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진달래교회

【산돌 손양원(孫良源 1902~1950)】 "손양원 목사의 삶과 신앙이해"

작성자씨알|작성시간25.02.28|조회수87 목록 댓글 0

 2010.5.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을 기리며- 차종순 박사

 

                         손양원 목사의 삶과 신앙이해

                                                                             차종순 교수(호남신학대학교 총장)


손양원 목사의 삶과 죽음에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다. 하나는 두 아들을 죽인 학생을 양자로 받아들인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신사참배와 공산주의를 끝까지 반대한 사건이다. 전자는 기독교적 사랑의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적 신념(정절)의 표현이다. 전자는 부모로부터 배웠으며 후자는 주기철 목사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자는 체념과 포기를 요구하지만 후자는 지킴과 양성을 요구한다. 전자의 결과는 껴안기이지만 후자의 결과는 거절이었다. 손양원 목사에게서 상반된 두 가지의 단면은 신앙의 두 모습을 마치 동전의 앞과 뒤와 같이 하나로 엮어 가는 통전적인 삶의 방식이었다.
손양원 목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부모로부터 그리고 선배 주기철 목사로부터 사랑과 신앙의 정절이었다. 이것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가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낳은 자식을,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둘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고, 나환자들과 함께 삶을 살아가면서 목회자로서 그리고 노회의 소속된 목사로서의 권리를 잃어버리는 것은 그가 깨달은 하나님의 사랑이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자식들을 죽인 학생을 양자로 받아들인 것은 기독교적 사랑과 감화를 통한 인간개조의 확신이었다. 마치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음으로 바뀐 것처럼 그 학생의 삶도 하나님의 사랑만 깨달으면 바뀔 수 있다는 확신에 찬 행동이었다. 그리고 일제가 요구하는 신사와 점령자 공산주의자들이 요구하는 사상을 거부한 것은 종말론적인 구원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리하여 가해자 안재선 학생을 양자로 받아들인 사건은 ‘사랑의 원자탄’ 같은 대 폭발이라기보다는 본인으로서는 지속적이며 끊임없는 내면적 투쟁이었다. 동시에 한 생명을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그리고 그 사이를 지켜보는 제3자들의 눈이 서로 뒤얽힌 복잡한 인간관계였다. 이 관계를 손양원 목사는 결국 자신을 순교의 제물로 바침으로써 아름답게 풀 수 있었다.
이 글은 지금까지 손양원 목사의 삶과 신앙을 연대기적으로 나열하여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허물기와 껴안기” 그리고 “지키기와 거절하기”라는 상관관계로써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I. 배우는 청년 손양원
손양원 목사의 집안은 구한말에서 1950년에 이르는 대한민국 역사의 근현대사의 한 장면이다. 외래 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인 집안이 근․현대 역사에서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는 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손양원 목사의 집안은 2대조로부터 아들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서 한 집안에서 두 분의 장로(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세 분(손양원․손문원․손의원)의 목사 그리고 순교자 세 사람(손동인․손동신․손양원)을 배출한 가문이다.
손양원 목사는 1902년 6월 2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85번지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아래로 두 남동생(손문준과 손의원)과 여동생 하나(손봉연)가 있다. 손양원 목사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 나라를 잃는 한일합방을 겪었으며, 중등학교를 다닐 때에 삼일만세 운동을 맞이하여 학교를 강제로 퇴학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칠원 지방의 삼일만세운동을 주동하였으므로, 즉 불령선인(不領鮮人)의 자손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권유를 받고서 1921년 일본 동경의 쓰가모 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하였다. 원래 넉넉하지 못하였던 살림이었지만 아버지가 불령선인으로 분류됨으로써 여러 가지 제재가 많아졌으므로 부모는 아들에게 학비를 지원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학생 손양원은 고학을 하면서 공부를 지속해야만 하였다.
학창 시절의 손양원 목사는 나라 잃은 설움, 가세의 몰락, 아버지의 독립운동 참여에 따른 각종 불이익이라는 아픔을 겪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불이익을 할아버지가 세우고 아버지가 봉사하는 교회에서 배운 신앙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신앙과 국가를 하나로 묶어낼 수 있었다. 이어서 아버지의 만세운동 참여에 따른 중학교 퇴학조치와 일본 유학과 고학이라는 사건은 젊은 청년 손양원 안에서 신앙에 대한 정열로 승화되어 나갔다.
청년 손양원은 할아버지가 선교사들로부터 물려받은 보수적인 정통신앙과 아버지로부터 애국적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며, 여기에 길선주 목사의 부흥회를 통하여 종말론적인 영성을 덧붙였다. 그리하여 청년 손양원은 말씀사랑과 기도생활 등으로 이어지는 보수적 신앙의 기초 위에 애국적인 신앙과 종말론적인 영성과 소망을 덧붙인 가운데 성장하였던 것이다.

