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을 방문하여 특별 수련을 가졌던 가쿠 홈마 선생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후기를 올렸습니다.
전문을 번역하여 올립니다. 원문은 다음 주소로.( http://nippon-kan.org/senseis_articles/05_yoon-sensei/05_yoon-sensei.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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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선생과 젊은이의 힘.- 한국 방문.
by 홈마 가쿠, 니폰칸 관장

미래의 한국 아이키도 지도자들
아이키도를 오래 수련한 사람은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걸음걸이만 보면 된다. 우린 그것을 일본어로 '하카마아루키(하카마걸음)'이라고 부르는데, 하카마를 오래 입어 온 사람이 걸을 때 벌어지는 다리를 묘사하는 것이다. 이건 영광의 표식으로도 볼 수 있고, 나는 어린 학생들이 선생이나 선배들의 뒤를 따라 걸으며 이 걸음을 모방하는 걸 많이 봐왔다. 또다른 오랜 아이키도 수련생을 판별하는 방법은 신경이 쓰일 때 2교나 손목뒤집기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수련생들이 그들의 선생의 움직임을 모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심지어 그들의 선생의 말하는 습관이나 말투마저도 그대로 따라하게 된 수련생도 본 적이 있다. 이런 수련생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수련을 통해 배운 존경과 진지함을 보이는 것이다. 한국의 서울 높은 언덕에 신라 호텔이 서있다. 난 신라 호텔의 로비에서 윤 선생과 그의 아내, 수련생들이 날 데리러 오기를 기다렸다. 호텔 로비는 매우 넓었지만, 나는 윤 선생과 그의 일행이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한 눈에 알아보았다. 윤 선생은 고바야시 사범이 걷는 방식 그대로 걷고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고바야시 야스오 사범, 그러니까 윤 선생의 선생은 일본 도쿄의 고다이라 시에 위치한 아이키도 고바야시 도장(www.kobayashi-dojo.com)의 설립자이다. 고바야시 사범은 전세계적으로 매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지도자이며, 내가 크게 존경하는 사범이다. 그는 미국, 유럽 및 아시아에 거대한 지도원의 네트워크를 조직했다.윤익암 선생은 서울에 위치한 대한아이키도연맹 본부도장의 도장장이다. 윤 선생은 한국에 최초로 아이키도를 전파한 지도자이며, 앞으로도 쭉 뻗어나갈 아이키도인들을 양성해오고 있다. 윤 선생이 고바야시 선생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겠지만, 우선 내가 한국에 온 첫날에 겪은 일을 말할 필요가 있다. 관광버스를 타고 한국을 여행하는 동안, 내 옆자리엔 한 미국인 남성이 있었다. 난 그가 한국에서 만들어진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종교단체의 리더임을 알게 되었다. 이 사람은 역시 같은 버스에 타고 있던 이 종교를 따르는 20명의 신도들의 에스코트 책임자였다. 버스는 또한 일단의 일본 여행객들을 싣고 남한과 북한의 사이에 위치한 DMZ로 향하고 있었다.
미국인 그룹이 출발시간에 정시도착하지 않아서, 관광버스는 20분 늦게 서울의 호텔에서 출발했다. 버스가 출발 준비를 하는 동안, 여행 가이드인 젊은 한국 여성이 자신의 소개를 했다. 그녀는 한국어, 영어, 일본어를 했다. 가이드는 미국인 여행객들이 자기 자리를 찾느라고 천천히 꾸물대는 동안 버스의 늦은 출발에 대해 일본어로 사과를 했다. 마침내 버스가 출발했고 가이드는 일본어로 여행안내를 계속 했다. 내 옆의 미국인 리더는 이를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영어는 국제어야."라며,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혼잣말을 했다. 곧 가이드는 영어로 말하기 싲가했다. 그녀가 말하길,"모두 주목해 주세요. 이것은 단체 여행이므로, 다른 분들을 위해서 시간을 엄수해주십시요. 예정된 정류장에서 예정대로 돌아오시도록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특히 DMZ에서는, 보안이 철저히 통제되고 시간제한이 강력하게 준수되고 있습니다. 경청에 감사드립니다." 옆자리의 미국인 리더는 그녀의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날 돌아보며 말하길 "저 여자가 뭐라는 거요? 저 여자 일본인이나 뭐 그런거요?" "왜요?"라고 묻자, "오직 일본인만이 저렇게 무례하게 말할 거요."라며 열을 내며 답했다.
