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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서정

만주 순례이야기

작성자씨알|작성시간26.06.20|조회수70 목록 댓글 0

송년홍신부 순례이야기

준비를 매우 탄탄하게 잘하는 양운기수사의 중국순례는 그 의미가 크다. 장현근선생의 중국순례도 마찬가지다. 일상적인 여행의 패키지와는 완전히 차별화돼 있고, 테마적인 순례의 차원으로도 격조높다. 그래서일까. 모집하는 평화순례는 순식간에 마감된다. 몇 년 전 문정현신부/문규현신부 등과 함께 만주순례를 했다. 양운기수사의 기획으로. 매우 알차게 구성된 만주순례에서 안중근의사의 유해를 이제는 찾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문정현신부가 진지하게 찾을 방법을 모색하면 좋겠다고 한다. 그리해서 해마다 한 번씩은 만주순례를 기획하고, 해설사도 좀 더 특화된 이를 겨우 찾았다. 더디 가지만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 해마다의 순례는 묘하게 이런 순례와 저런 순례가 연결이 돼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다음 해는 이병호주교와 그룹이, 다음 해는 안철문신부와 그룹이, 이를 잇고 있어 명맥을 유지한다. 하지만 해마다 고민이던 차, 한 본당에서 만주순례를 계획했다가 일본순례로 돌리면서 '올해는 또 버겁게 기획해야 되는가' 싶을 무렵, 송년홍신부에게서 연락이 왔다. '만주로 가기로 했다'고. 청소년들과 함께 하니 의미도 크다. 양운기수사도 장현근선생도 기획과 교육에 도움을 줄 듯하고, 윤영석선생도 안내와 해설을 할 듯하다. 무산될 뻔한 것이 명품순례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번에는 특별히 간도에서 있었던 경신참변을 계속해서 추적했던 나의 연구도 곁들여지고, 몇 년 동안 다가갔던 안중근의사와 김대건신부의 발자취에도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것이니 의미가 크다. 백두산도 아이들을 반길 것이고. 소설 "청초당"도 살을 더한 얘기꽃을 피울 것이다. 해마다 청소년들에게는 아낌없이 투자하며 의식을 가다듬는 송년홍신부로서도 오랜 경험이 축적된 프로들과의 만남 안에서 속속들이 살펴볼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부러우면 진다.' 우리는 주변에 비해 조그마한 한반도에 머무르고 있지만, 모든 면에서 그리고 특별히 문화 면에서 빼어나고 수려해서 결코 무언가를 부러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급성장한 중국에 살짝 부러운 하나가 삐죽 고개를 내민다. 침화일군난징대도살우난동포기념관[侵华日军南京大屠杀遇难同胞纪念馆]은 침략의 일본도 명시하면서 난을 맞닥뜨린 동포들의 도살[학살/살육]을 곱씹으며 기억하는 장임을 분명히 한다. 어리고 젊었던 아이리스장이 집요하게 추적해서 얻은 결과이기도 하다. 삼십만명의 학살[MasSacre]은 그녀의 삶마저도 젊은 죽음으로 몰아갔지만, 그녀 덕분에 조명된 회상[AnaMNesis]은 넋과 얼과 영과 혼과 백을 위로한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 아이리스[붓꽃]처럼 보라 물결은 그윽하게 그녀를 또한 떠올린다. 사진, 자료, 조각 등은 퍼즐처럼 조합되고, 수십 곳의 학살장소에서 가져온 소나무, 돌멩이 등도 침묵으로 소리친다. 바람이 일면 그 소리 또한 커진다. 일본제국주의의 발상은 만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만주사변 그리고 앞선 경신참변. 안중근의사의 효시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로 이어지고, 독립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만주 북간도에 살던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삼천여명에 달하는데, 그 중 절반 가량이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말한다. 노루바위[獐巖洞]와 기댈숲속[依林溝]에 살던 이들이 그러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박해를 피해 전라도 심산궁곡에 숨어살던 천주교인들이 종교자유와 함께 초남이와 나바위로 나왔으나, 이어지는 일제 농장지주들의 간척과 소작은 빚더미에 안게 했다. 더러는 꾀임으로 일본에 징용을 더러는 스스로가 만주로 피신을 가 신앙을 이어갔다. 그리고 벌어진 학살. 역사는 덮었다. 하지만 그 먼 후손들이 간다. 일부는 고사리손으로. 그들은 아이리스장보다 더 멋지게 밝힐 것이다. 그러니 이제 무엇이 부럽겠는가.

