괴로운 줄을 비춰하는 이 마음은 괴로운 순간에 늘 여유부동해요. 근데 이게 와닿지 않는다. 그럼 이게 와닿지 않는다? 이게 뭔가 힘이 없는 거 같다. 이게 머리로 아는 거예요? 그럴 때 머리를 이해하려고 하면 곧장 이게 헷갈려요. 그리고 이건 이외로 찾을 수가 없고 잡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해로 아까 법문 들었을 땐 대충 아는 것 같았는데 집에 가서 뭐였지 하고 또 그림 그리려고 하면 또 몰라요. 그래서 이 법문을 들을 때는 이해되면 되는 대로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신경 쓰지 마세요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냥 간절함을 가지고 이 마음에 관심을 두는 거예요. 이 마음에 관심 둔다는 건 뭐예요? 제가 이 자리에 있으면 하고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이 자리 있으면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죠. 생각 따라가지 않으면 언제나 이 자리예요. 생각 따라가지 않으면 생각하면 이 소리하고 이 소리가 다르죠. 분별되잖아요? 근데 이 소리를 비추는 이 마음하고 이 소리를 비추는 마음하고 이 모양을 비추는 마음하고 같은 한 마음이란 말이에요. 모르겠어요. 모르겠으면 알려고 하지 말란 말이에요.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어떤 어떤 법문을 쓰다 보니까 알면은 바보고 뭐 알지 못하면 천체다. 뭐 이런 얘기를 했대요. 그럼 뭐 어쩌라는 소리고 지금 알면은 바보고 알지 못하면 천체라는 건 뭐 뭔 소리가 이게. 이 마음은 다른 건 다 알 수 있잖아요. 모를 수도 있고 알 수도 있잖아요. 이 마음은 알 수 없어요. 이건 대상이 아니어서. 이건 알았다 할 수가 없어요. 아는 방향으로 공부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그리고 누가 누가 갑자기 알았다 했어요? 그래서 그 사람 틀린 사람이에요. 왜? 아는 내용이 있잖아요 뭔가. 안 내용이 뭔데 물어보면 구절구절 얘기를 할 거예요. 그건 얘기한 거잖아요. 알아 자기가 안 내용이에요? 대상이란 말이에요. 아무리 쌈빡하게 알았어도 모든 걸 비추는 이 참마음이요. 이렇게 말했어도 한데 맞는단 말이에요. 그러면 화가 나죠. 왜 화가 나요? 아니 스승이라는 놈은 지가 그렇게 얘기해가지고 나도 그대로 얘기한 건데 지가 얘기하는 거는 되고 내가 얘기하면 때린단 말이야. 이게 어찌 이럴 수가 있지 이런다니까요. 스님들의 역할은요. 스승의 역할은 그 얘기를 통해 그 얘기 아닌 낙처를 가리켜 보이고 있어요. 그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말을 주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말을 들어선 안 되죠. 그러니 스승의 말을 앵무새처럼 이런 거야 얘기하면 한 때 맞는다니까요. 그래서 옛날 불교에서 할과 방이 있는 게 할은 그런 소리 하기만 하면 소리 벅치른단 말인가요? 아니야 아니야 하고 하고. 그래서 스님이 했던 말을 다 암기하고 있다가 요거요. 아니에요. 저거야. 소리 박지를 이러다가 하도 이거 저거야 하니까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그러니까 정신차리고 소리를 빡찌른단 말이야. 할라고. 또 어떤 스님은 또 스승들한테 배운 맛 주소들은 말만 계속 맹무색처럼 반복하니까 안 되겠다 싶어서 그 말 나오려면 때리고 나올 날은 때리고. 이런단 말이에요. 그 생각 따라가지 말라는 거예요. 그럼 생각이 팍 멈추잖아요. 도가 무엇입니까 했단 말이에요. 도가 무엇입니까? 했는데 도란 이런 거고 저런 거고 저런 거예요? 이렇게 하니까 자꾸 생각 따라간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따른 배잔나무 도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돌을 바로 모여준단 말이에요. 그러면 갑자기 어떻게 돼요? 뭐지 싶은 생각은 있는데 왜 컵이 붙여줄까? 그 생각해봐야 답이 안 나와요. 근데 이걸 보고서 또 앞에서 안 나면 이 소리를 듣고 에이 더 앞에 잣나무 그런 그런 식으로 대상을 가지고 얘기하지 마세요 스님 그리고 자기가 대상으로 들어놓고 교수님 뜻앞에 있는 잔나무 그런 대상을 가지고 부처가 대상입니까?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마세요. 법을 얘기를 해 주세요. 이런단 말이야. 그래? 오케이 네 법을 얘기해 줄게. 