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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색[思 索]

【청성잡기(靑城雜記)】제3권 / 성언(醒言) 34. 〔작은 무례로 큰 화를 입다〕

작성자씨알|작성시간26.06.18|조회수18 목록 댓글 0

                    작은 무례로 큰 화를 입다.

 

송구봉(宋龜峯)이 아계(鵝溪) 이 정승과 친하였으며 젊었을 때 함께 8문장가로 이름이 났다. 그래서 이 정승이 장상(將相)을 모두 겸하였으나 구봉은 자기와 동등한 사람으로 여겨 편지를 보낼 때마다 그의 자(字)를 칭하여 ‘여수(汝受)는 받아 보시오.’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비웃었으나 이 정승은 거스르게 여기지 않다가 끝내는 여지시(荔枝詩)에 노발대발하여 구봉을 가차 없이 모함하였다. 시를 지어 비방함은 진실로 노여움을 살 만하다. 그러나 서식의 무례함이 빌미가 되지 않았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나침(羅沈)은 나양좌(羅良佐)의 서자이다. 조 풍원(趙豊原)이 그의 재주를 높이 사서 사표(師表)로 대하여, 나침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반드시 향을 피우고 보았다. 그런데 나침도 그의 대우를 믿고 서식을 매우 소홀히 하여 편지 끝에 ‘침이 절하고 올립니다.’라고 쓰지 않고, ‘침이 머리 조아립니다.’라고 썼다. 조 풍원의 관직이 재상의 반열에 올라도 나침은 여전히 편지에서 존경을 표하지 않았다. 조 풍원은 이것을 불만스럽게 여겨 친한 사람에게 말하였는데, 나침은 알지 못하고 더욱더 무람없이 하였다.

당시에 조징(趙

)이란 자가 매우 방자하여 망언을 잘 하였다. 그가 일찍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풍원을 욕하였는데, 나침이 이것을 듣고는 풍원에게 고자질하였다. 풍원은 조징에게 불만이 있었으나 아직 드러내지 않고 있었는데, 나침의 말을 듣고는 이것을 증거로 하여 성상께 아뢰었다. 그 결과 조징은 고문당하여 죽고, 나침 역시 멀리 귀양 갔다가 끝내 윤지(尹志)의 옥사에 죽었다. 조 풍원은 속이 좁아 남에게 화를 입혔으니, 진실로 자손에게 재앙이 미칠 만하며, 천한 신분으로 재주를 믿고 뽐내는 자도 나침을 거울삼아야 한다.

문연(文淵 : 마원 〈馬援〉)은 양송(梁松)의 아버지의 친구였는데 양송에게 화를 당하였고, 자미(子美 : 두보〈杜甫〉)는 엄무(嚴武)의 늙은 식객(食客)이었는데 엄무에게 화를 받았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서자가 어찌 자신의 재주를 믿고 교만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하면 작게는 비방을 초래하고 크게는 참형에 걸리게 되니, 이는 모두 스스로 취한 것이다. 어쩌면 모두가 이토록 어리석은가. 어떤 이는 문장과 학식이 송운장(宋雲長 : 송익필)의 일푼이나 반푼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스스로를 끌어올려 비교하니, 또한 슬퍼할 만하다 하겠다.

 

[주-C001] 성언(醒言) : 사람을 깨우치는 말이란 뜻으로, 총 3권에 인물평 및 일화, 사론(史論), 필기(筆記), 한문단편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다.

[주-D001] 송구봉(宋龜峯) : 구봉은 송익필(宋翼弼 : 1534~1599)의 호이다.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운장(雲長)이다. 모든 방면에 뛰어나 자신의 학문과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였던 송익필은 아무리 고관ㆍ귀족이라도 한 번 친구로 사귀면 자(字)로 부르고 관(官)으로 부르지 않았는데, 이러한 태도가 그의 미천한 신분과 함께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주-D002] 아계(鵝溪) : 이산해(李山海 : 1539 ~ 1609)의 호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이다. 숙부 이지함(李之菡)에게 수학하였으며, 문과에 급제하였다. 동인(東人)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뉜 뒤에는 북인의 영수가 되어 정권을 장악하여 영의정에 올랐다.