2. 배우고 완성되는 전도사 손양원
청년 손양원은 1924년 1월 결혼으로부터 부산 감만동의 나환자 집단 진료소 「상애원」과 깊은 인연을 갖는다. 결혼 후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옥렬리 소재의 처가를 방문하였다. 이 당시 시골에 위치한 미자립 교회는 선교사의 치리를 받으면서 조사들이 돌보았기 때문에 상주 목회자가 교회의 강단을 언제나 지킬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믿음 좋다는 소문이 난 손양원이 결혼 후 방문하였다는 소리를 듣고서 옥렬리 교회는 수요일 밤 예배에서 설교해 줄 것을 손양원에게 부탁하였다.
이날 예배에 참석하였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부산 감만동의 나환자 집단 진료소 「상애원」에서 기거하던 나 권사였다. 그녀는 불같은 손양원의 설교에 감동을 받고 부산 상애원으로 돌아가 손양원에 대한 자랑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상애원 환우들은 십시일반으로 헌금하여 손양원이 경남성경학교에 입학한 후에 외지전도사로 근무할 때부터 그를 후원하였으며, 손양원 전도사는 상애원에서 상주 목회자는 아니었을지라도 빈번하게 설교하였다. 이 때로부터 시작한 나환자들과의 인연이 그의 목회자로서의 삶 전체를 상애원과 애양원 나환자들과 연결시켜 주었다.
손양원은 결혼 후 2개월이 지난 3월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9월까지 미진된 학업을 마친다. 이 기간에 손양원은 두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받음으로써 그의 신앙형성에서 또 하나의 전기가 된다. 즉 손양원은 이 기간에 일본 동양성결교회 소속 나까다 주지(中田重治) 목사로부터 구원과 중생의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체험을 하는데 당시 일본에서 복음의 사회적 사명을 강조하던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손양원은 결혼 후 신앙의 개인적 완성을 이룬다. 장로교 선교사들과 할아버지․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보수적-전통적 신앙으로부터 말씀과 기도를 그리고 길선주 목사로부터 종말론적인 영성을 물려받았으나, 아직까지는 개인의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이 부분을 채워 준 만남이 일본인 성결교회 목사 나까다 주지였다. 일본에서 싹이 튼 동양성결교회는 특히 중생과 신유를 강조하였지만, 손양원은 중생의 확신을 가짐으로써 신앙의 내면적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이 당시에 일본에서 기독교 복음의 사회적 사명을 강조하는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력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우찌무라는 일본의 조선 침략을 비판하는 발언으로써 일본 사회에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어찌되었거나 우찌무라의 영향을 받은 김교신이 발행한 「성서조선」은 손양원 전도사에게도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으며, 1932년 상애원에서 그리고 경남노회로부터 이단으로 몰려서 쫓겨나는 아픔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하였다.
1924년 9월 일본에서 돌아와서 손양원은 10월 23일에 진주에 있는 경남성경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 3월에 졸업한다. 이 기간에 손양원 학생-전도사에게는 신앙의 또 하나의 요소가 덧붙여지는데 주기철 목사로부터 배운 종말론적인 순교신앙이었다.
이렇게 하여 손양원 목사의 신앙의 틀은 완성된다. 손양원 목사는 장로교회 선교사들과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장로교적 기독교 신앙을 물려받았다. 여기에 길선주 목사의 종말론적인 영성, 일본인 나까다 주지 목사의 중생과 구원확신, 우찌무라 간조의 복음의 사회적 책임을 배운다. 그리고 이어서 주기철 목사로부터 종말론적인 순교적 신앙을 배운다. 특히 아버지와 주기철 목사 그리고 우찌무라 간조로부터 신앙의 실천, 신앙의 용기를 배웠다. 자신과 가족의 현세적 평안보다는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모든 것을 손해 볼 수 있는 “용기있는 실천력”을 배움으로써 신앙과 삶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신행일치(信行一致)의 덕을 몸에 익혔다.
손양원 목사는 그의 신앙의 형성 과정에서 교파적인 특색을 허물어 버리고 성경말씀과 기도에 기초한 기독교의 복음을 껴안았다. 그리하여 그는 교파주의를 거절하고 교회와 사회를 하나로 묶음으로써 복음의 보편성을 지킬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신앙형성에는 호주 장로교 선교사, 부모, 그리고 한국인 목회자와 일본인 목사들까지 가세함으로써 그에게는 국적이라는 벽이 허물어졌고 기독교 복음의 보편성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국가인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절하면서도 편협한 국수주의적 신앙을 거절하고 국경을 초월한 기독교 복음의 보편성을 지킬 수 있었다.