다시 물어봐. 그러니까 부처가 무엇입니까? 따라배지 않나 뭐 고때 깨달았단 말이야. 처음 따른 앞에 전담할 때는 뜰 앞에 있는 잔나무를 봤단 말이 대상을 근데 그 다음에 뜰 앞에 잔나무 할 때는 뜰 뜰 뜰도 상관없고 하늘도 상관없고 바다도 상관없어. 아무 상관없을 나누는 순간 말의 내용과 상관없이 뜰을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정원 같은 뜰을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무슨 말이 나오더라도 뜰 하고 나옴과 동시에 바로 확인되는 이 낙처를 얘기한단 말이에요. 말 아닌 그 이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어요? 알려가면 알 수가 없어요. 그러면 알지 못 알지 말아야 되는구나 하고 이제 안 하려고 본문도 안 들어야 되겠구나. 공부도 안 해야 되겠구나. 저절로 이해가 되는 것도 이것도 이해되면 안 돼 하고 막 억지로 억지로 일을 시키지 말려고 애쓴다든지 알지 말려고 애써도 안 되죠. 알려고? 했어도 안 되는데 알지 말려고 했어도 안 돼요. 그래서 알면 바보고 알지 않으려고 하면 천체예요. 알고 모르게 잊지 않단 말이야. 알고 모르고는 분별만 알고 모르고가 있잖아요. 분별된 세계만. 이게 길다. 짧다 알 수 있어요? 근데 분별이라는 건 뭐냐면 인연 따라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얘는 긴지 짧은지 알 수 없어요. 요런 개념이면 짧다. 요렇게 임시로 말을 붙일 수 있고 요런 개념이면 짧다. 요렇게 길다. 이렇게 임시로 말을 붙일 수 있어요. 근데 그것도 임시잖아요. 임시로 길다라고 말했고 짧다라고 말했던 거잖아요. 그럼 얘는 여전히 길다가 아니고 짧다도 아니에요. 알 수 없는 거예요 사실은 세간도 사실은 알 수 없어요. 이 진실이 안목으로 보면 세간의 모든 것도 그러니까 제가 이런 말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내가 인생을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 그거 관심 많잖아요. 그게 왜 관심이 많을까요? 왜 죽고 나서 내가 지옥 가는지 급락하는지를 모르니까 알고 싶거든요. 자살은 스님이 와서 넌 잘 살았어. 이렇게 얘기해 주면와 나 죽거나 급락하겠구나. 좀 안심이 될 거 아니에요. 뭐 아마 그런 욕망이 있어서 그러지 않을까요? 자기가 잘 사는지 못 사는지 궁금한 게 또 내가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를 내가 알고 싶은 거예요. 왜? 내가 누군지를 알고 싶은 거예요. 죽을 때까지 내가 누군지를 알 수 없어요. 포기하세요 내가 인생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를 알려고 하는 걸 건 망상이에요. 어리석음해요. 이거에 답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동대방내에 나 아는 모든 사람한테 다 가서 물어보세요. 나 잘 살았어? 못 살았어? 몇 점쯤 줄 수 있어? 물어보세요. 다 점수가 달라요. 누군지 잘 살았다. 그러고 누군 못 살았다. 해요. 그럼 100명의 데이터를 가지고 빵점에서부터 100점까지 쫙 있어요. 그럼 그중에 여러분 뭘 선택할 거예요? 그래 봐야 모르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 않나요? 알 수 없는 거라니까요. 알아야 될까요?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지난 과거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 그 몸이 했던 일이 내가 한 일이라고 착각해서 그래요. 그건 30년 전에 걔가 한 거 아니에요. 여러분 30년 전에 몸 지금 있어요? 10대 때 그 어릴 때 그 몸 지금 하나도 없잖아요. 느낌도 가만히 보면 그때 느낌하고 지금 느낌하고 다르다니까요. 생각도 다르다니까요. 의지 의식도 다르다니까요. 오은이 통으로 없어졌어요. 30년 전 20년 전 10년 전에 내 몸과 마음은 없어요. 근데 지금도 생각으로 그게 나야라고 동의시하고 있는 거예요 생각으로 그게 나일까요? 10년 전 내가 지금의 나일까요? 불교에서 뭐라고 얘기하냐면 알 수도 없고 모를 수도 없기 때문에 나도 아니고 내가 아닌 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해요. 좀 전문 용어로 쓰면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10년 전에 업을 지은 그 내가 10년 후에 그 업의 과보는 받아요. 