DMZ에 도착하기까진 3시간을 버스로 이동해야 했고, 나는 3시간 내내 이 미국인 리더가 여행가이드에 대해 멈추지 않고 내뱉는 경멸적 언사가 섞인 지루한 얘기를 들을 처지에 놓였다. 급기야 그는 휴대폰을 꺼냈고 난 그가 "저 여잘 잘라버리겠어."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그가 지칭한 젊은 여성 여행가이드는 영어를 전공한 대학생이었다. 이건 그녀의 여름 아르바이트였다. 영어는 분명 그녀의 2차 언어였고 내 생각엔 그녀는 자신의 일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그녀가 모든 이들이 시간을 준수하길 바란다는 간곡한 요청은 합당했다. 내게 있어 옆자리에 앉은 미국인 "리더"가 전혀 섬세하거나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입을 꾹 다물며 신사답게 행동하려 애쓰던 나는, 마침내 이 상황을 더 이상 참기가 어려웠다. "왜 당신은 무례한 것과 일본인을 연관시키죠?"라고 물으며, "난 수천명의 미국인을 알고 있지만, 당신은 내가 만난 가장 무례한 미국인인 것 같군요."라고 그의 눈을 그대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DMZ에서 돌아온 후, 내가 참석한 세계평화회의의 행사 중 하나는 큰 연회였다. 모든 테이블이 주최측이 정성껏 마련한 좌석지정카드로 세팅되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찾자, 마치 의식처럼 옆 사람들과 명함을 주고 받았다. 내 옆자리는 중년의 한국여성이었다. 우리가 명함을 주고 받으려는 찰나, 그녀는 나를 아래 위로 몇 번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자기와 동행한 여성을 바라보며 말하길, "이 사람 일본인으로 보이는데. 난 일본인이 싫어." 그녀는 내가 일본인이라 판단하기 전에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내 생각엔 그녀는 내가 미국에서 왔으니 미국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일단 내가 일본인이라는 걸 알자 그녀는 나와 대화하는 것을 거부했다. 테이블에 남아있을 아무런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홀을 떠났다...
이 두 가지 경험은 나를 놀라게 했다. 난 한국이나 한국인에게 아무런 악감정이 없었지만, 위 두 경험 속에서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 조국 일본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 내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는 한국계였고, 지금 나는 미국에 살면서 한국 시장과 식당을 자주 들른다. 내 개인 마사지사는 한국인이다. 내가 미국에서 자주 출입하는 모든 한국계 시설에서는 주인과 직원들이 항상 우호적이고 친절하다. 언어장벽 속에서도 난 덴버에서 많은 한국인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위 두 경험은 당혹스러웠으며, 우리의 역사 속에서 일본과 한국 간에 많은 좋지 않은 일들이 있었음을 깨우쳐 주었고, 난 이 역사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1910년과 1945년 사이에, 일본은 한반도를 침략하고 강제로 점령했다. 이 한국점령기 동안, 일본군의 리더들은 한국인들이 그들의 언어, 관습, 종교, 심지어 그들의 이름까지도 바꾸도록 죽음이란 형벌 아래서 강요했다. 몇몇 한국인들은 강제로 일본군에 징용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전장에서 하급노동자로 일할 것을 강요받았다. 젊은 한국 여성들은 유괴되어 일본군 병사의 위안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내 의견으로는 일본군과 그 리더들의 만행은 지금 역사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며, 이는 겨우 60년 전의 일이다. 일본 역사의 이 슬픈 시대에 대해, 일본 정부는 이제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결실을 맺기까지 수 세대가 걸릴 치유기를 치러야 한다.
1945년 8월 15일 전쟁이 끝난 후, 한반도의 모든 한국인들은 그 동안의 압제에서 벗어났다. 그로부터, 한국은 국가적 자존심을 재건하고 그들의 국가적 문화를 부흥시키는 시기를 거쳤다. 5년 전만 해도, 테러적 지배에 대한 이해가능한 반응으로서, 한국에서 일본 음악, 영화, 언어, 기타 일본적인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통용되던 일본용어는 한국의 새로운 정체성에 맞추어 개선되었다. 한국에서 쓰이는 몇몇 일본용어는 같은 한문으로 쓰여있더라도 사용법이나 발음이 다르다. 아이키도라는 용어마저도, 같은 한자로 쓰였지만, 한국에서는 합기도라고 발음된다. 주도라는 용어는 유도로, 켄도는 검도라고 발음된다.