3. 배우고 봉사하는 전도사 손양원
손양원 전도사는 경남성경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3월부터 조선예수교 장로회 경남노회 부산시찰에 소속되어 1932년까지 상애원교회, 밀양 수산교회, 울산 방어진교회, 울산 남창교회, 부산 남부민교회, 양산 원동교회 등을 돌보면서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불같은 기도의 사람”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후일에 그의 별명이 “손불”이었다. 그는 이 기간에 여러 곳의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돌보는 습관이 그로 하여금 전국 각 곳으로 부흥회를 인도하는 부흥사(itinerant preacher)로서의 삶을 살게 하였다.
이 기간에 손양원 전도사는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목회하였지만 상애원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하여 상애원 담임목사의 지도아래 전도사로서 봉사하면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그 시기가 바로 1932년 봄 이었다. 이 때에 손양원 전도사는 김교신의 「성서조선」을 기초로 한 부흥회를 시도하였다.
일본에서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고 돌아 온 김교신은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편찬하여 당시 신사참배를 지지하던 교회와 목회자들을 향하여 소위 말하는 “무교회 신앙”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는 무교회란 단어는 지금까지 자신들의 업적을 무너뜨리는 무서운 단어였다. 그리하여 김교신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에 대하여는 이단이라는 굴레를 어김없이 덮어씌울 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손양원 전도사는 성서조선을 중심으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여기에서도 손양원 전도사는 하나의 신앙유형을 절대시하는 교파주의를 허물어버리고 복음의 정수만 지키려 하였다. 또한 당시 교계의 지도자들이 친일적인 자세에서 신사참배를 수용하기 시작한 현실 타협주의를 거절하고 부모와 길선주-주기철 목사로부터 배운 민족적 신앙을 지키려 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손양원 목사에게는 복음의 보편성(ecumenicity)은 있었어도 교파적 편협주의(denominational intolerance)는 없었다. 바로 이 점이 그로 하여금 부산노회 외지-전도사로서의 자리를 잃게 한 원인이었다.
그렇지만 손양원 전도사는 외지-전도사로서의 자리를 잃었지만, 전국을 상대로 한 부흥사로서의 새로운 사명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교파를 초월하여 전국에서 물의를 일으킨 이용도 계열의 신비주의를 잠재우고 동시에 복음적인 입장에서 신사참배 거절에 대한 정당성을 설교할 수 있었다.
이렇게 1932년 봄으로부터 1935년 초까지 전국을 상대로 한 부흥사로 지냄으로써 그의 신앙적 지평과 목회적 지평을 확대시킨 다음에 신학적 지평을 확대시키기 위하여 손양원 전도사는 1935년 4월 5일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평양신학교의 학생들은 소속 선교회별로 구분된 기숙사 건물에서 생활함으로써 타 선교회 소속 학생들과 더불어서 함께 생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서 손양원 전도사는 기숙사 입사생들의 방배치에서 지역을 무시해 버리고 하나로 통합시키는 제도로 전환시켰다. 이러한 지역 초월정신은 후일에 그로 하여금 전라도 땅에 위치한 애양원에서 일하게 하는 정신의 기초이기도 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학창시절과 학생-전도사 시절에 크게 배운 것은 길선주 목사와 주기철 목사의 기도생활에 기초한 기독교 신앙이었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기도와 함께 나라가 처한 현실에서 각종 유혹을 거절하고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의 정절을 지킬 수 있는 에너지를 배웠던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학생 손양원은 기독교적인 신앙에서 비기독교적인 요소들과 사이비-기독교적인 요소들을 거절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순수한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거절하기”는 “지키기”의 우선적인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손양원 목사는 기독교 신앙의 실천으로서 사회적인 벽을 허물었다. 나환자라는 사회적 냉대와 차별의 벽을 허물고, 신학생들의 지역주의라는 벽을 허물고, 심지어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감옥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서도 교도관들을 전도하기 위한 기회로 삼은 것은 이미 원수라는 벽을 허물고, 자신을 교화시키려는 공산주의자들을 전도하려다가 장총의 개머리판으로 입 주위를 맞아서 턱이 돌아가는 상처를 입은 것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껴안으려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손양원 목사는 일생 동안 “허물기”와 “껴안기”를 병행하였던 것이다.

