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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금강경 사구게ㆍ일체 유의법 여몽환포영 여로 역 여전 응작 여시觀

작성자空山 내려놓음 마음학교장|작성시간26.06.21|조회수61 목록 댓글 0

나라는 존재까지도 따져들어가면 수많은 인연의 그림자가 모여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모가 없었다면 이 몸이 없었고 밥을 지어 준 사람이 없었다면 자라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을 가르쳐준 사람이 없었다면 지금 이 생각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라고 부르는 것 안에 순수하게 나인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빌려온 것이며 전부 기대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머리로만 아는 것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은 다릅니다. 조용히 앉아서 지금 이 몸을 이루고 있는 인연 하나하나를 떠올려 보십시오. 밥 한 끼 물 한 잔 수만 번까지도 빌려온 것임을 느끼게 되실 것입니다. 그때 나라는 그림자가 비로소 투명해지기 시작합니다. 불자 여러분 이 4가지 비율을 다시 한번 살펴보십시오. 꿈은 실체가 없음을 보여주었고 환술은 속임의 구조를 드러내었습니다. 물거품은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주었으며 그림자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없음을 가리켰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같은 말을 네 번 반복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유의법에 서로 다른 내면을 하나씩 벗겨내신 것입니다. 이 내 비율을 다 듣고 나면 우리 마음에 한 가지 물음이 남게 됩니다. 그렇게 실체가 없고 속임이고 허약하고 의존적이라면 도대체 무엇이 남는 것인가? 이 물음 자체가 아직 유의법의 눈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남는 것을 찾으려는 마음 무언가를 움켜쥐려는 마음 그 마음까지도 유의법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비유를 드신 것은 절망하라는 뜻이 아니라 눈을 돌리라는 뜻이었습니다. 유의범 너머에 있는 흔들리지 않는 자리를 보라는 것입니다. 꿈을 꾸면서도 꿈인 줄 아는 사람 환수를 보면서도 환술인 줄 아는 사람 물거품을 바라보면서도 터질 것을 아는 사람 그림자를 보면서도 빌려온 것임을 아는 사람 그 아는 자리 그 깨어 있는 자리가 바로 무위의 자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네 가지 비유를 통해 우리를 바로 그 자리까지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내 비유가 끝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사국의 셋째 줄에서 두 가지 비유를 더 내놓으셨습니다. 여러 역여전 이슬과 번개 이 두 비유는 앞에 내과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여로 여겨져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다. 사국의 셋째 줄 이 여섯 글자가 담고 있는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앞서 꿈 환술 물거품 그림자 네 가지 비유를 풀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거기서 멈추지 않으시고 이슬과 번개 두 가지를 더 보태셨습니다. 왜 더 보태셨는지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앞에 네 비유는 유의법의 성질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실체가 없고 속임이며 허약하고 의존적이라는 것 이것은 유의법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슬과 번개는 결이 다릅니다. 이 두 비유는 유의법이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가를 시간의 차원에서 보여줍니다. 성질이 아니라 머무르는 시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이슬입니다. 아침에 풀립 위에 맺혀 있는 이슬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햇살이 비치기 전 이른 새벽에만 볼 수 있습니다. 맑고 투명하며 풀잎 끝에 동그랗게 매달려 있는 그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해가 뜨면 그 이슬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침 햇살 한 줄기를 버텨내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이슬을 비유로 드신 것은 유의법이 머무르는 시간이 그만큼 짧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좋은 일이 생기면 이것이 오래 가기를 바랍니다. 건강할 때는 이 건강이 영원할 것 같고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을 때는 이 순간이 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슬이 해가 뜨면 사라지듯 모든 유의법은 인연이 바뀌는 순간 형태를 잃게 됩니다. 평생을 함께하리라 믿었던 사람이 떠나가고 건강하던 몸이 어느 날 아프기 시작하며 높았던 자리에서 내려오는 날이 옵니다. 이것이 이슬의 도리입니다. 불자 여러분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이슬이 사라진다고 해서 물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슬은 증발하여 수증기가 되고 수증기는 구름이 되며 구름은 다시 비가 되어 내립니다. 형태가 바뀌었을 뿐 사라진 것은 아니며 유의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형태가 흩어지면 다른 인연을 만나 다른 형태로 나타납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머무르지 않을 뿐이며 이것이 이슬의 비유에 담긴 또 하나의 뜻이기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무상이라 합니다. 무상은 항상 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무상이라는 말을 들으면 허무하다는 느낌이 먼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상은 허무가 아닙니다. 