[주-D003] 8문장가 : 송익필을 비롯한 선조(宣祖) 대의 뛰어난 여덟 문장가 이산해(李山海),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최립(崔岦), 이순인(李純仁), 윤탁연(尹卓然), 하응림(河應臨)을 말한다.

[주-D004] 여지시(荔枝詩) : 《구봉집(龜峯集)》 권1에 ‘무제 이수(無題二首)’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첫째 수는 “늘어선 버들 여인의 처소를 가리고, 화장 마친 두 눈썹 초승달 같네. 친히 예쁜 꽃 꺾어 외부에서 온 손님을 희롱하고는, 부끄러운 체하며 돌아와 수정발을 내리네.〔一行垂柳掩紅簷 畫罷雙眉月樣纖 自折嬌花調外客 佯羞還下水晶簾〕” 하고, 둘째 수는 “여지는 강남의 풀로 전락하고, 연리지는 무정하게 꿈속에서나 말하게 되었네. 남자 몇 명이 총애를 독점하니, 비단 휘장엔 원혼만 서렸구려.〔荔枝一箇江南草 連理無情半夜言 男子幾人還固寵 香羅巾下有冤魂〕” 하였다.

[주-D005] 나양좌(羅良佐) : 1638 ~ 1710. 본관은 안정(安定), 자는 현도(顯道), 호는 명촌(明村)이며, 윤선거(尹宣擧)의 문인이다.

[주-D006] 조 풍원(趙豊原) : 풍원은 조현명(趙顯命 : 1690 ~ 1752)의 봉호이다.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ㆍ녹옹(鹿翁)이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발생하자,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종군하였으며, 난이 진압된 뒤 그 공으로 분무 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 풍원군(豊原君)에 책봉되었다.

[주-D007] 윤지(尹志) : 1688 ~ 1755.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자는 사심(士心)으로, 나주괘서(羅州掛書) 사건의 주모자이다. 1724년(영조 즉위년) 김일경(金一鏡) 옥사에 연좌되어 아버지 윤취상(尹就商)은 고문 끝에 죽고, 그는 이듬해 6월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안치되었다. 제주와 나주에서 30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였지만 김일경 일파로 낙인이 찍혀 등용될 가망이 없었으므로 늘 조정에 불만을 품어 왔다. 1755년 1월 노론을 지목하여 나주 객사의 벽에 나라를 비방하는 괘서를 써 붙여 을해옥사(乙亥獄事)를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서울로 압송되고 친국 끝에 그해 2월 아들 광철(光哲) 등 관련자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주-D008] 문연(文淵)은 …… 당하였고 : 마원이 일찍이 병들어 눕자 양송(梁松)이 문병 와서 침상 아래에서 절하였으나, 마원은 답례하지 않았다. 양송이 돌아간 후 자제들이 “양송은 부마로 조정에서 귀중하게 여겨 공경(公卿) 이하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은 이가 없는데, 아버지께서 어찌하여 홀로 예우하지 않으십니까?” 하자, 마원은 대답하기를 “나는 바로 양송의 아버지 친구이다. 그가 신분이 귀하지만 어찌 그 순서를 따지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였다. 양송은 이 일로 원한을 품었다. 마원이 죽은 후에도 양송은 원한이 풀리지 않아 마원을 모함하여 상주하니, 임금은 크게 노하여 마원에게 내려 준 신식후(新息侯)의 관작을 거두어들였다. 《後漢書 卷54 馬援列傳》

[주-D009] 자미(子美)는 …… 받았다 : 엄무(嚴武)는 두보와 옛날부터 친분을 맺어온 관계로 벼슬자리에 천거하는 등 잘 대해 주었으나, 오만방자한 성품의 두보가 자신을 함부로 대하자 죽이려고 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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