4. 실천하는 손양원 목사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손양원 전도사는 곧바로 경남노회에서 목사임직을 청원하였으나 크게 두 가지 사유로 거부당하였다. 하나는 일본의 복음적-사회적-실천 목회자 우찌무라 간조의 글을 읽음으로써 순수-복음의 입장에서 벗어났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신사참배 반대라는 이유였다.
이 때로부터 손양원 목사는 “허물기-껴안기” 그리고 “거절하기-지키기”를 실천하는 목회자로 변신하게 된다. 손양원 목사가 여수 애양원에 부임할 당시의 상황은 국가적으로 순천노회적으로 그리고 애양원 자체적으로 복잡한 시기였다.
국가적으로는 일본이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한 이래로 일본이 승전보를 계속 보도함으로써 한국의 독립은 점점 더 멀어지고, 민족적인 패배감에 빠져서 현실에 순응하는 사람들이 더욱 더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8년 봄 노회에서 전국의 각 노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고 순천노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순천노회는 구례에서 개최된 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고, 애양원 교회 담임목사인 김응규 목사도 참여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애양원 원장인 엉거(Kelly J. Unger: 원가리) 목사와 병원장 윌슨(Robert M. Wilson: 우월순) 의사는 새로운 목회자를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애양원 내부에서는 1935년 윌슨 원장이 일본 천황으로부터 그 동안의 봉사를 치하하는 훈장을 받은 데 대하여 일부 분격한 환우들이 비밀단체인 “일심회”를 통하여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어느 날 이들은 훈장이 보관되어 있던 예배당을 방화하여 훈장은 물론이려니와 그간의 각종 교회문서까지 몽땅 소각시킴으로써 교회의 역사를 훼손하고 말았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새로운 목회자는 1,500여 환우들을 따뜻하게 보살핌과 동시에 영적으로 강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랑과 영적인 능력을 다같이 겸비한 인물이 아직 목사임직을 받지 못한 손양원 전도사였다. 손양원 전도사의 부임에 대하여 현재 94세 된 김수남 권사는 이렇게 말한다.

광주 큰 교회(양림교회)의 목사님 아들이(김현정 목사를 말함) 손 목사님하고 평양 신학교 동기생이었는데, 이곳의 직원으로 와 있었다. 김현정씨가 “그 사람이 나하고 신학교 동창인데 그 사람은 별명이 ‘손불’이며, 기도에 열심인 사람으로서 손불을 데려다가 집회를 하는 것이 좋다” 라고 추천하여 손 전도사가 음력 6월에 집회를 하였다. 그 후 신사참배 문제가 심각해지니까, 교회를 맡지 못하고 이곳 저곳 교회에서 부흥회만 하였다. 그 후 김응규 목사가 떠나고, 후임 목사를 물색 중, 원가리(Kelly J. Unger) 선교사가 “신사참배 반대하는 그 사람이 아직 안수를 받지 못하였으나, 그 사람이 목사”라고 하면서, 손양원 목사를 초청하기로 하였다. 목사안수 받지 않았어도, 목사라고 불렀다.

손양원 전도사는 애양원 환우들로부터 환영을 받았으며 그의 감화력있는 설교는 이미 부흥강사로 초청된 때부터 인정받았으나 더욱 더 그의 목회를 탄탄하게 하는 것은 그의 신행일치(信行一致)적 삶이었다. 김수남 권사는 이렇게 말한다.

