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William Waterhouse_"Mariamne Leaving the Judgement Seat of Herod, 1887>
"헤롯의 법정을 떠난 미리암네", 1887 (John William Waterhouse) 헤롯은 '영웅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팔레스틴과 그 근접 지역을 B.C. 55-A.D.93년까지 다스린 왕조의 왕들을 통틀어 헤롯이라고 한다.
그 중 대 헤롯(헤로데)이라 불리는 헤롯대왕은 로마가 임명한 유대인의 왕(BC37~4 재위)이다. 그는 많은 도시 성전 성채·수로·극장·건축물을 세웠으며, 전반적으로 유대를 번영시킨 왕으로 평가받지만 두려움과 공포, 태생적 한계 특히 권력욕으로 인하여 말년에는 고통의 생이었다. 헤롯은는 팔레스타인 남부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안티파트로스는 에돔 사람(사해와 아카바 만 중간지역에 사는 아랍인)이었다. 안티파트로스는 큰 영향력과 부를 지녔고, 당시 부흥하던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 페트라(요르단 강 남서부) 출신의 귀족 딸과 혼인하여 그 영향력과 부를 더욱 증가시켰다. 헤롯은 비록 유대인 행세를 했으나 부계와 모계 둘 다 아랍 혈통이었다.
BC 63년 폼페이우스(BC 106~48)가 팔레스타인을 침공했을 때 안티파트로스는 그의 원정을 지원함으로써 로마와 오랜 관계를 시작했고, 로마로부터 그와 헤롯은 혜택을 받았다. 6년 뒤 헤롯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만나 평생 친구가 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역시 헤롯 가문을 좋아하여 BC 47년 안티파트로스를 유대 총독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는데, 그 신분은 헤롯 및 그의 자녀들에게까지 계승되었다. 같은 해 헤롯은 아버지로부터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받아 정치무대에 나섰다. 6년 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그를 갈릴리 분봉왕으로 삼았다. BC 40년 파르티아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을 침공하고 내전이 일어나자 헤롯은 로마로 도망갔다. 로마의 원로원은 그를 유대 왕으로 임명하고 그 지역을 충분히 장악할 만한 군대를 주었다.
BC 37년 헤롯은 36세의 나이에 감히 아무도 도전하지 못하는 유대의 통치자가 되어 32년 동안 그 지위를 유지했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미워하는 것을 잘 알고 그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성전을 제 3성전 혹은 헤롯 성전이라 부를 만큼 오랜 서월에 결쳐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각종 건물들을 화려하게 건축하였다. 권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아내 도리스와 이혼하고 그녀를 아들과 함께 궁 밖으로 쫓아낸 뒤 하스몬 왕가의 공주 마리암네와 재혼했다. 그가 재혼한 목적은 유대 민족의 지도자이며 제사장 가문인 하스몬가(家)와의 불화를 끝내려는 것이었지만, 결혼한 뒤 아름다운 마리암네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대 하스몬 왕조의 공주인 마리암네(Mariamne)와 결혼하여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질투와 음모에 휘말려 사랑했던 마리암네와 두 아들을 죽이고 만다. 언제 로마의 지지가 끊어질지 모른다고 불안해하던 헤롯은 천혜의 요새인 거대한 마사다(Masada)를 건축하여 유사시에 피신하려고 했으나 사용해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렇게 병적인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헤롯이 유대인의 왕이 탄생했다는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 모든 아이들을 죽이라고 한 것은 그의 처지에서 보면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헤롯은 열 명의 여자와 결혼하였다. 그의 첫 아내는 이두매 여인인 도리스(Doris)였다. 그러나 그는 도리스를 버리고 히르카누스(Hyr-canus)II세의 손녀인 마리암네(Mariamne)공주와 결혼하였다. 유대 왕실과의 결혼은 그의 왕권의 정통성을 좀 더 확고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헤롯은 마리암네를 사랑했으나 마리암네는 그를 싫어하였다. 마리암네에게서 아리스토볼루스(Aristobulus)와 알렉산더(Alezander)라는 두 아들을 낳았지만 헤롯은 후에 마리암네와 두 아들을 죽이고 만다. 마리암네가 죽은 후 헤롯은 예루살렘의 제사장 시몬의 딸인 또 다른 마리암네와 결혼하여 헤롯 빌립을 얻었다. 이 빌립이 헤로디아의 첫 남편이 되지만 후에 헤롯 안디바에게 아내를 빼앗기고 만다.(마 14:3;막 6:17) 그 다음 헤롯은 사마리아 여자 말다게(Malthace)와 결혼하여 아켈라오(Archelaus)와 안디바(Antipas)를 낳았는데 이 두 아들이 헤롯 사후에 유대의 실권을 쥐게 된다. 헤롯의 또 다른 아내는 예루살렘 여인 클레오파트라(Cleopatra)이다. 이 여자는 빌립을 낳았는데 헤롯은 빌립에게 아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다스리도록 했다.(눅3:1) 다른 다섯 명의 아내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헤롯은 사마리아를 건축하여 세바스테(Sebaste)라고 일컬었다. 동방박사들이 찾아왔을 때 그는 거의 70세였으며 죽을 병에 결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병적인 의심과 욕심은 베들레헴의 죄 없는 두살 아래 어린아이들을 죽게 만들었다. 그의 치세는 폭력과 살육으로 얼룩졌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를 싫어했고 진정한 의미에서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두 집정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카이사르의 권력을 계승하기 위해 갈등이 생기자, 헤롯은 친구 안토니우스를 지원했다. 그는 안토니우스의 정부이며 이집트의 여왕인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에 대한 그녀의 영향력을 이용해 헤롯의 가장 좋은 영토를 많이 차지했어도 안토니우스를 계속 지원했다.