업이 있고 그걸 보를 받는 그 연결성은 있어요. 그러나 작자는 없다. 업을 짓는 자도 없고 업을 받는 자도 없다. 자 나라는 고정된 시체가 없어요. 그 말은 뭐냐면 내가 없단 소리예요. 그럼 아니 내가 이렇게 길을 걷고 있잖아요. 근데 어떻게 내가 없다고 하지? 내가 말도 안 하는데 어떻게 내가 없다고 하지? 얘 성격도 있는데 어떻게 내가 없다고 하지 이러잖아요. 너가 말을 하고 누가 손을 올리고 누가 법문을 듣고 누가 집에 가고 누가 할까요? 그 모든 것을 움직이는 동료 동력이 어디 있을까요? 여러분 뭐 심장에 있어요? 심장에서 막 펌프질해 줘가지고 내가 움직이는 거예요? 아니 뇌에 있어. 뇌에서 시켜가지고 내가 하는 거예요? 그러면 닭 실신해 가지고 쓰러지면 여보세요. 내가 눈을 뜨니 눈이 있으니까 눈을 보지 그랬더니 눈이 있으니까 먼저 생각하거나. 귀가 있으니까 듣지라고 한다든지. 뭔가 이 몸을 나를 움직이는 어떤 뭔가 동력이 내 할머니에서 나온다고 느낀단 말이에요. 그 동료 교사는 보게 하는 동료 교사 나올까요? 눈에서 나올까요? 눈을 뜨고 있어도 못 볼 수 있는데요. 눈을 뜨고 있어도 못 보다가 마음이 보려고 할 때 그때 눈앞에 보이잖아요. 귀가 있어도 못 듣다가 내가 귀로 들으려고 하니까 듣잖아요. 약간 지주형 소리 들어보세요. 방문자가 제 얘기 드릴 때는 못 들었잖아요. 저 소리 그죠? 귀가 있다고 듣는 게 아니거든요. 이 마음이 한단 말이에요. 마음이 근데 이 마음은 이 마음 내 마음 이 사람 마음 저 사람 마음 부처님 마음 다 다르지 않단 말이야 한마음뿐이란 말이에요. 이 한마음이 무한 동력이에요. 일제 삼남 한상 모든 것을 움직이는 해가 뜨게 하고 해가 지게 하고 물이 흐르게 하고 저 자동차 움직이게 하는 게 엔진이 아니에요. 이 마음이에요. 우리 모두의 한 마음이 이 마음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전부 다 하나의 부처고 하나의 존재의 한 생명의 한 생명 한마음 다 한 가족이라니까요. 전부 다 온 세상에 한 가족이요. 한 생명이고. 이 생명 하나밖에 없어요. 다 이 생명 가져 쓰는 거예요. 그런데 각자 자기 생명이 있는 것하고 각자 자기 개성이 있는 것 같잖아요. 각자 자기의 자기라는 개성이 있는 것 같잖아요. 그건 왜 그런 거예요? 인연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법칙성에서 나오는 거예요? 2년 따라 모이고 흩어질 뿐이에요. 전부 다 모의고 흩어질 뿐인데 모의고 흩어지는 게 한 번 두 번 세 번 내가 나쁜 생각 한 번 두 번 세 번 반복하면 똑같은 상황을 봤을 때 나쁜 쪽으로 해석할 확률이 높아져요. 좋은 쪽으로 해석하면 좋은 쪽으로 해석하는 성격으로 굳어지고 좋은 부모님 밑에서 살면 그 부모님이 하던 말 생각 행동 움직임 모든 걸 그대로 배워요. 그래서 그렇게 닮아가요. 나도 모르게. 그게 나처럼 굳어지는 거예요. 나의 행동 양식으로 굳어지는 거예요. 그러다가. 나중에 나이 들어서 또 좋은 친구 만나고 뭐 예를 들어 이게 절에 가서 마음공부를 한다든지 내가 뭔가 강렬하게 바뀌는 능력이 생기면 또 이전 따라 바뀌어요. 그래서 어릴 때는 부모님 따라가다가 나이 들 때는 이제 친구 따라가다가 회사에 가면 그래서 회사가 저 사람 많은 회사에 가면 좋은 게 그 회사 사람하고 닮아가요? 나도 모르게. 어 어디 그냥 어느 누가 그러더라. 어느 식당에 설거지한테 해야 될 일이 생겨서 설거지하러 갔는데 그 주인이 계속 욕을 한대요. 뭐 이걸 이건 못 했냐고 맨날 욕을 하고 막 화를 내고 막 짜증을 내고 막 계속 막 험한 말을 하고 그러는데 돈이 문제가 아니라 내 이러다가 내 성격 버릴까 봐 나도 모르게 집에서 애들하고 얘기하다가 갑자기 나도 모르게 그 얘기를 툭툭 나오는데 보니까 그 사장이 했던 말이 내가 욕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튀나오더라는 거죠. 이렇게 훈습되는 거예요. 나라는 자아 개성은 훈습돼요. 내가 만든 게 아니에요. 내 게 아니에요. 2년 따라 헌습되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하려고 한 게 아니에요. 그 부모님 만났더니 그렇게 헌습이 돼 버린 걸 어떻게 해요? 그래서 이 에고라는 나라고 여기는 이 갔잖아. 갔잖아. 나는 훈습되어진 임시의 나예요. 가짜나 가예요 가 참나가 아니에요. 아 상 나라는 모양이에요. 모양 이렇게 생긴 모양이 내가 있는 것 뿐이에요. 근데 그 모양도 인연 따라 달라져요. 왜냐하면 딱 나이 들면 늙어가고 외모도 달라질 수 있고요. 성격도 달라지고요. 잘하는 것도 달라지고요. 재능도 달라져요. 끊임없이 달라지는 어느 성격 가지고 나라고 할까요? 어느 나이를 가지고 나라고 할까요? 전부 다 내가 아니에요. 