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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서정

남해경교수 순례이야기[2] 《너 이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문턱을 넘어서는 것》

작성자씨알|작성시간26.06.22|조회수36 목록 댓글 0

남해경교수 순례이야기〔2〕

             《너 이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문턱을 넘어서는 것》

앙주교좌성당이 국가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모두의 바람이 담겼다. 그것은 천주교 신앙인이 아닌 남해경 교수로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찰건축, 서원건축, 교회건축, 성당건축 등 종교건축의 여러 면모들을 두루 살펴보고 심사하던 남해경교수는 어느 종교에도 속하지는 않았지만 종교건축이 스스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느 정도 읽을 줄 아는 지경에 다다랐다. 종합예술인 종교건축이 담고 있는 음악과 미술은 물론, 거기에서 펼쳐지는 기도와 예식과 함께, 때로는 보다 더 깊이에서의 심성과 영성을 보며, 루돌프오토가 말하는 '거룩함[DasHeilige]'을 느끼기도 한다. 중앙주교좌성당의 경우 남해경교수는 무엇을 느껐을까. 일반인이라면 기둥이 없는 탁 트인 공간을 볼 것이다. 그런 점은 건축공학자인 남해경교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고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어떤 연유로 그렇게 한 것일까. 여기까지 다가가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이다. 그러면서 보이지 않는 부분인 바닥 너머와 벽면 너머와 천장 너머를 꿰뚫어보고 '그것이 그래서 그랬군.' 하고, 성당을 짓던 시절부터의 얘기들을 담아 퍼즐을 맞춰 사연들을 꿴 후 '그것이 그렇게 그렇군.' 하며 깊은 이해로 다가간다. 홀로로서의 인류[Human]를 넘어 더불어의 인류[HumanE]로 가되, 동물과 식물은 물론 미물, 그리고 바람과 햇빛도 오감을 열어 받아들이며 '그래서 그것이 그거다.' 하는 지경으로 나아간다. 중앙주교좌성당을 시작으로 펼쳐내는 남해경교수의 순례이야기는 이제 영점[ZeroPoint]인 중앙으로부터 전북으로까지, 그리고 전국으로까지, 덧붙여 세상으로까지 나가며 종교건축의 진면모를 이렇게저렇게 비교하고 넘나들며 풀어낼 것이다. 물론 문학가도 예술인도 그렇듯 설계자와 건축가가 말하며 의도한 바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해석은 자유롭고 영감은 신비롭다.

전북지역의 성당건축은 동굴서부터 오늘에까지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미사굴, 블랑굴, 성지굴 등 박해시대에는 크고작은 굴이 은신처이자 생활처였다. 그러다가 점차 돌담의 움집 형태를 띠게 됐다. 비교적 최근까지 천호의 어름골에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었다. 아직 종교의 자유가 있기 전까지는 공소가 신앙공동체의 기도공간이었다. 옹기가마, 한지지소 등 작업공간에 이동식 십자가만 놓으면 신앙공간이 된 것이다. 청웅과 광곡이 그렇다. 이는 일본 가쿠레기리스탄 시절의 공동작업공간인 시츠 등에서 살필 수 있는 양상과 비슷하다. 종교의 자유 직후에도 언제 다시 박해의 시절로 회귀될지 모르는 까닭에 겉으로 보기에는 일상공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공간구성을 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초가, 기와 등과 공소회장이 내놓은 공소회장댁 정도가 공소로서의 구실을 한 것이다. 능교, 어은, 수분, 신성, 천호, 태인, 두동, 구장, 황금 등의 공소가 그러하다. 점차 어은, 되재 등에서처럼 예비공간과 신자공간의 구분이 나타나고, 차츰 용마루 끝, 처마선 끝 등에 십자가와 십자기와 등이 성당임을 알리는 표시로 작용한다. 종교의 자유가 완연해지자 보다 뚜렷하게 용마루 끝에 십자가를 세우거나 첨탑을 세움으로 성당임을 알리는 시대가 도래한다. 되재, 수류, 화산 등이 그러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시기에는 비예모, 베모렐, 보두네 등 선교사에 의해 프와넬의 설계가 담긴 한국식, 동양식, 서양식 성당의 혼재된 양식이 드러난다. 전동성당과 수류성당과 화산성당이 대표적이다. 이후 일제강점을 지나 한국전쟁의 이후 김영구신부, 박성운신부, 김성근작가 등에 의한 구호물자시절 성당들이 있다. 안대성당과 둔율성당과 삼례성당과 중앙성당과 쌍교성당과 함열성당과 시기성당과 장계성당과 임실성당이 해당한다. 비슷하거나 조금 늦은 시기의 여산성당과 황등성당과 부안성당과 요촌성당과 상관성당도 유산으로서의 가치로 자리한다.