무상이 곧 반야의 지혜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움켜쥐는 힘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그 힘이 풀리는 자리에서 비로소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상을 아는 사람은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더 깊이 살게 됩니다. 영원하지 않기에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더 소중해지고 영원하지 않기에 오늘의 햇살이 더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이슬이 곧 사라질 것을 아는 사람만이 풀잎 위에 맺힌 그 한 방울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무상을 모르는 사람은 이슬을 붙잡으려 하다 괴로워하지만 무상을 아는 사람은 이슬이 있는 그 순간을 고요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제 번개를 살펴보십시오. 번개는 이슬보다 훨씬 더 짧습니다. 이슬은 적어도 새벽 한 때 동안은 머물러 있지만 번개는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지나가 버립니다. 찰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 한 번 깜박이는 시간도 되지 않는 그 짧은 순간을 찰라라 합니다. 번개가 바로 그 찰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자 여러분 부처님께서 번개를 여섯 번째 비유로 드신 데에는 두 겹의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첫째는 짧음입니다. 유의법이 머무르는 시간이 범개보다도 짧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하다고 믿는 것들이 실은 찰나찰나 변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몸의 세포는 죽고 새로 태어나고 있으며 마음의 생각도 일어났다가 사라지기를 쉬지 않습니다. 둘째는 밝음입니다. 번개가 칠 때 어둠 속에 감춰져 있던 산과 나무와 길이 한순간에 드러납니다. 그러나 번개가 지나가면 다시 어둠만 남게 됩니다. 깨달음도 이와 같다고 부처님께서는 보여주십니다. 깨달음은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오는 것이 아니라 찰나의 번개처럼 번쩍 드러납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한순간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개의 비유에는 덧없음과 깨달음이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선방에서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수행자가 어느 순간 확 깨치는 것을 견성이라 합니다.
그 견성의 순간이 바로 번개가 어둠을 가르는 순간과 같습니다.
오랜 어둠 끝에 한 줄기 빛이 번쩍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번개가 비추는 그 한순간 세상이 새로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산은 원래 거기 있었고 나무도 원래 거기 있었습니다.
다만 어둠 때문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며 우리의 참 본성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원래부터 있었지만 무명이라는 어둠에 가려져 있었을 뿐
번개가 어둠을 찢듯 반야의 지혜가 문명을 찢는 순간 본래의 자리가 드러납니다.
우리 삶에서도 이 번개와 같은 순간이 찾아옵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 앞에 섰을 때
큰 병을 진단받았을 때
평생 쌓아 올린 것이 무너진 순간 그때
우리는 세상의 참 모습을 한순간에 봅니다.
그동안 붙잡고 있던 것들이 얼마나 허약한 것이었는지 한꺼번에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 순간이 지나가면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갑니다. 또 다시 움켜쥐기 시작합니다.
부처님께서 번개의 비유를 드신 것은 그 번쩍임을 한 번으로 끝내지 말고 매 순간 깨어 있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삶에서 찾아오는 고통과 상실을 그저 괴로움으로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그 순간이야말로 번개가 치는 순간입니다. 유의법의 참 모습이 드러나는 깨달음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불자 여러분
이슬과 번개를 앞에
4 비유와 합치면
여섯 가지 비유가 완성됩니다.
꿈은 실체 없음을
환은 속임의 구조를
물거품은 허약함을
그림자는 의존성을
이슬은 덧없음을
번개는 찰나의 순간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여섯 비유로 유의법의 모든 면을 빠짐없이 비추어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여섯 비유가 하나로 수렴하는 지점이 있는데
이때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
이 한마디입니다.
꿈도 이슬도 번개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머무르지 않았을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유의법이 없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유의법에 머무르지 말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이 차이를 반드시 마음에 새기셔야 합니다.
없다와 머무르지 않는다는
하늘과 땅만큼 다른 말입니다.
우리가 괴로운 것은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을 머무르게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슬을 손에 쥐려 하면 손바닥 위에서 흩어지고 번개를 붙잡으려 하면 이미 지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슬이 이슬인 줄 알면 풀잎 위에 그 순간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번개가 번개인 줄 알면 그 한순간의 밝음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그렇다면 이 여섯 비유를 듣고 난 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는 사구게의 마지막 줄에서 단 네 글자로 답을 주십니다.