겨우 몇 년전에, 한 한국인 가수가 그녀가 부른 일본어 노래로 일본에서 널리 알려졌다. 그녀가 조국인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많은 팬들을 가졌음에도, 그녀가 부른 노래가 일본어였으므로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었다. 대중문화에 있어서 일본의 영향을 금하는 것은 이제 21세기에 들어선 한국의 전후, 압제 후의 정부의 태도로부터 남겨진 잔존물이다.난 관광버스에서 내 옆에 앉아 무례한 태도를 알본 국적에 대입한 한국에서 발생한 종교의 미국인 리더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연회에서 내가 일본인이란 이유로 명함을 주고 받길 거부했던 한국 여성에 대해 생각했다. 이 두 가지 태도에서 깨달은 것은 이들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시절에 대한 잔여물이란 것이다. 그 시절이 이제 역사의 일부가 되었어도, 그 효과는 여전히 체감되며, 버스에 있던 젊은 여성 여행 가이드와 같은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이를 감수해야만 한다.
2차 세계대전 후에 태어난 일본인으로서, 난 개인적으로 우리 역사 속의 그 시기에 아무런 직접적 영향을 받은 바 없다. 내겐 그 시절의 잔존물을 오늘날에도 보게 되는 것이 뼈아프다. 한국과 일본 양국의 미래를 생각해 본다면, 이 행동에 대한 가능한 이유들을 이해할 수 밖에 없다. 내겐 역사의 그 시기 동안 일본이 남긴 여러 부정적 영향들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양국의 평화로운 미래를 추구하는 데 신경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난 현재의 한국인들에 대해 우러나온 존경심에서 이렇게 한다. 왜? 한 가지 이유는 이번 한국 방문에서 만난 사람들며, 그들의 마음 속에는 친절함과 관대함이 충만했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윤 선생과 그의 아내, 상위 수련생들을 만날 기회를 가졌으며, 그들은 관광버스와 연회에서의 경험 이후 따라다니던 좋지않은 기분들을 깡그리 치유해주었다. 윤 선생과 그의 아내는 너무나 따뜻하고 우호적이어서, 몇 시간이 아니라 몇 년을 알고 지낸 것만 같았다. 윤 선생의 아내는 일본어에 능통하여, 난 그들 모두와 편히 대화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내가 지도할 기회를 주었고, 윤 선생의 학생들과 함께 한 수련은 환상적인 경험이었다. 그의 학생들은 젊고, 건강하고, 활기차며, 매우 우호적이면서도 자신들의 공부와 수련에는 매우 진지했다. 그들을 보며 한국에서의 아이키도의 미래는 건실하고 강력할 것임을 보았다.
윤 선생은 1960년 생으로, 한국에서 아이키도 개척자로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어린 시절, 윤 선생의 아버지는 태권도를 경찰서에서 가르쳤는지라, 매우 어린 시절부터 그는 무술에 노출되었고, 그에 대한 흥미를 갖고 있었다. 젊은 시절, 그는 태권도, 검도, 합기도, 가라데, 킥복싱을 연마했다.

윤 선생과 홈마 관장.
군복무 시절, 윤 선생은 타 장병들에게 태권도를 지도하는 사범이었다. 제대 후에는 한국 최초의 킥복싱 프로모터가 되었다. 그가 아이키도를 처음 접한 것은 대만에서 열린 킥복싱 토너먼트 참가를 위한 여행에서였다. 그는 한국어로 합기도라고 읽히는 일본한자 간판을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키도라는 일본 무술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윤 선생과 그가 당일 대만에서 만난 고바야시 사범과의 긴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가 일본의 고바야시 도장에서 고바야시 선생의 내제자가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바야시 선생과 함께 한 혹독한 수련의 나날 이후, 윤 선생은 한국으로 돌아와 아이키도라는 일본 무술을 지도하는 개척자가 되었다. 한국 귀국 이후에도, 그는 자신의 선생인 고바야시 사범을 만나기 위해 수 차례 일본을 방문하고 있으며, 그들의 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윤 선생이 고바야시 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놀랐다고 한다. 그는 그의 자서전에서, "그는 그저 순한 노신사처럼 보였지만, 나는 합기도 6단, 태권도 5단에 킥복싱 챔피언이었다. 그는 마치 어린애 놀잇감인양 나를 던졌다. 그의 기술들은 내가 알고 있던 합기도 기술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나는 합기도와 같은 한자로 쓰여있지만 전혀 다른 아이키도라는 그의 무술에 빠져버렸다. 나는 이 무술을 정말로 배우고 싶었다."라고 썼다. 1994년, 윤 선생은 그의 첫 아이키도 도장을 서울에서 열었다. 오늘날, 윤 선생은 한국 전역에 지부도장을 갖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합기도라는 무술이 한국에서 수련되고 있다. 윤 선생이 일본과 고바야시 도장에서 돌아와 "아이키도"라는 "새로운" 무술을 소개할 때 처음에는 좀 혼돈스러웠는데, 한국에 이미 있는 무술과 똑같이 한자로 쓰여지면서도 전혀 다른 무술이었기 때문이다.
