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뇌수해[雷水解] 赦過宥罪 解 , 풀다, 풀리다, 흩어지다, 벗다, 용서하다, 놓아주다, 풀이하다, 깨닫다. 위는 우레 雷 아래는 물水가 解 해궤다. 마흔 풀어가는 괘가 解해괘다. 험한 것을 겪고 난 이후에 해결되는 解괘로 받은 것이 아닐까?
解, 利西南, 无所往, 其來復, 吉. 有攸往, 夙(숙-이르다), 吉. 서남이 이로우니 갈바가 없으며 돌아오는 것이 좋다. 갈 수 있으면 빨리 마쳐야 한다. 해원 해탈 탈갑(解願 解脫 脫甲), 해결이다. 해방이다. 해탈이다. 解寃 해원이다. 마침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고, 가슴에 맺혔던 원통함이 풀어지고 인과(因果)에 의한 번뇌, 욕망, 탐욕으로 인한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서남이 이로움은 평탄하다는 뜻이다. 평상심이다. 잃어버렸던 나로 돌아오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나를 결박했고 또 내가 나를 풀어 벗어나 내가 나된 것이 해방이다. 스스로 얽메이고 갇히고 스스로 결박당한 난, 내가 나 자신을 풀어야 한다. 其來復 기래복은 내가 나로 돌아온 것을 말한다. ‘He came to himself’ 마침내 그가 그 자신에게 돌아왔다. I am that I am’ 이다. 夙 숙 빨리 빨리 처리해야 한다. 길 길이 있으면 어서 서둘러 가야 한다. 근심 걱정이 있으면 빨리 제거해야 한다. 아니면 멈추고 끝내고 얼른 그쳐야 한다. 세상으로부터 나로부터 자유을 원하거든 얼른 때려 치고 자유해야 한다, 구만리 남쪽바다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평생 노예로 머슴으로 살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의 몸이 되게 하셨으니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마십시오. (갈라디아 5:1)"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에게는 이미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 자유는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자유입니다.(갈라디아 5:13) 彖曰, 解, 險以動, 動而免乎險, 解. 위험으로 인한여 움직인다.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게 해방이다. 내가 부자유하면 괴롭다. 타인도 구속하면 괴롭다. 나와 동시에 타자도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인륜이다. 이것이야마로 해 解다. 解, 利西南, 往得衆也 서남이 이로움은 가서 민중을 얻는다. 모든 부자유하고 얽매인 사람들이 풀려난다. 바이러스의 무덤에 갇힌 사람들을 구한다. 성인의 역할이고 국가의 역할이다. 모두에게 어둠에서 나올 것을 독려하고 비행기를 보낸다. 其來復吉, 乃得中也 떠난 나로 돌아와서 풀림은 득중, 중정을 얻음이라. 철이 들고 눈을 뜨니 중용을 알았다. 이는 지적인 탁월성 Ethos Arete 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Mesotes)과 자사자의 중용 中庸과 다를 바 없다. 有攸往夙吉, 往有功也 할 일이 있으면 빨리해야 좋다. 天地解而雷雨作, 雷雨作而百果草木, 皆甲拆, 解之時太矣哉. 하늘이 풀리면 우레가 울고 비가 내린다. 오곡백과와 초목들이 다 껍질을 벗고 싹이 튼다. 難極則必解. 어려움이 끝까지 가면 반드시 풀린다. 雷雨作而春意解. 坎在上卦則爲雲, 坎在下卦則爲雨. 우레와 비가 일어나 봄의 뜻이 풀림이니 감괘(坎卦☵) 상괘에 있으면 구름이 되고 하궤에 있으면 비가 된다. 彖曰, 解, 險以動, 動而免乎險, 解. 해는 험난하고서 움직이니 움직여서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해방이다. 解, 利西南, 往得衆也, 서남이 이로움은 가서 많은 사람을 얻는다. 其來復吉, 乃得中也, 돌아와서 복됨은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有攸往夙吉, 往有功也. 명을 받들어 빨리 해결해야 뜻을 이룬다. 큰 공을 세운다. 天地解而雷雨作, 雷雨作而百果草木, 皆甲拆(탁), 解之時太矣哉. 천지가 풀리니 우레가 울고 그 사이에 비가 내린다. 오곡백과와 산천초목이 다 껍질이 터지니 해궤의 때가 크도다! 天地解, 蓋謂冬寒閉塞之氣, 至春而和解. 坎冬而震春也 천지가 풀리는 것은 겨울의 차가움으로 막혔던 기운이 봄이 와서 따뜻하게 풀림을 말한다. 감坎괘는 겨울이요 진震궤는 봄이다. 皆甲拆(탁)은 터진다는 뜻이다. 새싹이 트는 것이요 해방이 되는 것이다. 解之時太矣哉. 해방이 되는 때가 가장 중요하다. 해방되는 기쁨처럼 큰 것이 없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와 주기만 할량이면 나는 밤 하늘을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종을 울리오리다. 