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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서예가로서의 思白(사백) 董其昌(동기창)

작성자박경동|작성시간07.03.23|조회수639 목록 댓글 0

서예가로써의 思白사백

 

 

 董其昌동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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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동기창에 대한 소개는 송정의 견해가 아닌. 일반 자료를 수집한 서예학과 학생의 리포트를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고자, 잠시 넣었습니다,

개인적인 견해는 나중에 정리하여 넣도록 하겠습니다,

 

 

◈동기창,

 

서예학생 리포트 출처,

 

 

 

 

 

중국 명(明)나라 말기의 문인 ·화가 ·서예가.
호 : 사백(思白) ·향광(香光) ·사옹(思翁)
별칭 : 자 현재(玄宰), 시호 문민(文敏)
국적 : 중국 명(明)
활동분야 : 문인, 미술, 서예
출생지 : 중국 장쑤성[江蘇省] 화팅현[華亭縣]
주요저서 : 《화선실수필(畵禪室隨筆)》 《용태집(容台集)》
 
자 현재(玄宰). 호 사백(思白) ·향광(香光) ·사옹(思翁). 시호 문민(文敏). 장쑤성[江蘇省] 화팅현[華亭縣] 출생. 1589년에 진사가 되고,

 남경예부상서(南京禮部尙書)가 되었으나 환관의 횡포와 당쟁 때문에 사임하고,

 

 1631년옛 자리로 복귀하여 3년 후 태자태보(太子太保)가 되었다가 사임하였다.

사후에 태자태부(太子太傅)의 벼슬이 추증되었다.

관리로서도 명성이 높았으나 문명(文名)도높아 시인 ·서가 ·문인화가로서 널리 알려졌고, 감식(鑑識) ·감장(鑑藏) ·임모(臨模) 등에도 업적을 남겼다.


명나라 말 제일의 인물이었으므로 당시의 화단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고 화풍이나소론(所論)은 후세 오파(吳派) 문인화가에게 결정적 감화를 주었다.

 저서인 《화선실수필(畵禪室隨筆)》에서 남종화(南宗畵)를 북종화(北宗畵)보다도 더 정통적인화풍으로 한다는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을 주창하였다.


그림은 동원(董源) ·거연(巨然)을 스승으로 모셨고 송(宋) ·원(元)의 화가들의장점을 빠짐없이 수집하고,

심석전(沈石田) ·문징명(文徵明) 등의 오파문인화(吳派文人畵)의남종화풍을 계승 발전시켜 근거를 원나라의 황공망(黃公望)에게서 찾았다.


스스로 고아수윤(古雅秀潤)이라고 부르던 화풍으로, 먹물 빛깔의 변화가 풍부하고간명한 산수화를 많이 남겨 창작과 실제화업(實際畵業)을 화론(畵論)과 병행하여

 전개하였다. 문학에도 능통하였고, 서가로서도 명대 제일이라고 불리며 형동(邢愼)과 어깨를 겨루어, 북형남동(北邢南董)이라 불린다.


서체는 왕희지(王羲之)를 주종으로 삼으면서도 글씨 체형보다 내용을 더 추구하여당시 제일의 문인으로 각 방면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저서로 《산수화책(山水畵刪)》 《용태집(容台集)》 등이 있다.


남북분종론(南北分宗論)


 17세기 초 인 明나라 말기의 화단은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 속에서 쇠퇴 일로를 걷고 있었다.

정치권의 약화, 경제와 사회 질서의 문란, 院派(宮派인 畵院派)의 쇠미 등 몇몇 화가들을 제외한 전체 화가가 빠진 기상(奇想)과 괴벽 등으로 화단은 활기를 잃고 시들어 가고 있었다. 

 이렇게 어지러울 때 막시룡(莫是龍)과 동기창(董其昌)이 나타나 오파(吳派)의 화론을 확대 정리하여 정통화가(正統畵家)로 자처하면서 남북분종론(南北分宗論)이 전개되었다.


