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er Paul Rubens(1577-1640),The Defeat of Sennacherib, 1616-18, oil on panel 98x123cm]
기원전 705년부터 기원전 681년까지 산헤립은 앗시리아의 왕으로서 군 지도자들과 함께 유대 정복전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둠의 깊은 곳에서 번쩍이는 불빛의 한 가운데, 천둥으로 무장한 네 천사가 하늘에 나타난다. 온 군대를 이끌고, 왕의 말을 타고, 산헤립은 그의 갈기를 꼭 붙잡지 않으면 벼락맞아 죽거나 낙마할 듯 하다. 그의 용사들은, 말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로 질주할 때에, 그의 주변에 있는 먼지 속에서 뒹굴고 있다. 죽은 자와 부상당한 자들이 땅바닥에 무더기로 누워 있다.
그것은 전례 없는 혼란과 무질서가 있는 장면이다. 기수의 고통과 말의 공황은 가장 대담하고 놀라운 방법으로 표현된다. Sennacherib의 말은 뒷다리로 거의 수직에 가까운 위치로 기어들어 그의 앞발로 공중을 미친 듯이 때리고 그의 갈기와 꼬리는 마구 뒤척인다. 날고 있는 또 다른 말은 뒷발을 너무 높이 던져서 마치 공중제비를 가장 앞쪽으로 돌려야 할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코와 콧구멍을 가진 코는 치명적인 몸서리치는 공포에 질려 팽창했다. 말 타는 사람들은 이 상황이 두려운 나머지, 혼란스럽고 이순간 이자리를 피하기에 급급하다.
산헤립(Sennacherib) [달의 신(神)]이 나에게 형제들을 증가시킨다]
사르곤 2세의 아들인 아시리아의 왕. 산헤립(센나케리브)은 아버지로부터 막강한 제국을 물려받았지만 통치 기간의 대부분을 반란—특히 바빌론 도시를 둘러싼 반란—을 진압하는 데 보내야 하였다.
산헤립은 그의 아버지가 통치할 때 아시리아의 북쪽 지역에서 총독이나 장군으로 일했던 것 같다. 산헤립이 왕위를 계승한 후 그 지역은 거의 말썽을 일으키지 않은 것 같으며, 문제는 주로 남쪽과 서쪽에서 발생하였다. 칼데아 사람 므로닥-발라단(사 39:1)
그런 다음 산헤립은 자기가 “3차 원정”이라고 부른 원정에서 “하티”를 공격하기 위해 진군하였는데, “하티”는 당시 페니키아와 팔레스타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 같다. (「고대 근동 문헌」 Ancient Near Eastern Texts, J. 프리처드 편, 1974년, 287면) 그 지역은 전반적으로 아시리아의 지배에 대해 반기를 들고 있는 상태였다. 유다의 히스기야 왕 역시 그러한 지배를 거부한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왕둘 18:7)
히스기야 제14년(기원전 732년)에 산헤립의 군대는 서쪽으로 진격하여 시돈, 악십, 악고와 같은 페니키아의 해안 도시들을 함락시킨 다음 남쪽으로 향하였다. 모압과 에돔과 아스돗을 포함하여 두려움을 느낀 나라들은 복종을 표하기 위해 조공을 보낸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완강하게 저항했던 아스글론은 인근 성읍인 요파와 벳-다곤과 함께 무력으로 점령당하였다. 아시리아의 한 비문에서는 블레셋의 도시 에그론의 주민들과 귀인들이 그들의 왕 파디를 히스기야에게 넘겨준 것에 대해 비난하는데, 산헤립은 히스기야가 “그를 부당하게 감금하였다”고 말한다. (「고대 근동 문헌」, 287면. 왕둘 18:8)
성서 기록에서는 이 무렵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하였으며 많은 요새 도시들과 성읍들을 포위하고 함락시켰다고 알려 준다. 히스기야는 이제 라기스에 있는 아시리아 왕 산헤립에게 전갈을 보내어 그가 부과하는 액수의 조공을 바치겠다고 제의하였다. (왕둘 18:13, 14)
