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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 애민(愛民) 제6조 구재(救災)〔3〕

작성자씨알|작성시간26.06.05|조회수31 목록 댓글 0

목민심서 애민(愛民) 제6조 구재(救災)

3. 환란이 있을 것을 생각하고 예방하는 것은 또한 재앙을 당한 뒤에 은혜를 베푸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

불을 끄느라 머리를 그슬리고 이마를 데는 수고가 미리 굴뚝을 돌리고 땔감을 불 가까이에서 치워버리는 것만 못하다. 산골에 있는 민가로서 지대가 낮아서 물에 가까운 것은 평상시에 옮아가도록 경계해야 한다. 만일 이미 큰 마을이 형성되어 이동할 수 없는 경우에는 여름철에 배를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한다. 또 무릇 큰 마을에는 못을 파서 물을 저장하도록 하거나 혹 물통에 물을 저장하도록 해야 한다. 또 불을 끄는 방법으로는 초석(草席)이나 거적〔苫席〕 - 속명으로는 망석(網席) - 을 물에 적시어 덮기도 한다. - 물에 적신 물건으로 불을 끄는 것은 《춘추전(春秋傳)》에 보인다. - 지붕을 쳐다보고 물을 끼얹는 따위는 헛수고요, 아무런 보람도 없을 것이다. 평양(平壤)이나 전주(全州) 같은 교통이 좋은 읍이나 큰 도시에서는 수총(水銃) 10여 구(具)를 준비해 두어야 할 것이다.

염범(廉范)(주1)이 촉군 태수(蜀郡太守)로 있을 때였다. 그보다 앞서 촉군에 화재가 있어서 사람들에게 밤에 일하는 것을 금하여 화재를 방지하였다. 염범은 이에 엄중히 물만 저장할 뿐이었다. 백성들이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염숙도(廉叔度)가 오기를 어찌 그리 늦었는고 / 廉叔度來何暮

불을 금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일을 편안히 하네 / 不禁火民安作

전에는 저고리도 없더니 이제는 바지가 다섯 벌이로다 / 昔無襦今五袴

문간공(文簡公) 정림(程琳)(주2)이 익주 지주(益州知州)가 되었는데, 정월에 등불을 걸어 놓고 아전과 백성들이 모여 놀았다. 정림은 먼저 아전들에게 화재에 대한 방비를 해 놓게 하였다. 실화한 자가 있더라도 쫓아가서 끄게 하고 보고하여 대중을 움직이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이윽고 오문(五門)에서 큰 잔치를 베풀 제 성중에 불이 났는데, 아전들이 불을 끄니, 연회가 끝날 때까지 백성들은 모두 모르고 있었다.

당(唐)나라 왕중서(王仲舒)(주3)가 소주 자사(蘇州刺史)로 있을 때에 송강(松江)(주4)에 둑을 쌓아 길을 만들고 기와집으로 고치게 하여 화재를 막으며, 부세(賦稅)는 항상 백성들과 기한을 정하니 백성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홍처후(洪處厚)(주5)가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되었는데, 민가가 모두 초가집이기 때문에 자주 화재가 있었다. 그는 당나라 위단(韋丹)의 고사(주6)를 써서 백성들을 지도하니, 이로부터 백성들은 대부분 기와집을 짓고 읍에는 화재의 근심이 없어졌다. - 위단의 일은 공전(工典)에 보인다. -

후한(後漢) 때, 임문공(任文公)(주7)이 큰 홍수가 있을 것을 알고 큰 배를 만들어 두었더니, 과연 그 시기에 큰비가 내려 10여 길이나 물이 솟구쳐서 집들이 떠내려가기도 하고 파괴되기도 하였다.

송(宋)나라 진양기(陳良器)(주8)가 홍주 지주(洪州知州)로 있을 적에 홍수로 성이 무너지지 않은 곳이 열 다섯 군데였다. 성에 뚫린 구멍으로 물이 들어오니, 온 성안이 놀라고 소요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공은 미리 섶과 짚을 준비해 두었다가 하루가 지나기 전에 뚫어진 구멍을 막아버리니, 고을 사람들이 그의 덕을 칭송하여 말하기를,

“진공(陳公)이 없었던들 우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였다.

이명준(李命俊)(주9)이 서원 현감(西原縣監)으로 있을 적에, 읍치(邑治)가 큰 시내와 가까워 본래 수재의 걱정이 있었다. 어느 날 저녁에 물새들이 관정(官庭)에 모여들므로 공은 말하기를,

“이는 물이 들 징조이다.”

하고, 아전들과 백성들에게 경계하여 수재에 대비하도록 하였더니, 백성들은 미리 준비한 덕택에 온전히 살아나게 되었다.

