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6. 21. 주일오전. 마 27:27-31. 예수님은 아담 안의 죄인으로 죄의 저주를 다 대신 받으시고 조롱당하셨다
작성자이은중작성시간26.06.20조회수31 목록 댓글 02026.6. 21. 주일오전예배
마 27:27-31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정죄를 받았습니다. 죄가 확정된 것입니다. 정죄를 받아 마땅한 바라바는 풀러났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 십자가 형틀로 가는 과정에서 채찍질을 당했든지, 대기하는 장소이든지, 형이 확정된 후에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이것도 예수님이 죄가 확정 된 것을 증거합니다. 채찍질 뿐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졌습니다. 십자가형은 로마인들에게도 가장 무서운 형벌입니다. 사형 집행방식 중 십자가형은 가장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우며 고통스럽고 두려운 형입니다. 예수님은 사형수가 된 것입니다. 반란과 살인을 저지른 바라바는 풀어났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 죽음 즉 살인의 결과인 죽음의 대속으로서 십자가 형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라바의 죄의 원래의 죄, 기원의 죄인 첫 사람 아담의 죄의 원인과 결과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죽음의 형량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형으로 정죄 받으신 것입니다. 법정 최고형을 받은 것입니다. 이 사형정죄 판결은 바로 실행되는 판결입니다. 지체되지 않는 판결입니다. 바로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러갑니다.(26, 31절) 바로 끌러가서 못 박혀 죽으시면 되는데, 정죄 재판과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사이에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으로 다음과 같은 제목과 내용으로 설교하고자 합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아담 안에 있는 죄인으로 조롱하였다.
과거에 복식(服飾)은 신분과 관련되었습니다. 복식은 옷차림을 말합니다. 사람의 옷차림은 그 사람의 신분과 관련되었습니다. 사람의 지위 고하나 빈부 귀천을 알려주는 것이 그 사람이 입은 옷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군인들에 의해서 옷이 입혔다 벗겨집니다. 옷을 입고 벗는 것을 자의로 하지 못합니다. 강제적으로 옷이 벗기고 입히고 또 벗깁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기도 합니다.
총독의 군인들이 예수님을 데리고 관정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관정은 로마 군인들의 본부나 총독의 관저 안의 재판정, 또는 군인들이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죄수를 머물러 두는 곳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총독의 군병들은 유대인들이 아니고, 로마에서 용병으로 사서 주둔한 군인이든지, 로마에서 파견된 군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그들의 본부격인 관정안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관정안에 예수님을 놓고 모든 군대를 다 모이라고 했습니다. 다 군인들을 모여 놓고는 한 일이 예수님의 옷을 벗긴 것입니다. 많은 사람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것 자체가 아주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아무리 같은 성별인 남자들 앞이라도 전혀 모르는 군인들이 모두 모인 장소에서 옷을 벗는 것은 아주 두렵고 공포스런 일입니다. 예수님이 부끄러움을 당하신 것입니다. 부끄러움. 수치. 이것은 예수님께 적합한 단어가 아닙니다. 이것은 죄인에게 적합한 단어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에게 부끄러움, 그것도 옷이 벗겨짐으로 인한 부끄러움은 가당치도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부끄러움입니다. 옷을 벗음으로 부끄러운 것은 죄인인 사람에게 적합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음으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것이 첫 사람 아담이 죄를 지은 후에 보인 태도입니다. 벗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죄는 벌거벗음이요, 벌거벗음으로 인한 부끄러움이요, 그 부끄러움은 죄의 결과인 두려움을 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겨서 그 사람을 부끄럼게 하고 수치심을 주는 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죄를 지었을 때 자신이 벗었음을 알았습니다. 이미 그 전에도 벗고 있었지만,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습니다. 죄를 지은후에 벗은 것이 부끄러운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벌거벗고 있으면 안됩니다. 벌거벗는 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벌거벗은 것을 감춰야 합니다. 아담은 치마로 가렸습니다.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서 입혀주셨습니다. 죄 지은 인간은 벌거벗으면 안되고 입어야 합니다. 그것이 죄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옷이 벗겨졌습니다. 온 군대 앞에서 옷이 벗겨졌습니다. 죄 지은 사람은 옷을 입어 그 죄를 가려야 부끄러움을 면하는데, 예수님은 옷이 벗겨져서 죄를 가릴 것이 없습니다. 적나라하게 죄의 부끄러움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신데 죄인이 되셔서 죄인의 부끄러움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것 또한 예수님의 낮아지심이요, 예수님이 우리의 죄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대신해서 당하신 것입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는 다시 옷을 입혔습니다.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28-29절)
옷을 벗긴 것은 분명히 그를 죄인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첫 사람 아담의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으로서 이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옷을 벗겨서 부끄럽게 한 후에, 다시 옷을 입혔는데, 홍포를 입혔습니다. 홍포는 말 그대로 빨간 거적대기입니다. 과거 왕들의 복식은 다 빨간 색입니다. 빨간 색은 왕을 상징합니다.