서울 여의도에 가면 청초당[靑草塘]이라는 정장가게가 있다. 그리고 바늘 하나가 로고라면 로고다. 아마 주인은 안중근의사와 관계가 있던지, 안중근의사를 흠모를 하던지 한 모양이다. 하얼빈의 항일영웅 이조린을 기리는 자오린공원[兆麟公園]에 있는 '청초당[靑草塘]' 비석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여동생인 안성녀[루시아]가 제부[弟夫]와 함께 이미 하얼빈에서 양장점을 차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혹여 그 양장점 이름이 청초당[靑草塘]은 아닌지 역시도 추측케 한다. 안중근의사는 왜 죽음을 며칠 앞둔 상황에서 청초당[靑草塘]이라는 유묵을 쓴 것일까. 누구에게 건네기 위함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유묵이 신앙의 발로라는 것이다. '푸른 풀밭이 있는 연못' 누군가는 당[溏]이 연못이 아니냐고 하지만 수렁, 진창, 벌밭 정도이고, 안중근의사가 쓴 당[塘]이 연못인데, 흙[土]을 변으로 쓰는 것은 아마도 연못이 보이는 둔덕 정도라서 그랬을 것이다. '푸른 풀밭의 연못이 보이는 둔덕' 그러면 떠오르는 것은 천국이다. 신앙심이 깊었던 안중근의사는 그런 천국을 떠올리며 죽음을 며칠 앞두고 간절한 마음으로 새겼을 것이다. 그 천국에 떠오르는 한 마리 동물이 있다면 사슴이다.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 사슴은 독립의 갈증이 가득해 시냇가를 찾았다. 누군가가 말하듯 새끼를 밴 암사슴은 악어와 같은 위험이 도사리는 못이라도 뱃속 새끼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물을 마시러 간다. 언젠가 유튜브에서 본 장면 중 새끼사슴이 강을 건너는데 악어가 달려오자 어미사슴이 자신을 먹잇감으로 내놓는 모습이 있었다. 안중근의사의 천국은 그랬을 것이다. 거사 하루 전 거닐었을 하얼빈공원. 그리고 해방 전에는 거기 묻었다가 해방 후에는 함께 만세를 부르도록 고국으로 그리운 고국으로 보내달라던 안중근의사. 해방이 된 지 한참이 지났건만 우리는 여전히 헤맨다.

전국 곳곳의 수많은 아름드리 소나무들에 하트가 그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연료[松炭油]를 위해 긁어낸 자리에 생긴 상처다. 나무는 말을 안해서 그렇지 수백년 아니 수천년 세월동안 보고 들은 바를 기억한다. 뮌헨의 다하우수용소에 가면 막사가 있다. 그것도 없애려던 것을 마을이장과 주민들모두 '우리 독일국민의 수치를 덮지 마라.'고 해서 지우지 않은 것이다. 파편처럼 남은 막사. 그리고 '노동이 해방케 하리라.[Arbeit Machat Frei]'는 철문 위의 녹슨 문구가 살벌하게 맞이한다. 그리고 가스실 바로 옆에 새롭게 세워진 수도원에서는 연일 쉴새없이 봉쇄수도원 수도자들의 기도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흔적과 더불어 그날들을 보고 들은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서 있다. 그들은 생생하고 또렷하게 기억한다. 어떤 나무들에는 당시 깊이 새겨넣은 징용자들의 배고픔과 그리움도 새겨져 있다. 그런 까닭일까. 난징대학살기억관에도 수십 곳 학살현장의 소나무들을 옮겨심은 것은 '그대들은 적어도 봤을 것 아니냐.'며 목격자이자 증언자로서 내세운 것은 아닌지. 해미의 호야나무[회화나무]. 전주의 회화나무. 그리고 독일의 수없는 이교인들의 교수형이 있던 굴참나무 등도 모두 그렇다. 소설과 영화인 "마루타"는 일제강점기에 인간을 상대로 한 온갖 공포스러운 실험이 자행된 부대 731을 고발하고 있다. 너무 강하게 박힌 인상 중 하나는 하얼빈 그 차디친 곳에서 어느 정도에 손이 완전히 얼고 그것을 내려쳤을 때 두 동강이 나는가였다. 이미 괴사된 손의 감각이 없는 장본인을 웃게 하고는. 청소년들을 굳이 그런 끔찍한 곳에 데려갈 필요가 있을까. 물론 없다. 하지만 지금은 다소 누그러뜨린 공원처럼 된 곳의 파편처럼 남은 버즘나무와 버드나무와 회화나무와 은행나무가 들려주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것 정도는 되지 않을까. 소나무가 상처를 어떻게 하트로 만드는지를 보게 하듯이.