응작여 시관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니라. 이 관이라는 글자 하나에 사구게 전체의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응작여 시간 마땅히 이와 같이 볼 층이라. 사구게의 마지막 줄 이 네 글자를 풀어야 합니다. 응은 마땅히 작은 질 작 여신은 이와 같이 관은 볼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6 가지 비유를 모두 펼치신 뒤에 마지막으로 이 한마디를 남기셨습니다. 이와 같이 보라고. 여기서 같이 가장 중요한 글자는 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라고 하셨습니다. 알라고도 믿으라고도 외우라고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관이라는 글자 하나가 사국의 전체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불자 여러분 관은 단순히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 관이란 마음의 눈으로 꿰뚫어보는 것을 말합니다.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겉모습 너머의 본질을 봅니다. 한자로 견이라는 글자도 보다라는 뜻이 있지만 견은 눈에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고 관은 보이는 것 너머까지 꿰뚫어 봅니다. 부처님께서 견이 아니라 관을 쓰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볼 때 대부분은 見으로 봅니다.
눈앞에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진짜라고 믿습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하다.
건강하면 괜찮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만족한다. 이것이 見입니다.

그러나 觀으로 보면 그 안에 숨어 있는 구조가 드러납니다.
돈은 인연이 모여 생긴 것이며
건강은 조건이 유지되는 동안만 존재합니다.
사람의 곁에 있음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見이 표면에 머무른다면
觀은 그 너머의 구조를 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심한 말을 들었을 때 견으로 보면 화가 납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모욕을 주었다. 용서할 수 없다. 이렇게 반응합니다.

그러나 관으로 보면 그 화라는 감정 자체가 조건에 의해 일어난 유의법입니다.
저 사람의 말이라는 조건 나의 자존심이라는 조건 이 두 조건이 부딪혀서 화가 일어난 것이지 화가 나라는 존재의 본질은 아닙니다.
이렇게 볼 수 있게 되면 화에 끌려다니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觀의 힘입니다.
부처님께서

應作如示觀

이라 하신 것은 사구게의 여섯 비유처럼 보라는 뜻입니다.
일체유의법을 꿈처럼 환술처럼 물거품처럼 그림자처럼 이슬처럼 번개처럼 보라. 이것이 觀법입니다.

여기서 핵심을 놓치면 안 됩니다.
꿈처럼 보라는 것은 꿈이라고 단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꿈을 보듯이 보라는 뜻입니다.
꿈을 보듯이 본다는 것은 거기에 끌려가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잇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영상의 제목으로 돌아가 보면 꿈 같다는 말을 99%가. 거꾸로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거꾸로 안다는 것은 꿈 같다는 말을 듣고 허무하다. 아무것도 없다. 다 부질없다고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觀이 아니라 단념이며 체념에 불과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체념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금강경 전체를 읽어보십시오.
부처님 중생을 제도하라 하시고
보시를 행하라 하시며 바라밀을 닦으라 하십니다.
적극적으로 살라고 하시되
다만 그 모든 행위에 상을 두지 말라고 설하십니다.
꿈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꿈 안에서 중생을 위해 일하는 것
이것이 금강경이 말하는 보살의 삶이며 사구게의 관이 가리키는 방향입니다.
관은 체념과 정반대에 서 있습니다.
체념은 눈을 감는 것이지만
관은 눈을 뜨는 것입니다.

체념은 포기이지만 관은 즉시입니다.

유의법이 꿈 같고 물거품 같고 번개 같다는 것을 똑바로 보되 그 앎을 가지고 살 한가운데로 다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응작여시관의 진짜 뜻이며 사구게가 허무주의가 아닌 까닭입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살펴보십시오. 보살은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고 하십니다. 응모소주 이생기심 머무르지 않되 마음을 내라고 설하십니다. 아
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마음을 내되
거기에 머물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처음 들으시면 모순처럼 느끼실 수 있습니다.
머물지 않으면서 어떻게 마음을 내느냐?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가장 자유롭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때는 그 결과에 붙잡히지 않을 때입니다.
결과에 걸리는 순간 두려움이 생기고 계산이 생기며 마음이 좁아집니다.

머무르지 않을 때 오히려 마음이 넓어지는 것 이것이 금강경이 전하는 역설이며 사구게의 觀도 같은 구조입니다.

보되 거기에 메이지 말라.
살되 거기에 머물지 말라.
불자 여러분 이 관법이
우리 삶에서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살펴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되 이것이 영원하리라는 착각을 내려놓으면
지금 이 순간에 함께함이 더 깊어집니다.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대. 이 건강이 영원하리라는 집착을 내려놓으면 오늘 하루를 더 소중히 쓰게 됩니다.
관은 삶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삶을 되돌려주는 것입니다.
집착이라는 필터가 거치면 세상의 본래 모습이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觀이라는 글자가 수행법인 까닭이 여기에 있으며 한 번 듣고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매일 매 순간 반복해서 보아야 합니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이 화도 유의법이며 꿈과 같다고 관하십시오.
욕심이 일어날 때 이 욕심도 물거품과 같다고 바라보십시오.
슬픔이 밀려올 때 이 슬픔도 이슬과 같다고 알아차리십시오.
불교의 수행법 가운데 윗바사나가 있는데 이는 그대로를 관찰한다는 뜻입니다.