목사님이 설교를 한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인가? 라고 살폈는데, 손목사는 설교한 대로 실천하기 때문에 마음속에 참 목사로 인정하고 모시기 시작하였다. 목사님도 “위대한 사람도 당대는 모르고 지난 다음에야 안다” 라고 하셨다. 목사님의 가르침도 신령하였으며, 부산에서도 심지어 이단이라고까지 말한 사람도 있었다. 부산에서 김교신의 성서조선을 가지고 설교했는데, 이로 인하여 부산에서 쫓겨났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평가하였는가? 당시 애양원은 직원들의 구역과 환우들의 구역을 철조망으로 분할하여 일반인들은 환우들의 구역에 허가를 얻은 다음에 출입하였다. 뿐만 아니라, 환우들의 구역에 있는 애양원교회도 당회실도 분할되어 있었다. 즉 목회자가 앉는 부분과 환우 장로들이 앉는 부분을 유리로 가로막고, 가운데 유리창문을 두어서 대화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손양원 전도사는 부임 이래로 이러한 칸막이를 제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환우들의 거처에도 무시로 드나들었다. 당시 애양원에는 환우들 가운데 간호사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이들까지도 중환자의 방에는 악취로 인하여 출입을 꺼려하였다. 그런데도 손양원 목사는 감염이나 악취를 개의치 않고 모든 환자들의 처소를 출입하였다. 심지어 손양원 목사는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손목사님이 다미엥의 이야기를 하면서, “사실 나는 너희들하고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 라고 하였다. 본인이 병에 걸릴지 않걸릴지에 대해서는 관여치 않았다.