'역사를 잃으면 나라를 또다시 잃는다.' 불과 이삼십년 전만 해도 안중근이 누군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힌다.[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는 명심보감의 말을 유묵으로 남긴 이를 물었을 때 '글쎄요.' '안창호인가.' 했었다. '미래는 없다.' '미래는 없어.' 이랬는데 이삼십년 후에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다. 누군가는 고속도로변 벽에 크게 초상화를 올리고, 부모는 자녀들의 답사에 주저하지 않는다. 연극과 영화가 만들어지고, 심지어 건달과 양아치 사깃꾼 등도 존경해마지 않는다. 그 메인장소인 하얼빈역에 가면 중국의 영웅인 주은래조차 '안중근은 혁명의 효시이다.'고 말했던 것을 반영하듯, 한 켠에 안중근박물관이 있다. 일본이 이또히로부미[伊藤博文[いとう ひろぶみ]]를 지폐에 새겨넣고 영웅처럼 도쿄 한복판 센소지[浅草寺[せんそうじ]]에 이또정원[伊藤園]의 간판을 걸어놓는 것을 보면서 '또 망하겠군.' 하며 자괴감을 곱씹었는데, 이삼십년이 지난 후 젊은 미래세대들은 놀랍게 더 놀랍게 멋지게 더 멋지게 앞선 이들을 뛰어넘었다. 인구 이만오천에 불과한 무주의 청소년들과 도쿄의 한 학교를 교류 차원에서 방문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찢었다. 무주가. 도쿄를.' 그들의 넘치는 끼는 도쿄를 누르고도 남았다. 그런 그들은 안중근의사는 물론 외우기 싫어하는 연도도 흐름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재잘재잘 꽁닥꽁닥 장난기만 가득하다가도 한일역사자료관에 들어서 일제강점기와 그 이후 더 설움을 받았던 재일교포들의 사연 앞에서는 진지하고 숙연하다. 이만오천의 무주가 일천만명의 도쿄를 찢는다면, '재들은 도대체 어떤 민족일까.' 할 법도 하다. 적어도 몇 점의 안중근의사의 유묵에 담긴 철학적 영성적 깊이를 알고서 가는 진안의 청소년들의 만주순례의 저력[樗櫟/底力]이 기대되는 것도 바로 이 점.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하느냐.' 눈물마저 날뻔 한 이 물음에 '그렇다.'고 하자 이내 나온 말이 '그렇다면 내 양들을 잘 돌봐라.'였다. 어떻게. '죽기까지.' '견리망의[見利忘義]라는 말이 있다. '이익이 보이면 의로움을 저버린다.'는 이 말은 개인주의를 철저히 반영한다. 참된 지도자냐 거짓 지도자냐 등의 판가름도 여기에서 난다. 거짓 목자는 자신의 흠결을 감추기 위해 양들을 늑대에게 팔며 타협한다. 하지만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善牧爲羊捨命] 양과 염소 등은 두 발굽으로 바위와 절벽을 잘 탄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몸을 돌릴 수조차 없는 막다른 벼랑 끝에 서기도 하는데, 그러면 하는 행동이 소리다. '음메에에.' '아이구야.' '죽겠어요.' 착한 목자는 철부지 어린양의 목소리를 잘 알기에 벼랑으로 쫓아가 처음에는 목자의 지팡이로 나중에는 손아귀로 구해낸다. '벼랑에서.' '견리사의견위수명[見利思義見危授命]' 안중근의사의 유묵 가운데 와닿는 이 글귀는 '이익을 보거든 의로움을 생각하라.'는 것인데, 여기에서 말하는 의[義]는 양[羊]과 나[我]를 동일시하는 희생[犧]의 각오가 담긴 의로움[羲]이다. 그리 본다면 스스로 바치고[捨] 스스로 내놓는[授] 것에 본분이 있다는 것을 안중근의사는 말하는 것이다. 강한 보다 강한 필치로. 베르모렐선교사가 수류성당의 전신인 배재공소에 들러서 남긴 기록에는 이렇게 써있다. '이[공소신자]들은 말할 수 없이 가난하다. 하지만 쌀 한 톨도 콩 한 알도 생기면 나눈다.' 그런 정신의 교육장에서 배운 안중근의사는 몸에 밴 것을 그리 실천했다. '사랑하기 때문.' 해방을 위한 안중근의사의 타는 목마름은 '사랑 때문이다.' 하고 통일을 향한 조성만열사의 타는 목마름의 전형이 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예수의 원형이 있다. '목마르다.'는 예수의 십자가상 표현이 다시금 '사랑하냐.'로 들리고, 그러면 '내[네]양떼는.'으로 들리는 것도 그 때문.

