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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 Charles Darwin, 1809-1882)】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

작성자씨알|작성시간26.01.04|조회수64 목록 댓글 0
〔 Charles Darwin, (1809-1882)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 자연선택설(Natural Selection) 〕

 

진화론으로 19세기 이후 생물학에 혁명에 가까운 거대한 변화를 이끈 인물이다. 다윈의 이론은 유전학 관련 부분만 빼면 대부분이 현대 생물학계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생물이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한다는 그의 이론은 생물학을 넘어서 많은 분야에 영향을 주었다.

 

잉글랜드 슈루즈베리(Shrewsbury)에서 부유한 의사인 아버지 로버트 워링 다윈과 도자기로 유명한 웨지우드 가문 출신 어머니 수재나 다윈 사이에서 2남 4녀 중 다섯째 아이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집안과 어머니 집안 모두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소위 말하는 부자집 다섯째 아이다.

그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Erasmus Darwin, 1731–1802)은 유명한 의사였다. 물론 현대적인 의미의 의술을 행했던 것은 아니었고, 주로 약물과 심리치료를 통해 몸의 안정과 병증을 다스렸다고 한다. 그는 의사로서의 실력을 크게 인정받았었는데, 그 능력이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 당시 영국의 국왕 조지 3세는 이래즈머스 다윈에게 주치의가 되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했다. 이래즈머스 다윈은 토리당을 매우 싫어했는데, 당연히 국왕의 주치의가 되면 그들과 엮이고 한패가 되는 것이라 여겨 거절했다고 한다. 거의 반드시 귀족의 작위를 수여받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진보적 지식인이었으며, 손자인 찰스 다윈의 진화론과 비슷한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종교적으로 사람의 신분을 가르는 짓은 어리석다면서 기독교 주류를 비난하다가 파문당했으나 당시대뿐만 아니라 현대에까지 이름을 남긴 저명한 학자들과도 교류할 정도로 존경과 인정을 많이 받았던 터라 별다른 불편을 겪지 않았고 그걸 자랑하며 당당하게 지냈다. 그의 혁신적인 주장들은 당대에 묻혀졌고, 손자의 엄청난 유명세 때문에 오히려 불이익을 받기도 했지만, 이러한 사상이 집안의 밑거름이 되어 손자 찰스가 그런 이론을 펼칠 수 있었던 만큼 지금은 상당히 재조명되고 있는 인물이다.

 

