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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도병 (朴道秉)(1917 ~ 2002)】 「 수원고등농림학교 재학 시절 한글연구회 조직하고 활동」

작성자씨알|작성시간26.06.12|조회수15 목록 댓글 0

【박도병 (朴道秉)(1917 ~ 2002)】 「수원고등농림학교 재학시 한글연구회 조직 활동」

1917년 11월 16일 함경남도 원산부(元山府) 당상리(堂上里)에서 박승종(朴承鍾)과 안종애(安鍾愛) 사이에서 3남 6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호는 경암(耕巖)이다. 1941년 오영덕(吳泳德)과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다. 1924년 원산 광성학교에 입학해 4학년을 마친 뒤 1928년 4월 해성학교 5학년에 편입해 1930년 3월에 졸업하였다.

 

1932년 9월 평안북도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五山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해 함석헌(咸錫憲) 등에게 영향을 받아 동기 20여 명과 애교회(愛校會)를 조직하여 비밀리에 모여 애교·애국·애족 실천을 도모하였다. 1937년 3월 졸업 후 4월 수원고등농림학교(이하 수원고농) 농학과에 진학했다. 수원고농에는 한국인 학생 기숙사인 일명 ‘동료(東寮)’와 다수를 차지하는 일본인 학생 기숙사인 ‘서료(西寮)’ 사이에 차별과 학대,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8년 8월 도쿄(東京) 수학여행 중 메이지신궁(明治神宮)에 참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본인 학생들에게 구타당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1939년 4월 중순 동료회 석상에서 료장(寮長) 정주영(鄭周泳)으로부터 “민족 의식을 앙양하고 조선 문화를 부활해 조선을 독립시켜야만 한다”는 강연에 깊이 공감하고, 10월 11일 오후 7시 기숙사 제4료 6호실에서 정주영·임봉호(林鳳鎬)·민병준(閔丙駿)·김상태(金象泰)·김중면(金重冕)·김윤하·송장헌·정창순·김종활 9명과 함께 ‘한글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이들 한글연구회 회원과 함께 ‘한글과 한국 문화를 수호하기 위해 서로 조선인이라는 의식을 잊지 말 것, 비밀을 지킬 것, 조선어를 사용할 것, 시간을 엄수하고 연구는 두 시간을 한도로 할 것, 『한글맞춤법통일안』과 『중등조선말본』을 교재로 하여 연구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들은 12월 중순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 7시부터 2시간 씩 7~8회 연구회를 개최하여 교재를 읽고 받아쓰기를 연습하면서 일제의 한국어 교육 폐지와 일본어 상용에 저항했다.

 

1940년 3월 졸업 후 고향에서 아버지의 과수원 운영을 도우면서도 당우(堂隅)체육회 회계를 맡고, 12월 중순부터 이듬해 1월 하순까지 집에서 동생과 친척 등 14명에게 『한글맞춤법통일안』 읽기와 한글 받아쓰기를 가르쳤다. 그러던 중 한글연구회 창립 회원이었던 김중면이 함남 갑산공립농림학교(甲山公立農林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1941년 4월부터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선전하다가 붙잡혔다.

이 일로 한글연구회 조직과 회원들의 행적이 발각되어 1941년 9월 대다수 회원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혀 수원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수원고농 한글연구회 사건(제3차 수원고농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1943년 3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44년 9월 3일 만기 출옥하였다.

 

광복 이후 경상남도 진주에 정착해 경상대 농과대학 교수, 원로과학기술자문단 농수산부 원예분과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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