동굴은 피신을 의미한다. 제주의 협재굴 정도라면 동굴 중에도 사성급 특급호텔에 속한다. 미사굴, 블랑굴, 성지굴 등은 다르다. 페레올주교, 다블뤼주교, 김대건신부 등이 나바위로 입국한 이후 피신하여 연명하며 미사를 드린 곳이라고 해서 붙은 미사굴. 제법 크지만 한여름에 모기와 날타리 등이 쉴새없이 말그대로 끊임없이 기웃한다. 블랑굴은 기암괴석들이 얼기설기 모여앉아 만든 공간이다. 비교적 크지 않지만, 블랑주교는 여기에 피신해 있으면서 다른 선교사와 더불어 방인사제의 양성까지 꿈꿨다. 보두네신부의 성지굴은 이영춘신부가 비교적 최근에 발굴한 것으로, 혼란스런 세상을 피해 숨어든 작은 굴이다. 허리도 숙여야 할 정도로. 이병호주교가 궁금해해서 함께 간 동굴. 가파른 경사가 피난길임을 더욱 확연히 보여준다. 한참을 동굴 앞에서 묵상하던 이병호주교가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더니 드러눕는다. '주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했지만, 한참을 그리 습하고 냉랭한 그곳에 누웠다 일어났다. 마치 보두네신부의 아바타라도 된 양 느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죽림굴과 새재굴에 비하면 비교도 안될 굴에서 날벌레와 시름하고 밤이슬을 피해가며 연명하던 선교사들에게 굴은 무엇일까. 루르드의 성모굴처럼 어쩌면 한 줌 빛도 없는 곳에서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한가닥 희망. 김대건신부의 동생 김난식의 회문산 먹구니 동굴은 아주 작다. 거기에서 몸을 돌리면 딱 그대로 성상의 감실이다. 감실[龕室]. 또아리를 튼 용이 용답게 돼 용틀임만을 남겨놓은 상황처럼, 그 자리에 있으면 모두가 수도자와 수도승이 된다. 베네딕트와 예로니모가 그러하듯이. 칠흙같은 어둠이 깔린 플라톤이 말한 것 같은 그 동굴에 한줄기 빛이 들어오면, 그 빛을 머금어 또 빛을 내라는 교훈이 담겨있지는 않을까.

근대[Modern]에서 현대[ConTemporary]로의 과도기를 구분짓는 결정적인 계기는 시멘트공법, 옥상구조화, 철근골조화 등 건축자재와 바우하우스, 실용화공간, 공간다양성 등 건축구조의 변화 등에 기인한다. 특별히 알빈슈미트의 고창성당과 복자성당과 노송성당이 대표적이다. 또한 신태인, 교구청[인보성체회/가톨릭센터], 구호처[성모병원], 교육처[해성학교/성심학교] 등이 그러하다. 서학성당도 비교적 그 범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김후영, 김후만, 김후철 등의 형제들이 거론되는 것도 이 시기이다. 여기까지도 현대의 건축재료학, 건축기하학, 건축시공학 등의 발달 이전과의 구분으로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논할 수 있다. 현대는 앞선 언급에서처럼 어디라도 무엇이건 어떻게든 구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뚜렷한 시대적 특색을 거론할 수 없을만큼 다채롭고 다양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내부의 공간, 공경의 대상, 담지된 내용 등의 변모로 시대의 조류를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성당건축은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따른 차별요소와 더불어 면밀히 잇는 공통요소를 동시에 밝힘으로서 성당건축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다. 사제와 신자의 공동체적 취향이 특징으로 드러나면서도 유기체적 구조 안에서 조화를 갖춘디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색채를 띤다고 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본질에 충실하되 실험적인 그리고 도발적인 성당건축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런 현상은 원래 건축양식이 보존과 보전의 차원에서 살려진 채, 일정 부분의 리모델링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지붕과 바닥이 대표적이며 부벽과 통벽의 다소 큰 리모델링도 포함된다. 요촌성당과 서학성당이 여기 해당된다. 자재와 재질과 도구는 바뀐 사진과 기록과 설계에 따른 원형보전도 활발하다. 대표적인 모델로 되재와 신성과 어은과 같은 굥소가 여기 해당한다.