[역주]

[주-D001] 염범(廉范) : 후한(後漢) 때 두릉(杜陵) 사람으로 자는 숙도(叔度)이다. 명제(明帝) 때에 여러 관직을 거쳐 뒤에 운중 태수(雲中太守)ㆍ촉군 태수(蜀郡太守) 등을 역임하면서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後漢書 卷31 廉范列傳》

[주-D002] 정림(程琳) : 송나라 박야(博野) 사람으로 자는 천구(天球),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익주 지주(益州知州) 등 여러 지방관을 역임하여 많은 치적을 올렸고, 인종(仁宗) 때에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ㆍ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宋史 卷288 程琳列傳》

[주-D003] 왕중서(王仲舒) : 당(唐)나라 병주(幷州) 사람으로 자는 홍중(弘中), 시호는 성(成)이다. 헌종(憲宗) 때 소주 자사(蘇州刺史) 등 여러 지방관을 지내고, 목종(穆宗) 때에 벼슬이 중서사인(中書舍人)ㆍ강서 관찰사(江西觀察使)에 이르렀다. 《新唐書 卷161 王仲舒列傳》

[주-D004] 송강(松江) : 강 이름. 태호(太湖)의 지류(支流)로 곧 지금의 오송강(吳淞江)인데, 옛날에는 입택(笠澤)이라고도 하였다.

[주-D005] 홍처후(洪處厚) : 1599~1673. 조선 문신. 자는 덕재(德載), 호는 성암(醒菴), 시호는 충장(忠莊),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인조 때에 여러 청환직을 거쳐 의주 부윤(義州府尹) 등을 역임하고, 효종 때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다.

[주-D006] 위단(韋丹)의 고사 : 위단은 당(唐)나라 만년(萬年) 사람으로 자는 문명(文明)이다. 헌종(憲宗) 때에 용주 자사(容州刺史) 등 여러 지방관을 역임하고, 특히 강남서도 관찰사(江南西道觀察使)로 있을 때는, 그 지방 백성들이 아직 기와집을 지을 줄 모른 탓으로 초가집들의 화재 위험이 많자, 위단이 기와 굽는 기술자를 불러다 기와를 구워서 백성들의 집을 기와집으로 개조시켜 화재를 예방하였다. 《新唐書 卷197 韋丹列傳》

[주-D007] 임문공(任文公) : 후한(後漢) 낭중(閬中) 사람으로 아버지 문손(文孫)에게서 천관풍성학(天官風星學)을 전수받아 방술(方術)에 뛰어났다. 애제(哀帝) 때에 사공연(司空掾)을 지냈다. 《後漢書 卷82 任文公列傳》

[주-D008] 진양기(陳良器) : 미상이다.

[주-D009] 이명준(李命俊) : 1572~1630. 조선 인조 때의 문신으로 자는 창기(昌期), 호는 잠와(潜窩),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일찍이 서원 현감(西原縣監 서원은 청주(淸州)의 옛 이름임) 등 여러 내외직을 역임하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성품이 강직하기로 유명했다.

思患而預防。又愈於旣災而施恩。

焦頭爛額。不如曲突徙薪。峽中民家。地卑水近者。宜於平日。戒其遷徙。若已成大村。不可移動者。宜於夏月。預備舟船。又凡大村。宜飭鑿沼貯水。或置甕貯水。又凡救火之法。以草席苫席。俗名曰網席。 濡水以覆之。濡物救火。見春秋傳。 若仰屋潑水。徒勞無益也。通邑大都。如平壤全州者。宜備水銃十餘具。

廉范爲蜀郡太守。先是。蜀郡有火災。禁人夜作以防災。范乃嚴儲水而已。歌曰。廉叔度來何暮。不禁火民安作。昔無襦今五袴。

程文簡琳守益州。正月放燈。吏民聚游。公先戒吏爲火備。有失火者。使隨救之。勿白以動衆。旣而大宴五門。城中火。吏救止。卒宴。民皆不知。

唐王仲舒爲蘇州。堤松江爲路。變瓦屋。絶火災。賦調常與民爲期。民不爲擾。

洪處厚爲義州府尹。民俗皆茅屋。數有火患。公用唐韋丹故事以導民。自是民多瓦屋。而邑無火憂。韋丹事。見工典。

後漢任文公。知有大水。自貯大舟。至期果大雨。水湧十餘丈。漂壞廬舍。

宋陳良器知洪州大水。城之不滅者十五。水得城竇以入。擧城惶擾。不知所爲。公預具薪藁。不終日以塞。州人德之曰。無陳公。吾屬如何矣。

李命俊爲西原縣監。邑治近大溪。素有水患。一夕水鳥來集官庭。公曰。此水祥也。戒吏民爲水備。未幾水大至入城。漂廬舍。民賴有備。得以全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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