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 Kim-Stankevich(1885 ~ 1918)】 "러시아 볼셰비키 세력과 연합 한 항일운동"
작성자씨알작성시간26.01.01조회수34 목록 댓글 0【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 Kim-Stankevich(1885 ~ 1918)】
" 독립운동 사상 처음, 러시아 볼셰비키 세력과 연합 한 항일운동"
러시아 연해주의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멀지 않은 한인 농촌인 시넬니코보 마을(秋風) 永安坪(또는 秋風 大甸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두서(金斗瑞)는 함경북도 경흥 출신으로 1869년 대기근 때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령으로 건너갔다. 10살 때인 1895년 김알렉산드라는 동중철도 건설 공사장의 통역으로 일하던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갔으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아버지의 폴란드인 친구인 M. I. 스탄케비치의 후원으로 고향의 소학교를 마친 후 블라디보스토크의 여학교(김나지움)에서 중등 교육 과정을 마쳤다. 당시 러시아혁명 사상가들의 저술을 비롯한 비합법적인 혁명적 문건들을 처음으로 접하고 사회문제에 눈뜨기 시작하였다. 이어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 있는 사범학교를 마친 후 고향의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아버지의 친구이자 후견인이기도 한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결혼하였다.
결혼 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으며, 러시아어 교사였던 오 바실리와 재혼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인 1914년 말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제조하거나 목재를 공급하는 러시아의 관영 공장들이 몰려 있던 우랄 지방으로 갔다. 특히 극동으로부터 한국인, 중국인 노동자를 대거 모집하던 페름(Perm) 지방의 대공장에서 통역으로 일했다. 한국인 노동자들을 모집한 이가 통사 김병학(金炳學)이었다. 수천 명의 한국인 노동자들을 우랄 지방으로 데리고 간 그가 계약 조건을 자기 마음대로 위조하여 놓고 도망하는 바람에, 한국인 노동자들은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처지에 빠지고 말았는데, 곤경에 빠진 이들의 권익을 대변하고 투쟁하였다. 1917년 초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가담하였다.
2월 혁명 이후 한국인·중국인 노동자들의 소송 대리인으로서 소송을 승리로 이끌어 이들의 밀린 임금도 받아내고,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였다. 이들 노동자 가운데는 이동휘와 이종호가 설립했으나 경비 부족으로 폐교했던 나자거우(羅子溝)무관학교 생도 출신들도 있었다. 이인섭·안용학 등 한국인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우랄노동자동맹’을 조직하였다. 1917년 7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예카테린부르크위원회로부터 극동 지방의 볼셰비키 당사업, 특히 한국인 사회에서의 선전, 조직 사업의 책임을 부여받았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국인, 중국인 노동자들은 물론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 등 전쟁 포로들 사이에서 적극적인 선전, 조직 활동을 전개하였다. 곧 극동 지역 볼셰비키 세력의 주요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부상하였다. 그리하여 1917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제2차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당) 극동 지방 대표자 회의에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Muravyov-Amurskii) 구역 대표로 참석하였다.
1918년 1월 18일 극동 러시아의 정권을 담당할 ‘극동 지방 노·농·병 소비에트 자치위원회’(이후 극동 인민 위원회로 개칭됨)가 구성되어 의장에는 볼셰비키인 크라스노시체코프가 선출되었다. 하바롭스크의 볼셰비키당 조직을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활동적인 볼셰비키와 더불어 하바롭스크로 옮기게 되었고 하바롭스크 볼셰비키 조직의 책임 서기와 회계로 선출되었다. 이와 동시에 극동 러시아의 혁명 정권인 극동 인민 위원회의 외교 인민 위원(외교 위원장)이 되었다. 1918년 4월 28일(러시아 구력) ‘반일(反日), 반제(日帝)의 사회주의 노선’을 강령으로 채택한 최초의 한인 공산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창립하였다. 한인사회당은 출판사 보문사(普文社)를 설립하여 한국의 역사와 지리 등 교과서를 간행하였고, 백위파와 제국주의 간섭군에 대항하기 위한 적군의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기관지로 잡지 『자유종』을 발행하였다.
1918년 6월 28일 체코군이 봉기하자 일본·미국·영국·프랑스 등 연합국이 무력 간섭을 시작하여 볼셰비키 정권이 붕괴하고 백위파 정권이 들어섰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8년 8월 28일 자바이칼 지방 적위군 부대 지휘관, 볼셰비키당 및 소비에트 일꾼들은 우룰리가역에 모여 정규적인 전선 체제에서 빨치산 체제로의 전환에 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한인사회당을 포함한 볼셰비키당과 소비에트 조직은 하바롭스크를 떠나 흑룡주(아무르주)로 이동해야 했다. 극동인민위원회 역시 흑룡주로 이동하였다. 1918년 9월 4일 하바롭스크가 일본군과 백위파 군에게 함락되고, 9월 10일 마지막 탈주선인 ‘바론 코르프(코르프 남작)’호가 하바롭스크를 떠나 아무르주의 블라고베셴스크로 이동하려고 흑룡강(아무르강)을 따라가다가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때 백위파 군의 포함(砲艦)에 붙잡히고 말았다.
‘바론 코르프’호에 볼셰비키당 일꾼들과 한인사회당의 중심 인물들과 함께 타고 있었다. 이들은 하바롭스크로 되끌려갔고 마침내 잔인하기로 악명 높은 백위파 대장 칼미코프 휘하 군인의 심문과 즉결 재판을 받았다. 한인사회당의 간부들인 유동열·김립·전일·이인섭 등 10여 명은 석방되었으나, 1918년 9월 16일 새벽 4시 사회 사업 위원인 치쉰, 재판장인 네페도프(Nefedov) 등 다른 핵심 볼셰비키 17명과 함께 그동안 수감되어 있던 ‘죽음의 차량’에서 끌려 나와, 후에 인민들이 ‘죽음의 골짜기’라 부른 곳에서 총살당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