홍포의 포는 포대기 할 때 그런 것입니다. 옷이라기보다는 포대기처럼 큰 거적대기 같은 것입니다. 핵심은 빨간색이라는 것이지요. 왕의 복장을 상징하는 빨간색 거적대기로 벗은 몸을 걸친 것입니다. 그리하고는 머리에는 가시관을 엮어서 씌웠습니다. 아마도 주변에 불을 피우기 위해서 모아 둔 가시를 엮어서 동그랗게 만든 모양입니다. 가시로 동그랗게 관을 만들어서 머리에 맞춰서 씌웠습니다. 오른손에서는 갈대를 들게 했습니다. 왕의 복장처럼 하려고 빨간 포대기 같은 거적대기로 벗은 몸을 둘려서 입혔습니다. 머리에는 왕관처럼 보이게 하려고 가시로 관을 만들어 씌웠습니다. 갈대를 오른손에 들게 한 것은 왕이 scepter라고 하는 지휘봉같은 막대기를 들고 있습니다. 지팡이는 아니고 막대기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을 홀이라고 합니다. 머리에 쓴 왕관은 왕권을 상징한다면, 홀은 그 왕권으로 온 세상을 지휘하고 명령하는 왕의 권세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갈대로 해서 오른손에 쥐어준 것입니다. 분명히 군인들은 예수님께 의도를 가지고 이런 행동을 예수님께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니 왕의 의전을 한다고 한 것입니다.
왕의 의전이지만 실상은 조롱하기 위한 것입니다. 야유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스갯거리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한 사람을 병신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아무 힘없는 왕, 왕의 옷을 입고 왕의 관을 쓰고 왕의 홀을 갖고 있지만, 아무런 힘도, 권위도 없는 왕입니다. 자기들이 조롱하기 위해서 만든 왕입니다. 자신들이 예수님 앞에 무릎 꿇어 절하면서 왕이여 평안하소서.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지만 희롱하고 조롱하고 우스갯거리로 만들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모든 사람앞에서 조롱을 당하고 웃음거리가 되어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모욕하고 조소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무릎을 꿇고 왕에게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고 절합니다. 그 다음에 해야 할 것이 왕에게 다가와 충성의 입맞춤을 합니다. 이것이 시편 2편이 가르치는 왕의 백성이 마땅히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시 2:12)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어야 합니다. 이 입맞춤은 기름부음 받은 왕에 대한 충성과 복종의 입맞춤입니다. 그런데 군인들은 왕의 평안을 구하며 절한 후에 충성과 복종의 입맞춤이 아니라 그 입으로 침을 뱉습니다. 침을 뱉는 것은 가장 심한 모욕과 저주입니다. 입으로 충성의 키스가 아니라 침을 뱉어 모욕합니다. 권세의 상징인 홀인 갈대를 빼앗아서 예수님의 머리를 칩니다. 이는 창세기 3장의 말씀을 모욕하고 대적하고 저주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15절)
여자의 후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반대가 되었습니다. 이는 분명히 군인의 배후에 사탄이 있음을 알게 합니다. 사탄은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를 치므로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로 행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틀렸고 자신이 승리했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희롱을 다 한 후 입혔던 홍포도 벗겨졌습니다. 다시 도로 그의 옷을 입혔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원한 것이 아닙니다. 군인들도 총독이 시킨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조롱과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모욕을 당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죄의 저주를 다 감당하셨다
예수님은 진정한 왕입니다. 그들이 왕을 세운다고 해서 왕이 되는 것도 아니고, 안 세운다고 왕이 못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계신 유일한 절대자이신 신이시며 영원부터 영원까지 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정죄를 받으신 후에 왕처럼 옷도 입고 관도 쓰고 홀도 오른손에 들었습니다. 왜 군인들은 다른 것으로도 예수를 희롱하고 모욕할 수 있는데, 이것을 했을까요?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는 첫사람 아담의 범죄와 그 죄의 결과가 예수님께 적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첫사람 아담의 죄의 결과로 죽임을 당하시는, 죄인이 되셔서 죽으시는 것임을 명확히 하고자 한 것입니다. 자 그럼 예수님께 군인들이 한 행동이 어떻게 예수님이 죄의 결과를 그대로 받으시는 지를 봅시다.