모아예요. 2년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다 뭉뜨려가지고 이게 통으로 다 나야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이혼 낳고 그걸 나라고 느끼는 거예요. 끊임없이 달라졌는데 어떻게 그게 나예요? 제임 보상은 제 폰부예요. 보상에 변해가는 건 고정된 자아일 수가 없어요. 이처럼 깨달음도 추구해서 얻는 게 아니에요. 추구심이 쉬워지는 공부에 이건 처음부터 끝까지. 세간 현실 세계를 행복하게 사는 비법도 여기 있어요. 비결도 추구해도 돼요. 그러니까 내가 예를 제가 예를 들어 추구하지도 마세요. 이렇게 이걸 계속 강조하면 추구하지 말라는 걸 계속 얘기하면 그건 추구하지 말라는 말에 집착하는 말이에요. 제가. 제가 그랬잖아요. 버버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 그랬잖아요. 즉 진리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 그러니까 어떤 얘기를 해요? 추가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나서 추가하지 말라는 말에 집착하라고 얘기하지 않고 어떻게 해요? 추구하되 추구함이 없이 추구해야 된다. 추구하는데 추구하는 거에 집착하지 말고 추구해야 된다. 그건 추구하는데 추구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그게 하드함의 없이 하는 거예요. 내가 했다라는 상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해서 사는데 집착은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 이미 만족스러워요. 할 게 없으니까요. 근데 할 게 없다고 아무것도 안 하지 않아요. 2년 따라 할 일을 충실히 해요. 자식을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또 남편을 위해서 집안일도 열심히 하고 바깥에 돈도 열심히 벌어오고 자식을 위해 학원비도 열심히 벌어오고 그 2년이 그래 돼 있으니까 2년을 열심히 챙긴다니까요. 2년 따라 열심히 산다니까요. 부지런히 살아요. 더 순수하게.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이 우리는요. 반응해요. 반응해요. 이게 이게 무슨 말이냐면 제가 옛날에 그런 생각한 적 있어요. 그 이제 우리 군에 있을 때 보면 어느 보직 중에 되게 힘든 보직이 있다. 그랬잖아요. 정말 어렵고 힘든 보직 정말 너무너무 힘든 부식인데 그 부식에서 늘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에요. 그럼 옆에서 이렇게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면요. 와 진짜 너무 힘들 것 같고 너무 안쓰럽고 좀 부사하기도 하고와 저걸 어떻게 저렇게 해내는 게 너무 대단해요. 저 힘든 거를 매일같이 저렇게 해낸다는 게 너무 대단하고 어떻게 저걸 할 수 있지 막 싶단 말이에요. 죽어도 못 할 거 같고. 그렇단 말이에요. 그런데 2년 따라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딱 가잖아요. 그 자리에 가면 다 해요 다 해요. 물론 하면서만 온갖 생각이 처음에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러니까 예를 들어 컴퓨터 앞에 앉아 가지고 업무만 하루 종일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근데 이건 동상인가 싶을 정도로 거기 앉아 가지고 정말 몇 시간을 꼼짝 안 하고 계속 요구받았다. 8시간 내리 요거만 하다가 퇴근한 사람이 있거든요. 가지고와 정말 미쳤다. 정말와 저거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난 죽어도 저건 못 하겠다 싶은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근데 어느 날 제가 이렇게 군에서 임시로 그런 보직에 잠깐가 있어야 될 때가 있었어요. 계속 그 관련된 것만 써야 되는 거고 하는 때가 있었어요. 그 거기 딱 가니까 뭘 느꼈냐면 처음에 갈 때 되게 걱정을 했어요. 야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걸 해야 되는구나. 아유 이것도 해야지 어떡하겠나? 이런 생각이 있으면서 갔단 말이에요. 그런데 깜짝 놀랬어요. 9시에 딱 출근해 가지고 딱 이러기 시작하는데 좀 있다가 밥 먹으라는 거예요. 거기 뭐지? 그래서 몇인데 어쨌든 12시라는 거야? 