30년 전 미국에선, 거의 모든 곳에서 합기도 도장을 볼 수 있었다. 이들 미국의 합기도 도장들은 아이키도의 창시자 사진을 걸어놓기도 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와 아이키도의 일본 한자 족자가 그들의 도장에 걸려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 온 젊은이로서, 이는 날 혼란스럽게 했다. 합기도 도장에서 가르치는 것은 아이키도가 아니었지만, 그러면서도 창시자 우에시바와 어떤 관계가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합기도 도장들은 사라졌다. 그리고 남아있는 합기도 도장들은 더이상 창시자의 사진과 아이키도의 일본한자 족자를 걸고 있지 않다. 오늘 합기도 도장에서 지도되는 것들은 순전한 한국 무술로서 가르쳐지고 있다. 아이키도와 합기도 간의 관계와 역사는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2차대전 이후의 아이키도와 합기도의 발전에는 일본의 압제 종료 후의 극심한 배타주의의 직접적 영향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나는 윤 선생의 본부도장에서 한국 전역에서 온 그의 가장 활동적인 지도원들과 학생들로 이루어진 선택된 그룹과 함께 수련하도록 초대되었다. 난 이 그룹의 파워풀한 에너지에 매우 감명을 받았다. 윤 선생의 학생들에게는 주변에 전염되는 활기차고 강한 연대의식이 있었다. 수련 후 환영파티에서 우리는 모두 모여 한국 술인 막걸리, 한국 음식과 수많은 대화를 교환했다! 다음날, 윤 선생과 그의 고참 수련생이 나를 데리고 서울 주변을 구경시켜주어 한국문화의 많은 부분을 직접 경험하고 볼 수 있었다.

윤 선생과 그의 학생들과.
그 운명적인 첫 번째 버스 관광에서, 우리의 목적지는 군사자유지역과 남과 북 간의 회담이 열리고 양쪽에 군인들이 지키고 선 건물인 판문점이었다. 1953년 남과 북에는 휴전협정이 체결되었고, 한국은 그 후로 분단된 채 남아있다.그 시설을 방문했을 때 나는 일본의 압제가 남과 북의 분단이란 결과에 있어 어떠한 역할을 했을지 생각해 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여행 가이드인 젊은 한국 여성과 함께 입구에 들어섰다. 비록 이런 생각들은 내 맘 속에만 있었지만, 그녀는 일본과 한국간의 지난 역사와 압제기에 있었던 슬픔과 비극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린 현재의 분단과 양쪽의 적극적 활동이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개인적 희망을 얘기했다. 그녀는 단지 적극적인 면들과 미래에 대한 자신의 희망들만을 얘기했고 나는 그녀에게 깊히 감동했다.

판문점에서. 북한 쪽에 위치한 홈마 관장.

남한 쪽에서 본 판문점.
윤 선생의 아이키도 연맹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젊은 아이키도인들의 새로운 세대는 일본과 한국, 한국과 세계 간의 이해를 증진하는 중요한 가교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나는 윤 선생과 그의 아내, 그의 학생들에게 그들의 상냥한 환대에 대해서, 고바야시 사범에게 상냥하게도 한국 방문 중 윤 선생을 방문하도록 허락해주고 나보다 먼저 언질을 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드린다. 고바야시 사범은 또한 그의 아이키도 인생 50년을 회고하는 자서전도 보내주셨다. 나는 그의 책을 읽고 고바야시 선생이 그의 전세계적인 조직을 이루는데 들인 노력과 성실함에 감명을 받았다. 그의 성공에는 지혜가 있었고, 그 지혜는 그가 한국에 있는 자신의 조직과 경험을 나눌 기회를 제공해주셨다는데서 명백하다.
나는 이 기회를 매우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