호흡을 관찰하고
몸의 감각을 관찰하며
마음의 일어나는 생각을 관찰합니다.
이 윗바사나의 핵심이
바로 사구게의 觀과 맞닿아 있습니다.

관찰하되 판단하지 않고 알아차리되 거기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구게를 외우면서 관법을 닦는 것은 경전 공부와 수행을 동시에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사고계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이며 유의법 안에 살면서도 유의법에 매이지 않는 삶의 시작입니다.

불자 여러분
응작여시관
이 네 글자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무엇에 매여 계십니까?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인지 아직 오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인지 유의법에 매여있는 한 괴로움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관의 눈으로 바라보는 순간 매여 있던 그 자리에서 한 발 물러설 수 있게 됩니다.
물러선다는 것은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다. 더 넓은 눈으로 더 깊은 자리에서 삶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사구게의 네 줄로 우리에게 하나의 완전한 수행 체계를 주셨습니다.

첫째 줄에서 대상을 밝히시고 둘째 줄과 셋째 줄에서 여섯 비유로 그 성질을 보여 주신 뒤 마지막 줄에서
이와 같이 보라는 수행의 방향을 제시하셨습니다.
네 줄이 하나의 흐름이며 이 흐름 전체가 금강경의 핵심을 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구게가 금강경 전체 안에서 어디에 놓여 있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제 그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사구게는 금강경 제32분 응합의진분에 놓여 있습니다.
금강경의 맨 마지막 장입니다.
32장에 걸친 부처님의 말씀이 이 네 줄의 게송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사구게가 맨 끝에 놓여 있다고 해서 단순한 결론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사국에는 결론이 아니라 금강경 전체를 꿰뚫는 하나의 축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금강경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금강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작업을 반복하는데 바로 상을 부수는 것입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 네 가지 상을 금강경은 32장에 걸쳐 끊임없이 깨뜨립니다.
아상은 내가 있다는 집착이며 인상은 남이 있다는 집착입니다.
중생상은 중생이 따로 존재한다는 집착이고 수자상은 생명이 독립적으로 있다는 집착을 가리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네 가지 상이 깨달음을 가로막는 근본 장애라고 설하십니다.
그래서 금강경 곳곳에서 이상을 깨뜨리는 말씀이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괴로움의 대부분은 이 네 가지 상에서 비롯됩니다. 내가 옳다는 아상 저 사람이 나쁘다는 인상 세상이 나를 알아줘야 한다는 중생상 내 생명만은 특별하다는 수자상 이것들이 뒤엉켜서 우리를 괴로움의 그물 안에 가두어 놓습니다. 가만히 하루를 돌이켜 보면 마음이 불편했던 순간이 있으셨을 겁니다. 그 불편함에 뿌리를 캐어 들어가면 반드시 이 네 가지 산 가운데 하나에 닿게 됩니다. 누군가가 나를 무시했다고 느낀 것은 아상이며 저 사람은 왜 저러나 하는 판단은 인상입니다. 금강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일은 바로 이 그물의 매듭을 하나씩 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불자 여러분 제3분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설하십니다.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라고 제14분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범소유상 개시어망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수보리 존자가 눈물을 흘린 것은 앞서 살펴본 대로입니다. 제17분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시 한번 못을 박으시며 법에도 집착하지 말라 비법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흐름을 따라가 보면 금강경의 구조가 드러납니다. 앞부분에서는 상을 세우고 중간에서는 그 상을 깨뜨리며 뒷부분에서는 깨뜨린 것조차 다시 깨뜨립니다. 보시를 하되 보시한 상이 없어야 하고 중생을 제도하되 제도한 상이 없어야 하며 법을 설하되 법이라는 산조차 남기지 말아야 합니다. 금강경의 맨 처음을 떠올려 보십시오. 부처님께서는 탁발을 나가시고 밥을 드시고 발을 씻고 자리에 앉으십니다. 이 평범한 일상의 장면으로 금강경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32장의 법문이 모두 끝난 자리에서 사고계가 나옵니다. 일상에서 시작하여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다만 돌아온 그 일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 있습니다. 닭발하고 밥 먹고 발 씻는 그 일상이 이제는 꿈같이 물거품같이 번개같이 보이되 그 안에서 여전히 온전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불자 여러분 여기서 사고계의 위치를 다시 보십시오. 이 모든 작업이 끝난 맨 마지막 자리에 사고개가 놓여 있습니다. 사고계의 첫 줄 일체 요리법은 상이 붙어 있는 모든 대상을 가리킵니다. 둘째 줄과 셋째 줄의 여섯 비유는 그 상을 깨뜨리는 여섯 개의 방편입니다. 마지막 줄 응작여 시간은 깨뜨리고 난 뒤에 눈을 제시합니다. 