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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충효절의(忠孝節義)의 애국의 가문

작성자박경동|작성시간09.04.22|조회수32 목록 댓글 0

1. 공자의 생애

공자는 이름이 丘요, 字는 仲尼이니, 그 先代는 宋나라 사람이다. 아버지는 叔梁紇이요, 어머니는 顔氏이니, 노나라 양왕 22년(B.C 551) 경술년 11월 경자일에 공자를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출생하였다.
공자는 아이가 되어 장난할 때에 항상 俎豆를 진설하며 예를 행하는 용모를 베풀었었다. 장성하여 季吏(창 고관리자)가 되어서는 料量을 平하게 하시고, 司職吏(축산담당자)가 되어서는 가축이 번식하였다.

昭公 25년(B.C 517) 갑신은 공자 나이 35세였는데, 소공이 제나라로 달아나 노나라가 혼란하니, 공자께서는 이에 제나 라로 가시어 高昭子의 가신이 되어서 景公에 통하였다. 경공이 尼谿의 토지로 공자를 봉해 주고자 하였으나, 晏영이 불가하다 하니, 경공이 의혹하였다. 공자는 마침내 제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왔다.

 

 

定公 元年 임진은 공자 나이 43세였는데, 계씨가 강하여 참람하고, 그의 가신인 陽虎가 난을 일으켜 정권 을 독단하였다. 그러므로 공자는 벼슬하지 않고 물러나 詩書와 禮樂을 닦으시니, 제자가 더욱 많아졌다. 정공 9년 경자는 공자 나이 51세였다.
공산불뉴가 費邑을 가지고 계씨를 배반하고 공자를 부르자, 가고자 하였으 나 끝내는 가지 않으셨다. 정공이 공자를 中都의 읍재로 삼으니, 1년만에 사방에서 본받았다. 그리하여 아침내 司空이 되시고, 또 大 司寇가 되시었다. 10년 辛丑에 정공을 도와서 제나라 군주와 夾谷에서 會盟하시니, 제나라 사람들은 노나라 에게서 침략한 땅을 반환해 주었다. 12년 계묘에 중유로 하여금 계씨의 가신을 삼아 세 도읍의 성을 허물게 하고 갑옷과 병기를 거두게 하였는데, 맹씨의 집안에서는 成땅의 城을 허물려고 하지 않으므로, 포위공격하 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정공 14년 을사는 공자 나이 56세였다. 정승의 일을 攝行하여 소정묘를 베시고, 국정에 참여하여 들으시니, 3개월   만에 노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제나라 사람들이 아름다운 여자와 악사를 보내어 저지하니, 계환자가 이것을    받았으며, 郊祭에 또 제사지낸 고기를 대부들에게 주지 않자,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셨다.

위나라에 가서 자로의 처형인 顔濁鄒의 집에 主人을 정하시었다. 진나라를 가실 적에 匡땅을 지나니, 광땅    사람들은 양호라고 여겨 拘留하였었다. 풀려나자 위나라로 돌아와 남자를 만나셨다. 위나라를 떠나 송나라에 가시니,    사마인 환퇴가 죽이고자 하므로, 또 송나라를 떠나 진나라에 가서 司城貞子의 집에 주인을 정하시고, 3년 동안 거주하다가 위나라로 돌아오셨는데, 靈公은 등용하지 못하였다. 계환자가 죽을 적에 강자에게 유언하여 이르되 반드시    공자를 불러 등용하라 하였는데, 그 신하들이 저지 하자 강자는 마침내 염구를 불러왔다. 초나라 昭王은 장차 書社의    땅을 가지고 공자를 봉해주려고 하였는데, 令尹인 子西가 불가하다 하니, 마침 내 중지하였다. 다시 위나라로 돌아오시니, 이때 靈公이 이미 죽고, 위나라 군주인 輒이 공자를 얻어 정치를 하고자 하였으며, 염구가 계씨의 장사가    되어 제나라와 싸워 전공을 세우자, 강자가 마침내 공자를 불렀으므 로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오시니, 실로 哀公 11년    정사년으로 공자 나이 68세였다.
그러나 노나라에서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못하였고, 공자도 또한 벼슬을 구하지 않으시어 마침내 {서 전}과    {예기}를 敍하시고, {시}를 刪定하고 樂을 바로잡으셨다.


2. 공자의 사상

를 수호화기 위해 공자는 도덕윤리의 측면에서 "仁"의 학설을 제시했다. "仁"이라는 어휘 자체는 공자 이전부터 이미 일상적으로 사용되어왔지만 철학범주로서 제기된 것은 공자에 의해서였다. 공자가 내놓은 "仁"은 이후 중국 철학사에서 중요 범주의 하나가 되었다. 『논어』에서 "仁"에 대한 언급이 아주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공자가 안연의 물음 에 답한 한 구절이다. 이 구절은 "禮"와 "仁"의 관계를 개괄하고 공자의 "仁"학설의 기본 내용을 설명해준다.

안연이 인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이다. 단 하루라도 자 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한다면 온 세상 사람들이 그를 어진 사람이라고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克己"란 자기 억제이며 "復禮"는 "禮"에 부합되지 않은 언행을 "禮"의 원칙에 부합되도록 한다면 이것이 바로 "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라도 "克己復禮"를 이룬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어진 사람이라고 부르게 된다는 것이다.