그 3시간이 금방 회사 나가더라고요. 그 깜짝 놀래가지고 밥을 먹고 나서 이렇게 막 정리하고 이제 1시에 이러고 시작하는데 좀 이따가 한둘 퇴근을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뭐지? 이렇게 기억이 나요. 이게 몰입을 하니까 시간을 모르겠더라고요. 훈련도 그래 훈련도 그때는 막 힘도 주겠다라고 애들 못 하겠다라고 막 이러다가 막상 가서 굴리고 나면 생각이 없어요. 그냥 기계처럼 오른쪽 쪽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왼쪽 왼쪽으로 굴러가는데 그냥 그냥 한참 하다 보면 시간이 지나요. 이게 약간 그때 보면 되잖아요. 약간 로보트 비슷해요. 로보트 같아요 사람들이 그리고 고냈다 와서 처음에 정신교혹이시잖아요. 기차저차 어쩌저쩌 한다. 지금부터 시작하잖아요. 그럼 아무도 토를 안 달아요. 군에 온 모든 사람 중에 이걸 이건 너무 하지 않습니까? 이거 우리가 큰일 날 수 있습니다. 어쩌고 이런 얘기를 하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아무도 노후를 안 해요. 그냥 해요. 그러면 멀리서 이렇게 바라보면 신기해요. 모든 사람이 요 인연에 딱 넣잖아요. 그럼 이 인연에 다 움직여요. 로보드 같아요 진짜. 우리가 다 그렇다니까요. 여러분은 여러분 인연 속에 요 몸 몸뚱아리 속에 딱 집어넣잖아요 여러분 그러면 본별심이 그 목동아리에 딱 최적화된 자기를 만들어낸다니까요. 응 그래서 진짜 자기가 없어요. 그런데 왜 웃으셨잖아요. 주권하면 어디로 가죠? 주권하면 내가 다음 생에 뭐 어디 미국에서 태어날까요? 남자나 여자로 태어나지 않을까요? 아 저는 그런데 아 저기 저 저 이렇게 막 지내. 지네 같은 다리 긴 벌레 너무 제 태어나서 제일 무서워하는 게 지네 같은 벌레인데 난 지네로만 태어났으면 좋겠어요. 어떤 친구는 사마귀가 너무 무서운데 저는 제발 좀 사마귀로 안 태어났으면 좋겠어요. 뭐 이런 얘기를 하더란 말이죠. 죽고 나서 사마귀가 되고 지네가 되고 이럴 거야 안 그럴까요? 이거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예를 들어 여러분 여러분 물을 먹었어요? 몸을 지나 가지고 피도 되고 막 왔다 갔다 지나 가지고 얘가 이제 오줌으로 빠져나갔어요. 근데 그게 어쩌지? 제가 그 물을 사마개가 먹었어요. 금은 내 몸의 일부가 사막이 몸이 된 거야 안 된 거예요? 됐잖아요. 그럼 그걸 윤예라고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지수 하품 그 물의 지수 화풍 각각 요소들은 그렇게 유네해요. 그 그렇게 돌고 돌잖아요. 그걸 유네라고 이름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잖아요. 딱 정할 수가 없잖아요. 그럼 또 여러분 마음 착한 마음 쓰는 거 뭐 어떤 마음을 맨날 쓰면 계속 못된 마음이 계속 유뇌해요. 없음으로 굳어져가지고 계속 부정적인 마음이 계속 유네해요. 그러다가 좋은 사람 만나고 좋은 인연 만나서 좋은 마음 쓰는 걸 옆에서 잘 훈습하다 보면 그 사람이 좋아져요. 그럼 또 좋은 마음으로 윤해서 이제는 악한 마음을 쓰지 않게 돼요. 그럼 마음이 그렇게 좋은 마음으로 또 바뀌어요. 은혜예요. 끊임없이 의존하고 있잖아요. 어 그 저 손님과 스님에서 법률 스님이 그 얘기하시대요. 윤에 뭐가 윤예냐? 괴로움이 돌고 도는 게 윤예다. 그게 원래 윤애의 정의예요. 괴로움이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게 유네예요. 지옥아기 축제 인간소락 천상에 왔다 갔다 하는 게 뭘 왔다 갔다 해요? 죽고 나서만 태어나는 게 아니고 지금도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하고 있다니까 우리는 감정이 태어났다가 죽잖아요. 그죠? 그게 생사해요. 불교에서 말하는 생산은 불생불멸이라잖아요. 생도 없고 사도 없다. 그러잖아요. 이 몸이 태어나고 죽는 걸 생산하고 하지 않아요. 왜? 애초에 불교는 몸이 태어나고 죽는 거 그걸 보는 게 아니라 진실을 보거든요. 우리 중생들이 생사라고 여기는 걸 보니까 몸이 태어나고 죽는 게 생사가 아니라 모든 인연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생겨날 때 생이라고 하고 끝날 때 사라고 해요. 좋은 감정 생겨났다. 사라지잖아요 그게 그 감정의 일생이에요 한 평생이에요 손을 들었다 하잖아요. 드는 일이 생겨나고 느는 일이 생겨나죠. 감정도 생겨나고 생각도 생겨나고 좋은 일도 생겨나고 나쁜 일도 생겨나고 성공도 있고 실패도 있고 그게 전부 다 생사 생사 생사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거예요. 