1825년, 찰스 다윈은 자유로운 분위기의 에든버러 대학교 의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에든버러 대학교는 해부학계에서는 유럽 전역에 명성이 자자할 정도였으며 찰스 다윈의 집안은 매우 부유했으므로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다윈은 여기서 1827년까지만 공부하다가 자퇴하였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당시의 대학교는 지금의 인강 사이트와 비슷하게 운영되었는데, 학생들은 강의를 듣기 위해 대학에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강사에게 직접 지불했고, 강사는 그 돈으로 생활비 등을 충당했다. 당연히 돈을 벌기 위해 소위 '돈이 되는 강의'를 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경쟁에서 자유로운 강사들이 있었는데 그 강사의 과목이 필수 과목으로 지정된 경우였다. 이럴 경우 기본적인 학생수가 보장되므로 어떤 강의를 해도 문제될 것이 없었고, 대충대충 강의하는 교수들이 나타났다. 이런 대충대충 강의하는 교수들 중에는, 심지어 그의 아버지가 강의하던 강의록을 그대로 읽는 교수도 있었다. 그래도 수업이기 때문에 따라가려고 노력해 보았으나 다윈은 이내 지쳐버린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들었던 해부학 수업이었다. 해부학으로 유명한 에든버러 대학교 답게 해부학 수업은 강사가 실제 사람의 시체를 가지고 해부를 하면서 진행되었는데, 다윈의 강의를 담당하던 교수가 능력이 부족하여 좋은 시체를 구해오지 못했다. 이는 당시 스코틀랜드 법률이 바뀌면서 해부용 시신을 쉽게 구하기 어려웠던 이유가 컸다. 당시 해부학자들은 남몰래 묘지에서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신을 파오는 도굴꾼들과 거래하는 것이 암묵의 룰이었는데, 망자에 대한 존중의식이 점점 신장하면서 도굴꾼들이 활동하기 어려워진 것이 큰 요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다윈이 수강하던 시기, 해부학 수업에 사용된 시체는 온전한 시체라기보단 방부제에 절여진 덩어리에 불과했고, 공부할 만한 부분들이 이미 상당히 훼손되어 제대로 된 강의가 불가능했다. 게다가 학생들이 직접 실습할 시신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엄청난 수의 학생들이 강당에 모여 잘 보이지도 않는 시신을 멀찍이서 바라봐야만 했다. 그 시체를 보면서 다윈은 수술을 하는 것에 혐오감을 가졌다. 설상가상으로 교수의 강의력까지 좋지 않아 찰스 다윈은 이 수업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또한, 그 당시에는 마취학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도 영향을 주었다. 수술을 하며 엄청난 고통을 겪는 환자들의 모습을 보고, 의사가 되어서 저런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에 큰 회의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공부하는 환경에도 적응하기 힘들고, 공부를 열심히 해도 의사가 되어 해부나 수술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다윈은 정말로 의사가 되기 싫어했다. 다윈은 점차 자신이 굳이 의사가 되어 생계를 책임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결국 그는 의사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1827년 에든버러 대학교를 자퇴하게 된다. 그는 의사가 되는 길보다는 성공회 신부가 되는 길이 낫겠다고 생각했고 로버트 워링 다윈은 이러한 아들의 생각을 받아들여 찰스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크라이스트 컬리지 신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학교를 자퇴하기 전, 찰스 다윈은 로버트 그랜트와 함께 플리니안 학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학회는 에든버러에 다니는 학생들이 모여서 서로 연구한 것을 발표하고 함께하는 모임이었다. 로버트 그랜트는 찰스 다윈의 동료와 같은 존재였는데, 찰스에 비해 아는 것이 많고 연구 방법 등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젊은 과학자로 명성을 쌓고 있어 이내 찰스는 로버트 그랜트의 조수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 둘은 함께 해양의 무척추동물을 연구하였는데 찰스는 이때 현미경을 다루는 법 등의 기본적인 생물학 연구 방법을 익히게 된다. 연구를 통해 아는 지식이 크게 늘어났음은 당연한 이야기다.

또한, 이때 이미 다윈은 진화론에 대한 생각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도서 대출 목록이나, 그가 남긴 글을 보면 진화론적인 사상을 가졌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나 라마르크의 저서들을 읽어보았음은 명확하다. 이들뿐만 아니라, 당대에는 진화론적 관점을 가진 진보적인 사상가들이 많았기에 다윈이 그 영향을 받았음은 틀림없다. 그와 자주 붙어다녔던 로버트 그랜트 역시 라마르크주의자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즉 다윈이 대학생인 시절에도 '진화'라는 개념은 낯선 개념이 아닌 학계 최신의 떠오르는 연구분야였으며 많은 '가설'들이 나오던 시점이었다.

사소한 이야기지만 의대 재학 시절 유명한 연쇄살인마와 엮인 적이 있다. 이 당시 연고 없는 노숙자나 극빈층을 골라 살해한 뒤 자연사로 위장해 에든버러 의대에 해부용 시체로 팔던 윌리엄 버크(William Burke)와 윌리엄 헤어(William Hare)를 자주 만났기 때문이다. 교수를 대동하거나 혹은 혼자 만나서 시체상태를 살핀 뒤 시체값을 두고 흥정을 벌였는데 나중에 사건이 발각되자 이 때문에 다윈은 경찰 조사도 받고 법정에 나가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후일 다윈이 진화론을 두고 공방을 벌일 때 공격 측에서 이 일을 거론하며 인신공격에 쓰기도 했다. 공격의 요지는 "당신 진짜로 그 시체들이 살해 당한 시체라는 걸 몰랐나?"는 것. 이 부분은 사이먼 페그 주연의 영국 영화 '버크와 헤어(Burke and Hare)'에도 나오는데 이 영화에서는 아예 다윈이 살해 당한 시체인 걸 눈치 채고도 사는 것처럼 묘사된다.

