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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양문교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라(히 4:12-16)

작성자시무언|작성시간26.06.07|조회수0 목록 댓글 0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라(히 4:12-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는 성령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보혜사 성령을 진심으로 삶으로 체험하고 증거하는 교회였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인간을 고통속에 몰아넣고 갈등과 파멸로 이끄는 근원이 바로 죄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벗어나도록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살길은 바로 진리입니다. 진리가 아니면 변하고 없어지고 우리를 어둠가운데로 이끄는 것이기에 진리를 알게 하시고 그 진리를 따라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은 언제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분을 따라가게 하시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잃어버렸던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성령님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본받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그런 의미에게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고 회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령님은 하나님 말씀을 듣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살아 숨쉬는 ‘하나님의 숨결’ 그 자체입니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잠시 머물다 안개처럼 사라질 세상 것들만 붙잡으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가치를 놓치고,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만 변두리로 밀어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귀를 막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침묵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을 닫아도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을 발휘하며, 우리가 꽁꽁 숨겨둔 죄와 상처, 욕망과 두려움의 깊은 어둠 속까지 피하지 않고 기어이 찾아오십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역경에 지쳐있는 히브리서 성도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유대 공동체에서 출교를 당하고, 재산을 빼앗기고, 끊임없는 조롱과 박해 속에서 신앙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과연 이 좁은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하는가? 다시 눈에 보이는 성전과 화려한 제사가 있는 옛 종교의 안전지대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깊은 영적 침체와 유혹 속에 있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고통은 길어지고, 세상의 힘은 너무나 강해 보이고, 우리의 믿음은 자꾸만 작아져 갈 때가 있습니다. 이 영적 위기의 순간에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고개를 들어 믿음의 주이시고 온전케하시는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계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라고 초청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은혜의 보좌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이 주시는 그 큰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지 세 가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숨은 내면을 온전히 드러내십니다(12-13절)

본문 12절과 13절은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위로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정직하게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얼마든지 거룩한 신앙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얼굴에는 평안의 미소를 띠고, 입술로는 은혜를 유창하게 말하며, 겉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경건의 모양을 갖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가면도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외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면에 속지 않으시고, 연출에 감동하지 않으시며, 우리가 자랑하는 세상의 그 어떤 것에 박수를 치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자기 의의 자랑하고, 자신의 치적에 날개를 달고, 자신의 경건을 은밀히 자랑하지만, 살아있는 말씀앞에 서면 그 모든 것은 바람 앞의 먼지처럼 흩어집니다.

 

하나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인간을 죽이는 잔인한 칼이 아닙니다. 이것은 살리기 위한 수술 칼입니다. 의사의 칼이 환자의 환부를 가를 때, 그 칼은 죽이기 위한 칼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인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칼은 아프고 두렵지만, 그 칼이 병든 부위를 드러내지 않으면 생명은 더 깊이 무너집니다. 말씀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려고 찌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숨겨 두고도 고치지 못했던 죄의 뿌리를 드러내기 위해 찌릅니다. 우리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상처, 우리 스스로도 인정하고 싶지않은 교만, 선한 말 속에 숨어있는 자기중심성, 봉사의 이름으로 포장된 인정욕구, 사랑이라는 말 뒤에 숨어있는 지배욕,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감추어 둔 불신앙까지 말씀은 정확히 찾아내십니다. 또 본문은 하나님 말씀이 무엇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까?

 

(12하-13절)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여기서 ‘판단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크리티코스’인데, 이는 단순한 정죄가 아니라 ‘마음의 생각과 동기를 정확하게 감찰하고 분별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그 행동을 하게 만든 숨은 동기를 보십니다.

 

사람은 눈물의 양을 보고 감동하지만, 하나님은 그 눈물 속에 참된 회개가 있는지, 아니면 그저 들통난 것에 대한 후회와 자기연민만 가득한지를 정확히 아십니다. 성경에서 이 말씀의 날카로운 검이 임했던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던 다윗 왕의 사건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충직한 신하 우리아를 전쟁터 맨 앞줄에 내몰아 죽였습니다. 그 후 다윗은 완벽하게 범죄를 은폐했다고 믿었습니다.