성서 기록에서는 파디 왕이—그가 정말로 히스기야의 포로였다면—그때 풀려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히스기야가 산헤립이 요구한 조공 은 300달란트(약 198만 2000달러)와 금 30달란트(약 1156만 달러)를 냈다는 점은 분명히 알려 준다. (왕둘 18:14-16왕둘 18:17-35)
아시리아의 사절단이 산헤립에게 돌아왔을 때, 그는 립나를 대적하여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에티오피아 왕 디르하가와 관련하여 ‘보십시오, 그가 당신과 싸우려고 나왔습니다’”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왕둘 19:8, 9)
여호와께서 산헤립의 군대를 무찌르시다
예루살렘과 관련하여 산헤립은 히스기야에게 유다의 수도를 점령하고자 하는 자기의 결의를 접은 것이 아니라고 경고하는 협박 편지를 보냈다. (사 37:9-20) 아시리아 사람들의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쳐 죽이고 산헤립이 “수치스러운 얼굴로 자기 땅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사 37:33-37; 대둘 32:21
산헤립의 비문들에서는 그의 군대에게 닥친 이 재난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잭 피니건 교수가 말한 것처럼, “아시리아 왕들의 비문들은 전반적으로 과시하는 조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흔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 산헤립이 그러한 패배에 대해 기록했을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고대로부터의 빛」 Light From the Ancient Past, 1959년, 213면) 하지만 산헤립이 이 사건에 대해 제시하는 설명을 유의해 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설명은 시카고 대학교 오리엔트 연구소에 보존되어 있는, 산헤립 각주 비문으로 알려진 것에 새겨져 있다. 산헤립이 한 말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유대인 히스기야는 나의 멍에에 굴복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의 견고한 도시 46개와 성벽이 있는 요새들과 그 인근의 무수한 작은 마을들을 포위 공격하였다. 잘 다져진 (흙) 경사로들과 (그렇게 해서) (성벽) 가까이 끌고 온 공성퇴들(과 더불어) 보병들이 공격을 하고, 갱도와 성벽의 갈라진 틈과 공병대의 작전을 (활용하여) (그곳들을) 정복하였다. 나는 (그곳들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20만 150명의 사람들과 말, 노새, 당나귀, 낙타, 크고 작은 가축들을 셀 수 없이 끌어냈고 (그것들을) 전리품으로 여겼다. 그 자신[히스기야]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내가 그의 왕도인 예루살렘에 갇히게 하였다. ··· 내가 약탈한 그의 성읍들은 그의 나라에서 떼어 내어 아스돗 왕 미틴티와 에그론 왕 파디와 가자 왕 실리벨에게 주었다. ··· 히스기야 자신은 ··· 나중에 나에게 나의 위엄 있는 도시 니네베로 금 30달란트, 은 800달란트, 보석, 휘안석, 큰 적석(赤石) 덩어리, 상아(로 상감 세공한) 침상, 상아(로 상감 세공한) 니메두 의자, 코끼리 가죽, 흑단, 회양목을 비롯한 온갖 값진 보물들과 함께 (자기의) 딸들과 후궁들과 남녀 악사들을 보냈다. 조공을 바치고 종으로서 경배하기 위해 그는 (자기의) 사자들을 보냈다.”—「고대 근동 문헌」, 288면.