BC 31년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가 최종적으로 패배한 뒤 헤롯은 승리한 옥타비아누스에게 자기가 누구 편을 들었는지 솔직히 고백했다. 이전에 로마에서 헤롯을 만난 적이 있던 옥타비아누스는 그가 로마가 원하는 대로 팔레스타인을 다스릴 유일한 인물임을 알고서 그를 다시 왕으로 인정해주었으며, 또한 클레오파트라가 차지했던 땅을 헤롯에게 돌려주었다.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에게는 권력 교체기 헤롯처럼 선악을 떠나 충성스런 존재가 필요했으리라! 헤롯은 아우구스투스의 대행정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따서 손자와 증손자의 이름을 지었다. 헤롯 아그리파 1세, 헤롯 아그리파 2세가 그들이다. 황제와 대행정관은 헤로데에게 국빈으로 로마를 방문할 기회를 주어 그는 다시 이탈리아를 2번 방문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에게 키프로스 구리 광산 감독권을 주고 이익의 절반을 할당해주었다. 그는 BC 22, BC 20년에 헤롯의 영토를 2배로 늘려주었기 때문에 헤로데의 영토는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요르단 강 동편, 즉 오늘날 요르단 왕국의 일부지역과 레바논 남부, 시리아를 포함하게 되었다. 그는 원래 나바테아 왕국도 헤롯에게 줄 뜻이 있었지만, 당시 그 왕국의 권좌가 공석이었을 당시 헤롯은 정신과 육체 모두 쇠약해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헤롯은 자기 영토에 수많은 요새와 화려한 도시들을 건설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큰 두 도시는 주로 이교적인 새 도시로 하나는 요파(야파)와 하이파 사이의 해안에 있는 팔레스타인의 항구도시 카이사레아로, 훗날 로마령 팔레스타인의 수도가 되었고, 다른 하나는 고대 사마리아의 옛 터에 세워진 세바스테였다. 그는 예루살렘에는 안토니우스 요새와 웅장한 왕궁(그 일부가 성채 안에 남아 있음)을 지었다(예루살렘 성전). 안토니우스 요새는 그 일부가 오늘날 비아 돌로로사(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걸어간 길)에 세워진 수도원들 밑에 남아 있다. 그가 지은 건축물들 가운데 가장 웅장한 것은 성전으로서, 그는 그 전체를 다시 건축했다. 넓이가 14ha에 이르는 성전 바깥뜰은 오늘날도 '알 하람 아시 샤리프'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는 또한 베이루트, 다마스쿠스, 안티오크, 로도스 등 외국 도시들과 많은 성읍들을 장식했다. 헤롯은 올림픽 경기의 의장이 되어 그것을 후원했다.
자기 왕국에서는 유대교의 주도적인 파벌인 바리새파를 거스르는 것을 우려하여 마음껏 자기를 과시하지 못했다. 바리새파는 그를 외국인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언제나 그와 대립해 있었다. 헤롯은 자기에게 감사해 마지않는 이교도들의 후원자로서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바깥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의 보호자로도 자임했고, 모든 힘을 동원하여 그 유대인들이 사는 지역 군주들의 환심을 사려 했다.
