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공 예배 설교

2026. 6. 7. 주일오전, 마 27:15-26, 예수님은 죄인을 위한 대속으로 정죄받으시고 죽으셨다

작성자이은중|작성시간26.06.06|조회수29 목록 댓글 0

2026. 6. 7. 주일오전예배

마 27:15-2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성도여러분.

 

중보(中保)는 가운데 중에, 지킬 보, 보전할 보입니다. 가운데에서 양자를 화해시키고 관계를 유지하고 보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 총독앞에서도 선한 증언을 하셨습니다. 법정에서 선한 증언으로 우리가 받을 법의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딤전 6:13) 진리만을 말씀하심으로 선한 증언을 하셨습니다.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여전히 중보하십니다. (롬 8:33-34)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입니다. 중보자로서 총독앞에 서셨습니다. 정죄를 받기 위해서 서신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받을 정죄였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정죄받을 어떤 죄목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총독앞에 서서 피고인으로 증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정죄의 자리에서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내용의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성경본문으로 다음과 같은 제목과 내용으로 설교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배척당하셨다

15절에, 이 명절 즉 유월절 전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전례는 이전에 있었던 일,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명절 중 하나입니다. 이런 절기에는 총독이 죄수 한 사람을 풀어주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광복절 특별사면같은 것입니다. 광복절같은 날에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특별하게 풀어주면서 죄를 사해주는 것입니다. 유월절에 죄수 한 사람을 풀어주는 예가 성경에 근거한 것일까 할 때, 명확한 성경적 근거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전례라고 한 것이고 특별히 총독의 전례(governor’s custom)다 한 것입니다. 성경적 근거라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 즉 애굽이라는 감옥에서 나오게 된 것을 기념하는 것이 유월절이기 때문에, 유월절에 죄수 한 사람을 구원해 주는 것은 유월절의 의미와도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겠다 정도입니다. 명절이 되면 총독에게 청원합니다. ‘나라에 죄를 지은 사람중에 한 사람을 풀어주시오.’ 하면 총독도 시민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고, 정치적 안전과 시민의 요구를 통해 시민들의 불만 완화를 위한 도구로서 사면을 활용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었습니다. 총독은 무리들이 모였을때에 그들의 청원하는 사람을 알고자 물어보았습니다. 바라바냐? 그리스도냐? 둘 중에 누구를 풀어주길 원하느냐고 무리들에게 물었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그 무리들이 예수님을 자신에게 넘겨준 것이 시기 때문인 것을 알았습니다.(17절) 예수님을 죽이는 데 가담한 사람들은 먼저 무리들입니다. 일반 평민 대중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풀어줄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들이 요청만 하면 예수님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죽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회를 예수님에게 적용한 것이 아니라 다른 유명한 죄수인 바라바에게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데 가담한 사람들은 무리들만 해당된 것이 아닙니다.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 자신도 예수님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가담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이미 예수님을 법정에 세워 심문했을 때 그가 죄로 인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시기로 인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자신은 무슨 악도 찾지 못했습니다. 공정한 재판관이라면 여기서 그만 심문을 그치고 올바르게 심판했어야 합니다. 시편 58편의 말씀이 응했습니다.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느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아직도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 주는도다”(시 58:1-2)

 

본디오 빌라도는 통치자로서 마땅히 정의로 심판하고 판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잠잠했습니다. 그는 악을 행했습니다. 손을 씻었지만 자신의 손으로 폭력을 달아준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자신의 아내의 올바른 도움을 받을 기회를 버렸습니다. 자신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어젯밤 꾼 꿈에 대해서 일러주었습니다. 빌라도의 아내는 예수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저 옳은 사람에게”

 

예수는 분명히 옳은 사람입니다. 빌라도 아내의 꿈으로 나타난 계시는 올바른 계시입니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고 일러줍니다. 오늘 꿈에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다고 합니다. 소위 꿈자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사나웠던 것입니다. 옳은 사람, 이는 죄가 없는 사람(innocent man)인데 이 사람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꿈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죄없는 사람이 괴로움을 당하는 것으로 본인도 괴로워 한 듯이 보입니다.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려줬습니다. 이 사실을 알려준 때가 바로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았을 때입니다. 재판장으로 이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이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풀어주라는 뜻으로 재판석에 앉았을 때 사람을 보내 꿈 얘기를 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결과적으로 아내의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첫 사람 아담의 아내인 하와는 남편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습니다. 돕는 배필로서 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빌라도의 아내는 최소한 이 사건에서 보는 것 만으로는 돕는 배필로서 역할을 충실히 했습니다. 남편이 잘못된 결정을 하지 못하도록 막고자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빌라도는 결과적으로 돕는 배필인 아내의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시편 58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는 귀머거리 독사같으니 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3-5절)

 

빌라도는 분명히 악인입니다. 나면서부터 거짓이었습니다. 거짓의 아비인 옛뱀에 속한 자입니다. 빌라도 같은 사람은 귀를 막는 귀머거리 독사같습니다. 뱀으로 요술을 부리는 사람의 소리도 듣지 않고 요술도 따르지 않습니다. 귀가 먹었기 때문에 들리기 않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올바른 아내의 말에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와 같습니다. 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습니다. 그는 악인으로서 거짓만 가득할 뿐입니다.