 남종화(南宗畵)와 북종화(北宗畵)는 화가의 신분에 따라 문인화와 직업 전문화가의 그림을 구별하는데 이 양자의 대립과 교류가 중국회화사의 특색을 이루고 있다. 

남·북종화를 분류하여 살펴보면 남종화는 明대의 동기창과 막시룡 등이 당대 선종 (唐代禪宗)의 남북분파에 따라 구분 지은 데서 생긴 명칭이다.

 

  남종화는 대개 인격이 높고 학문이 깊은 선비가 여기(餘技)로 수묵(水墨)과 담채(淡彩)를 써서 내면세계의 표출에 치중하여 그린 간일하고 품격 높은 그림을 말한다. 

 

또한 북종화는 화원(畵員)이나 직업화가들이 짙은 채색과 꼼꼼한 필치를 써서 사진처럼 외형묘사에 주력하여 그린 장식적이고 격조 없는 공필(工筆)의 그림을 말한다.  남송의 마원(馬遠)이나 하규(夏珪)처럼 수묵울 주로 사용하여 그린 화가들도 북종화가로 분류된다.


문인(文人)이란 유교의 학문과 문학의 교양을 갖춘 사람이라는 의미이지만 그들은 지식인인 동시에 관리 또는 관리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며 서민 위에 군림하는 사회적 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자 들로서 그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문인화는 요컨대 취미로서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 제작한 아마추어 그림에 불구하지만, 인품이 고결하고 학덕을 겸비한 문인이 그림 쪽이 기량이 뛰어난 직업화가의 작품보다도 고아하며 귀중하다는 주장은 당대(唐代)에 시작되어 송대에 확립되었다.

 

  이러한 주장의 대표인 동기창이 주장한 것은 문인화가 남종파를 대표하며 그 문인화는 문자(文字)의 향기, 서권(書卷)의 맛, 문인의 취미, 탈속(脫俗)한 모습, 훈련된 사생력(寫生力), 생동하는 기운(氣韻)등이 있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남종화는 사의(寫意)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인화이고 북종화는 정교한 것을 중요시하는 비문인화이며 어찌 화공(畵工)처럼 극세(極細)하면서 문기(文氣)가 없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첫째, 북종화는 구작법을 쓰고 착색(着色)을 하나 남종화는 선염법(渲染法)을 쓰고 안료를 칠하지 않는다. 

둘째, 북종화는 비문인화이고 남종화는 문인화이다. 

셋째, 북종화는 정공화(精工畵)이고 남종화는 사의화(寫意畵)이다.이런 융통성 없는 사상에 물들게 되면 보수와 배타의 함정에 스스로 빠지게 되고, 발전은커녕 퇴보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명말 이후 중국그림이 웅변해 주고 있다.

 

 


 동기창의 영향은 영·정조의 문예부흥정책에 따라 번지기 시작한 겸제, 단원, 혜원 등의 새로운 회화 운동에 찬물을 끼얹는데 일조의 공이 있기도 하다.  동기창은 예림백세(藝林百世)의 종사(宗師)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한편 무서운 반동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기창의 상남폄북론(董其昌의 尙南貶北論)


 明나라 후반기에는 각기 다른 회화양식과 유파들이 풍성하게 생겨났다.
그 중 가장 독단적이며 말썽을 많이 일으킨 화론으로 尙南貶北論(또는 南宗文人畵論, 南北宗畵論)을 들 수 있다.


이 시대를 지배한 사람은 동기창(董其昌)이라고 하는 당당한 인물이다.