장예모감독의 "붉은수수밭" "귀주이야기" "진링십삼채" "트라이아드" "오일의마중" 등을 보면 공통분모가 '여인'이다. 격변기 중국에서의 가장 약자인 여인의 모습이 여러 빛깔로 담겨있다. 하지만 태양의서커스를 방불케 하는 대형 버라이어티쇼를 보고 있으면 이 감독이 그 감독이 맞나 싶을 정도의 큰 스케일에 압도된다. 사실 섬세함과 광활함은 미시와 거시의 정반대인 것이지만, 사람의 감정선을 건드리기에는 둘 다 충분한 기운이 가득하다. 부여, 옥저, 발해, 말갈, 거란, 여진, 만주, 심지어는 흉노, 돌궐, 선비, 훈족, 몽골 등 유목민들은 미시와 거시의 경계 안에서 우리와 그 역사적 깊이를 함께하고 있다. 어떠한 이름으로건 피가 흐르게 하고 기가 드세게 하며 혼이 스미게 한다. 부모의 나라, 형제의 나라, 친척의 나라 등이 됐다가 몇 세대가 지나면 침략자, 약탈자, 학살자 등으로 돌변하기도 한 것이 역사의 흐름이지만, 파편적으로 남아있는 문화의 씨앗이 '하나'임을 느끼게 해준다. 하얼빈에서 연길까지의 고속열차. 독일, 일본, 한국 등보다 더 빠르게 진화한 중국 고속열차에 몸을 맡기면 처음에는 속도에, 다음에는 평야에, 그리고는 지붕에 놀란다. 그렇게 빠른데 끝없는 평야에 옥수수 물결과 섬같은 팔작집. 곧 햇빛을 머금어 황금들녘으로 변할 초록바다의 옥수수밭은 '광활한 만주벌판'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지게 하고, 거기에 어김없이 '나는 고려인[조선인]이오.' 하듯 외로운 섬처럼 있는 팔작지붕의 굴뚝에는 연기가 피어오르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던 독립운동가들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하염없는 아낙의 시선이 갇혀있다. 그 거시와 그 미시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감정선을 건드리고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가면 갈수록 하나둘 짙게 나타나는 팔작지붕의 물결은 이제 다른 언어를 배우지 않아도 서로 소통할 지경에까지 다다른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럴수가.' 참혹하고 비참해진 상황에 직면하면 누구나 던질 수 있는 말이다. 알빈슈미트신부 역시 수없이 던진 말일 수 있다. 경신참변과 만주학살을 들은 그에게의 만주는 선교지로서의 어떤 지역이라기보다 학살지로서의 그런 지역으로서만큼 자리했을 것이 분명하다. 대개는 이런 경우에는 무신론[Nihilism]에 빠져든다. 알빈슈미트신부 역시 그랬다. 그는 사제직분에 대해서조차 회의하고 고민했다. 포기하기 위해서 돌아간 독일에서는 더더욱 그런 현실이 뚜렷했다. 더군다나 독일은 그런 과오를 저지른 장본인의 국가였다. 하지만 반성이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움직임이 있었다. 더 이상은 침묵과 방종에 빠진 채로가 아닌 참여와 행동에 이를 각오가 있었다. 건축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삼대에 이르는 건축가가문인 뵘가문은 새로운 건축의 모델들을 제시했다. 성전은 더이상 하느님만의 집이어서는 안된다. 성전이 성당이 돼, 백성들까지 아우르는 집이어야 한다. 쾰른에서 시작된 이런 움직임은 교회건축을 거룩함을 담되 하느님의 집이며 백성들의 집으로 변모시켰다. 백성들이 이제 주인이기도 하게 된 것이다. 사제들은 백성들을 향해 하느님을 대변한다. 또한 백성들의 소리에 귀기울인다. 요즘으로 치면 그리 놀랍지 않을 흔하게 보는 현상이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변화인 이런 움직임에 건축도 일조했다. 거기에서 영감을 얻고 희망을 가진 알빈슈미트신부는 다시 본인의 선교지인 한반도로 돌아온다. 그리고 일제강점이 지나자 한국전쟁이 일어나 막장 끝까지 간 곳에서 희망의 끈을 건축에 녹여내기 시작한다. 그것이 전국에 수십수백 성당건축에 담겨있다. 전북에도 고창, 복자, 노송 등에서 볼 수 있다. 공통분모들은 이러하다. 하느님 백성들의 집답게 통구조인 성당은 남향의 배치를 하고, 백성들의 등 뒤의 창살에서는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희망의 한 줌 빛.

'하늘의 별을 그리워하다가 하늘의 별이 된 사람, 윤동주.' 별을 그리던 사람은 많다. 고흐는 흔들거리는 아를르의 별을, 도데는 양치기들의 순수함의 별을, 지용은 모래성으로 발옮기는 별을, 가람은 징병끌려간 맏이같은 별을. 몽골사막의 샤르댕의 쏟아지는 별들도 있고 고즈시마의 줄리아의 한아름의 별들도 있다. 감탄과 탄복을 자아내지만 슬픔과 시림도 빚어만든다. 그도 그럴 것이 별을 보면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어서일 것이다. 엄마, 아빠, 누이, 맏이, 동생, 친구, 연인. 동주는 누이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떠난 도쿄와 교토로의 여정. 교토의 도시샤대학에서 공부하다가 소풍간 계곡. 그리고는 며칠 안 있어 붙들려가고 후쿠오카의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을 받으며 죽어갔다. 그의 오랜 형제와도 같은 동료였던 송몽규와 함께. 그리고 명동촌에 돌아온 것은 싸늘한 시신. 아낙들이 시들은 생활을 이고 지고 안고 하며 되질 울질 자질 하는 그곳. 그러다가 먼저 간 별의 길을 따라갔겠지. 그 아득함의 끝에 다윗의 별도, 그리고 예수의 별도 좌표를 만들어줄 것이다. 그리고는 이 다음 별에서는 지구별을 바라보며 이렇게저렇게 말할 것이다. 때로는 일르기도 하고 때로는 즐거웠다 하고. 이미 세상에 없지만 별이 됐기에 머무는 그들과의 대화는 천문이 아니고서도 가능하다. 송년홍신부는 아이들과 만주에서 그 별들을 볼 것이다. 그리고 무수한 별들이 된 사람들의 사연들도 얘기할 것이다. 손만 뻗으면 금방이라도 간지럽히듯 부드럽게도 맞닿는 그 별들. 멀리로 떠나야지만 만남이 가능했던 고흐도 도데도 그리고 샤르댕 역시도. 어쩌면 북녘 어딘가에서 숨을 거둔 지용과 외딴 섬나라에서 생을 끝낸 줄리아. 그리고 마침내 동주도 그렇게 그가 못다한 얘기들과 더불어서 만날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어린왕자의 유일한 별도 보겠지.

