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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부따와 스피노자 사상

작성자空山 내려놓음 마음학교장|작성시간26.06.21|조회수20 목록 댓글 0

우리는 보통 스피노자를 철학자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부따는 깨달은 성자로 기억합니다. 한 사람은 서양 철학을 대표하고 다른 한 사람은 동양의 수행 전통을 대표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두 사람이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스피노자는 신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고 어떤 것도 사유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도 생각하고 있는 마음도 느끼고 있는 감정도 모두 신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붓다는 진여를 떠나 현상이 없으며 현상을 떠나 진여 또한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진여와 분리된 어떤 세계가 아니라 진여가 드러난 모습입니다.

언뜻 보면 신과 진여는 전혀 다른 개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 깊이 들어가 보면 흥미로운 질문이 나타납니다.
스피노자가 말한 신은 정말 종교가 말하는 신일까요?
붓다가 말한 진여는 정말 어떤 초월적 세계일까요?
어쩌면 둘은 같은 실제를 바라보면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요?
스피노자는 신적 자연을 말했습니다.
신은 자연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라고 말했습니다.
붓다는 진여는 현상과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현상으로 드러나는 실상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 온 신과 세계 본질과 현상 깨달음과 현실에 대한 관점도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번 탐구에서는 스피노자의 신적 자연과 붓다의 진연를 통해 본질과 현상이 왜 둘이 아닌지
인간은 왜 현상에만 머무르게 되는지 그리고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나는 종교가 말하는 인격적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에게 신은 세상을 만든 뒤 물러난 존재가 아닙니다.
나와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원인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도
생각하고 있는 마음도
느끼고 있는 감정도
모두 신을 떠나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신을 초월적 존재로 보지 않았습니다.
신은 자연 밖에서 세상을 조종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연을 생성하고 자연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내재적 원인입니다.
신은 자연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입니다.
신은 자연 속에서 끊임없이 전개되는 활동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신은 어딘가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존재와 경험 속에서 항상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재

세상을 만들고 세상을 심판하는 존재가 아니라
신은 모든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궁극의 실제입니다.
전제 이전의 존재이며 사유 이전의 근원입니다.
모든 것은 신 안에서 존재하며
모든 것은 신 안에서 이해됩니다.
따라서 신은 모든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불교가 말하는 진여 또한 매우 비슷한 의미를 갖습니다.
진여는 어떤 대상이 아니고
찾아서 얻는 것도 아니며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진여는 모든 현상의 근원이며
모든 존재의 본성입니다.
모든 현상이 나타나기 이전에 있으며 현상이 사라진 후에도 항상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진여를 떠나 현상이 없고 현상을 떠나 진여 또한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현상이 진여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은 진여의 드러남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파도가 바다와 분리될 수 없듯이
현상 또한 진여를 떠나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스피노자의 신과 진여가 서로 만납니다.

신을 떠나 존재가 없듯이 진여를 떠나 현상도 없습니다.
신없이는 사유할 수 없듯이 진여 없이는 경험 또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스피노자의 신적 자연은 불교의 진여와 현상이라는 관계와 맥을 같이 합니다.
진여의 관점에서 읽힌 자연은 신이며 생멸의 관점에서 읽힌 신은 자연입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두 실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실제를 서로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체와 상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체는 본질이며 상은 드러남입니다.
그러나 체와 상은 서로 분리된 둘이 아닙니다.
체가 드러난 것이 상이며 상은 체를 떠나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스피노자의 신적 자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신은 자연과 분리되지 않으며 자연은 신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본질과 현상 체와 상 신과 자연은 하나의 실제가 가진 두 얼굴입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둘 다 존재의 근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이러한 진여가 현상 세계와 전혀 관계없는 절대적 실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래장을 말하고 아뢰야식을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여래장은 모든 존재가 본래 갖추고 있는 본성이며 아뢰야식은 모든 경험의 씨앗을 품고 있는 근거입니다.
모든 경험은 아뢰야식을 바탕으로 전개됩니다.
모든 현상은 아뢰야식을 통해 드러납니다. 따라서 아뢰야식은 진여와 현상이 만나는 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가 신을 말한다면
불교는 진여와 여래장을 말합니다.

스피노자가 존재의 근원을 말한다면 불교는 일심과 아뢰야식을 말합니다.

설명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방향은 같습니다.

존재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생각도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고
감정도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며
세계 또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의 근원을 바탕으로 드러납니다.

스피노자는 그것을 신이라 부르고
붓다는 진여라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남습니다.

만약 신과 진여가 존재의 근원이라면 그 본질은 어떻게 몸과 마음이 되고 어떻게 세계로 드러나는 것일까요?
스피노자의 신과 불교의 진여가 어떻게 현상으로 드러나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또 조건 따라 드러나며 감정도 조건 따라 드러납니다.
이 사실을 보지 못하면 인간은 오온에 예속됩니다. 생각에 끌려가고 감정에 끌려가며 몸에 끌려갑니다. 그러나 연기를 보게 되면 생각은 생각으로 보이고 감정은 감정으로 보이며 몸은 몸으로 보입니다.
더 이상 그것을 나라고 믿지 않게 됩니다.

