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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학수 白學洙(1901 ~ 1969)】 「1920년 평북 용천에서 일제 경찰과 교전, 1932년 군자금 모집 활동」

작성자씨알|작성시간26.06.19|조회수11 목록 댓글 0

【백학수白學洙(1901 ~ 1969)】

       「1920년 평북 용천에서 일제 경찰과 교전, 1932년 군자금 모집 활동」

 

1901년 5월 16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비현면(枇峴面)에서 백선일 (白善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水原)이고, 호는 청고(淸皐)이다. 이명으로 백학신(白學信)을 사용하였다. 부친은 1919년 만세운동 당시 비현 장날에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물이다. 활동 당시의 본적과 주소는 평북 용천군(龍川郡) 양광면(楊光面) 구룡동(龜龍洞)으로 되어 있다.

 

1920년 9월 1일 ‘선천폭탄의거’를 주도했던 김응식(金應植)·임용일(林龍日) 등을 도와 군자금과 정보를 제공하는 활동을 하였다. 김응식 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으며, 만주 콴뎬현(寬甸縣)의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 참모장 이탁(李鐸)이 조직한 결사대(決死隊)에 뽑혀 평북 선천 방면으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1920년 8월 미국 의회의 상·하원 의원으로 구성된 동양시찰단 한국 방문을 기하여, 관공서 등 일제의 기관을 파괴하고 관공리의 처단을 감행하려고 계획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한편 민심을 격려하여 독립의 실현을 촉진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후 같은 해 12월 12일 밤 8시 경 백인순(白仁舜)·백운현(白雲鉉)·김상진(金尙榛)·이경문(李景文)·김상복(金尙福)·김득하(金得河)·김상백(金尙柏) 등 독립당원 7명과 함께 용천군 양광면 구룡동 백학균(白學均)의 집에서 그들을 잡으러 오는 일제 경찰 10여 명과 약 3시간 동안 대치하였다. 일제 경찰 김지연(金志淵)에게 총상을 입히는 등 격전을 벌였으나, 끝내 동료 3명과 함께 현장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나머지 동료 4명도 며칠 뒤 모두 붙잡혔다.

이로 인해 1921년 2월 19일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1922년 4월 19일 가출옥으로 풀려났다.

 

1930년대에는 군자금 조달을 위해 만주로 아편을 밀반출하는 활동을 하였다. 1932년 8월 20일경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 남두일면(南斗日面) 이파리(梨坡里) 홍문권(洪文權)에게 의뢰해 시가(市價) 2,640원 정도에 해당하는 아편 약 6관(貫)을 구매하였다. 그리고 집으로 가져온 후 만주로 밀반출하기 위해, 같은 해 10월 3일 백상규(白相圭)·백학웅(白學雄)에게 운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의주군 주내면(州內面) 서호동(西湖洞) 압록강안(鴨綠江岸)에서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 일로 1932년 10월 27일 일제 경찰에 끌려가, 같은 해 11월 11일 이른바 조선아편단속령 위반으로 징역 3월을 받아 옥고를 겪고, 1933년 2월 11일 풀려났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화베이(華北) 지구 톈진시(天津市), 장쑤성(江蘇省) 쉬저우시(徐州市) 등에서 숙박업 등을 하면서 생활했다고 한다.

1945년 광복 이후 의주로 귀국하여 10개월 정도 체류하다가 월남하였다. 1950년 6·25전쟁 이후 진보당(進步黨)에 가입한 바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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