어린왕자의 소행성은 특별하다. 그의 별은 소유가 아닌 존재다. 서로 바꿔말할 수도 있지만 뉘앙스는 다른. 김진소신부의 호남교회사연구소 서재 쿠션에 '하느님은 사랑이시다.[God Is Love]'라고 적혀있고, 그 아래 '사랑은 하느님이시다.[Love Is Of God]'라고 쓰여있다. 여기에 소유 또는 출처 등의 오브[Of]가 붙은 것은 사랑은 하느님의 것이며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는 뜻일게다. 이런 정도의 소유는 자본과 명예와 권력에 있어서의 욕심의 소유가 아닌, 존재를 드러내주는 존재 자체와 가깝다. 어린왕자의 소행성의 장미 한 송이가 그렇다. 명동촌을 지나 용두레에 가면 으레 일송정과 해란강을 보러 가는데, 올해부터는 접어야 할까 고민이다. "선구자"의 작사가와 작곡가의 친일이 의심스런 까닭이다. 소나무는 늙어도늙어도 해란강은 흘러도흘러도 변함없건만 해방을 얼마 앞두고 일제의 발악이 극에 달했을 때, 이제는 내선일체를 받아들여야 할까 보다는 생각에 변심한 이들이 그들만이었을까. 그런데 그들은 정작 자신들의 시와 곡에 담긴 깊은 의미는 알고 있었을까. 이 길고 멀은 험난한 길이 자신들의 세대를 훌쩍 넘어서야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 소나무 한 그루 그 개울물 한 모금 안에서도 지켜져야 할 나의 소유가 나의 존재란 사실을. 독도[獨島]는 홀로 외로운 섬이라는 뜻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렇다고 대나무도 없는 곳이 죽도[竹島/たけしま]라고 하는 일본의 궤변은 더는 못들어줄 억지이다. 하지만 이러지 않았을까. 우리 독도의 독[獨]을 '만큼은[たけ]'의 것으로 부르다가 변용시켜버린. '만큼은[ほど]'의 또다른 표현과는 뉘앙스가 전혀 다른 '만큼은[たけ]'은 일본어로도 너만큼만은 결코 내줄 수 없다는 자존심의 표명이다. 창씨개명과 징병징용에 '뭐 어때. 이 정도 쯤이야.'가 아니라, 가장 작은 너 하나를 잃는 순간 그 사라진 소유로 인해 존재를 잃고 만다는 뜻이 담긴 것이다. 어린왕자의 장미 한 송이같은 소나무. 개울물. 그리고 독도.

프랑스 얘기를 하면 '그래 너네 나라.' 하는 한 신부가 있다. 소르본느에서 역사, 신화, 종교를 전공했고 고등사회과학연구원[EHESS]에서 아랍, 순례, 건축 등을 공부했던 이력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그렇듯 좋은 점은 좋다고 나쁜 점은 나쁘다 말할 뿐이지 예찬론자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점은 우리도 생각하면 어떨까. 순례객이건 여행자이건 관광객이건 어김없이 가는 네 곳. 노트르담대성당, 몽마르뜨르언덕[예수성심대성당], 루브르박물관, 베르사유궁전. 이 곳 어디에서건 가장 중요한 자리에 잔다르크가 있다. 노트르담대성당은 바로 제대 곁에 있고, 문구에는 제이차세계대전 이후 대통령들은 자유와 해방을 기억하며 어김없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몽마르뜨르언덕[예수성심성당]에는 아예 성당입구 좌우에 루이성왕과 나란히 말을 타고 있는 잔다르크가 있다. 루브르박물관에는 마침내 샹파뉴지방을 되찾고 랭스대성당에서 프랑스왕의 대관식에 있던 잔다르크의 제단곁 모습이 앵그르 작가의 작품으로 중요하게 소개되고 있다. 베르사유궁전에는 전쟁과 평화의 방에 결연한 의지를 가진 모습으로 묘사됐다. 네 곳 다에서 보는 공통분모를 찾는다면, 다른 작품들이 왕과 귀족 등인데 평민으로서는 돋보이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것과, 잔다르크의 시선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는 것과, 무기를 쥐고 있지 않고 두손을 모으거나 깃발을 쥐고 있거나 칼을 들고 있어도 마치 바오로사도의 신앙을 위한 칼처럼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명동촌에서 용두레지나 두만강까지 이어지는 그 길목에 노루바위[獐巖洞]와 기댈숲속[依林溝]이 어드메인지도 다시 추적하겠지만, 파편처럼 안중근이 이때저때에 여기저기를 지나갔다는 얘기들을 주섬주섬 모은다. 이유는 하나. 우리도 언젠가는 명동대성당, 장충동성당,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중앙박물관 안에 안중근의사를 모셔야 할테니. 서소문에 유묵 "경천[敬天]"이 걸렸으니 머지않았다.