자랑으로 가득 찬 이 설명에서는 보내온 은의 수량을 300달란트에서 800달란트로 부풀리고 있는데, 지불된 조공과 관련된 다른 세부 사항들도 틀림없이 그처럼 과장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다른 부면에서는 성서 기록을 놀랍게 확증해 주며,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점으로, 산헤립은 히스기야가 조공을 바친 일이 아시리아가 예루살렘에 대해 포위 공격의 위협을 가한 후에 있었던 것으로 묘사하는 데 반해, 성서 기록에서는 조공을 바친 일이 그 전에 있었다고 알려 준다. 그처럼 사건들의 순서가 뒤바뀌어 나오는 것에 대한 개연성 있는 이유에 관해 「펑크 앤드 왜그늘스 신 표준 성서 사전」(Funk and Wagnalls New Standard Bible Dictionary, 1936년, 829면)에서 한 이러한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산헤립이 벌인 이 원정의 결말은 베일에 가려져 있어 명확하지 않다. 그가 에그론을 함락시킨 후에 무엇을 하였는지는 ···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자기의 연대기에서 산헤립은 그가 히스기야를 처벌하고 유다 나라를 공격하고 유다의 영토와 도시들에 조처를 취한 시점이 이때라고 알려 준다. 사건들을 이러한 순서로 배열한 것은 그가 밝히고 싶지 않은 어떤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인 것 같다.” 성서 기록에 따르면, 산헤립은 하느님께서 그의 군대에 재난을 내리시자 서둘러 니네베로 돌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순서를 뒤바꿔 놓은 산헤립의 기록에서는 자기에게 편리할 대로, 히스기야가 특별히 사자를 보내 니네베에서 조공을 바쳤다고 말하는 것이다. 매우 의미심장한 점으로, 역사가들은 산헤립의 통치가 그 후로도 20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주장하는데도, 고대의 비문들과 기록들에는 산헤립이 또다시 팔레스타인 원정을 했다는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기원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그 사건에 대한 바빌로니아인 역사가 베로수스(기원전 3세기의 인물로 추정)의 기록으로부터 인용하였다고 주장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나케리모스는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랍사케스 휘하의 군대가 역병으로 인해 위기에 처해 있음을 보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그의 군대에 전염병을 가져오셔서, 포위 공격 첫날 밤에 18만 5000명의 병사가 지휘관들과 장교들과 함께 죽었던 것이다.” (「유대 고대사」 Jewish Antiquities, X, 21 [i, 5]) 일부 주석가들은 이 재난을 기원전 5세기에 헤로도토스(II, 141)가 기록한 내용과 연관시켜 설명하려고 하는데, 그 기록에서 헤로도토스는 “어느 날 밤, 엄청난 수의 들쥐들이 아시리아 진영으로 떼지어 몰려와 그들의 화살통과 활과 방패 손잡이를 먹어 치워 버렸”고, 그리하여 그들은 이집트 침공을 실행할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기록은 분명 성서 기록과 일치하지 않으며, 또한 아시리아의 이 원정에 대한 헤로도토스의 설명은 아시리아의 비문들의 내용과도 부합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베로수스와 헤로도토스의 기록은 산헤립의 군대가 이 원정에서 갑작스럽게 재난을 당하여 곤경에 빠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하지만 산헤립의 걱정거리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아시리아로 돌아온 후 바빌론에서 므로닥-발라단이 선동한 또 다른 반란을 평정해야 하였다. 산헤립은 이번에는 자기의 아들 아슈르나딘슈미를 바빌론 왕으로 앉혔다. 육 년 후에 산헤립은 엘람 사람들을 치기 위한 원정을 시작하였지만, 얼마 있지 않아 엘람 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함으로 그에 대해 보복하였다. 그들은 아슈르나딘슈미를 포로로 잡고 자기들의 왕을 바빌론의 왕좌에 앉혔다. 그 지역의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여러 해 동안 이어진 후 결국 격노한 산헤립은 바빌론을 초토화시킴으로 복수를 하였다. 바빌론이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거룩한 도시”의 지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것은 전례가 없는 행동이었다. 산헤립의 통치의 나머지 기간에는 큰 사건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산헤립은 예루살렘 원정이 있은 지 약 20년 후에 죽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숫자는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기록들에 근거한 것인데, 그러한 기록들이 신뢰할 만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어쨌든, 성서 기록에서는 산헤립이 니네베로 돌아간 즉시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나중에 그가 자기 신[니스록]의 집에 들어갔을 때에” 그의 아들들인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라트 땅으로 도망쳤다. (대둘 32:21; 사 37:37, 38Ancient Records of Assyria and Babylonia), D. 루컨빌, 1927년, 2권, 200, 201면. 에살-핫돈
건축 공사
그처럼 아시리아 제국은 산헤립의 통치 때 별달리 영토가 확장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수도의 위치로 회복시킨 니네베에서 야심 찬 건축 공사를 벌였다. 산헤립이 그곳에 세운 거대한 궁전은 홀과 뜰과 의전용 방들로 이루어진 복합 건물로서, 길이가 450미터에 폭이 210미터에 달하였다. 그는 고멜 강 위로 예르완 수로교로 알려진 고가 수로를 건설하여 48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물을 끌어 왔다. 그 물은 정원들과 공원들의 관개에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해자를 채워서 그 도시의 방어 기능을 강화하였다.
