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곡 선생, 당신이 그립습니다.”
이율곡은 조선 시대의 대학자이며 위대한 정치가입니다. 그는 1536년 어머니 신사임당의 친정인 강릉의 오죽헌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6세 때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의 본가가 있던 파주로 이주했기 때문에 본향(本鄕)은 파주(坡州)입니다. 그는 파주에서 성장하고 학문을 완성했으며, 잠시 관직 생활을 했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생애를 파주에서 보내며 학문을 연구하다가 49세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과거(科擧)에 아홉 번 장원급제하는 등 조선 최고의 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파주에는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자운서원(紫雲書院), 율곡기념관, 이이(李珥) 가족 묘역, 율곡이 명상을 위해 즐겨 찾던 화석정(花石亭) 등 율곡의 삶을 기념하는 중요한 유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자운서원과 가족 묘역이 있는 「파주 이이(李珥) 유적」은 국가 사적 제52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는 속담같이 그는 이미 3세 때에 어머니 사임당 신 씨를 통해 글을 깨우쳤고, 7세 때에는 유교의 기본 경전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모두 암기할 정도로 천재성을 보였습니다. 1548년 13세 때에는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여 시험관은 물론 부모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과거에 총 9번 장원 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명을 가졌습니다. 율곡은 29세에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초임으로 하여 거의 해마다 승진하여 내외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약 20년의 관직 생활을 통하여 무려 40여 차례나 사직 상소를 올릴 정도로 오직 치국(治國)의 도를 펴기 위하여 혼신이 힘을 다하였습니다.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임명되었던 1582년에는 여진족의 반란을 진압하였습니다.
그가 죽기 1년 전 48세에는 선조에게 유명한 <10만 양병설>을 건의하였습니다. 그는 왕에게 유학의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는 경연(經筵)에서 “국력의 쇠약함이 심한지라 10년도 못 가서 반드시 나라가 무너지는 큰 화가 있을 것이니 10만 병졸을 미리 양성하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씩을 두어 그들의 조세를 덜어주고 무재(武才)를 훈련하여 6개월로 나누어 교대로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가 변란이 있으면 10만 명을 합쳐서 지키게 하여 위급할 때 방비하소서.”하고 건의를 하였습니다. <10만 양병설(養兵說)>을 주장하던 당시 조선의 실제 전투가 가능한 병력 숫자는 1,0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에 유성룡(柳成龍)과 동인(東人)들은 반대의견을 말하면서 왕에게 아뢰기를 “조선에서 10만 명의 대병력을 양성할 경우, 엄청난 군비의 문제로 경제가 파탄이 날 수 있습니다. 무사할 때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사회적 혼란만을 양성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10만 양병설>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이로 인해 동인의 집중 탄핵을 받아 율곡은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구국의 뜻을 풀지 못한 채 병을 얻어 49세를 일기로 짧은 생애를 마쳤습니다. 율곡의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선조는 곡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도록 애통해하였으며, 수라상에 고기를 올리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3일 동안 조정에서 조회를 열지 말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이율곡이 사망하기 직전 유서를 써서 밀봉해서 가족들에게 주면서 나라에 변고가 생겼을 때 열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이율곡 선생이 사망한 후 10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내부의 군대들을 그대로 방치하면 반란이 일어날 수 있기에 외부로 돌려 조선과 명나라를 정복하려고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조총(鳥銃)이라는 신식무기와 함께 잘 훈련된 일본 군대들은 한반도에 상륙한 지 3일 만에 서울 부근까지 쳐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개성으로 급하게 피난 가던 선조가 임진강에 도착했습니다. 칠흑 같은 밤이었고, 마침 장마철이라서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횃불을 밝혔지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고 타고 갈 배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군들은 불과 하루 정도의 거리에 이미 당도해 있었습니다. 선조의 일행이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날이 밝기 전에 임진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바로 그때 일본이 침략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율곡의 가족들은 선생의 유서를 열어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모월 모시 밤에 임진강 강변의 화석정에 불을 질러라”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화석정은 생전에 그가 임진강을 바라보며 명상하였던 정자입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던 가족들이었지만 율곡 선생의 예언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기에 가서 실행하였습니다. 한여름 장마의 빗속에서도 평소에 기름을 먹인 화석정이 불이 붙자 강가 일대는 대낮같이 환해졌고 선조 일행은 배를 찾아 무사히 강을 건너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모시고 피난 다녔던 유성룡은 왜란이 평정된 뒤에 <징비록>에 왜란의 역사를 기록했는데 그곳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율곡은 참으로 성인(聖人)이다. 만일 그의 말을 시행하였다면 나랏일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랴! 또 그의 전후의 계책(計策)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의 말이 모두 척척 들어맞는다. 만일 율곡이 있다면 반드시 오늘에 맞는 일을 할 것이니 참으로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는 명백한 일이다.”
율곡의 장점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는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눈앞의 현실뿐 아니라 미래의 위험까지 내다보았습니다. 그의 사후 약 8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그의 통찰력이 재평가되었습니다.
둘째, 실천성입니다. 학문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백성과 국가를 위한 학문을 추구했습니다. 율곡은 다른 유학자들과 달리 학문을 현실 문제 해결에 적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이론과 현실을 함께 보았던 실천적 지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는 균형감각이 있었습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원칙과 현실을 함께 고려했습니다. 개인의 인격 수양과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강조했습니다. 그의 저서인 격몽요결(擊蒙要訣)은 오늘날에도 자기 수양과 교육에 관한 고전으로 읽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해결해야 할 당면 문제는 정치적 양극화와 진영 대립, 저출산과 고령화, 경제적 불평등과 청년층의 어려움, 지역, 세대 간 갈등, 사회적 신뢰의 약화 등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자칫 파멸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여기저기서 목소리만 요란할 뿐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공동체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지도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앞을 내다볼 수 있는 혜안(慧眼)을 가진 사람, 균형감각과 실천성을 가졌던 이율곡이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워지는 때입니다. “이율곡 선생! 당신이 정말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