 

빌라도는 재판장으로서 확고하지 못했습니다. 재판장은 피고인석에 있는 사람의 죄의 유무에 따라 죄가 있으면 정죄하고, 죄가 없으면 무죄라고 선언하면 그만입니다. 다른 것 즉 고소한 사람들의 요구에 예민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죄수의 죄의 유무에 예민한 것이 아니라, 고소인들에게 예민했습니다. 빌라도는 무리들에게도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물어보더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합니다.(17절, 21절) 이것이 그 당시의 재판장의 관행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재판장의 재판 태도로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소리에 따라 재판 형량이 결정되는 것은 피고의 죄의 유무와는 관련없이 사람의 소리와 기호에 따라 죄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사람들의 소리가 커지는 것에 예민했습니다. 이러다가 민란이라도 나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울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어찌하든지 풀어 줄 요량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혹 그럴 요량이었으면 단호하게 재판석의 재판장으로서 결정을 내렸어야 했습니다. 그런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습니다만, 그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소극적 행동을 가장한 적극적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은 사탄과 같은 것입니다. 첫사람 아담을 유혹할때도 소극적인 듯 하지만 결국 적극적으로 죄를 짓게 한 것과 같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의 피에 대해서 무죄라고 하면서 너희들이 당하라 하고는 손을 씻었습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듯 한 것입니다. 무작위의 작위를 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듯이 보이지만 분명히 행동을 한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도 예수님을 풀어줄 기회가 있었지만 그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대제사들과 장로들입니다. 아주 교묘하고 악랄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은 뒤로 살짝 빠져있고 다른 사람들을 선동하는 자들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20절)

 

무리를 선동했습니다. 그 선동은 성공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풀려날 기회가 있었는데,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총독 빌라도에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유대인 무리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대신 유명한 죄수 바라바가 풀러났습니다. 예수님이 진짜 죄수보다 못한 죄수가 된 것입니다.

 

2. 우리를 대신해 죄인이 되시고 정죄받으셨다

예수님이 풀려난 것이 아니라 바라바라는 사람이 풀러났습니다. 성경은 그 사람을 “유명한 죄수”라고 설명합니다. 아마도 모든 유대인이라면 다 알만한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빌라도도 바라바를 이 명절에 풀어주면 국민의 인심을 얻겠다 한 것입니다. 바라바는 “성중에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눅 23:19)입니다. 민란이라고 하면 황제 가이사에 반역을 일으킨 반란일 것입니다. 그 반란 과정에서 살인이 벌어진 것입니다. 바라바라는 이름의 뜻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대비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풀려 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인 바라바가 풀러났습니다. 바라바는 자신의 죄로 죽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로 죽어야 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라바는 사람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바라바가 죽고 예수님이 풀러났어야 합니다. 바라바가 풀러나고 예수님은 정죄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졌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죄인을 대신해 정죄받고 죽으시는 것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사람의 아버지의 아들인 바라바를 대신해 영원한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죽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대속적 죽음임을 드러냅니다. 대속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받는다는 뜻입니다. 바라바는 자신의 죄로 정죄받을 사람이었고, 예수님은 무죄로 풀려나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사람 아버지의 아들이 풀러나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인 예수님은 죄가 정해졌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의 죄가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대속은 하나님의 아버지의 아들로서 받으시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바라바는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입니다. 민란은 반역과 반란과 관련됩니다. 로마에 반대하여 반정을 일으키기 위해 민간을 선동해 한 무리가 되어 난리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살인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는 첫사람 아담의 죄가 그 결과를 잘 보여줍니다. 첫 사람 아담의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고 반란입니다.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반역입니다. 그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살인은 죽음입니다. 바라바는 첫 사람 아담의 죄가 그 결과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반역과 죽음의 죄에 정죄받아야 할 죄인을 대신해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심에도 정죄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죄와 그에 따른 죽음은 분명히 대속적 정죄요 대속적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적한 사람의 아들들의 죄를 대신해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정죄당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도 다 사람의 아들들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대신 정죄당하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이방인인 총독 빌라도에게도 버림당하셨습니다. 자기백성과 이방인에게 버림당하신 것은 바로 모든 인류가 그를 버린 것입니다. 이것 또한 대속적 버림당하심입니다. 죄 지은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없습니다.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이 창설하신 에덴의 동산에서 버림당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진노의 대상이요 자신을 반역한 반역자로 여겼습니다. 버림 받아야 대상은 죄 지은 사람이지 죄없으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심에도 아담의 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했습니다. 거짓의 재판정에서 진리이신 예수님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을 버림을 예수님이 친히 대신해서 받으신 것입니다. 내가 받을 하나님의 버림과 정죄를 대신해 사람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대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의 심판, 우리가 받아야 할 사형선고, 우리가 받아야 할 영원한 심판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것은 오직 중보자이신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입니다.

 

이 예수님께 감사하십시오. 이 예수님을 위해서 사십시오. 이 예수님의 나를 대신해 정죄받으신 것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죄를 멀리하십니다. 죄에서 떠나십시오. 거룩한 생활을 하십시오. 거룩한 말과 행동을 하십시오. 거룩한 교회안에서 교인들을 진심으로 섬기십시오. 우리를 대신해 정죄당하시고 심판정에 서신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