금강경이 32장에 걸쳐 있던 모든 작업이 이 네 줄 안에 압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금강경의 핵심 구절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응모소주 이생기심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이것은 사국의 관과 같은 뜻입니다. 범소유상 게시어망 무릇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 이것은 사국의 염웅한 포용과 맞닿아 있습니다. 약견제 상비상 즉견열애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열애를 본다. 이것은 사국의 전체가 가리키는 최종 목적지와 같습니다. 금강경의 핵심 구절 하나하나가 모두 사구개로 수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구개를 제대로 이해하면 금강경 전체가 열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구개 없이 금강경을 읽으면 부처님께서 왜 같은 말씀을 반복하시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산을 부수라 집착하지 말라. 머물지 말라. 이 말씀들이 흩어져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고계를 알고 나서 금강경을 다시 읽으면 32장 전체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모든 말씀이 사국의 관이라는 한 글자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예를 들어 제사분에서 부처님께서 보시에 대해 말씀하실 때 사고계의 눈으로 읽어 보십시오. 봇이라는 행위도 유의법이며 꿈과 같고 물거품과 같다는 것을 알면 보시한 상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워집니다. 제 10분에서 부처님 국토를 장엄한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엄이라는 상조차 유의법이라는 것을 관하면 장엄하되 장엄한 상이 없는 경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렇듯 사국에는 금강경 어느 장을 펴도 그 장의 핵심을 여는 열쇠가 되어 줍니다. 불자 여러분 여기서 하나 더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금강경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뉩니다. 제1분부터 제16분까지가 전반부이고 제17분부터 제32분까지가 후반부입니다. 전반부에서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거친 집착을 깨뜨리시고 후반부에서는 수행자의 미세한 집착까지 깨뜨리십니다. 흥미로운 것은 후반부에서 수보리가 다시 같은 질문을 한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같은 질문을 다시 하는 것은 전반부에서 깨달은 것으로는 아직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법을 깨달았다는 생각 수행을 했다는 자부심 부처를 보았다는 확신 이 미세한 상대까지 전부 깨뜨리신 뒤에야 사구개가 나옵니다. 모든 상이 다 부서진 자리에서 비로소 응자기여 시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구개가 아무 때나 읽어도 같은 개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금강경 전체의 여정을 함께 걸은 뒤에야 사국의 무게가 비로소 온전히 느껴집니다. 처음 읽을 때와 32장을 모두 읽은 뒤에 읽을 때 같은 네 줄이 완전히 다르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그것이 금강경의 힘이며 사고계가 맨 끝에 놓인 까닭입니다. 금강경을 독성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매일 한 번 혹은 일곱 번을 독성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 독성이 끝나는 자리에 사고개가 있습니다. 32장의 말씀을 모두 통과한 뒤에 만나는 이 네 줄을 이제부터는 다른 눈으로 읽어 보십시오. 독성할 때마다 사고계에 이르면 잠시 멈추고 그 뜻을 마음에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일체유의법 영웅한 포용 여로역 여전 응작 여시관 이 네 줄이 입에서 나올 때마다 금강경 전체의 가르침이 한꺼번에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고계를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어떻게 수행으로 옮길 수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경전의 뜻을 아는 것과 그것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이제 사고계를 매일의 수행으로 쓰는 구체적인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사고계를 일상에서 수행으로 쓰는 방법은 크게 네 가지가 있습니다. 사경 염송과 정근 관법 그리고 회양이며 이 네 가지를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사경을 살펴보십시오. 사국의 내줄을 한 글자한 글자 정성스럽게 베껴 쓰는 수행입니다. 일체유의법 염웅한 포용 여로역 여전 응작여시관 한자로 쓰셔도 좋고 한글로 풀어 쓰셔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글자를 쓸 때 그 뜻을 마음에 새기면서 쓰는 것입니다. 빨리 쓰려 하지 마십시오. 한 획을 그을 때마다 그 글자가 가리키는 뜻을 떠올리면서 천천히 써야 합니다. 일체 모든 것이 유의법이라는 것을 새기면서 일체를 쓰고 염웅 꿈과 같다는 것을 새기면서 여몽을 씁니다. 불자 여러분 사경이 수행인 까닭은 손과 눈과 마음이 동시에 하나의 뜻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산만한 마음이 한 글자에 모이고 그 글자의 뜻이 마음에 스며들게 됩니다. 