"이를거예요." "일러도좋다." "제발일러라." 가장 가까이에서 북녘마을을 볼 수 있는 도문은 두만강줄기의 중간 어드메 정도에 있어서 지척이다. 계단을 타고 언덕을 오르면 탁 트인 북녘땅이 보이고, 학교도 얘들도 공장도 집들도 그리 보인다. 맨눈으로도. 그곳에 가면 모두의 눈은 허공을 가로지르고 모두의 입은 침묵을 주워담는다. 문규현신부도. 문정현신부도. 이병호주교도. 그리고는 모두가 제일 궁금하게 바라보는 곳은 집들의 굴뚝이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면 '그래. 뭐라도 짓고 있는가 보다.'며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다. 거기에 서면은 사람이 있어도 사람이 그립다. 우루루 몰려들어서 무너진 다리 중간까지도 가 더 가까이에서 여러 장면들을 더 선명히 볼 수 있는 중국인이어도, 그런 관광객의 관광과는 차원이 다르다. '놀러 온 게 아닌' 그곳에서 하나라는 사실은 피와 맥이 먼저 알아 끓고 뛴다. 그리고는 내려오는 계단에 은퇴한 요양원 여성원장이 이병호주교의 팔짱을 끼고 부축한다. 딋모습을 찍고 '바티칸에 이를거다.'고 하니, 제발 그리 하라며 아마 교황도 잘했다고 할 거라는 말미의 여운도 남긴다. '잘했다.'고 칭찬들을 소리를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눈치보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늑대와 괴물로 그려진 북녘사람들의 모습을 의무적으로 보고자란 어린시절과 비슷한 나이의 진안 청소년들은 과연 그 두만강 너머에서 무엇을 볼까. 늑대. 괴물. 아니면 사람. 비교적 전이해가 덜한 그네들의 피는 끓을까. 맥은 뛰놀까. 몹시 궁금하지만 그리 염려하지도. 몇몇 청소년 대학생 단체와의 여정에서도 확인했듯이 더 끓고 더 뛰는 그들의 피와 그들의 맥은 통일의 고픔에 훨씬 더 한 걸음 더 다가가 있다. 고사리손의 이번 아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 어디에 내놔도 이렇게 개구장이에 말괄량이가 없는 한반도의 아이들은 이병호주교처럼 이르는 것도 두려움 없이 속내를 보일 것이다.

가슴 시린 두 곳. 장춘 그리고 녹둔. 장춘은 소팔가자로 인해 한때 많은 성지순례가 있던 곳이다. 산동에 살던 소씨가문 천주교 신앙인 여덟가구가 이사를 와 살아서 붙었다는 그 이름이 회자된 것은 김대건신부와 최양업신부를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들이 거점이자 입국의 전초지역으로 삼은 까닭이다. 그리고는 옛 성당을 다시 새 성당에, 그러나 이를 헐고 다시 새 성당을 지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마당까지만 겨우 보고, 기껏해야 길 건너 푸세식 화장실이나 이용하고 나올 정도이다. 그러니 옛 자취는 그 화장실이라고 할 도리밖에. 상해의 김가항성당이야 도시화로 자취를 감췄어도 은이공소에서 옛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있으니 김대건신부가 서품받았을 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으련만. 그리고 옛 신앙의 형태까지도. 그런데 소팔가자는 쥐어짜도 아무런 상상의 오감이 나지 않는다. 녹둔은 허허벌판. 그나마 민속박물관에 가면 조선인[고려인]이 살았음을 보여주는 기와파편이라도 남아있다. 물방울이 기와끝에 맺히지 않게 하려고 손가락으로 꾹 누른 지혜까지도. 그 녹둔도를 사수하려고 이순신장군은 필사의 노력을 다했다. 땅은 차지했지만 병은 잃었었기에 결국 장군의 직분을 놓아야만 했던 그가 왜 그토록 그 땅을 중요시했는지 가보면 안다. 지금은 두만강 물줄기 끝자락이 틀어져 러시아땅으로 돼있지만, 중국이 태평양으로 나가기 위해 목을 매는 땅이다. 결국 멀게는 일본, 미국 등까지도 바다로 맞닿아 있는 곳이니 거점으로 얼마나 중요한가. 누구나가 전초기지로 삼고 싶지 않겠는가. 김대건신부의 백색순교[白色殉敎]가 붉게 변할 곳과 이순신장군의 백의종군[白衣從軍]이 죽어 사는 곳인 장춘과 녹둔은 여전히 빈터이지만, 그곳에서 부는 바람이 범상치 않음은 그 때문이다. 산 너머 강 너머 길 너머 있는 얘기들을 연길 어디쯤에서 아이들은 들을 것이다.