두개골이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무슨 한이 남으리잇가! 심훈의 해방을 맞이하는 감격과 환희, '그날이 오면' 이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象曰, 雷雨作, 解, 君子以, 赦過宥罪. 우레가 울고 비가 내리면 해방이 된다. 군자는 이것으로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해 준다. 사죄하지 않는다고 잘못했다고 나무라지 않고 그 죄를 그 악을 용서해 준다. 마치 아들과 딸이 잘못했다고 해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덮어주는 것처럼 말이다. 赦過宥罪 사괴유죄, 허물을 사하고 죄를 용서한다. 민중을 탓하지 않고 악마를 탓한다. 해충이 있어 먹히는 것이지 해충을 박멸하면 그놈들을 제거하면 옥수수가 온전하다. 백성들은 문제삼지 않고 탓하지도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따름이요 살고자 애씀이다. 初六, 无咎 象曰, 剛柔之際, 義无咎也. 흠이 없다. 강과 유가 만나니 의롭고 허물이 없다. 강한자와 유한자 사이에서 민중은 그냥 살 뿐이다. 초목처럼 순한 사슴처럼 살아낼 뿐이다. 九二, 田獲三狐, 得黃矢, 貞, 吉. 밭에서 세마리 여우를 잡는다. 득황시 得黃矢 황금 화살을 얻어 바르고 곧으니 이롭다. 금으로 만든 화살, 능력과 지혜, 사랑 이 세가지를 얻어 바로잡으니 좋은 일이다. 象曰, 九二貞吉, 得中道也. 곧게하여 길하니 중도를 얻음이라. 중도는 지혜와 용기 그리고 자비다.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이다. 六三, 負且乘, 致寇至, 貞吝. 짐꾼이 수레를 탔으니 도적을 부른다. 負且乘 부차승은 탐관오리다. 치구지 致寇至 도둑을 불러들인다. 도둑이 분수를 모르고 수레를 타 도둑들을 부른다. 한번 쿠테타를 해서 해먹으면 다름 놈이 나타나서 또 해먹는다. 민족을 반역한 역적놈이 대통령 노릇을 한다. 이를 본 강도가 또 대통령을 해먹는다. 象曰, 負且乘, 亦可醜也. 自我致戎, 又誰咎也. 짊어져야 하는 자가 수레에 탔으니 역시 추하지 않은가? 스스로 도둑을 불러드렸으니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리요. 민중이 검의 위력이 없어서이다. 민중이 힘이 없어서 自我致戎 제 집에 강도를 불러들였다. 민족반역자가 정권을 잡고 벼슬을 하고 전횡을 일삼는다. 한도 끝도 없다. 민중의 촛불혁명이 국가를 일으켜 세웠으나 악마의 발톱으로 할퀴니 해 낼 수가 없다. 너무 힘들다. 너무 아프다. 아! 又誰咎也 누구를 원망하리요? 九四, 解而拇(무), 朋至, 斯孚. 엄지발가락을 해결하면 친구가 찾아온다. 그들이 벗이다. 백성의 아픔과 슬픔을 알고 진실한 사람, 정도正道를 가는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象曰, 解而拇, 未當位也 엄지발가락을 풀어야 됨은 자리가 마땅치 않음이다. 六五, 君子維有解, 吉, 有孚于小人. 군자가 자기의 매인 바를 푸니 길하다. 진실함으로 소인을 대한다. 象曰, 君子有解, 小人退也. 군자가 자신의 문제를 푸니 악인이 스스로 물러간다. 자신의 문제를 풀 수 없는 사람은 타인의 문제를 알아도 풀 수 업다. 나를 알아야 한다. 빠뜨린 것이 아니라 빠진 것이니 維有解 유유해, 내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 극기복례 克己復禮 天下歸仁 자기를 이기고 사랑과 진리의 세계로 돌아와야 한다. 하루를 정신 차리면 영원히 정신차리게 된다. 하루를 다스리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 하루라도 내가 좋아지면 하루라도 남도 좋아진다. 내가 나빠서 안된다. 다 내 문제다. 上六, 公用射隼於高墉之上,
獲之, 无不利 높은 담 위에 새매(逐鷹鸇)을 잡으니 희망이 있다. 제일 큰 악, 내 속에 있는 逐鷹鸇鳥雀也 매를 낚아 채야 한다. 내가 없어져야 전체가 산다. 나는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다 하신 님의 은혜가 크도다. 내가 죽어야 너와 세상이 구원된다. 象曰, 公用射隼, 以解悖(패)也. 어긋난 도리, 즉 패도를 해결했구나. 내 안에 있는 악마를 찾아 제거하여 사랑과 정의, 바른 자리로 돌아왔도다. 일도출생사 一道出生死 뇌수해[雷水解] 赦過宥罪, 렘브란트의 자화상 " 돌아온 탕자" 를 기록합니다. 17세기 유럽 회화사상 가장 뛰어난 화가로 손꼽히는 인물, 빛과 어둠을 탁월하게 만졌던 명암법의 대가 렘브란트(1606~1669) 이 렘브란트 하면 떠오르는 작품이 지나칠 정도로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그 자신, 바로 자화상입니다. 