 

다윈은 자연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열정적인 표본 수집가였고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집 주변의 시골을 탐험하며 보냈다. 1825년, 다윈은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에든버러 대학에 입학했지만, 그는 의학 강의가 정말 지루하고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1828년, 다윈은 케임브리지의 크리스티 대학으로 옮겨 자연사와 지질학을 공부했다. 그는 지질학자 아담 세지윅과 박물학자 존 헨슬로의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과학 탐험에 참여하며 표본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1831년, 다윈은 남미의 해안을 지도하는데 5년을 보낸 조사선인 HMS 비글호의 승무원으로 초대되었다. 다윈은 그 기회에 달려들었고, 그 항해는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비글호에 있는 동안 브라질과 리우데자네이루, 우루과이와 칠레를 거쳐 마침내 에콰도르 갈파고스제도에까지 도착한 다윈은 수천 개의 식물과 동물의 표본을 수집했고, 광범위한 지질학적 현상을 관찰했다. 그를 통해 그는 종의 다양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진화와 자연선택에 대한 그의 생각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1836년 영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윈은 그의 발견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곧 그의 첫 번째 책인 "비글호 항해 중에 방문한 국가들의 자연사와 지질학에 대한 연구 저널"을 출판했다 이 책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다윈을 존경받는 박물학자이자 작가로 확립시켰다.

 

비글 항해에서 돌아온 후, 다윈은 그의 시간을 연구하고 표본을 수집하는 데 쏟았고, 이것은 그가 진화론을 생각해낼 수 있도록 이끌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종들은 가장 적합한 개체의 생존과 번식을 선호하는 자연선택을 통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진적으로 진화했다. 그는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하고 증거를 모았고, 결국 1859년에 그의 유명한 책 "종의 기원"을 출판했다. 이 책은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고 지구 생명체의 기원에 대해 과학자들과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열띤 토론을 야기했다.

 

찰스 다윈의 과학적 업적은 자연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우주에서 우리의 위치를 보는 방식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센세이션하게 바꾸었다. 그의 진화 이론과 자연선택의 개념은 현대 생물학의 기본 원리로 남아있으며, 과학자들과 사상가들의 세대에 영향을 미쳤다.

 

다윈 진화론은 찰스 다윈이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을 통해 생물 종이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다양화된다고 설명한 이론으로, 변이, 유전, 생존 경쟁이라는 핵심 요소로 구성된다. 환경에 더 적합한 유리한 형질을 가진 개체가 살아남아 자손을 남기고, 이러한 과정이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되어 새로운 종이 탄생한다는 것이 핵심이며, 1859년 《종의 기원》에서 발표되었고 현재 과학계의 주류 이론이다

그의 이론을 둘러싼 논란에도 불구하고, 다윈은 그의 일생 동안 출판과 연구를 고집했다. 그는 종의 진화에서 성적 선택의 역할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었고, 그 주제에 대해 몇 권의 책을 출판했다. 이것은 그가 1882년 4월 19일 73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의 사후, 진화와 자연선택에 대한 그의 연구는 심리학, 인류학, 그리고 철학과 같은 다른 분야로도 확장되었다.

 

다윈은 생물의 기원과 다양성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제공하며, 생물학 발전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멘델의 유전학 연구 재발견과 결합하여 '현대 진화 종합'으로 발전하여 현재까지도 생명과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다윈이 없었다면 오늘날에도 우리는 우주에서 인간만이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가 만들어낸 업적은 단지 종의 기원에 대한 지식 정도가 아닌, 생물에 대한 의미와 존재의 본질을 되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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