음 중중무진 연기예요. 이게. 종중무근 무궁무진하게 생사 생사 생사가 끊임없이 나고 죽고 나고 죽고 반복하는 게 눈앞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지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는 일은 없어요. 그러니까 죽으면 어디로 갈까요? 지금이 이 일이기 때문에 죽고 나도 일밖에 없어요. 우리 모두가 여서 나왔어요. 죽고 나도 여기로 밖에 돌아갈 데가 없어요. 여기서 생겨난 모양은 그건 내가 아니에요. 모형은 인형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건데 곧 뭐하러 신경을 씁니까? 그 모양이 생기든 죽든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그 모양이 생겨나고 모양이 사라질 때 모양이 생길 때 생긴 줄 알고 사라질 때 사라진 줄 알아요. 생각이 일어날 때 일어난 줄 알고 생각이 사라질 때 사라진 줄 알고 감정이 성공의 실패가 병이 아픔이 통증이 모든 것이 이 세상 섬나라상 모든 일이 일어날 때 그것만 단독으로 일어난 적 있나요? 그걸 비추는 이 마음이 있으니까 그것도 있죠. 그것은 여기서 비추어지는 대상은 전부 다 왔다 가는 거예요. 고양이 바뀌잖아요. 끊임없이 바뀌잖아요. 여기서 비춰보는 대상이 감정이 왔다 갔다 감정이란 대상으로 왔다 가고 생각이란 대상으로 왔다 가고 여기서 늘 보고 있잖아요. 감정이 왔다 가는 걸 보고 생각이 왔다 가는 걸 보고 소리를 보고 느낌을 뭐 모든 게 왔다 가는 걸 늘 여유부동한 마음짜리에서 그 모든 걸 보고 있는 우리 마음은 크기도 모양도 빛깔도 없지만 어디 있는지 위치도 알 수 없지만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몸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라고 죽는 것도 아니고요 여기서 생겨나고 사라진 모든 게 나왔단 말이에요. 이게 출처예요. 이게 우리의 고향의 고향 본향 꼴이 본래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랬잖아요. 3귀의 본래 나온 자리로 돌아간다. 돌아가 거기에 의지한다. 여기에 의지하는 거예요. 이것만이 진짜 고향이니까. 그러니까 부모님이 나의 고향이 아니에요. 부모님 뱃속이 나에 나온 출처가 아니에요. 여기가 진짜 나의 고향이에요. 근데 일치 삼라만산 오누즈 모든 존재가 다 여서 나왔단 말이야 그러니 어때요? 한 가족이죠 우리 모두가. 모두가 한 가족이에요. 그래서 반드시 너무나 긴밀하게 여러분이 누구 한 명을 괴롭혔어요? 그럼 이 세상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해요. 누구 1명에게 한 돈 100만원을 껐다가 안 갚았어요? 그러면 이 우주 법규로부터 누군가가 여러분 돈을 날리는 일을 당해요. 누굴 괴롭혔으면 괴롭힘을 당하고 누구를 사랑했으면 아꼈으면 도움을 줬으면 도움 받는 일이 벌어져요. 복지였으면 복받는 일이 벌어져요. 다 한 통 속이라서 그래요. 내가 저 어디저 저기 저 외국 여행 갔다가 외국 현지에 있는 어떤 사람을 아무도 안 보는 데서 제가 도와줬는데 아무도 안 알아줘요.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온 우주가 다 알아요. 그 금감 내용은 다 알고 다 본다 그러잖아요. 부처님은 다 알고 다 보신다. 진리는 다 알고 다 봐요. 나 혼자 몰래 한 잘한 거 어디 가서 자랑할 필요가 없어요. 자랑하고 나면 그게 이제 오히려 공덕이 없어져요. 그리고 오히려 남들이 욕을 해요. 그게 옛날에 연예인들 막 몇십억 기부했는데 기부하고 난 거야. 신문에 나면은 꼭 그 밑에 반은 욕이고 반은 칭찬이라니까요. 그 깜짝 놀랬다니까요. 아 이거는 너무 완벽한 자랑들이어서. 욕할 구석이 하나도 없어요. 근데 반은 욕을 한다니까요. 저기 지돈이냐 뭐 뭐 뭐 누가 이렇게 해준 거 아니냐 뭐 저거 저쩌고. 온갖 욕을 해요. 그러니까 업이 그래서 그래요. 수희 찬탄을 하지 못하는 업이 있는 사람은 좋은 걸 봐도 수의 찬탄을 못 해요. 그러니 이 세상 어차피 우리가 아르마리로는 알 수 없어요. 이게 뭐가 옳은지 뭐가 그런지 알 수 없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의 입장 입장 입장 하나하나를 뜯어보면요. 전부 다 그럴 법해요. 우리도 그럴 수 있어요. 지금 전쟁 나가지고 칼 들고 총 들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잖아요. 