금강경 전체를 사경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시간이 부족하신 분은 사국에 네 줄만 매일 사경해도 충분합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혹은 잠들기 전에 사국에 네 줄을 한 번 베껴 쓰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수행이 됩니다. 처음 시작하실 때는 사국의 원문을 종이에 크게 적어 벽에 붙여 놓으시면 좋습니다. 눈에 자주 보여야 손이 자연스럽게 움직입니다. 한 달만 꾸준히 하시면 사국에 16. 글자가 저절로 외워져 있으실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염송입니다. 사고개를 소리 내어 읽거나 마음속으로 되뇌는 것입니다. 절에서 예불할 때 금강경을 독성하시는 분들은 이미 사고개를 입으로 읽고 계십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독성을 할 때 속도에 신경을 쓰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빨리 읽어야 공덕이 쌓인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셨을 겁니다. 그러나 사고개만큼은 천천히 읽으셔야 합니다. 한 줄을 잊고 잠시 그 뜻을 비추어 보고 다시 한 줄을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사고계를 읽을 때는 읽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그 뜻을 관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일체 요리법이라 읽을 때 지금 내가 붙잡고 있는 것들을 떠올리십시오. 염웅한 포용이라 읽을 때는 그것들이 꿈과 같고 물거품과 같다는 것을 마음에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백파렴주를 돌리면서 사구개를 염송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염주 하나를 넘길 때마다 사고기 한 줄씩을 익습니다. 내 알이면 사국의 한 바퀴가 됩니다. 108 염주 한 바퀴를 돌리면 사구개를 27번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염주 수행과 사국의 관법을 동시에 할 수 있습니다. 아침 예불전이나 잠들기 전 고요한 시간에 해 보시기 바랍니다. 불자 여러분 세 번째는 관법이며 이것이 사국의 수행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관법은 특별한 시간을 따로 내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수시로 하는 것입니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잠시 멈추고 마음속으로 되내십시오. 일체유의법 여몽한 포용 이화도 유의법이며 꿈과 같고 물거품과 같다. 이렇게 관하는 순간 화에 끌려가던 마음이 한 발 물러서게 됩니다. 욕심이 일어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를 간절히 갖고 싶을 때 여러 역 여전이라 관하십시오. 이 욕심도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아서 잠시 후면 사라져 있을 것입니다. 슬픔이 밀려올 때도 걱정이 머리를 떠나지 않을 때도 사고계를 떠올리면 그 감정의 한가운데에서 한 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누군가와 다투고 난 뒤 마음이 어지러울 때 해보십시오. 그 사람에 대한 미움도 유의법이며 내가 옳다는 확신도 유의법입니다. 둘 다 인연이 만들어낸 것이며 둘 다 꿈과 같고 그림자와 같습니다. 이것을 관하는 순간 다툼의 매듭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합니다. 상대방을 용서하기 전에 먼저 나의 상이 풀리게 됩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는데 관법은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닙니다.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느끼돼. 그 감정이 유의법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느끼면서도 끌려가지 않는 것 이것이 관법의 핵심입니다. 감정을 억누르면 그것은 수행이 아니라 억압이 되어 버립니다. 관법은 억압과 정반대에 서 있으며 있는 그대로를 보되 거기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 관법을 꾸준히 하시면 감정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끌려다니는 시간이 짧아집니다. 화가 나도 금방 알아차리고. 욕심이 일어나도 빨리 놓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수행의 힘이며 사고계를 몸으로 아는 사람과 머리로만 아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관법은 고요히 앉아 있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걸을 때도 할 수 있고 밥을 먹을 때도 할 수 있으며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일상의 한가운데에서 하는 관법이 앉아서 하는 관법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감정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절에 앉아서 유의법을 관하는 것은 연습이고 삶의 한가운데에서 관하는 것이 실전입니다. 부처님께서 사고개를 설하신 것도 수행의 방 안에서가 아니라 기원 정사의 일상 한가운데에서였습니다. 네 번째는 회양입니다. 수행을 마친 뒤에 그 공덕을 모든 중생에게 돌려보내는 것을 회향이라 합니다. 사국의 사경을 마치거나 염성을 마친 뒤에는 반드시 회양을 하십시오. 해양무는 간단해도 충분합니다. 사구개를 통해 얻은 깨달음의 공덕을 일체 중생과 함께 나누겠다는 마음을 내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사구개를 읽고 난 뒤 고요히 합장하시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발언하십시오. 이 공덕으로 일체 중생이 유의법의 참모습을 바라보고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하기를 원합니다. 