이러한 손양원 전도사의 행동은 원내의 환우들 뿐만 아니라 동료 직원들과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손양원 전도사는 전임 목회자의 첫 출발 단계에서부터 자신의 모든 것을 “허물었으며” 이로써 “껴안을” 수 있었다.
손양원 전도사의 “허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비하(self-humiliation), 자기-부정(self-abnegation)의 실천이었으며 또한 동시에 아들까지 내 놓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잃어버리기(self-lost)”의 실천이었다. 그리하여 손양원 전도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기간에도 고역을 시키는 간수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신형을 선고받아 대구 교도소로 이송된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그곳의 간수들에게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한다 라고 말할 정도로 주어진 상황을 “껴안음으로써” 자신이 누려야 할 온갖 특권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5. 완성되는 손양원 목사
해방과 함께 다시 애양원의 목회자로 부임한 손양원 전도사는 1946년에 경남노회에서 목사임직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의 목회사역을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1948년 10월에 이르러 일명 「여순사건」이 발발하였다. 이 기간에 이미 알려진 대로 손양원 목사의 두 자녀가 순교당하였다. 순천사범학교와 순천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큰 아들 동인과 작은 아들 동신은 안재선 군이 이끄는 좌경학생 단체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이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 애양원에서는 손양원 목사와 함께 신사참배를 반대하면서 수감생활을 하였던 이인제 전도사가 부흥회를 인도 중이었다. 부흥회 기간 어느 날 청년들이 트럭을 타고 애양원에 도착하여 “우리가 동인, 동신을 죽였다” 라고 큰소리로 떠들고 돌아갔다. 이에 애양원의 홍순복 장로가 순천으로 가서 여동생 동희 양이 임시로 수습해 놓은 시신을 운구하여 애양원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손양원 목사가 아들들의 장례예배 후 상여 앞에서 “수고와 고생 끝난 후에...” 찬송을 부르면서 울음을 보이지 않고 춤을 추는 모습은 무엇인가? 울음을 “거절함으로써” 지금까지 순교의 아름다움을 설교해 온 자신을 “지키기” 위한 내면적 투쟁이었다. 이렇게 자신의 아픔과 눈물을 “참음으로써”(허물어 버림으로써) 죽음을 앞둔 애양원의 환우들을 “껴안으려” 하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서 아들들을 죽인 안재선의 생명을 구명하여 양자로 삼은 것은 분노와 미움을 “허물어 버림으로써” 한 생명을 살려내기 위한 “껴안음”이었이며, 아들 둘을 잃은 자신의 아픔을 “거절함으로써” 지금까지 원수를 사랑하라고 설교하였던 자신을 “지키려는” 투쟁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손양원 목사는 장례식에서 “나의 9가지의 감사”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1950년 7월 23일부터 9월 27일까지 전라도 일대가 북한군에 의하여 점령당하던 기간에 여수 순천에서 또 다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여수 애양원 안에서도 식량 배급을 받기 위해서는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인공기를 게양해야 한다 라고 주장하는 친북적인 조직들이 있었다. 이럴 때마다 손양원 목사는 철저하게 반대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거부하는 공산주의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을 “지키려” 하였다. 이것은 또한 애양원 식구들에게도 지켜야 할 신앙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무언의 가르침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상황이 점점 악화되어 가자 직원들과 환우들의 강요에 의하여  피난가기 위하여 배에서 선상예배까지 드린 후에 직원들은 떠나 보내고 자신은 다시 하선하였다. 나중에 하선 이유를 묻는 서현식 목사에게 “애양원의 환우들을 공산주의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자신의 생명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상황을 알면서도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버림으로써” 애양원의 환우들을 “껴안으려” 한 자기-희생(self-sacrifice), 자기-비하(self-mortification)의 증거였다.
이렇게 손양원 목사가 자신을 버렸지만 애양원의 환우들이 목회자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고 동요하게 되자, 손양원 목사는 10일간의 부흥회를 선포하고서 매일같이 집회를 지속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만세반석 열린 곳에 내가 숨어 있으니...”(305장) 찬송을 부르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교하자”라고 열성적으로 설교하였다.
그렇지만 애양원 환우들 가운데 일부 공산 동조자들이 손양원 목사를 밀고함으로써 손양원 목사는 9월 13일에 율촌지역 내무서에서 출동한 몇 사람에게 이끌려갔다. 그곳에는 기존에 붙들려 온 사람들이 이미 있었으며, 손양원 목사를 위시한 이들은 다같이 “교화대상자”였다. 며칠 후 손양원 목사는 율촌 내무서에서 여수 내무서로 끌려가 학습을 받았다. 그곳에서도 손양원 목사는 끝까지 공산주의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공산주의 학습교사를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하여 전도하고, 또한 같이 수감된 사람들에게도 전도하였다. 이러한 손양원 목사의 태도는 1950년 9월 27일 여수에서 광주로 한 줄에 10명씩 묶여서 끌려가면서도 호송하던 사람에게 전도하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총을 맞고 쓰러진 다음에도 아픔과 고통을 참으면서 “주여 주여” 부르짖었으며 동시에 자신에게 총을 쏜 사람들을 용서해 줄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손양원 목사는 공산주의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정절을 지키는 신앙의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애양원 환우들을 “풍성한 먹을거리와 풍요로운 삶을 약속하는 지상의 낙원”이라는 유혹으로부터 지킬 수 있었다. 또한 손양원 목사는 자신을 공산사상으로 교화시키려 하고, 총의 개머리판으로 때려서 입술이 귀밑으로 돌아가도록 두들겨 팬 사람들까지 기독교로 교화시키려 하고 그들을 위하여 용서하는 기도를 드림으로써 미움을 “허물어 버리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껴안으려”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인간이 만든 이념적 벽을 “거절함으로써” 오로지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 한 분만 유일한 신이라는 신앙을 “지키려” 하였던 것이다.

6. 손양원 목사의 삶과 신앙을 정리하기
손양원 목사는 1902년에 태어나서 1950년에 죽음으로써 48년이라는 짧은 삶을 살았다. 그의 생애는 태어나서 집안과 고향 교회로부터 배운 신앙과 중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한 후 경남성경학교에서 주기철 목사를 만나서 배운 신앙이 그의 삶 전체에 흐르는 맥으로 작용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앙유형
공통점
특징
신앙적 윤리
선교사와 할아버지
장로교 신앙
말씀과 기도
칼빈적 예정론
청교도적 삶
선교사와 아버지
장로교 신앙

