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 항쟁의 대상 ,
성서조선 第 94 號 (1936年 11月)
우리를 ‘무교회주의자’ 라고 지목하면서 ‘교회에 반항하며, 교회를 공격하는 것이 무교회주의다. 교회와의 대립 항쟁만이 그 존재 이유이다’ 라고 말들을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기성교단에 대한 싸움꾼으로 우리 소위 무교회주의자들을 충동하여 내세우자는 나쁜 뜻이 아니라면, 무교회주의에 대한 심한 무지에서 내린 ‘주관적’ 독단일 뿐이다.
‘기독교는……언제든지 사명적인 싸움을 짊어지고 있다’ 하는 말은 맞다. ‘역사적 기독교가 다 전투의 종교였다’ 하는 말도 사실 그렇다. 이는 ‘기독교’ 라는 것이 본래 그렇다는 말이다. 모든 기독교가 다 그래야 할 것이다. 무교회주의에 국한된 말이 아니다.
‘무교회주의이면 교회와의 대립 항쟁에만 그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라’ 함은 무교회주의에 대한 얕은 식견이며 독단이다. 이는 무교회주의를 크게 그릇되게 하는 견해이다. 우리더러 기탄없이 말하라면 다음과 같이 말하리라.
“최태용(崔泰瑢) 목사는 실체의 무교회주의에서 호흡하며 살아 보지도 못하고, 신학적 사색의 관습으로써 관념적으로 자기 나름의 무교회주의를 만들어 놓고는 거기에다 의미를 부여하고 공격하는 것같이 보인다.”
우리 무교회주의자는 종교 전문학자 또는 직업적 종교가가 아니다. 보통 사람이며, 전문으로 하거나 직업으로 하지도 않는 ‘문외한’이다.
평범한 인간이고 신학자가 아닌 까닭에 악의가 없다. “무교회주의이면 교회와의 대립 항쟁에만 그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다” 라는 승려 냄새 분분한, 법의를 입혀 놓은 정의 같은 문구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싸울 때는 뿔이 부러지게 싸우다가도 협력할 때는 ‘무교회자’인 자기의 입장을 망각한 듯이 협조도 하며 찬동도 한다.
조리 정연한 체계와 규범에 의하여 적이라면 밤낮을 잊고 싸우려는 것은 신학자적 생각일 뿐이다. 우리는 때로는 싸우며 때로는 화협하여 고집할 입장도 없는 듯하고, 궤도도 정해지지 않은 것 같아서 앞뒤가 모순된 것이 무교회자의 걸음이다.
무교회주의의 본령은 소극적으로 대립 항쟁 함에 있지 않다. 적극적으로 진리를 천명하며 복음에 생활하는 데 있다. 때로 항쟁이 없지 못하나 이는 진리가 현현하며 생명이 성장하는 길에 장애물을 만났을 때의 일시적이며 불가피한 현상이다.
무교회라고 해서 교회만이 그 항쟁의 대상은 아니다. 무교회자는 개념에 사는 학자가 아니요, 현실 세계에 생활하는 산 사람인 까닭에 그 시대 그 사회의 현실에 착안하여 싸운다.
오늘날 조선교회를 공격하는 것은 특별한 용기가 필요 없다.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각자 교파의 내분으로 빈사 상태에 놓인 조선교회들을 추궁하는 것은 우리 보통 인간의 심정으로는 즐거운 일이 아니다.
무교회는 ‘교회’ 와만 싸우는 것으로 알고 있는 데에 승려적 편협이 있다. 교회 이외의 것과도 싸우는 데에 무교회의 정신이 있다. 과연 누가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인가는 주 예수의 은총을 기다려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