'막다른곳[ImPasse].' 우리로서는 막힌골목 정도로 얘기될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워낙 산과 골이 많은 지형을 이용해 집도 절도 그 마지막 끝자락 언덕에 지었다. 남향인데다 등에 산을 이고 앞에 물이 있는 형상이라면 최고였다. 그러니 이런 곳을 걷든 뛰든 날든 자유자재로 다니는 것도 익숙하다. 조선시대 숭유억불의 불교가 그랬고 서학박해의 천주교 역시도. 바로 그러한 때 자기만이 아는 산골은 은신처를 마련했다. 사찰과 공소가 숨은 곳도 역시나 그렇다. 이러한 지형을 활용한 것은 삶의 지혜이기도 했고 싸움 전략이기도 했다. 우리가 들어본 학익진[鶴翼陣]이 그러하다. 봉오동전투는 영화에서도 보듯이 숫자상 불리한 각개전투의 여러 군대가 힘을 합쳐 유인된 일제를 전멸시킨 사례로 볼 수 있다. 청산리전투도. 이순신장군의 경우는 더 대단하다. 한산도 해안가와 섬마을도 활용했지만, 적은 수의 우리 군함이 지형과 바다도 동원해 적선을 몰살시킨 까닭이다. 배도 섬이 되게끔 했으니 대단한 지혜다. 하지만 학익진[鶴翼陣]의 취약점도 없지 않다. 공동체가 무너져 누군가가 배반해서 한 곳이 뚫리면 여지없이 파죽지세로 와르르 무너져버린다. 대표적인 사례가 세키가하라전투이다. 고니시유키나가가 속한 서군은 조선에서 패배한 우리의 전략을 내란에서 활용해 봤지만, 이를 또 잘 아는 내부의 배반자 세력에 의해 날개 한 곳이 뚫리자 결국 도쿠가와이에야스의 동군에 패배하고 말았다. 우리가 일제강점기의 무수한 영화에서 밀정 때문에 거사가 수포로 돌아간 경우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런가 하면 삼면이 기암으로 된 곳은 도리어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 되기도 한다. 오카와치야키라는 일본 사가현에 끌려간 도공들이 평생을 갇혀 도자기만 만들어낸 것도 그런 이유이다. 봉오동과 청산리를 지나며 아이들은 그 형세 안에서조차 이런저런 역사를 배울 것이다.

'마리자[LaMariza]' '두만강' 둘 다 멀리 아주 멀리 있는 강이라서 상관관계는 없다.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마리자를 알고 한반도 사람들은 두만강을 안다. 노래로. 타지에 가면 산골과 바다에 가지 말라는 말도 있다. 저 산골 넘으면 그리고 저 바다 넘으면 이내 고향이 보일 것만 같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흥얼거림과 어머니의 레퍼토리는 전혀 알지 못하는 아들과 손자에 이어져 알지도 못하는 곳을 향한 향수[鄕愁]를 유발한다. 그 그리움을 담아 길을 노래하고 그 아련함을 녹여 길을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독일 다하우의 강제수용소에 있는 봉쇄수도원의 고통의 성모, 일본 이마리의 도자기마을에 있는 봉쇄수도원의 영보의 성모, 일본 하코다테 바닷가언덕에 있는 봉쇄수도원의 천사의 성모, 한국 마산창원 골짜기언덕에 있는 봉쇄수도원의 수정의 성모, 미국 뉴저지의 이국타향땅에 있는 봉쇄수도원의 평화의 성모. 성모의 기도는 수도자 기도로 끊임없이 울려퍼진다. 그 중 미국의 봉쇄수도원에서 만나는 수도자 라뤼[LaRue]. 우리가 잘 알듯 흥남철수 때 수많은 피난민을 구한 매러디스호의 선장이다. 그의 이름인 라뤼[LaRue]는 프랑스어로 길이다. 개선대로[Avenue]나 가로대로[Boulevard]와 달리 좁디좁고 굽디굽은 길이다. 하지만 결국은 이어진. 누가 그 이름을 붙여줬는지 모르지만, 기가 막히게 그는 이름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길이 됐다.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이어지지 않은 길을 염원하며 매리너스[MarinUs]라는 이름으로 수사가 됐다. 우리와 함께 하는 어머니[Mary In Us]. 자신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국땅을 향한 기도는 고향땅을 향한 노래 못지않게 진하다. 이 아이러니는 소화데레사에게도 통한다. 선교사의 주보성인. 봉쇄수도원의 수도자인데도[?]. 기도란 그런 것이다. 두만강변을 타는 아이들도 기도할 것이다. 언젠가는 넘나들 것을 꿈꾸며 노래를 넘는 기도를.