애국적 신앙
실천적 용기
길선주 목사
장로교 신앙

종말론적 영성

나까다 주지
성결교회 신앙

중생과 구원확신

우찌무라 간조
초교파 신앙

복음의 사회적 사명
실천적 용기
주기철 목사
장로교 신앙

종말론적 순교신앙
실천적 용기


이렇게 배우고 몸에 익힌 신앙은 그의 삶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실천적 신앙으로 유지되었다. 손양원 학생-전도사는 경남노회 소속 순회 외지-전도사로서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지내고, 평양에서 능라도 교회 전도사로 1935년부터 1938년까지 사역하였다. 그 후 1939년 7월 14일에 애양원교회 담임 전도사로 부임하여 1년 2개월 사역하다가 1940년 9월 25일 수요예배 후 여수경찰서에 검거되어 1945년 8월 17일 해방과 함께 출옥하여 다시 부임하여 1946년 3월 경남노회에서 목사임직을 받았으며, 1950년 9월 13일 여수 경찰서 율촌 내무서에 끌려가던 날까지 목회하였다.
이렇게 볼 때에 손양원 목사는 여수 애양원에서 담임 목회자로 재직한 11년 2개월 동안 약 5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나머지 6년 2개월은 담임목사로서 교회를 지켰던 목회자이다. 물론 목회 기간 중에도 주중이면 부흥회에 자주 다녔다. 이러한 손양원 목사의 삶과 목회를 꿰뚫는 사상은 무엇이었는가? 필자는 여기에서 “허물기와 껴안기” 그리고 “거절하기와 지키기”라는 주제로 정리하였다.



허물기와 껴안기
거절하기와 지키기
상애원 시절
나환자에 대한 차별
환우들의 마음
감염에 대한
두려움
나환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
친일적 교회를 보면서
미온적 신앙태도
기도와 순교신앙
친일적-현실유지 신앙
하나님께 대한 정절과 우찌무라의 유형의 신앙
평양신학생시절
지역차별주의
사랑의 하나되기
신사참배와 친일적 신앙
하나님께 대한 정절
일제치하 및 애양원 부임
목회자와 교인의 차별
환우들의 마음
당회장의 권리
그리스도의 사랑
수감기간
자유에 대한 염원
가족과 교인들의 신앙
신사참배
하나님께 대한 정절과
전도의 기회
여순사건 기간
원수에 대한 증오
애양원 환우들의 마음
눈물 거부
순교와 종말론적 기쁨
인간개조의 확신
공산치하
식량배급 및 일시적 평안함
환우들의 안정
공산사상
종말론적 순교신앙
본인의 순교
피랍자와 가해자의 구별
전도자의 삶
공산사상
종말론적인 순교신앙
전도의 기회


손양원 목사는 일생동안 내면적 투쟁 속에서 그리스도 우선적으로 살았던 한 인간이며 동시에 목회자였다. 그의 삶에서 볼 수 있었던 순교적 자세는 타고난 것이라기보다는 배운 것이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는 이러한 신앙적 배움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던 용기 있는 신앙인이었다. 신사참배를 강요가 시작될 때에 광주 선교부에서 활동하였던 페이슬리(James I. Paisley: 이아각) 선교사는 이렇게 말한다.

(편지를 쓰는) 기자에게는 한국교회와 선교회 그리고 선교사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대담성이 더욱 더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말씀을 더욱 외칠 수 있는 과감성, 진정으로 “우리는 사람보다는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게 하는 과감성,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설교하기를 중단하지 않으려는” 과감성이 필요하다

손양원 목사의 삶과 신앙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사적(私的)인 만남을 자신이 몸담고 살았던 시대의 사회속에서 공적(公的)인 행동으로 말할 수 있었던 신행일치(신행일치)의 모범이었다. 손양원 목사는 페이슬리 선교사가 말하는 대담성, 과감성, 당위성의 덕목을 고루 갖춘 소수의 지도자로서 모든 시대에 걸쳐서 언제나 대두되는 비-기독교적인 그리고 사이비-기독교적인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덕의 사람이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년보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85번지에서 태어나다
           부친: 손종일 장로 모친: 김은수 집사
1908년 7세 때부터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교회에 다니다
1913년 11살 때 칠원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다
1919년 맹호은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다
       4월 서울 중동중학교에 입학하다
1921년 일본 동경 쓰가모 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하다
1924년 1월 정양순과 결혼하다
       3월 일본에 가서 성결교회 목사 나까다 주지 목사로부터 구원과 중생에 관한 확신 가짐
       10월 부산 경남성경학교 입학
1926년 3월 경남 성경학교 졸업
           경남노회에서 외지전도사로 근무하면서 상애원, 밀양 수산교회, 울산 방어진 교회, 울산 남창교회, 부산 남부민교회, 양산 원동교회를 돌보다
1932년 상애원 교회에서 김교신의 성서조선을 중심으로 한 주간 부흥회 한 것이 화근이 되어 선교사들과 경남노회로부터 이단으로 축출되다
1935년 4월 5일 평양신학교 입학하다
1938년 3월 16일 평양신학교 졸업하다
1939년 7월 14일 여천군 율촌면 신풍리 소재 애양원 전도사로 부임하다
1940년 9월 25일 신사참배 반대로 여수 경찰서에 수감되다
1941년 7월 21일 여수 경찰서(미결수)에서 광주 구치소로 이감되다. 광주지방법원에서 1년 6개월 형을 언도받다
1943년 5월 17일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함으로서 종신형을 선고받다. 광주구치소에서 경성구금소를 거쳐 청주구금소에 수감되다
1945년 8월 17일 출감하다
1946년 3월 경남노회에서 목사임직받다
1948년 10월 21일 두 아들, 동신 동인 군이 급우들에게 총살당하다
1950년 7월 23일 전라남도 일대가 북한군에 점령되다
       9월 13일 여수군 율촌면 내무서에 붙들려가다
       9월 27일 총살당하다
1977년 11월 26일 부인 정양순 사모가 소천하다



