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안에 가장 아름다운 성당 전동성당과 진산성당
글. 길 위의 인문학 우리땅 걷기 운영자 sji
나라 안에 가장 아름다운 성당 전동성당과 진산성당
우리나라에서 아산의 공세리 성당, 횡성의 풍수원 성당과 함께 가장 아름다운 성당중 한곳으로 알려진 전동성당은 1908년부터 시작되어 20여 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당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이 성당 자리는 천주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곳이다.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그리고 권상연이 참수형을 당한 곳이다.
세례명이 바오로인 윤지충은. 전라도 진산현(지금은 충청남도 금산군에 속함) 출신으로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외사촌이다.
1783년 5월에 생원시에 합격한 윤지충은 정조 8년인 1784년 겨울 서울에 머물 때 김범우(金範禹)로부터 처음으로 천주교 서적을 빌려보았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787년 다산의 형인 정약전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윤지충은 정조 13년인 1789년에 중국 베이징에 가서 견진성사(堅振聖事)를 받고 돌아왔다. 그 뒤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심하여 시골집에 숨어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신앙을 지키던 중, 정조 15년인 1791년 그 어머니 권씨(權氏)가 별세하자 장사를 지낼 때 천주교 교리에 따라 신주르 불사르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곧 친척과 유림에게 알려져 불효자라는 지탄을 받게 되었고, 이것이 관가에 알려지자 진산 군수 신사원(申史源)은 조정에 고발을 하였다. 윤지충은 사건이 확대되자 충청도 광천으로 피신해 있다가, 숙부가 대신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791년 11월 21일에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진산 군수 신사원은 그들을 달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릴 것을 권유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문초를 당하면서도, 오히려 교리의 타당함을 주장하여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였고“절대로 신앙만은 버릴 수 없다”고 대답했다.
아래의 글은 윤지충이 진산에서 전주 감영으로 압송되어 오면서 남긴 글이다.
“29일. 첫닭이 울 때 길을 떠났다. 신거런 주막에서 처음으로 쉬면ㄷ서 조반을 먹었고, 그 다음 개바우에서 두 번째 쉬며 말을 먹였다. 해가 질 무렵에 안덕원에 있는 고관들의 여인숙 근처를 지나서 조그만 산등성이를 넘자, 우리를 데리러 오는 감영 나졸들을 만났다.
수많은 포졸들이 큰 고함을 지르며 걸어오는데, 어떻게나 소란을 파우던지 우리를 잡는 것이 큰 도둑이나 잡는 것 같아 보였다. 우리는 남문 안에 있는 감영으로 끌려갔는데, 아주 컴컴하고 밤이 으슥하였으므로 우리 좌위에 횃불을 켜놓고, 우리를 중군 아문으로 끌고 갔다.“ 중군이 우리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성명이 무엇이냐.?”
전주 감영으로 이송된 뒤 윤지충과 권상연은 자신들이 아는 천주교 신자들의 이름을 대지 않았다. 오히려 윤지충은 제사의 불합리함을 조목조목 지적했고, 혹독한 형벌이 가해지기도 했다.
당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의 기록을 보자.
.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한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그해 12월 8일 전주(全州) 형장(지금의 전동성당 자리)에서 불효와 불충 그리고 악덕의 죄로 처형되었고, 조선 천주교 사상 최초의 조선인 순교자가 되었다. 이 사건을 신해사옥(辛亥邪獄 : 진산사건 珍山事件)이라 한다.
그날 정조 15년인 1791년 11월 8일 자 <조선왕조실록> “윤지충과 권상연을 사형에 처하다.” 라는 기록을 보자.
“전라도 진산군은 5년을 기한으로 현으로 강등하고 53 고을의 제일 끝에 두도록 하라. 그리고 해당 수령이 그 죄를 짓도록 내버려 두었는데, 그가 감히 관청에 있어서 몰랐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가 먼저 적발했다는 것을 가지고 용서할 수는 없다. 일전에 계사에 대해서 역시 일의 결말을 기다려 처분하겠다고 비답하였으니, 해당 군수는 먼저 파직하고 이어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법에 따라 무겁게 처벌토록 하라.”
큰 역적이 난 고을은 고을을 없애버리고 그가 살던 집마저 숯불로 지지고 못을 파서 연못을 만들었던 것이 조선왕조의 엄혹한 법 집행이었다.
왜냐 그 집을 그대로 두면 그곳에서 나는 풀이나 나뭇잎을 노새나 염소가 먹고도 역적질을 한다고 여겼던 것이 그 시대의 풍속이었다.
그보다 앞서 종교적으로 파문당하고 온갖 고난을 통하여 세계 철학사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 네덜란드의 스피노자였다. 그는 1656년 이단의 혐의로 교회의 장로들 앞에 소환되었다. "신은 신체, 물질의 세계를 갖고 있고 천사는 환상이며 영혼은 단지 생명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고 친구들에게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장로들은 "그 말이 사실이냐"고 그에게 물었고 장로들은 차선책으로 교회의 신앙에 대해 표면상의 충성이나마 서약한다면 5백달러의 연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것을 거절한 스피노자는 1656년 7월 27일 헤브라이의 음울한 종교의식의 온갖 절차를 밟아서 파문되었다. 그 때의 상황이 그레츠의〈유태인의 역사〉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저주의 말을 읽는동안, 때때로 큰 각적의 울부짖는 듯, 느린 곡조가 들렸다. 식이 시작될 때에는 환하게 켜있던 등불은 식의 진행에 따라 하나씩 꺼지고 드디어 마지막 등불이 꺼졌고(파문당한 사람의 영적 생명의 소멸을 상징한다.) 회중은 칠흑 같은 어둠에 파묻혔다.
그는 파문을 받아들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해서는 안될 일을 파문이 나에게 강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그를 쫓아냈고 누이동생마저 그의 얼마 되지 않은 유산을 독점하고자 했으며 친구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외면했다. 유태민족 전체로부터의 고립과 생명을 위협당하는 속에서 암스테르담의 교외인 아우테르레크가의 조용한 다락방으로 거처를 옮긴 그는 베네딕트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했다.
그는 직업으로 어린아이를 가르치다가 안경의 렌즈를 갈아 생계를 꾸려가며 연구에 몰두했고 살아 생전 두 권의 책을 냈다.〈데카르트의 철학적 원리〉와 익명으로 발표된〈신학정치론〉그 책을 읽은 어떤 사람들은 스피노자를 "일찍이 지구상에 산 무신론자중에 가장 불경스러운 무신론자"라고 했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불멸의 보고"라고 했다.
지금은 세계철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스피노자를 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체념해야 한다.”고 말하고, "울지 마라, 화내지 마라, 이해하라"고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면서 자기 신념을 지킨 스피노자나 종교적 신념을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윤지충이나 권상연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윤지충과 권상연의 시신이 유항검의 고향인 초남이 성지에서 발견된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였다.
이 문제로 인하여 조정은 서구 문화의 도입을 반대하던 공서파와 천주교를 믿거나 묵인하는 신서파로 분열해 대립하기 시작했다
윤지충. 권상연이
나고 자란 금산군 진산면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인
그들이
전주 전동성당 자리에서
참수 당하고
이 지리에 성당이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