'성당건축을 보려면 전북으로 가라.' 서울대에서 더불어 고문서를 공동으로 발굴하고 라틴어와 프랑스어 등을 해독하는 한 연구진의 말이다. 앞선 언급들처럼 근대의 성당건축의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근대만이 아니었다. 치명자산의 산상성당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전체 벽면을 타일모자이크로 덮은 성당이다. 보두네신부가 초남이 바우배기로부터 이장해 온 유항검 가족들의 유해를 모신 성당은 제비혈의 혈자리에 있으며, 롱샹대성당, 빙엔대성당, 몽생미셸섬, 몽마르트르, 르퓌엉블레, 드라살레트 등과 같이 산 정상에 우뚝 솟구친 곳에 자리한다. 이병호주교와 교구민의 바람이 담긴 치명자산 산상성당은 뒤이어 간납대의 둔덕 솟은 곳에 놓인 교구청[대성당]으로 이어진다. 독일의 뷔르츠부르크 밤베르크와도 같은 높은 언덕은 간납대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묘한 분위기도 자아낸다. 이기발, 이생발, 이흥발 삼형제의 구국의 혼이 담겼지만, 한편으로는 사간원에서 따온 간과 헌납이라는 직책에서 따온 납이 합쳐진 누대라는 뜻의 간납대. 사간원은 사헌부와 홍문관과 더불어 임금에게 직언과 충언을 하는 기관이며, 천주교에 대한 탄압과 박해의 상소도 끊임없이 이어진 곳이기도 하다. 그 형제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간원의 잔상들이 있는 간납대에 후대 백성들은 천주교 심장부를 들어서게 한 것이다. 그리고 치명자산 아래에는 세계평화전당이라는 피정센터와 기념소성당 등이 있다. 가장 효율적으로 지어진 것으로 찬사를 아끼지 않는 피정센터 안의 소성당, 그리고 외부의 대성당 등은 이병호주교와 김영수신부의 영감이 깃들어있다. 절제된 갖춤이 그대로 담긴 피정공간의 숙소는 청빈의 최재선주교의 마지막 단칸방처럼 전주교구의 성직자와 수도자와 신앙인의 자린고비가 깃들어 있고, 컨벤션홀은 신앙인만이 아닌 세상사람들 모두를 위해 열려있다. 새로운 시도라도 선보이듯이.

그런가 하면 서울대 김광현교수의 천호성지 산상부활성당과 산상성지박물관 등은 노출콘크리트라는 건축공법 면에서는 안도타다오와 비슷하게 여길 수도 있지만 모방력을 띠는 안도타다오의 건축과는 확연히 다르며, 노출콘크리트 일세대인 르꼬르뷔제도 담지 못한 내부의 포근함과 은은함의 빛은 위로와 치유를 선사하기에 충분하다. 외부의 콘크리트 무덤 형태들은 내부의 나뭇결이 주는 아늑함에 따라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떠오르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나무가 주는 톤을 기어코 쓰다듬게 만든다. 벽면을 뚫고 새어드는 빛, 천장을 타고 스며오는 빛 등은 이병호주교와 박대덕신부와 김영수신부가 서로 다른 건축적 영감을 구상했지만 김김광현교수의 하나로 조화된 하늘의 빛 안에서 일체감을 갖는다. 알빈슈미트신부를 앙드레부통신부와 더불어 연구한 가톨릭신앙심의 김정신교수와 조광호신부의 영감은 박종충신부에 의한 고산성당을 예술작품으로 승화한다. 호남 최초의 천주교 발상지인 초남이에는 오성기신부의 영감이 간직된 대성당이 지어지고 있는 중이다. 독일에서 사목활동을 한 면모는 어떠한 성당이 가장 오래 버티는가를 보여주려고 하듯, 당시 신앙인들이 그림으로 봤을 법한 성당의 이미지로 재현된다. 그리고 이제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의 유해가 발굴된 바우배기의, 지금은 잠시 덮었지만 카타콤브에서나 느낄 신비감을 갖춘 무덤성당, 유일하게[?] 한옥에 띠집을 담았던 수청공소, 그리고 전주옥터 부근이자 바우하우스 개념의 실용주의 건축이며 최근 설계도면까지 발굴된 구가톨릭센터, 현대화의 바람을 타고 사라진 바우하우스 개념의 실용주의 건축이던 성모병원, 해성학교, 성심학교 등의 아쉬움에 천착하지 않고 늦었지만 새롭게 마련될 숲정이성지의 대성당이 어떠한 빛깔로 맥을 이으며 리모델링[뉴모델링]될지 기대된다. 김진소신부가 돌담집을 그렇게 고집하듯 영과 혼과 백과 넋과 얼이 담긴. 그리고 최초의 순교자의 고향인 진산성지성당과 권빈첸시오의 보림사, 신시도초막 ...