 고궁(高宮)이자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이며,

 

화가로서 그리고 단연 회화에 대한 가장 저명한 권위자로서 대단히 자신에 찬 인물이었다.  그는 문인화론의 원칙을 재천명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회화에 대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동기창은 회화양식들을 법전화(法典化)하기도 했으며,

'尙南貶北論'이라는 자신의 유명한 체계에 의하여 문인화의 전통을 찬미하고 화원파와 직업화가들, 특히 절파(浙派)화가들을 낮게 평가했다.  요컨대 그는 역사 전체와 회화 예술을 그 자신이 만족할 만하고, 그 시대 사람들에게 납득이 갈 만한 하나의 질서 속에 체계화시키려고 했다. 

 이 점에서 그는 크게 성공하였으며,

 

 그 이후 중국에서 쓰여진 회화에 관한 대부분의 책들은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그는 문인화의 전통이 다른 어떠한 것 보다 우월함을 설명하기 위해 15세기 시인이며 화가였던 두경이 먼저 창안한 학설을 빌려다가 남북종(南北宗)의 이론을 정립하였다.

 

  그는 자연계에 작용하고 있는 도덕률을 이해함으로써 학자나 군자는 자신의 덕성(德性)을 함양시킬 수 있으며 이러한 일은 주로 산수화를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으며 문인들만이 이를 성공적으로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문인들이 화원의 구속이나 생계의 위협없이, 학자로서의 폭넓은 독서와 시문에 젖은 교양인이기 때문에 지위가 낮은 직업화가들은 바라지도 못할 고상한 취미를 즐기는 생활의 여유가 사물의 본질을 이해 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취사선택이나 상징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도 미묘한 개념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인화의 전통을 동기창은 당대(唐代) 선불교(禪佛敎)의 남종선(南宗禪)에 비유하여 남종화파(南宗畵派)라고 칭하였다.  이 남종선은 갑자기 무의식적으로 깨닫게 된다고 주장하는 선불교의 한파(派)로써 일생동안 수양을 통해 서서히 깨달을 수 있다는 북종선(北宗禪)과 대립된다.  동기창에 의하면 위대한 인격을 지닌 화가는 모두 남종화파에 속하였다.


북종화파(北宗畵派)에는 모든 화원과 궁중의 화가들이 포함되었다.  여기에는 이사훈(李思訓)과 청록산수화파(靑綠山水畵派)에 속하는 그의 후계자 들과 이당(李唐), 유송년(劉松年), 마원(馬遠), 하규(夏珪)등도 포함돼 있다. 


이러한 그의 독단적인 이론은 그후 3세기 동안 중국의 미술 지평을 지배하고 현혹하였다.  이 명백한 모순은 끝없는 혼란을 야기 시켰다. 

 동기창의 이러한 편견을 도외시 할 수도 있고, 개별적인 화가들에 대한 분류도 거절할 수 있으나, 그의 남북종에 대한 분류는 두 가지 종류의 그림에 대한 분류로 생각된다. 

 

이 두 종류란 화원풍의 절충적이고 정확하며 장식적인 요소가 순수하게 표현되 있는 그림들과 자유스러우면서도 필치를 중요시 하고 개성적이며 주관적인 성질의 그림들을 말한다.  또한 남북종론은 그 당시 학자들의 감정이 반영되었다. 

 

 부패한 명조의 붕괴가 시작되고 정직한 관리들은 공직을 떠나는 반면 황제에게 봉사하는 화가나 학자들은 그들의 재능을 팔아먹었지만 그들은 유교적인 덕성을 받드는 지식인이라는 신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동기창은 극단적인 개성주의 화가들을 제외하고 화가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정통(正統)으로 몰아간 것이다.


동기창은 흑백론과 같은 남북종화론을 과감하게 천명함으로써 비난도 받았지만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의 대사(大師), 또는 예림백세(藝林百世)의 종사(宗師)라는 말을 듣기도 하였다. 

 

명대 후기화단(後期畵壇)의 거두였던 그의 이 상남폄북적인 남종문인화론은 결국 청(淸)대화단 뿐만 아니라 18세기 이후의 조선화단과 일본화단에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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