 

왕의 권력으로 입을 막았고, 겉으로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성군의 모습을 가졌고 백성을 재판하는 경건한 모습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단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나단선지자가 부자의 비유를 들며 그 악한 자를 지적할 때, 다윗 왕은 격분하며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나단선지자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의 검을 빼어 들고 다윗왕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삼하 12:7) “당신이 그 사람이라” 그 순간, 다윗왕이 1년동안 겹겹이 싸고 있었던 가식과 위선, 자기 정당화의 가면이 단번에 찢겨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윗왕의 죄악은 벌거벗은 것처럼 통째로 드러났습니다. 말씀의 검이 그의 혼과 영,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이 우리의 숨은 동기를 찌를 때 아픕니다. 부끄럽습니다. 도망치고 싶습니다. 내 봉사 이면에 숨겨진 인정욕구가 드러나고, 내 사랑이라는 미명뒤에 숨은 지배욕이 들통나며, 내 확신 이면에 도사린 불신앙이 폭로될 때 영혼은 비명을 지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의사의 수술칼이 환자의 환부를 가르는 것은 환자를 죽이려 함이 아니라, 암덩어리를 도려내어 살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철저하게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시는 이유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어 파멸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죄의 독소를 빼내어 우리를 치유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수술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말씀 앞에 자신을 점검하고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다 내놓음으로 하나님의 치유를 체험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큰 대제사장이 계십니다(14-15절)

말씀의 검 앞에 벌거벗겨진 죄인은 절망속에서 도망쳐야 마땅합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거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바로 그 절망의 순간에, 위대한 복음의 반전을 선포합니다. 14,15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성경은 말씀앞에 죄가 드러났을 때 무서워 숨거나 스스로를 더 그럴듯하게 꾸미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그분을 붙들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 양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갔지만, 그들 자신도 죄가 있는 유한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들의 제사는 매년 반복되어야 했습니다. 그 제사들은 참된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짐승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보배로운 피를 흘려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고 하늘 성소에 오르신, 차원이 다른 위대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 우편에서 지금 이 순간도 우리를 위해 눈물로 중보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멀리 천상에만 계시며 우리를 차갑게 내려다보고 책망하시는 재판관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입니다.

 

이 ‘동정’이라는 말은 단순히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며 ‘불쌍하다’고 혀를 차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 고통속으로 직접 뛰어 들어가 그 아픔을 함께 겪고 온몸으로 같이 아파한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본문은 우리의 무엇을 동정하시고 도우시고자 하신다고 말씀합니까?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연약함은 육체의 연약함이나 경제적인 연약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가 병들어서 아픈 고통도, 그리고 가난속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고통도 다 아시고 동정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의 동정하시는 것의 궁극적인 내용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이 근본적으로 불행하고 고통스러우며 비참한 이유는 내가 가난하기 때문도 아니고 병들었기 때문도 아니고, 삶의 여러 가지 인생문제들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바로 내 안에 있는 죄때문에 우리가 불행한 것입니다.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모든 문제의 본질은 바로 내속에 감추어진 죄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연약함을 향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러한 점을 말하기 위해서 특별히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일하게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하는 이유는 히브리서 수신자들이 시험앞에서 굴복하여 죄를 범하는 영적인 연약함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여러 가지 고난과 핍박, 순교를 직면하게 되었고, 이러한 시련을 통해 신앙을 포기하도록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단은 세상의 좋은 것들을 가지고서 유혹하여서 신앙을 위해 고난받기보다도, 자기 살길을 꾸려나가고 세상의 행복과 쾌락을 추구해가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혹과 핍박의 시험 앞에서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굴복하고 말았고, 그래서 세상과 타협하고 신앙의 뒷걸음질을 치고있는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을 향해 히브리서 저자는 통렬하게 책망하면서도, 그들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자비를 바라보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메시지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필요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세상의 수많은 시험 앞에서 죄짓기 쉬운 연약한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의 삶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수없이 찾아오는 세상의 수많은 유혹들과 고난의 시험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오직 주와 복음만을 위해서 죽기까지 충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솔직히 그렇게 살지 못하고 시험에 굴복하여 죄지을 때가 많고, 우리도 세상과 타협하고 신앙의 뒷걸음질을 치는 삶을 살 때가 많지 않습니까? 정말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깊이 깨닫는 것은 우리 자신이 세상의 유혹과 핍박 앞에서 얼마나 연약하지, 또 우리 안에 불일듯이 일어나는 죄의 정욕 앞에서 얼마나 무능력한지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이것을 이겨낼 수 없고, 우리의 어떠한 노력도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이 죄를 항거할 수 있는 능력이 근본적으로 없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연약함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하늘 보좌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의 연약한 살과 피를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배고픔의 고통을 아셨고, 머리둘 곳 없는 외로움을 아셨으며, 가장 신뢰했던 제자에게 배신당하는 쓰라림을 겪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대중들의 조롱과 수치를 고스란히 받으셨고, 그 엄청난 고통과 아픔을 친히 감당하시면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영혼의 깊은 상처를 친히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죄는 없으시지만, 우리가 인생의 광야에서 겪는 모든 유혹과 시험, 눈물과 아픔을 ‘똑같이’ 겪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 멀리서 구경하시는 분이 아니라, 나를 찾아오셔서 “내가 네 아픔을 안다. 내가 그 고독을 먼저 겪었다”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진정한 구세주이십니다.