이한줄의 회양이 수행의 공덕을 나만의 것으로 가두지 않고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까닭입니다. 불자 여러분 여기서 금강경의 가르침이 다시 작동합니다. 회양하되 회양에 따른 상에 머물지 마십시오. 내가 공덕을 쌓았다. 내가 중생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생각 자체가 아상이 됩니다. 화이어나드의 회양한 상이 없는 것 이것이 금강경이 말하는 진정한 회양이며 사국의 관법이 회양에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수행법을 하나로 묶어 매일 실천하시면 사고계가 머리에서 가슴으로 스며듭니다. 가슴에서 삶 전체로 퍼져나가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떠올려야 하지만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저절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화가 나는 순간에도 의식하지 않아도 영웅한 포용이라는 네 글자가 마음속에서 울려 퍼질 것입니다. 그것이 곧 사고계가 몸에 벤 사람의 삶이며 수행이 일상이 된 경지입니다. 염성을 더 깊이 하는 방법으로 정근이 있습니다. 정근이란 한 가지 구절을 반복해서 읽으며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수행을 말합니다. 사국의 내줄을 정근의 대상으로 삼아 30분 혹은 한 시간 동안 반복해서 읽어 보십시오. 처음에는 입으로 소리 내어 읽다가 점차 소리를 줄여 마음속으로만 익습니다. 마지막에는 읽는 것도 놓고 사국의 뜻만 고요히 비추어 봅니다. 이것이 경전정근에서 관법으로 넘어가는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사경으로 손에 새기고 염성으로 입에 새기며 관법으로 마음에 새기고 회양으로 세상에 돌려보내는 것 이 네 가지가 사국의 수행의 전체 모습이며 사국에는 경전 속에만 머무르는 개성이 아닙니다. 매일의 살 안에서 매 순간의 마음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수행법입니다. 불자 여러분 오늘 법문에 처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법문은 하나의 물음에서 시작했습니다. 꿈 같다는 말 99%가 거꾸로 알고 있다는 것 그 거꾸로 안다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분명하게 보이실 겁니다. 꿈 같다는 말을 듣고 다 부질없다.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거꾸로 아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사구개를 통해 전하신 뜻은 그것과 정반대였습니다. 꿈인 줄 아는 사람만이 꿈 속에서 자유롭습니다. 물거품인 줄 아는 사람만이 물거품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번개인 줄 아는 사람만이 그 한순간의 밝음을 놓치지 않습니다. 사국에는 허무주의가 아니었으며 삶을 포기하라는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삶을 더 깊이 더 온전히 더 자유롭게 살라는 가르침이었기에 유의법의 참 모습을 바로 보는 순간 움켜쥐던 손이 펴지고 그 자리에 반야의 지혜가 들어옵니다. 우리는 오늘 사국의 내주를 한 줄씩 풀어보았습니다. 일체유의법에서 유의법의 정체를 알았고 염웅암포형에서 네 가지 비유에 서로 다른 층위를 살펴보았으며 여러 역 여전에서 이슬과 번개가 가리키는 시간의 도리를 들었고 응작여 시간에서 부처님께서 보라고 하신 그 관의 뜻을 깨쳤습니다. 사고계가 금강경 전체를 관통하는 열쇠라는 것도 확인하였으며 사경과 염송과 관법과 회양이라는 구체적 수행법도 함께 짚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듣고도 삶이 바뀌지 않는다면 아직 견으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관으로 듣는다는 것은 듣는 순간 마음이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에 걸려 있는지 한 번만 돌이켜 보십시오. 어제의 후회든 내일의 걱정이든.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전부 유의법입니다. 전부 꿈과 같고 이슬과 같으며 번개처럼 지나갑니다. 이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 괴로움과 자유의 갈림길이 놓여 있습니다. 삶이 힘드시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몸이 아프셔서 힘드신 분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가 어려우신 분 경제적으로 걱정이 많으신 분 그 괴로움은 진짜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괴로움이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괴로움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라고 하셨습니다. 괴로움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에 끌려다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병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집니다. 관계가 저절로 풀리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집착이 풀리면서 오히려 관계가 편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사구개를 삶의 들인 사람의 변화입니다. 바깥 조건이 바뀌어서 편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안에 눈이 바뀌어서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응자겨 시간이라 하신 것이 바로 이 안의 눈을 가리키고 계셨습니다. 금강경을 매일 독성하시는 분도 계시고 아직 금강경을 한 번도 읽어 보지 못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사국에 내줄만은 반드시 외워두시기 바랍니다. 