다윗의 길로 간 히스기야에게 시험이 찾아 왔다. 히스기야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신흥 강국인 앗수르의 산헤립은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주변 국가를 계속 침공했고, 식민지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유다를 공격했다. 1차 침공에서 패배한 히스기야가 자신들이 앗수르를 배반 한 것(7절)과 이번 공격에 저항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시인하고,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 줄테니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산헤립은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를 요구했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왕궁 곡간과 성전 곡간의 금은을 다 모아서 주었고, 부족하자 성전의 문과 기둥에 입힌 금까지 긁어모아서 줬다. 산헤립이 돌아갔다.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산헤립이 2차 공격을 해 왔다. 산헤립은 2차 공격에서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다르단, 랍사리스, 랍사게라는 장군을 내세웠다. 이 중에서 랍사게 장군은 심리전에 능한 사람이었다. 랍사게 장군 일행은 대군을 이끌고 ‘라기스’로부터 예루살렘까지 진격해 왔다. 유다의 군대는 앗수르를 대적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벽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히스기야 왕 측에서는 왕궁 책임자인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사관 요아가 지휘관으로 나섰다.
앗수르 군대의 랍사게 장군이 먼저 심리전에 나섰다. 랍사게는 앗수르 군대과 유다의 군대가 다 듣도록 일장 연설을 시작 했다. 랍사게는 유다 측 장군들을 지목하면서 말했다. “너희는 가서 히스기야 왕에게 전해라, 히스기야 왕이 누구를 믿고 앗수르를 반역했느냐? 히스기야가 믿고 있는 애굽(바로 왕)은 가시나무와 같다, 그것을 믿다가는 찔린다. 손해만 볼 것이다. 또, 너희가 믿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은 믿을 신이 못된다. 너희는 여호와를 믿고 전쟁에 나와서, 우리 중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장교 하나과 싸워서도 이길 수 없다. 내기를 하자, 단 한 명이라고 우리에게 말 타고 달려와서 싸워 이길 수 있는 병사가 있다면, 말 2천마리를 주겠다. 절대로 못할 것이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너희(유다)들이 믿는 여호와의 뜻을 따라서 온 것이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가 전(前)에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유다를 쳐서 멸하라 하셨다(거짓말, 조롱).”
랍사게의 말은 논리 정연하고, 설득력이 있었다. 양측의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싸우기 전에 벌써, 앗수르 군대의 사기는 올라가고, 유다 군대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심리전의 효과 였다. 유다 측 대표들이 랍사게에게 요청했다. “이런 일은 대표단 끼리 따로 만나서 대화를 통해 협상합니다. 그리고, 우리 측 군대들은 알아듣지 못하도록, 공식적인 국제 언어인 ‘아람어’로 말씀해 주십시오.”(당시 유다인들은 아람어를 대부분 알아 듣지 못했다)
랍사게가 말했다. “내 주 앗수르 왕이 히스기야 왕과 너희 대표단에게만 이 말을 전하라고 보낸 것이 아니다. 너희 왕과 대표단, 우리와 대치하고 있는 너희 모든 백성들에게 말하라고 보낸 것이다.” 랍사게는 오히려 더 크게 유다의 언어로 유다의 군대들에게 소리 질러 말했다.