 

3.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보좌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16절)

우리의 내면을 꿰뚫어 보시는 살아있는 말씀이 있고, 우리의 연약함을 온몸으로 체휼하신 대제사장이 계시기에,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최종적인 결단을 촉구합니다. 본문 16절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성도 여러분, 세상은 연약함을 멸시합니다. 강한 자, 성공한 자, 스스로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자를 찬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앞에서도 “내가 죄의 습관을 완전히 끊은 뒤에, 내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깨끗해졌을 때 비로소 주님 앞에 떳떳이 나가야지”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깨끗해져서 주님께 가는 것이 아니라, 더럽기 때문에 씻으러 가는 것입니다.

 

건강해서 병원에 가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이 병들고 찢겨 피투성이가 되었기 때문에 의사이신 예수님께 가야 합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비로소 죄를 끊을 힘이 생기고, 예수께 붙들려야 죽었던 믿음이 다시 살아나는 줄 믿습니다. 여기서 “담대히”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레시아’입니다. 이 뜻은 ‘종이나 죄인의 신분이 아니라, 사랑받는 자녀가 아버지 앞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어떤 숨김도 없이 자유롭게 나아가 속사정을 전부 쏟아놓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담대함은 죄를 우습게 여기는 인간의 뻔뻔함이 아닙니다. “나는 아무런 자격이 없고 내세울 공로가 단 하나도 없지만,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기에 아버지가 나를 절대 내치지 않으신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복음적 담대함’입니다.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가능성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모든 가능성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 은혜를 받기 위해서 말씀도 읽지 않고 기도도 안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없이도 씩씩하게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의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조차도 기도하셨는데, 연약한 죄인이 기도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은 교만의 극치인 것입니다. 기도 안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않고 나를 믿는 삶의 실상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보혜사 성령님보다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언제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육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렇게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면 보혜사 성령님은 탄식하십니다. 그러면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점점 어두움에 사로잡혀 영혼을 도적질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없이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은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죄인의 결국인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말씀 안 읽고 기도하지 않는 영적으로 게으른 신자는 반드시 이러한 상태로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 수신자들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죄에 지면, 죄의 종이 되고, 죄의 종으로 살면 반드시 사망에 이른다고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삶을 살지 않으면, 결국 자기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고 바울은 경고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정신을 차리고 참으로 회개하여서 이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 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긍휼하심을 얻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결국 은혜의 비가 우리 마음속에 활활 타오르며 번지는 죄의 정욕의 산불을 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결단은 단순해야 합니다. 숨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변명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자기 의를 붙들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신앙의 체면을 세우려 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울면서라도 나아가야 합니다. 손이 떨려도 나아가야 합니다. 무너진 마음 그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앞에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말씀 앞에서 제 속이 드러났습니다. 저는 생각보다 교만했고, 생각보다 두려웠고, 생각보다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제게 큰 대제사장이 계심을 믿습니다. 주님이 저를 아시고도 십자가를 지셨음을 믿습니다. 저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십시오.”

 

그 보좌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두 가지를 얻습니다. 바로 ‘긍휼하심’과 ‘때를 따라 돕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저주하며 부인했던 베드로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말씀의 검 앞에서 자신의 비참한 실패와 밑바닥을 보았습니다. 닭이 울 때 그는 통곡하며 달아났고,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과 정죄감에 사로잡혀 다시 옛 삶의 자리인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감히 주님 앞에 설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혐오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정죄하거나 변명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숯불을 피워놓으시고 떡과 생선을 구워주시며 그를 따뜻하게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은혜의 보좌’ 앞으로 초청하시며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보좌앞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자격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주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의지하여 담대히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주님은 그 부끄러운 실패자를 긍휼히 여기셨고, 사명을 새롭게 하시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낙심하여 무너졌던 베드로는 이 은혜의 보좌 앞에서 다시 살아나, 예루살렘 성령강림의 날에 담대히 복음을 선포하는 초대교회의 기둥으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막연한 은혜가 아닙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 즉 우리의 시간표에는 늦은 것 같아도 하나님의 정확한 타이밍에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가장 깊은 은혜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살아있는 말씀 앞에 서라고 부르십니다. 그 말씀 앞에서 마음의 생각과 뜻을 숨기지 말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부르십니다. 우리를 동정하시는 주님,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가 없으신 주님,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신 주님, 부활로 새 생명을 여신 주님, 하늘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라고 부르십니다. 그분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분 때문에 우리는 다시 일어납니다. 오늘 이 시간, 나의 어설픈 자기 의의 보따리를 다 내려놓고, 오직 큰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과 대속적 사랑을 붙잡기 위해 날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긍휼하심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풍성히 누리며 날마다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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