스피노자는 이 상태를 신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드러남만 보는 것이 아니라 드러남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을 함께 보는 것입니다.
결과만 보는 것이 아니라 원인도 보는 것입니다.
드러남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드러남을 가능하게 하는 본질을 보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삼종지 즉 직관지의 인식입니다.
스피노자는 일종지. 즉 상상지가 결과에 머무르는 인식이라면
직관지는 사물의 본질을 직접 이해하는 인식이라고 말합니다.
불교로 말하면 반야의 지혜와도 같습니다. 연기를 보고 오온개공을 보며
본질과 현상이 둘이 아님을 보는 것입니다.

不異

스피노자에게 상상지는 결과만 보는 인식입니다.
드러난 현상만 보고 그 원인은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불교로 말하면 업에 의해 사물을 인식하는 상태와도 같습니다.
생각을 사실로 믿고 감정을 실제로 믿으며 현상을 분리된 실제로 믿는 단계입니다.

반면 삼종지는 사물을 그 본질과 필연에 관점에서 인식합니다.
왜 그것이 일어났는지 어떤 원인에서 드러났는지 그 근원을 함께 보는 것입니다. 불교로 말하면 반야지의 안목입니다.
연기를 보는 안목이며 오은개공을 보는 안목입니다.
연기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인간은 삶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고통은 현상만 보고 원인을 보지 못하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필연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신의 안목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드러난 사건을 넘어 그 사건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대 자유는 신을 인식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스피노자가 말한 자유는 본질을 인식하는 자유이고 필연을 자각하는 자유입니다.
그때 인간은 더 이상 감정에 지배되지 않습니다.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감정을 보기 때문입니다.
미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미움의 일어남을 그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감정 자체는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고 가치 중립적입니다.
문제는 감정이 아니라 감정에 대한 인식입니다.
같은 슬픔도 무지 속에서는 고통이 되지만 원인을 이해할 때는 지혜가 될 수 있습니다.
같은 분노도 무지해서는 집착이 되지만 원인을 이해할 때는 통찰이 됩니다.
정신이 감정에만 자극받을 때 감정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감정을 필연성으로 인식하게 되면 정신은 더 이상 감정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감정을 억압해서가 아니라 감정의 원인을 보기 때문입니다.

미움도 슬픔도 욕망도 그 원인을 인식할 때 비로소 자유롭습니다.

스피노자가 지복이라 부른 것도
불교가 해탈이라 부른 것도
신과의 필연성입니다.
정신과 신체가 신의 변용임을 철저히 인식할 때
몸과 마음을 더 이상 실체로 붙잡지 않게 됩니다.

오온을 나라고 믿지 않고 연기적 현상으로 보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나라는 생각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하나의 근원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신과의 필연성을 인식함으로써 인간은 창조자로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완전함은 신과의 관계 속에서만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 속에서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자각함으로써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신을 자각함으로써 감정과 인과율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불교 또한 연기를 깨달음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말합니다.
결국 둘이 말하는 자유는 생각대로 사는 자유가 아니라 생각에서 벗어나는 자유이고 본질을 자각하는 자유이며 신과의 필연성을 인식하는 자유입니다.

진여와 현상이 둘이 아님을 보는 자유입니다.
그때 비로소 몸과 마음이 신에 드러남이며 오온 또한 진여의 드러남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이것을 지복이라 불렀고 불교는 이것을 해탈이라 불렀습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자리는 하나입니다.
본질을 자각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나는 이제 집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스피노자가 말한 신과 붓다가 말한 진여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겉으로 보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신을 말하고 한 사람은 진여를 말합니다. 하나는 실체를 말하고 하나는 여래장과 아뢰야식을 말합니다.
하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두 사람 모두 하나의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나와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궁극의 근원 말입니다.
스피노자는 그것을 신이라 불렀고 붓다는 진여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본질은 오온과 세계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본질은 보지 못하고 드러남만 보고 드러남을 실제라고 믿는 것입니다. 오온을 나라고 믿고 생각을 나라고 믿고 감정을 나라고 믿으며 현상에만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인간이 자유롭지 못한 원인을 신과의 필연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불교는 무명 때문에 연기를 보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이 말한 자유는
같은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자유는 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신과의 필연성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진여와 현상이 둘이 아님을 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의 근원에서 드러나고 있음을 직접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때 인간은 감정의 노예에서 벗어나고 생각의 노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오온을 나라고 믿는 착각에서도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지복이라 했고 불교는 이것을 해탈이라고 했습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자리는 하나입니다.
의식을 자각할 때 우리가 찾고 있던 그것이 의식임을 스스로 보게 됩니다.


진리 탐구와 함께 의식의 지평을 넓혀 갑시다. 구독과 좋아요는 여러분의 사랑과 격려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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