<참고문헌>
1. 김충남, 순교자 주기철 목사 생애, 서울: 백합출판사, 1991.
2. 이홍술, 순교자 손양원 목사의 생애와 사상, 순천: 푸른솔서원, 1995.
3. 손동희,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서울: 아가페, 1999.
   ______, 사랑의 순교자 손양원 목사 옥중목회, 서울: 보이스사, 2001
4. 이광일 엮음, 손양원 목사 설교집 1권: 성경대로 살자, 순천: 손양원목사 순교기념사업회, 1991.
   ___________, 손양원 목사 설교집 2권: 오늘이 내 날이다, 1994.
   ___________, 손양원 목사 설교집 3권: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다, 1995.
   ___________, 손양원 목사 설교집 4권: 옥중서신, 1993.
5. 안용준, 사랑의 원자탄, 서울: 성광문화사, 1949.

2. 학위논문
이광일, 산돌 손양원 목사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연구, Jacksonville, Trinity Theological College & Seminary, 1995.

3. 면담
1. 오마르다. 오은자 권사의 증언, 2003년 3월 11일
2. 차숙철 집사(차진국씨의 조카)의 증언, 2003년 4월 19
3. 김수남 권사의 증언, 2003년 5월 14일
4. 배길홍 장로, 박개문 집사의 증언, 2003년 5월 14일
5. 이광일 목사, 2003년 5월 14일

4. 편지
1. James I. Paisley, "Dear Friends," 13 July 1938.
<초록>
손양원 목사는 1902년에 태어나서 1924년에 결혼하고 1948년에 두 아들의 순교를 목격한 뒤 1950년에 본인도 순교자로서 삶을 마감하였다. 이렇게 순교자 가계를 이룰 수 있는 신앙의 핵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본 필자에게는 “허물기와 껴안기” 그리고 “거절하기와 지키기”라는 중심점이었다.
손양원 목사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의 아픔과 일생을 같이하면서 신앙의 정절을 지킨 사람이었다. 그는 부모와 장로교 선교사로부터 장로교 신앙과 신학을 물려받았으며, 길선주 목사로부터 종말론적 신앙을, 주기철 목사로부터 순교의 신앙을, 일본인 성결교회 목사로부터 구원과 중생의 확신을, 그리고 우찌무라 간조로부터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물려받았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이 손양원 목사라는 한 개인에게는 신앙의 굳은 의지와 용기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손양원 목사는 비인간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허물기와 껴안기“로 맞서고, 비기독교적인 사상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거절하기와 지키기“라는 틀을 사용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상애원과 애양원의 나환자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허물고 이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껴안았으며, 심지어는 자신을 고문하는 일본인 형사들과 공산주의자들에게까지 차별을 허물고 껴안으려 하였다. 또한 손양원 목사는 상애원과 애양원 환우들에 대한 잘못된 상식을 거절하고, 일본의 신사참배 요구와 공산주의자들의 기독교 신앙 부인 요구를 거절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정절을 지키려 하였다.
“허물기와 껴안기” 그리고 “거절하기와 지키기”라는 틀은 하나님께서 손양원 목사의 삶을 통하여 한국교회에게 말씀하시는 큰 계시일 것이다.



영문: A New Perspective of the Life and Faith of Rev. Sohn, Yang-Won.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