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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 애민(愛民) 제6조 구재(救災)〔6〕

작성자씨알|작성시간26.06.11|조회수24 목록 댓글 0

목민심서 애민(愛民) 제6조 구재(救災)

6. 황충(蝗蟲)이 하늘을 뒤덮을 때 물러가도록 빌기도 하고 잡아 죽이고 하여 백성들의 재해를 덜어 주면, 인애(仁愛)하다는 명성을 듣게 될 것이다.

마원(馬援)(주1)이 무릉 태수(武陵太守)로 있을 적에, 군내에 황충이 떼가 연달아 생겼다. 마원이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고 부세(賦稅)의 징수를 가볍게 해 주니, 황충이 떼들이 바다로 들어가서 새우가 되었다.

《비아(埤雅)(주2)》를 상고하면 다음과 같다.

“황(蝗)은 곧 어란(魚卵)에서 부화한 것이니, 속담에 춘어(春魚)라 한다. 알을 좁쌀같이 슬어 진흙 속에 묻어 두었다가 이듬해에 물이 그곳까지 이르면 모두 부화하여 물고기가 되지만, 만약 가뭄을 만나 물이 줄어 그곳까지 이르지 않으면 그 알이 오랫동안 껍데기 속에 있으면서 햇볕을 쬐게 되어, 이에 비황(飛蝗)이 생기거나 혹은 새우가 된다.”

양(梁)나라 소수(蕭修)(주3)가 진주 자사(秦州刺史)로 있을 적에 군내에 황충이 있었다. 소수가 전지에 나아가서 깊이 스스로를 책망하였더니, 문득 수천 마리 새가 날아와서 황충을 거의 다 쪼아 먹어버렸다.

살피건대, 원나라 성종(成宗) 때 황충(蝗蟲)이 곡식을 갉아 먹으므로, 성종이 제사를 지냈더니 홀연히 두루미 떼가 날아와서 땅에 있는 황충은 쪼아 먹고 나는 놈은 날개로 쳐죽여서 황충이 전멸하였다 한다. 이 또한 괴상한 말인 것이다.

송나라 조변(趙抃)(주4)이 청주 지주(靑州知州)로 있을 때, 산동(山東) 지방에 가뭄이 들고 황충이 있었는데, 청제(靑齊)로부터 경내로 들어오려던 차에 우연히 큰 바람을 만나 이에 뒤로 날아가 물속에 떨어져 죽었다.

살피건대, 역사에서는 노공(魯恭)(주5)이 중모령(中牟令)이 되자 황충이 경내로 들어오지 못했다 하고, 송균(宋均)(주6)이 구강 태수(九江太守)로 있을 적에, 산양(山陽)ㆍ초패(楚沛)에 황충이 많았는데, 구강에 이르러서는 문득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하며, 탁무(卓茂)(주7)가 밀령(密令)이 되고, 구양현(歐陽玄)(주8)이 무호령(蕪湖令)이 되었을 때, 황충이 모두 경내로 들어오지 못하고, 왕황(王況)(주9)이 진류 태수(陳留太守)로 있을 때 황충이 높이 날아가 버렸다고 하니, 이런 말들은 모두 허망한 것이므로 꼭 그렇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송나라 미원장(米元章)(주10)이 옹구지현(雍丘知縣)으로 있을 때였다. 황충이 크게 일어나서 백성들이 이를 걱정하였다. 이웃 고을의 위사(尉司)(주11)는 잡아 묻었는데 그 뒤에도 종전대로 만연하니, 보정(保正)(주12)에게 책임을 지우고 힘을 합해 잡아 없애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모두 옹구(雍丘) 지방에서 몰아내어 이 고을에 날아왔기 때문이다.”

하였다.

위사(尉司)는 공문으로 보정(保正)의 말을 적어서 옹구현에 통첩하되, 각자가 서로 황충을 두들겨 잡아 제 고장에 다 묻어버리고, 이웃 고을을 구렁으로 삼아 몰아내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 청하였다. 때마침 미원장이 바야흐로 손님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다가 통첩을 보고 껄껄 웃으며 붓을 들어 그 뒤에다 기록하기를,

황충은 본래 공중을 나는 물건인데 / 蝗蟲原是飛空物

하늘이 보내어 백성의 재앙 되게 하였구나 / 天遣來爲百姓災

우리 고을에서 내쫓을 수가 있다면 / 本縣若能驅得去

귀관에서는 왜 두들겨서 돌려보내지 못하오 / 貴司何不打回來

하니, 전해 들은 자가 포복절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진유학(陳幼學)(주13)이 중모지현(中牟知縣)으로 있을 때였다. 가을 추수가 무르익었을 때 황충이 하늘을 뒤덮었다. 진유학이 황충을 잡아 1300여 석이 되었는데, 이에 재앙이 되지 않았다.