“유다의 백성들이 나의 말을 들으라, 너희의 왕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너희가 믿는 여호와가 너희를 구원해 줄 수 없다. 히스기야의 말은 다 거짓이다. 너희는 우리 앗수르 왕의 말을 듣고 항복하라,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너희 동족(同族)인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너희들을 모두 더 좋은 곳으로 집단 이주 시킬 것이다. 그곳은 먹을 것이 풍부한 곳이다.
히스기야의 말은 거짓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지금까지 싸워 패배시킨 모든 민족들도 다 믿는 신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우리가 믿는 앗수르의 신에게 패배했다. 하맛, 아르밧, 스발와임, 헤나, 이와, 북 이스라엘(사마리아)의 신들이 다 어디 갔느냐? 다 패배했다. 너희가 믿는 신이 어찌 앗수르의 신을 이길 수 있겠는가? 너희의 초라한 군대가 어찌 우리 앗수르의 대군을 이길 수 있겠느냐? 대답해 보라.”
유다의 군대(백성)들은 잠잠했다. 이들의 마음속은 복잡해졌다. 크게 상처 받은 유다 측 대표단(장군)이 모든 사실을 히스기야 왕에게 보고 했다. 히스기야가 절망에 빠졌다. 전세(戰勢)가 완전히 불리해졌기 때문이다. 길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도움이다. 히스기야는 전장(戰場)에서 돌아온 대표단을 그대로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이 상황을 보고하고, 기도 응답을 받아 달라 부탁했다.
“랍사게가 그의 주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와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였으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말을 들으셨을지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들으신 말 때문에 꾸짖으실 듯하니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소서 하더이다 하니라”(4)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기도 부탁할 때의 내용을 주목해 봐야 한다. 밑줄 친 부분이다. 말라기 3:16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의 대화를 듣고 그 내용을 기념책에 기록한다고 하셨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랍사게와 유다 대표단 사이의 대화를 들으셨을 것이라고 믿었다. 히스기야는 이런 이해와 믿음을 바탕으로 이사야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사43:26 “나로 기억나게 하라”
이사야가 하나님께 기도했다. 응답이 왔다.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말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 바 나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라”(19:6-7).
앗수르가 다른 나라와 동시 다발적으로 전쟁을 했기 때문에 유다와의 전쟁이 잠시 동안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가 다시 불붙었다. 앗수르의 산헤립이 전(前)에 랍사게가 했던 말과 동일한 내용을 적어서 히스기야에게 보냈다. 일종의 선전포고문이다.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들고 성전에 들어갔다. 히기스야는 이 편지의 펼쳐 놓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앗수르 여러 왕이 과연 여러 민족과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고, 또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그들이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
적장 산헤립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입장에서 논리가 정연한 글을 썼지만, 유다 왕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입장에서 논리 정연한 기도를 드렸다. 히스기야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보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20).
하나님께서 이 전쟁은 나에게 속한 것이라 말씀하시고, 하늘의 군대를 이끌고 직접 개입하셨다. 이사야 선지자와 히스기야 왕이 중보 기도를 통해서, 이 전쟁에 하나님 나라가 개입할 수 있도록 동역자의 역할을 잘해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결국 쥐때로 인해 폐주가 된 산헤립은 그의 아들들인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에게 칼로 죽임당했다. 이사야서에도 같은 기록이 나오고 거기에는 그들이 산헤립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일이 일어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한 산헤립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그가 소문을 듣고 본국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칼에 죽게 하리라고 예언케 하신 선지지 이사야의 말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출처] 산헤립|작성자 daily message/ [출처] https://wol.jw.org/ko/wol/d/r8/lp-k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