금강경 전체를 다 외우지 못하셔도 이 네 줄만 가슴에 품고 계시면 금강경의 핵심을 늘 곁에 두고 사시는 것과 같습니다. 절에서 스님들께서 법문을 마치실 때 사구개를 함께 독성하시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짧지만 이 네 줄 안에 금강경 32장의 가르침이 전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국의 내주를 다시 한번 천천히 읽겠습니다. 일체유의법 모든 것은 인연이 모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몽한 포영 꿈 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습니다. 여러 역 여전 이슬처럼 더덥고 번개처럼 짧습니다. 응작여 시간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합니다. 이 네 줄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오늘 하루도 유의법이라는 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는 오늘 하루 내가 붙잡고 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고요히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들이 꿈같고 이슬 같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하루의 괴로움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사구개를 알기 전과 알고 난 뒤의 삶은 겉으로는 달라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전히 밥을 먹고 일을 하며 사람들을 만나지만 안에서 달라집니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거기에 걸리지 않고 같은 사람을 만나면서도 상에 끌려가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금강경의 첫 장면에서 보여주신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탁발하고 밥 먹고 발 씻는 그 평범한 일상이 깨어 있는 눈으로 바라보면 그 자체로 법문이 됩니다. 불자 여러분 금강경을 독성하실 때 사고계에 이르시면 잠시 멈추시기 바랍니다. 매주를 천천히 읽으시고 그 뜻을 마음에 비추어 보시고 고요히 눈을 감으십시오. 그 한순간이 하루의 수행이 됩니다. 금강경이 전하는 모든 가르침이 사국의 네 줄 안에 살아 있습니다. 2500년 전 기원 정사에서 부처님께서 이 개송을 설하셨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수보리 존자는 이미 눈물을 흘린 뒤였습니다. 모든 상이 허망하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사고계를 설하시며 그 깨달음을 네 줄로 압축해 주셨습니다. 오늘 이 법문을 들으신 우리 모두가 수볼이 존재가 들었던 바로 그 가르침을 함께 들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꿈인 줄 아는 사람만이 꿈속에서 자유로우며 이것이 사국의 첫 문장이자 마지막 답입니다. 이 법문을 시작할 때 인생 꿈 같다. 다 부질없다 하시던 그 한숨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한숨의 의미가 달라져 있으실 겁니다. 꿈 같다는 것은 부질없다는 뜻이 아니라 꿈인 줄 알면서도 온전히 살아가라는 부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허무가 아니라 자유였습니다.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사국에는 살아 있습니다. 절에서 법당에서 독성 모임에서 그리고 지금 이 영상을 듣고 계시는 자리에서 사국에는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일체유의법 염홍한 포형 여로역 여전 응작여시간 이 16 글자가 2500년 동안 한 번도 낙지 않은 까닭은 우리의 삶이 여전히 유의법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붙잡고 여전히 걸려 있으며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기에 이 가르침은 오늘도 새롭습니다. 오늘 이 법문을 들으시면서 마음속에 작은 변화가 일어나셨을 수 있습니다. 그 변화를 놓치지 마십시오. 내일 아침 사곡에 내줄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수행의 시작이며 거창하게 시작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사국의 네 줄 16 글자면 충분합니다. 그 16글자가 삶 전체를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설하십니다. 이 경전의 사국의 한 줄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남을 위하여 설해 주면 그 공덕이 한량 없다고. 오늘 이 법문을 들으신 분들은 이미 사고개를 받아지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가르침을 가슴에 품고 삶속에서 관하시고 주변의 인연들에게도 전해 주십시오. 그것이 곧 금강경이 말하는 벚꽃이이며 가장 큰 공덕이 되는 수행입니다. 축원합니다. 이 법문을 들으신 모든 분들이 사국의 참뜻을 바라보시고 유의법에 걸리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사시기를 바란합니다. 일체유리법 여몽암포형 여로역 여전 응작여시관 이 네 줄의 공덕이 듣는 모든 분들에게 고루 미치기를 원합니다. 나무 석가모니 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오늘 법문이 마음에 와닿으셨다면 좋아요를 눌러 주시고 아직 구독하지 않으셨다면 구독도 부탁드립니다. 이 법문이 필요한 분이 주변에 계시다면 공유해 주시면 더 많은 분들이 사고계의 참뜻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불교 믿음 채널에서 또 다른 법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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