살피건대, 한(漢)나라 평제(平帝) 때 사자(使者)를 시켜 황충을 잡게 하되, 황충을 잡아 관청에 가져오는 자는 섬과 말로 헤아려 돈을 받았다고 하며, 당(唐)나라 개원(開元) 때에는 요숭(姚崇)(주14)이 포황사(捕蝗使)를 파견할 것을 상주하여 구역을 나누어 가서 황충을 죽였고, 석진(石晉)(주15)의 천복(天福) - 고조(高祖)의 연호. 936~943 - 연간에 백성을 모집하여 황충을 잡게 한 후 식량과 바꾸어 주었다 하니, 황충을 잡는 것이 황충의 재해를 구해 내는 요법(要法)이다.

신라 때, 김암(金巖)(주16)이 패강진 두상(浿江鎭頭上)으로 있을 때였다. 한번은 황충이 떼가 서쪽으로부터 패강(浿江)의 경계로 들어와 들을 덮으니 백성들이 두려워하였다. 김암이 산꼭대기에 올라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하니, 홀연히 바람과 비가 크게 일어나 황충이 모두 죽었다.

살피건대, 우리나라에는 본래 황충의 재해가 없다. 내 나이 60이 되었지만 아직 황충을 보지 못했는데, 신라 때는 황충이 있었던 것이다.

[역주]

[주-D001] 마원(馬援) : 후한(後漢) 무릉(茂陵) 사람으로 자는 문연(文淵),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여러 내외직을 역임하고, 광무제(光武帝) 때에 복파장군(伏波將軍)이 되어 교지(交阯)를 정벌하여 평정했다. 신식후(新息侯)에 봉해졌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주-D002] 비아(埤雅) : 서명(書名)이다. 20권. 송나라 육전(陸佃)이 찬한 것으로, 석어(釋魚)ㆍ석수(釋獸)ㆍ석조(釋鳥)ㆍ석충(釋蟲)ㆍ석마(釋馬)ㆍ석목(釋木)ㆍ석초(釋草)ㆍ석천(釋天)의 8편(八篇)으로 되어 있다.

[주-D003] 소수(蕭修) : 양(梁)나라 사람으로 자는 세화(世和)이고, 의풍후(宜豐侯)에 봉해졌다. 양주(梁州)ㆍ진주(秦州)의 자사(刺史) 등 여러 내외직을 역임하고, 경제(敬帝) 때 태보(太保)에 이르렀다. 지극한 효자였다. 《南史 卷52 梁宗室下》 《梁書 卷22》

[주-D004] 조변(趙抃) : 송나라 구주(衢州) 서안(西安) 사람으로 이름은 변(抃), 자는 열도(閱道), 호는 지비자(知非子), 청헌(淸獻)은 그의 시호이다. 진사에 급제한 후, 인종(仁宗)ㆍ신종(神宗) 대에 걸쳐 여러 내외 요직을 역임하고, 태자소보(太子少保)에 이르렀다. 강직하기로 유명하였고, 특히 여러 지방의 지주(知州)를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올렸다. 그의 전찬(傳贊)에 의하면 그는 자기 형제들의 딸 10여 명과 다른 처녀 20여 명을 시집보내 주었다고 하였다. 저서에는 《조청헌집(趙淸獻集)》이 있다. 《宋史 卷315 趙抃列傳》

[주-D005] 노공(魯恭) : 후한(後漢) 때 평릉(平陵) 사람으로 자는 중강(仲康)이다. 일찍이 중모령(中牟令)으로 있으면서 크게 덕정(德政)을 베풀었고, 뒤에 사도(司徒)에 이르렀다. 《後漢書 卷25 魯恭列傳》

[주-D006] 송균(宋均) : 후한 때 안중(安衆) 사람으로 자는 숙상(叔庠)이다. 광무제(光武帝) 때에 구강 태수(九江太守)로 있으면서 호환(虎患)을 없애는 등 많은 치적을 올렸다. 《後漢書 卷41 宋均列傳》

[주-D007] 탁무(卓茂) : 후한 때 남양(南陽) 사람으로 자는 자강(子康)이다. 밀령(密令) 등 여러 지방관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이름이 높았고, 광무제 때 태부(太傅)에 이르고 포덕후(褒德侯)에 봉해졌다. 성품이 남달리 너그럽고 인자하였다. 《後漢書 卷25 卓茂列傳》

[주-D008] 구양현(歐陽玄) : 원(元)나라 길주(吉州) 사람으로 자는 원공(原功), 호는 규재(圭齋), 시호는 문(文)이다. 경사백가(經史百家)에 정통한 학자로, 인종(仁宗) 연간에 무호 현령(蕪湖縣令) 등 여러 관직을 거쳐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에 이르렀다. 저서에 《규재문집(圭齋文集)》이 있다. 《元史 卷182 歐陽玄列傳》

[주-D009] 왕황(王況) : 후한 때 사람으로 자는 문백(文伯)이다. 명제(明帝) 때에 진류 태수(陳留太守)가 되어 덕정(德政)을 베풀었다.

