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빈들의소리

【송두용 宋斗用(1904 ~ 1986)】 「『성서조선』 발간을 통해 민족의식 고취」

작성자씨알|작성시간26.06.11|조회수23 목록 댓글 0

【송두용 宋斗用(1904 ~ 1986)】 「『성서조선』 발간을 통해 민족의식 고취」

1904년 (음)6월 19일 충청남도 회덕군(懷德郡) 회덕면(懷德面) 신대리(新垈里, 현 대전광역시 대덕구)에서 부친 송헌옥(宋憲玉)과 모친 유씨(柳氏)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후손이다. 5세 때 통천군수를 지낸 큰아버지 송헌기(宋憲基)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921년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배계복(裵癸福)과 결혼하였다.

 

1924년 3월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결심한 후 1925년 동경농과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다. 무교회주의를 주장한 개신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성서집회에 참석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성서집회에서 한국인 유학생 김교신(金敎臣)·함석헌(咸錫憲)·정상훈(鄭相勳) 등과 교류하며, 조선성서연구회에 가입하여 우리말 성경을 읽으면서 민족 의식을 고취하였다. 1927년 7월 1일 무교회주의 신앙을 기반으로 한 『성서조선(聖書朝鮮)』을 창간하여 발행하였다.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후 김교신과 협력하여 1930년 6월에 공개 성서 집회를 개최하였다. 그 해 9월 경기도 부천군(富川郡) 계남면(桂南面) 오류리(梧柳里) 부지를 매입하여, 같은 해 12월 오류학원을 개원하였다. 서울·인천·부천 등지를 순회강연하면서 한국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동지들과 함께 발간한 『성서조선』을 배포하였다.

 

이 무렵 민족의식을 가진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신사참배 거부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의 기독교 탄압과 통제가 강화되었다. 일제로부터 10여 차례 『성서조선』의 출판금지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성서조선』 권두언에서 ‘혹독한 추위가 와서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죽어 나가더라도 한두 마리는 살아남듯이 일제가 아무리 민족말살정책을 펼치더라도 끝내 살아남는 한국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일로 1942년 5월 25일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김교신·함석헌 등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미결수로 옥고를 겪던 중, 1943년 3월 29일 불기소로 풀려났다.

1945년 광복 이후 인천 장봉도(長峰島) 일대를 중심으로 구호 활동과 교육 사업에 헌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