그럼 여기 계신 여러분들도 나쁜 짓 절대 못 하는 여러분들도 걔는 안 죽이면 내가 죽는다 싶으면 내 자식이 죽는다 싶으면 어떡하겠어요? 찔러 죽이죠. 총으로 쏴 죽이고. 다 한다니까요. 그리고 내 자식 먹일 게 하나도 없이 이제 전쟁통에 아무것도 먹일 게 없어요. 근데 우리가 옆에 옆에 마을을 점령했어요. 그럼 거기 가서 다 털어 갈 거라니까요. 착하고 못 뜰 거고 상관이 없다니까 2년 따라 그렇게 할 거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사람을 응징하거나 과하게 싫어하거나 미워하거나 이럴 필요조차 없어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이것만이 이 보는 이 자리 이것만이 진짜 진실이에요. 진짜예요. 진짜 찐이에요. 찐 나머지 나 생각이잖아요. 생각 따라가니까 결혼 죽겠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괴롭다니까요. 중생은 생각따라 사니까요. 일이 있으면 어쩌지 저랬으면 어쩌지 저래 이 일이 있으면 어쩌지 하는 그 생각 그거는 수백 수천 수만 수억 수조까지 생각 중에 하나인데 그 생각 때문에 죽을 확률이 얼마나 돼요. 그 생각이 진짜 벌어질 확률이 얼마나 돼요? 그거 막 다 대응해야 돼요. 대비 책 마련해야 돼요? 데뷔책 마련한들 뭐 그게 정말 그렇게 잘 되겠냐 말이에요. 그냥 대비책도 마련해야 되겠지만 생각이 나면 근데 거기에 막 생각이 사로잡혀 있을 필요는 없어요. 그래서 그냥 삶은 진짜 인연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면 돼요. 그래서요. 아 2년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은 진실이에요. 그런데 2년 2년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지 못하는 건 이걸 다르게 말하면 유의 조작이라 그래요. 2년 따라 흐르고 있는 걸 거스르면서 내 뜻대로 하고 싶은 생각 있잖아요. 그걸 분배심이라 그랬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2년 따라 사는 사람은 순탄해요. 문제가 없어요. 자기 생각대로 살려는 사람은 괴로워요. 근데 생각대로 살지만 인연에 맡기고 생각대로 살아요. 하되 함이 없이 하는 거죠. 그럼 내 생각대로 열심히 살지만 완전히 인연이 내맡기고 사는 사람이에요. 그게 지혜예요 얼마나 간단해요? 삶이 이렇게 너무나 단순한 거예요.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그냥 사는 거 걸로 끝 그걸로 끝이에요. 자연스럽게. 자연스러움을 거스르지 않고 그러면 열심히 해요. 열심히 하는데도 안 된다. 그러면 안 되는 게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러면 아 지금은 때가 아닌 게 진리인 거예요. 그러면 안 되는 걸 받아들이면 돼요. 그럼 오케이 안 되네. 그럼 나중에 될 때를 위해서 지금 열심히 준비만 하고 있으면 돼요. 안 되면 바닥바득 배야 된다고 우기면 괴로워요. 그때부터 근데 바둑바둑 우기지 않으면 언제나 자유로워요. 아무 문제가 없어요. 아무리 좋은 거여도 그 지금 안 되고 있으면 그건 안 돼야 되는 게 안 돼야 되니까 안 되는 거예요. 근데 지금 만드는 거지? 나중에도 안 되리란 보장은 없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좀 더 열심히 노력하고 연습하다. 보면 나중에 언젠가 2년이 되면 될 날이 있을 거예요. 그럼 그 날을 위해서 열심히 준비할 수 있죠. 그건 2년을 거스르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울 때 그러니까 여러분 어떤 일을 할 때 이걸 할까 말까 갈까 말까 이럴까 저럴까 막 고민이 있을 때 어떻게 하면 되냐면 어느 게 더 자연스럽지. 흐름을 타고 가는 흐름일까? 이런 걸 보면 돼요. 그래도 모르겠다. 그러면 자연스러운 건 뭐냐면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 있잖아요. 내 주변에 있는 지인들이나 가까이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야 이런 이런 고민이 있는데 터나도 될 사람들한테 이런 고민했는데 너 같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이렇게 물어보는 건 좋죠. 물어봤는데 그 사람이 내가 합당하지 않는 얘기를 한다 할지라도 어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됐으니까 물어보는 용기가 있는 거 아니에요. 물어보는 것도 자기 고집이 많은 사람은 안 물어봐요. 