[주-D010] 미원장(米元章) : 송나라 오(吳) 땅 사람으로 이름은 불(芾), 호는 해악외사(海嶽外史), 원장(元章)은 그의 자이다. 일찍이 옹구지현(雍丘知縣)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에 이르렀다. 서화(書畵)에 모두 뛰어났는데, 특히 명필(名筆)로 유명하다. 《宋史 卷444 米芾列傳》

[주-D011] 위사(尉司) : 도둑을 잡고 옥사를 다스리는 지방 관리.

[주-D012] 보정(保正) : 송나라 왕안석(王安石)이 창안한 지방자치제도의 하나로, 십가(十家)를 1보(保)라 하고 1보의 책임자를 ‘보정’ 또는 보장(保長) 등으로 불렀다.

[주-D013] 진유학(陳幼學) : 명(明)나라 무석(無錫) 사람으로 자는 지행(志行)이다. 신종(神宗) 때 확산지현(確山知縣)ㆍ중모지현(中牟知縣) 등을 지내면서 선정으로 이름이 높았고, 뒤에 안찰부사(按察副使)를 지냈다. 《明史 卷281 陳幼學列傳》

[주-D014] 요숭(姚崇) : 당(唐)나라 협석(硤石) 사람으로 자는 원지(元之),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현종(玄宗) 때 재상(宰相)에 이르고, 양국공(梁國公)에 봉해졌다. 《新唐書 卷124 姚崇列傳》

[주-D015] 석진(石晉) : 오대(五代) 시대 후진(後晉)의 별칭. 석경당(石敬塘)이 후당(後唐)을 멸하고 세운 나라이므로 이렇게 일컫는다.

[주-D016] 김암(金巖) : 신라 혜공왕(惠恭王) 때의 학자. 김유신(金庾信)의 후손으로 당나라에 가서 둔갑법(遁甲法)을 배우고 돌아와 사천대박사(司天大博士)가 되었고, 이어 여러 지방의 태수(太守)와 패강진 두상(浿江鎭頭上) 등을 역임하였다.

飛蝗蔽天。禳之捕之。以省民災。亦可謂仁聞矣。

馬援爲武陵太守。郡連有蝗。援賑貧羸。薄稅斂。蝗飛入海。化爲魚鰕。

〇案埤雅蝗。卽魚卵所化。俗云。春魚遺子如粟。埋于泥中。明年水及故岸。則皆化而爲魚。如遇旱乾。水縮不及故岸。則其子久閣。爲日所暴。乃生飛蝗。或以爲鰕子。

梁蕭修爲秦州刺史。郡有蝗。修詣田所。深自咎責。忽有飛鳥千群。食蝗殆盡。

〇案元成宗時。蝗蟲食苗。成宗祭之。忽有鶖鳥群至。蝗在地者。啄之。飛者。以翼格殺之。蝗盡滅。亦弔譎之言。

宋趙抃守靑州時。山東旱有蝗。自靑齊將及境。偶遇大風。乃退飛墮水而死。

〇案史稱魯恭爲中牟令。蝗不入境。宋均爲九江守。山陽楚沛多蝗。至九江。輒四散。卓茂爲密令。歐陽玄爲蕪湖令。蝗皆不入境。王況爲陳留太守。蝗高飛去。斯皆杳茫之言。不可以取必也。

宋米元章爲雍丘令。蝗大起。百姓憂之。隣縣尉司禁瘞。後仍舊滋蔓。責令保正。倂力捕除。或言盡緣雍丘驅逐過此。尉司移文。載保正之語。牒雍丘縣。請各行打撲。收埋本處。勿以隣國爲壑。時元章方與客飮。視牒大笑。取筆書其後云。蝗蟲原是飛空物。天遣來爲百姓災。本縣若能驅得去。貴司何不打回來。傳者。無不絶倒。

陳幼學知中牟縣。秋成時。飛蝗蔽天。幼學捕蝗。得千三百餘石。乃不爲災。

〇案漢平帝時。詔使者捕蝗。人能捕蝗詣吏者。以石斗受錢。唐開元時。姚崇奏遣捕蝗使。分道殺蝗。石晉天福間。募民捕蝗。易以粟。捕蝗者。救蝗之要法也。

新羅金巖爲浿江鎭頭上。嘗有蝗。自西入浿江之界蔽野。百姓懼。巖登山頂。焚香祈天。忽風雨大作。蝗盡死。

〇按吾東本無蝗災。余生六十年。未見蝗蟲。而新羅之時。乃有此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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