불행하게도 헤롯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어둡고 잔인한 성격을 드러냈다. 더구나 그의 정서불안은 가정 내부에서 계속된 음모와 술수 때문에 더욱 깊어졌다. 마리암네를 깊이 사랑한 그는 질투심이 일어나면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헤롯의 누이 살로메 (그녀의 증조카, 즉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는 다른 인물)는 남을 쉽게 의심하는 그의 성격을 교묘하게 이용해 헤롯이 아내를 미워하게 만들어 두 사람의 관계를 깨뜨렸다. 결국 헤롯은 마리암네와 그녀를 통해 낳은 두 아들, 그녀의 오빠와 할아버지, 그녀의 어머니를 모두 살해했는데, 마리암의 어머니 알렉산드라 또한 야비한 사람으로서 살로메의 음모를 종종 돕곤 했다. 헤로데는 도리스와 마리암네 외에도 8명의 아내가 더 있었으며, 그 가운데 6명의 아내를 통해서 14명의 자녀를 낳았다. 헤롯은 말년에 동맥경화증을 앓았다. 그는 1차례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고 이웃나라인 나바테아와도 분쟁을 겪어야 했으며, 결국 아우구스투스의 신망을 잃고 말았다. 그는 큰 통증에 시달렸고,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혼란을 겪었다. 또 3번이나 후계자 문제에 자기의 뜻을 번복하다가, 왕위를 물려주던 맏아들 안티파테르를 살해했다. 그가 죽기 직전에 베들레헴의 어린아이들을 학살한 일은 전적으로 그가 빠져 있던 혼란과 일치한다. 헤롯대왕은 한차례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한 뒤에 죽었다. 그는 마지막 유언을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재가를 받는 것을 전제로 한 뒤 자기 영토를 3명의 아들에게 나누어 주어 헤롯 아르켈라우스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왕, 헤롯 빌립보와 헤롯 안티파스에게는 분봉왕들로서 나머지 영토를 나누어 다스리도록 했다. "Mariamne Leaving the Judgement Seat of Herod, 1887 헤롯의 법정을 떠난 미리암네는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 1849~1917년) 작품. 그는 빅토리아 시대 런던 미술계를 점령했던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의 대표 화가다. 라파엘 전파는 말 그대로 라파엘 이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라파엘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인 라파엘로를 지칭한다. 즉, 르네상스 이전으로 돌아가 자연스러운 예술을 표방하자는 것이다. 1848년 왕립아카데미에서 공부하던 몇 명의 젊은 영국 화가들이 무분별하게 르네상스 미술을 모방하던 당대 예술가들을 비판하려는 취지에서 이 단체를 결성했다.
John William Waterhouse_"헤롯의 법정을 떠난 미리암네" 그림 속에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은 미리암네로 헤롯의 둘째부인이다. 비록 그녀가 헤롯의 누이 살로메와 미리암네의 모친 알렉산드라의 질투와 간통죄를 저질렀다고 하는 모함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법정을 나서고 있지만 그림 속에 미리암네는 아무 죄 없다는 듯 헤롯을 응시한다. 내가 무슨 잘못이 있냐고, 인생 그렇게 살지 말라고, 죽어야 할 사람은 너고 당신도 곧 죽는다고 헤롯과 재판관을 꾸짖는 듯하다. 오히려 법정에 앉아있는 헤롯은 고개를 숙이고 재판관들은 이 재판이 정치적 재판임을 알지만 권력 앞에서 어떤 올바른 판결이나 주장도 할 수 없게 되고 한 여인을 죽음으로 내몬다. 결국 헤롯은 이 재판 결과 마리암네와 그녀를 통해 낳은 두 아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르스, 그녀의 오빠와 할아버지, 그녀의 어머니를 모두 살해했는데, 마리암의 어머니 알렉산드라 또한 야비한 사람으로서 살로메의 음모에 종종 가담했다. 워터하우스의 이 그림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숱한 무고와 모함에도 불구하고 달라진 시대에 새로운 증언과 진술이 나와 사법적 판단에 있어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는 것처럼 워터하우스ㅡ는 헤롯의 법정에서 쇠사슬이 허리에 찬 미리암네의 멋진 장신구처럼 미리암네의 죄는 아무 것도 아니고 오늘날 사법적 판단과 형벌처럼 사형을 언도받고 집행해야 될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닌 살인귀 헤롯임을 선언하고 있다.
'sial(2020. 6. 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