자기 힘이 정해 놓고 그냥 가지. 근데 유연한 사람은 물어본단 말이야. 지인들한테 그러면 주변 사람들한테 가까운 사람들한테 물어보는 게 좋은 이유가 뭘까요? 내가 너무 뭘 하고 싶은데 남편이 죽어도 못 하게 해요? 그 큰 인연이 아닌 거예요. 내가 너무 하고 싶어서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렇게 이러니까 한번 하면 어떨까 했는데. 남편도 어 좋겠는데 하면 큰 인연인 거예요. 주변 사람들도 어 좋겠는데 이렇게 하면 흐름이 뭔가 되는 쪽으로 흘러가는 거잖아요. 그러면 그 대량률이 있는 걸 수도 있어요.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2년이라는 게 귀하다는 소리예요. 2년이 근데 우리는 가장 가까운 인연 제일 무시하잖아요. 네가 뭘 알아? 당신이 뭘 알아? 회사 일을 내가 더 잘 알지? 뭐 이러고. 어떤 분들은 그래요. 남편이 집을 날렸대요. 가지고 어디 안 좋은 집을 사 가지고 날렸대요. 그래 가지고 아니 그 그걸 왜 그렇게 남편 욕을 하세요? 보사님도 같이 샀을 텐데 그랬더니 아이고 같이 샀으면 제가 말도 안 하죠. 저 몰래 그냥 딱 듣기 소리 도당 딱 찍어와 가지고 나한테 통보했단 말이에요. 이러더라고요. 왜 통보하겠어요? 나는 아는데 저 사람 모른다. 저 사람 얘기해봐야 무조건 반대할 텐데. 이런 생각 때문에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거예요. 아무리 자기 생각이 옳아도 주변 사람 가족 특히 2년이 있는 이유는 왜 그래요? 물론 그중에도 뭐 좋아도 하고 싫어도 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들을 존중해야 되는 거예요. 왜? 또 다른 나로서 존중해야 되는 거예요. 왜? 내 남편 아내 가족들은 또 다른 나거든요. 나와 가장 가까운 인연들이 물질 현상으로 현현돼서 나오는 게 가족이에요. 그러니까 가족을 굳이 못 하면 그 어떤 누구도 굳이 못 해요? 근데 가족이 구제가 제일 힘들죠. 그러니 구제는 못 하더라도 어때요? 가족을 존중해야 돼요. 내 마음처럼. 내일처럼. 그래서 거사님들은 보사님들 몰래 혼자서 주식 막 하면 안 되고 고사님들을 또 마찬가지고 뭔가 이렇게 좀 큰 그런 것들은 같이 해서 같이 대화를 나눠서 그러면 흐름 따라가는 거잖아요. 흐름 따라. 그러면 뭔가 잘못되더라도 아이 둘이 같이 잘못한 거니까. 같이 이겨내자 하면 되잖아요. 그럼 미안한 것도 덜하잖아요. 근데 혼자 잘못해 가지고 혼자 날려 보세요. 퇴직하신 거자님들 퇴직금 뭐 한 2억 3억 받아 가지고 주식해 가지고 내가 10억으로 늘려 가지고 만으로 행복하게 해 주려고 주식했다가 3억이 5천만 원 된다 이랬단 말이에요. 금 9000만원 되고 나니까 어떤 분은 끝까지 말 안 하고 어떤 분은 어쩔 수 없이 많은 아내한테 얘기를 했다가 아내가 그 처절하게 울면서 막 화도 내다가 어떤 분들은 말도 안 하고 그냥 혼자서 울음을 살키면서 이런 분도 있고 막 화를 내는 분도 있고 근데 그 모습을 보고는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더래요. 그렇지 않았다는 지금 2억 5천 내 남은 인생 날아가 가지고 세상이 무너지는데 안에 그 모습을 보니까 무너져 죽을 것 같더래요. 가지고 그날로 이게 막노동을 하러 나가 가지고 매일같이 막노동을 하러 본인이 한 잘못이 있으니까 안에 보기 미안하잖아요? 뭐 그랬다는 얘기들도 있고. 그래서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을 타고 가는 게 저는요. 물론 열심히 해서 뭔가 조금 아닌 것도 해보는 것도 좋죠. 도전해 보는 것도 좋죠. 근데 도전 한번 해 보고 도전해 서러운 도전해 봤는데 안 된다. 그럼 그건 자연스럽지 않은 거예요. 그럼 이런 마음 자세는 어떨 때 가능할까요? 과도한 집착이 없을 때 삶은 지금이대로도 괜찮다라는 믿음이 있을 때 그리고 모양을 모양의 내가 아니라 이 마음이 난 줄 알면 어때요? 모양 따라가는 일이 해도그만 안 해도 그만두잖아요. 그렇게 모양 따라가는 일을 하면 좋잖아요. 아니 돈 많으면 좋잖아요. 그러니까 돈 벌어보겠다. 어 마음 드는 거 좋죠. 그러니까 노력해 본다 이거예요. 근데 될지 안 될지 모르니까 안 돼도 괜찮고 돼도 괜찮다. 꽃눈은 자유로워요. 이렇게 생각 따라가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고 가면 더 열심히 더 순수한 열정을 다해서 삶을 살아가게 돼요.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맙십시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