'죄인 아무개 대령했습니다.' 선교사들이 순회판공을 하게 되면 본인의 순서를 툇마루에서 기다리다가 하는 고해의 첫마디다. 그런데 어느 어린아이가 이러기에 선교사가 웃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툇마루는 성당건축에 있어서 배랑[拜廊, Narthex]과도 같은 구실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일종의 테라스와도 같은 배랑[Narthex]은 어원상으로 보자면 지팡이, 회초리, 버팀목, 상비약 등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흔한 동서구조의 성당배치를 보면 신앙인들은 북서쪽 입구에서 성당에 들어서기 위해 기다린다. 지팡이에 기대서. 회초리를 맞으며. 버팀목을 찾아서. 상비약을 구하며. 어떠한 어원을 들이대도 그럴싸하게 들어맞는 의미의 이 공간은 참회자의 자리이자 예비자의 자리로서 마련된다. 유럽의 고딕양식과 로만양식을 떠올리면 금방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며, 적어도 원형에 충실하다고 하면 이 공간은 곧바로 세례대 혹은 성수대 등으로 이어짐도 알 수 있다. 몇몇 옛 공소와 옛 성당에 나타나는 툇마루로서의 이 요소를 눈여겨보면, 비록 동서배치는 남북배치로 틀어져 있음에도 갖출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음을 보게 된다. 어은공소는 매우 흡사하고 독특하게 뒷편한켠을 그리 할애한다. 전통적인 한옥구조에서도 어렵지않게 찾을 수 있는 마루구조이다. 신성공소와 되재공소는 바깥회랑 쪽에 파편같이 늘어뜨려진 툇마루를 뒀다. 둘 다 원형복원에 충실했느냐를 두고 옥신각신하지만, 적어도 이런 독특한 공간구성을 기억을 더듬어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화산성당과 수류성당도 미루어 짐작케 한다. 말씀전례와 성찬전례에 있어서의 예비자와 신앙인의 구분 혹은 참회자와 화해자의 구분 등이 건축에서 묻어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메인인 신랑[身廊, Nave]을 넓고 높게 쓰고자 해서 없애거나 포함시킨 리모델링을 볼 수 있다. 또한 시대정신이니 맞거나 틀리다 할 수도 없다. 일리 있다.

하지만 가볍게 여길 수 있는 테라스와 발코니와 베란다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상징적 요소가 사라질 때 결정적인 큰 요소를 잃는다는 것도 알 필요는 있다. 테라스에서 잠시 비를 피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집이든 타인의 집이든 집에 들어서기 전에 몸가짐과 맘가짐의 매무새를 다지기도 한다. 잃었던 두아들의 돌아온 탕자는 거기서 들어갈 것을 고심하고 머물던 맏이도 나갈까 망설인 채로 주저한다. 문턱[Seuil]은 양곡과 가라지 구분[Thresh]을 위한 도리깨질 한계점[ThreshHold]이자, 과학에서 고체가 액체로 액체가 기체로 아니면 화학반응에서 분리와 화합의 임계점[Limen]이며, 어쩌면 인류학에서 하나에서 또다른 하나로 나아가는 전환점[TurningPoint]으로서의 망설임과 주저함의 경계[Liminality]이기도 하다. '뭐 어때. 옥석은 들어온 다음에 가리면 되지.' 이처럼 쉽게 생각하는 종교의 자유가 도래한 시절, 세례를 받고 난 이후 십프로도 될까말까 한 신앙인들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그 중 심지어는 세례받은 다음날부터 냉담으로 이어지는 경우까지 있다. 이 모든 이유를 건축적 요소의 결핍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억지로 꿰어맞추는 견강부회[牽强附會]인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 상징성만이라도 간직할 수 있는 장치가 있었더라면 지금같은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일까. 그런 흔적들을 더러는 돈이 없어서 더러는 잊고 있어서 내버려둔 채로의 어은공소, 신성공소, 되재공소, 화산성당, 수류성당 등이 지방문화유산 국가문화유산 세계문화유산 등으로 나아갈 잠재성과 가능성을 가졌다는 것은 바로 이런 대목들 때문이다. 박해시절을 회상한다.

 

       "'너 이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문턱을 넘어서는 것이며,

        신앙을 위해서 죽을 각오까지 돼있다는 것이야.

        그래도 넘을래[?]' "문턱은 재차 묻는다.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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