순례이야기가 중반을 넘어가는 지점. 즉 정점인 곳에서 백두산을 만난다. 백두산 천지. 그 어디서 떠나도 한[큰] 품에 넉넉히 끌어안을 백두산. 장소는 또 시간을. '그날' '한날' '새날' '오늘' 심훈은 두개골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그날을 노래하고 그러다가 마침내 그날이 오면 자신의 가죽이 벗겨져 북소리를 내더라도 기뻐하리라고 말한다. 한날[OneDay]은 레미제라블의 소설과 영화와 오페라 뮤지컬 등에서 곧잘 나오는 표현인데, 더 정확히는 '더한한날[OneDayMore]'이니 '내일'인 '그날'이다. 뮤지컬 안에서는 새벽[Dawn], 내일[Tomorrow] 등과 같은 한날은 '하느님이 당신의 곳간에서 꺼내오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날[We Will Discover What Our God In Heaven Has In Store]'이라고 말한다. 철학적이고 신학적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직 끝나지 않은 하느님 창조의 연장선상, 그것이 마치 종말의 끝자락처럼 보이는 말미에 '한날'로 드러남을 말해준다. 그날은 한날인 것인데, 지긋지긋한 또 하루의 그날도 꿈속꽃밭의 먼 막연한 그날도 아닌, 우리가 상상하고 모두가 생각하는 그 때와 그 곳을 넘어서기에 '새날'이다. 소설 "범도"를 쓴 소설가는 부평 새날의집과 인연이 있다. 송년홍신부도 거기에서 잠시 노동생활을 했다. 농투성이 노동자가 바라는 그날은 분명히 새날인 까닭에 쉼터, 놀터, 쌈터 이름을 새날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니 말해줘도 모를 것이 분명하기에 예수조차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하느님은 준비하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소설 속 홍범도가 만주벌판을 종횡무진하고 마침내는 중앙아시아에서 외롭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을 때도 그의 마지막 움켜쥔 주먹 안에 그 '새날'이 있었을 것이다. 김혁태신부는 창조신학과 종말신학을 꿰뚫으며 '곧'이라고 말한다. 왜란 때 끌려간 조선인들은 '오늘'이라고 하고. 날씨가 어떻든 백두산천지에 서서 송년홍신부는 아이들에게 말할 것이다. '그날이 오늘여.' 구수하게 전라도 사투리로.

백두산은 어느 시기와 어떤 계절에 가도 저마다의 풍광으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그 중 천상화원의 꽃잔치를 보려면 유월/칠월/팔월이 안성맞춤이다. 아이들에게 한여름과 한겨울이 방학인 것도 이해가 안되지 않지만, 봄과 가을 그 아름다운 한반도를 어렸을 때부터 눈에 가득 담고 가슴 깊이 심는 것도 교실에 쳐박혀 수학공식 영어단어 하나를 더 외우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다. 외국의 일주일 정도의 예수부활방학, 모든성인방학[TousSaint] 정도가 우리도 있었으면. 다행히도 백두산은 아이들의 방학이 막 시작되는 칠월말/팔월초 정도에 그 꽃잔치를 볼 수 있다. 꽃잔치/꽃물결/꽃사태 그 어떤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북쪽에서 오르는 북파도 서쪽에서 오르는 서파도 남쪽에서 오르는 남파도 절경이다. 가는 굽이길 버스 내내에 가는 오르락 계단 켜켜이 꽃들과 탄성이 비벼진다. 식물본초학자인 주영승교수도 식물사회학자인 김종원교수도 한라산/을릉도/백두산 등을 그렇게 애찬하는 이유를 가보면 안다. 꽃들이 작고 홀로여도 진하고 강하다. 마치 우리 민족과 백성이 그렇듯이. 이는 두메양귀비 하나만 봐도 대번에 알 수 있다. 하늘연못인 천지[天池]를 천지분간도 못할 정도의 매몰찬 날씨라면 바로 곁 두메양귀비를 보라. 비바람이 '너 꺾이는 것을 보고 싶다.'는 양 몰아쳐도 이리기웃 저리흔들 꺾이지 않는다. 올라가는 내내의 자작나무[사시나무]는 우리가 상상하듯 올곧지 않고 휠대로 휜 모습이지만, '서로 부둥켜서 비바람을 견뎌내는 식물의 지혜'라는 말을 통해서도, 그리고 '함께 무리지어서 피는 꽃들은 머리를 낮추고 둥글게 서로에 기대 이겨낸다는 식물의 혜윰'이란 것을 통해서도 깨닫는다. 비바람이 몰아치면 아이들은 홀로도 꿋꿋한 그리고 더불어 보듬는 것을 꽃들로부터 배울 것이다. 날씨마저 해맑다면 어떠할까. '말해서 무엇해[?]' 이것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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