안연은 한걸음 더 나아가 "克己復禮"의 내용이 무엇인지 물었다. 공자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나아가지 말라"고 하였다. "仁"의 원칙에 부합되는 사람이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면에서 "禮"의 범위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여기에서 말하는 "禮"란 주례이며 동시에 서주 노예제 사회의 등급제도인 것이다. 이로써 공자가 제시한 "仁"이란 일종의 도덕원리를 이용하여 "君子"들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 하는 모든 것을 자제케 하고 이들이 주례의 등급규정을 철저히 지키고 예를 범하는 행위를 방지 하려고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공자에게 "復禮"란 "仁"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이다. "忠恕의 道"를 실행한다는 것은 반드시 주례에 서 규정한 준칙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자기가 바라는 것"이거나 "바라지 않는 것"이나를 막론하 고 주례라는 원칙적 제약을 벗어날 수 없다. 소위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귀족들에게 주례가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서로 타협하고 양보할 것을 유구한 것으로 자신의 이익 을 고려할 때는 동시에 다른 귀족의 이익도 살펴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이것의 목적은 모순을 조화시키고 주례의 구질서를 개선, 유지하는 데 있을 뿐이다. 공자는 당시 두 가지 종류의 소유제에 대한 모순을 반영하는 통치계급 사이의 투쟁을 모두 노예소유주 귀족들 사이의 군신 내 부의 모순으로 보았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禮"에 의한 제재, 사상적으로는 "仁"의 고취로써 이와 같은 모순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이 공자가 제창한 "충서의 도"의 역사적 내용이자 계 급적 정체이다. 공자는 결코 모든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며, 심지어는 착취계급 전부를 사랑한 것도 아니다. 그가 사랑한 것은 오직 착취계급 가운데 일부분인 노예소유주 귀족에 지나지 않았 다. 공자는 노예소유주 귀족의 입장에 서서 "자기가 서려고 하면 남을 서게 해주고 자기가 이루 려고 하면 남이 이루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허풍을 칠 수는 있어도 내가 참월을 생각한다면 남 의 참월도 지지해주고 내가 반란을 꾀한다면 남의 반란에도 공감해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이다. 이러한 충서의 도는 공자에게는 결코 허락될 수 없다. 일정 계급적 도덕이론은 이 계급의 정치제도에 기여하는 것으로, 공자의 "인"도 "예"에 종속되는 것이다.

공자는 "인"을 "復禮"를 추진하는 일종의 도덕적 동력이자 사상적 근거로 보는 한편, "인"의 실행 은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인이 어찌 멀리 있으랴? 내가 인을 바란다면 그 인 은 이미 와 있다."라고 공자는 말한다. 자신이 "인"은 바로 온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인"을 행 하려고만 한다면 "인"은 바로 온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인"을 양심이나 자아의식의 산물롤 보 는 것이다. 이러한 유심주의적 관점에서 출발하여 공자는 주관적인 도덕동기와 소위 "내성적"인 자아수양의 역할을 크게 내세웠다. 그는 "인의 실천은 자기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지 어찌 남에게 서 비롯되랴?"라고 강조하였다. 이는 "인"의 실천이 바깥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개인의 자각과 주관에 따른 노력에 의거할 뿐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공자는 노예소유주 귀족들이 오직 "인"을 실행하고 자각적으로 자기를 억제하며 주례의 규정을 준수할 수 있으면 "인"의 원칙 이 실현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례 또한 옹호되고 회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

노예제 사회가 해체되어 봉건적 소유제 사회로 나아가돈 역사적 변혁기에 위치하는 공자의 인에 대한 학설은 한 역사시대의 복잡한 사회모순, 특히 통치계급 상층에서 발생한 모순으로서 분화와 투쟁을 반영한다. 공자가 중국 철학사에서 처음으로 통치계급의 내부관계를 조정하는 원칙으로서 하나의 도덕범주인 "인"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통치계급 내부에 새로운 위기가 출현했음을 나타내 는 것으로 불가결한 새로운 조치였다. 그러나 공자는 노예제 사회의 종법제도를 옹호하는 반동적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의 도덕학설도 위선과 기만적 성질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이 같은 본질이 일체의 반동계급의 수요를 충족시켰으며 이로써 그는 중국 역대의 반동통치자나 모 든 착취제도의 옹호자로 채용되었던 것이다. 공자의 "인"의 학설은 역대 봉건지주계급 사상가에 의해 지지, 보완되어 "三綱五常"과 "忠孝節義"를 중심 내용으로 하는 봉건 예교사상으로 발전하여 봉건통치를 옹호하는 냉혹한 사상적 압박도구가 되었다. 이리하여 중국 역사상 공자 때까지 "仁 慈"의 의미밖에 없었던 "인"이 봉건지주계급의 독재를 위한 마취제이자 항상 노동인민의 신체를 얽어매는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되었던 것이다.

3. 공자의 교훈
1) 관리로서나 사상가로서나 교육자로서 몸소 실천하는 표상으로서의 성인의 모습을 보여 줌

2) 인(仁)과 예(禮)의 실천을 통한 인격 도야의 중요성

3)학문을 닦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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