첫 사람 아담의 아내를 유혹한 뱀은 피조물이었지만, 자신의 지위를 떠났습니다. 자신의 위치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인 천사였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해 하나님 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실패로 끝나자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 죄의 시작이고 죄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온 세상의 왕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광야에서 하와를 유혹하듯이 사탄은 유혹하며 시험했습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8-9절)
하나님같이 되는 것은 하나님 같이 왕이 되는 것입니다. 사탄의 최종목적은 자신이 하나님 되는 것이고, 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말을 듣고 죄를 지었을 때, 왕이 되었습니까? 왕이 되지 않았습니다. 왕이 될 수도 없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왕복과 같은 빨간 거적대기로 걸치게 함으로서 예수는 아담처럼 죄를 지으면 하나님처럼 왕이 되는 거짓 왕이다, 죄 지은 사람이 왕이 아닌데 왕인척 하는 그런 왕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같이 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선악을 분별할 뿐이지 실제 선악을 분별하지도 못합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아담의 죄 즉 하나님과 같이 되어 왕이 되는 그런 죄의 결과로서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자라고 모욕하는 것입니다. 원래 영원한 왕이 아닌 예수라는 사람이 아담처럼 하나님께 범죄해 하나님처럼 왕이 되고자 한 그런 왕이지 실제 왕은 아니다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첫 사람 아담과 같이 죄를 지은 죄인이며 스스로 영원한 왕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해 왕이 되고자 한 첫 사람 아담과 같은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머리에 씌운 가시관은 죄의 결과의 형벌 중 하나입니다.
“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 3: 17-18f)
가시덤불은 분명히 죄의 결과입니다. 죄로 인해서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를 낸 것입니다. 죄의 결과로 땅의 저주의 가시덤불로 만든 관을 예수님이 머리에 쓰셨습니다. 사람이 머리에 쓴 것은 그 사람의 영광이요 권위입니다. 그런데 머리에 죄의 저주인 가시로 만든 관을 썼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아담안의 죄 가운데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홀을 오른손에 들었습니다. 오른손은 권세, 힘을 상징하는데, 그 오른손에 든 홀(막대기)가 갈대입니다. 갈대는 죄를 지은 아담이 자신의 벗은 것을 가리기 위해서 무화과 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든 것과 비교됩니다. 무화과 나무의 치마나 예수님이 오른손에 든 갈대는 모두 금방 말라 비틀어집니다. 갈대는 오래가지 못하고 지시하기위해서 움직이면 꺽이고 맙니다. 치마가 시들어 버리니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힌 것과 대조적입니다. 예수님이 홀로 든 갈대는 아담의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와 같이 죄의 결과에 따른 것을 드러냅니다. 이를 통해서도 예수님은 아담의 죄 가운데 있는 죄인 중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군인들이 예수님께 침을 뱉는 것은 모욕이면서도 두려움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이 두려웠습니다.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그런데 왕복을 입혀 놓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움이 없을 뿐 아니라, 모욕하고 완전히 비하합니다. 완전히 깔봅니다.
갈대를 뺏어 예수님의 머리를 칩니다. 창세기 3: 15절의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친다는 예언을 뒤집니다.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머리를 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합니다.
이 모든 행동이 원하는 것은 예수님을 모독하고 희롱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바로 부끄러움입니다. 깔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신들이 장난감 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옷을 벗기고 다른 옷을 입고 또 다시 그 옷을 입힙니다. 예수님이 자의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력합니다. 마치 예수님을 곤충과 같습니다. (시 22편) 이것을 시편 22편은 정확히 예언합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6절)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12-13절)
3. 스스로 하나님을 떠난 삶은 사탄의 조롱거리일 뿐이다
예수님은 죄인의 영향을 그대로 받았습니다. 죄의 저주를 다 받으셨습니다. 사탄의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 조롱과 부끄러움은 죄 지은 사람이 받아야 했습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그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 스스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왕이 된 듯이 보입니다. 사탄이 왕의 옷을 입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왕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왕이 임명한 왕이 아닙니다. 왕은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자기 스스로 왕이 되어 자신이 결정하며 권세를 부릴 수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사탄의 조롱거리, 희롱거리일 뿐입니다. 사탄이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가치있는 삶입니까?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왕복을 입고 왕처럼 관을 쓰고 있고, 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탄의 무리들은 조롱과 비웃음입니다. 자신도 부끄러움의 대상일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적해 스스로 하나님되고자 하고, 왕이 되고자 하는 믿지 않는 자들의 삶입니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은 사탄은 조롱거리일 뿐입니다.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은 사탄의 조롱거리일 뿐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버린 사탄과 같은 사람의 삶은 사탄에게 한낱 비웃음거리와 장난감같은 것 뿐입니다. 수치심과 고통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것은 비참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아닌 지옥의 삶도 이런 것입니다. 지옥은 사탄으로 둘러싸여서 사탄의 조롱거리와 웃음거리가 될 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교회를 떠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떠나,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 자의 삶은 사탄의 노리개일 뿐입니다. 부끄러움과 조소와 고통 뿐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이 이것을 우리를 위해서 대신 받으셨는데, 다시 예수님을 떠나 그 자리로 가려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단 한번 뿐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떠난 자들을 위한 십자가의 속죄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고난받으심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사탄의 노리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법을 행하므로 영광스런 존재로 살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