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고 진 뒤에야 봄인 줄 알았었네
봄이면 산에 들에 피는 꽃들이 그리도 고운 줄,
나이가 들기 전엔 정말로 몰랐네
내 인생의 꽃이 다 피고 또 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내 마음에 꽃 하나 들어와 피어있었네~~~
양희은의 <인생이란 선물>노래가 요즘 말로 내 머리에 필이 팍 꽂혔다.
꽃이 이쁘다고 느끼면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란다.
봄꽃이 다 피고 진 6월이다.
산과 들에는 봄꽃이 아니라 채송화 찔레꽃 자귀나무꽃 등 이미 여름꽃이 활짝 피었다.
장마철이라서 그런지 적당히 우중충한 날씨가 오히려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 준 여행길이었다.
지난 6월 23일,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여행길을 다녀왔다. 서울에서 봉하마을까지 400Km, 하루 여행으론 이동시간만 800Km인 셈이니 만만찮은 거리다.
이른 새벽부터 서둘러 움직여야했다.
서울역은 새벽에 열린 한국과 나이지리아 축구경기가 계속해서 리플레이 되고 있었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텔레비전에 빠져들어 갈 듯이 집중해 있었다. 서울역에서 탄 기차는 밀양까지 두 시간 반 만에 도착했고 밀양에서 옮겨 탄 기차는 진영까지 30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진영역에서 터미널까지 길을 물어서 걸어가는 데도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다행히 여행일정표 대로 11시 봉하마을 행 시내버스를 탈 수 있었다. 수요일 이른 시간인데도 버스 안에는 봉하마을을 찾는 이들로 가득 찼다. 사연도 각각이다. 부산에서 오셨다는 세분의 아주머니들, 옆 마을에 살지만 처음으로 맘먹고 찾는 다는 70대 쯤 되어 보이는 시골 할머니, 한 눈에도 오랜 여행길임을 알 수 있는 노란 배낭을 맨 초로의 할아버지 등등..
진영터미널에서 봉하마을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4~5Km 가량 된다고 했으니 이동시간도 10여 분 안팍이다. <노무현 대통령 생가 입구>라고 쓰여진 나무색의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부터는 노란 팔랑개비가 가로수처럼 길게 늘어서 있다. 들판에는 웃자란 모들이 시원스럽게 펼쳐 있었고, 차를 타고 가다 한눈에 들어온 것은 이것 말고도 또 있었다. 양 길가변에 노무현 대통령을 기억할 수 있는 수많은 그림들이 조각조각 그려져 있었다.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입구에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작은 건물이 있었고 건물입구에는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 부부의 사진이 있었다. 놀랍게도 사진이 아니라 제주도에 사는 어떤 분이 40일을 걸려서 만든 십자수란다. ‘아니 십자수가 사진보다도 더 정밀할 수가 있나?’ 할 정도로 완벽한 대통령 부부의 모습이었다.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훈훈해지는 모습이었다. 기념관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육성 음성이 흘러나왔고 한 켠에는 그분을 추모하는 글이 적힌 노란 종이가 수 천개가 넘게 붙어있었다. <꽃이 피고 진 뒤에야 봄인 줄 알았습니다>라는 글귀가 마음에 진하게 다가왔다. 나도 그랬다. 희망과 기대로 가득 찼던 참여정부의 여러 가지 정책 앞에 지지와 박수를 보내기보다는 늘 부족한 2%에 대한 불만이 앞서 격려와 지지 보다는 비판하는데 앞섰던 것이었다. 그래서 퇴임과 함께 그 부족한 것을 보완해주고 채워주시길 바랬는데 훌쩍 떠나셔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안타깝고 서글펐던 것이다.
추모관 건물을 나서서 찾아간 곳은 노무현 대통령 생가였다. 작고 아담한 초가집이었다. 우리네 시골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런 집이다. 왼쪽으로 조그마한 장독대가 놓여있고 오른쪽에는 뒷간이 함께 있는 평범하고 아주 조그마한 집이었다. 생가 옆에는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있었고 가게 안에는 대통령의 저서들과 노란손수건이 있었다. 생가를 지나 광장을 찾아갔다. 추모의 정과 안타까움 그리움을 담은 박석들이 수천, 수만 개의 눈이 되어 내 가슴에 박혔다. 우리가 잘 아는 어떤 이들의 이름도 있었고 가족들의 이름이 적힌 박석들도 있었다. 맨 위쪽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유지였던 < 민주주의 최후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그 앞에서 70이 가까워 보이는 허리가 구부정한 할아버지가 두 번의 절을 올린다. 헐렁한 옷차림에 눈가를 훔치시는 모습이 짠하다. 다양한 사연들을 갖고 찾아온 이들의 모습만큼이나 참배모습도 다양하다. 31일째 전국일주를 하고 있다는 원주의 할머니는 내년이 칠순이시란다. 열여섯 개 나라를 여행한 경험이 있다는 할머니는 배낭하나 짊어지고 찾아오셨다. 할머니가 유난히 눈에 띄였던 이유는 박석에 쓰여진 글자 하나하나를 작은 수첩에 꼼꼼히 적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시내버스를 타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한 시간 여를 그렇게 적으셨단다. 때를 놓치기 십상이어서 언제나 빵을 준비해 다니신다는 할머니는 이해를 구하고 우리 앞에서 빵을 드셨다. 시간이 있었다면 할머니께 점심식사를 대접해 드리고 싶었다.
봉하마을은 언론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렇게 크거나 화려하지도 않았다. 보통사람들이 살기보다는 조금 크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퇴임한 대통령이 살기에는 여러 가지로 불편한 곳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손녀를 자전거에 태우고 다니시던 길은 생태마을 길로 조성 중이었고 항상 오르던 산책길은 대통령이 다닌 길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분이 마지막으로 몸을 던지셨던 부엉이바위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지 않았다. 사실은 그냥 뛰어내려도 훌쩍 뛰어내릴 수 있을 만큼 야트막한 바위였다.
그렇게 짧은 하루일정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흔적들을 뵙고 왔다. 퇴임 후 봉하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환경운동을 하시는 대통령을 찾아가야지 생각했었는데 다만 그분의 흔적만을 찾을 수밖에 없어서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었다.
꽃이 피고 진 뒤에야 봄이 지났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