허긴 그림을 시작해서 그림을 마칠 때까지 100여점이 넘는 자화상을 그려댔으니, 그의 주된 작품으로서 자화상이 연상되는 것이 당연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를 자세히 보면 그리 폼나고 잘생긴 인물도 아닌 것 같은데 주구장창 자신의 모습을 그린 이유가 뭔지 새삼 궁금해지는군요.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레이덴 지방의 방앗간 집에서 나서 그런대로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14살 때 레이덴 대학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자신이 그림에 남다른 소질이 있음을 깨닫고 '스바넨부르그'를 거쳐 '라스트만' 문하에 입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천재성과 화가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암스테르담 의사협회의 주문으로 그린 '툴프박사의 해부'가 미술계의 센세이션을 일으켜 작가로서 입지를 다지고 탄탄대로를 걷게 되지요. 이 시기에 명문가의 딸, '사스키아'와 혼인을 하는가 하면 당시 초상화의 일인자로서 돈과 명성을 쌓게 됩니다.그는 자신감이 충만했으며, 모든 일들이 다 자기 뜻대로 되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평면적인 초상화의 명인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하던 그도 더 이상 벽돌을 찍어내듯 그려대는 무미건조한 자신의 그림에 견딜 수 없게 되고 돌연 또 다른 세계를 향하여 뛰쳐나갑니다. 그 후로 다시는 평면적인 판박이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고 극적 명암효과를 강조한 렘브란트만의 전대미문의 그림을 그리게 되지요. 그러나 그 길은 위험천만한 길이었고, 그의 선택과 결정은 결국 사람들이 동경하는 돈 많은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원인이 됩니다. 급기야 '야경 夜警'의 제작을 고비로 한 순간에 붕괴되는 성서의 '욥'처럼 나락으로 치닫게 되고, 게다가 렘브란트에게 초상화를 맡기면 2~3개월이나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의뢰인이 뚝 끊겨 버립니다. 여러 사건 속에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 마저 죽자마치 복음서에 집나간 둘째 아들처럼 낭비와 추문으로 망가지고, 자신이 파괴되는 만큼 그의 명성과 재산도 송두리째 상실하고 맙니다. 그런가 하면 착한 '헨드리키에'와 재혼하기도 했지만 행복한 순간도 잠깐 곧 파산과 혹독한 생활고를 겪게 되고, 그의 유일한 희망이자 기쁨인 ' 사스키아' 사이에서 얻은 단 하나 뿐인 아들 ' 티투스' 마저 잃게 되는 기막힌 운명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런 끔찍하고 절망적인 상황속에서 그린작품이 복음서의 ' 돌아온 탕자' '전 세계 그림 가운데서 도달할 수 없는 절정'이라는 찬사를 받은 걸작으로 1667년경, 렘브란트가 죽기 2년 전에 그린 미완성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보면 아버지에게 돌아온 탕자를 완전 상그지로 그립니다. 이 거지는 '자화상'에서 늠름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과는 동떨어진 아버지로부터 떠나 깊은 시름과 절망 끝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잔혹한 운명을 짊어진 탕자, 아버지로부터 도망간 인류가 다 같이 겪는 비참한 꼬라지며, 그림 속의 탕자는 또, '렘브란트' 자신의 영혼의 '자화상'입니다. 이 그림은 집 나간 아들이 집에 들어 온 순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 아버지는 아들의 잘못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인양 오직 사랑과 긍휼의 눈빛으로 잃어버린 아들의 영접에만 집중합니다. 아들은 집 나갈 때의 저돌적이고 당돌함은 사라지고 마치 거지나 죄인처럼 아버지의 품에 안기고 있으며, 아버지는 무릎 꿇고 어쩔줄 몰라하는 아들의 가녀린 어깨 위에 손을 얹고 삶에 지치고 무거운 마음의 짐을 달래주고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아버지와 아들이 깊이 만나는 이 장면에서 그의 특유의 빛과 어둠의 기법을 살려 아버지의 자비의 얼굴에서 누더기를 걸친 아들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축복과 구원의 세계를 그려냅니다. 반면에 맨 우측의 장대같이 꼿꼿하고 뻣뻣하게 서 있는 이가 있으니, 이름하여 바로 큰 아들, 오랜 방랑 끝에 돌아온 동생을 보고 아버지의 반에 반만큼이라도 반갑게 맞이하기는 커녕 재판정의 맨 윗자리에 앉아 판결이라도 하려는 듯, 그 옛날 렘브란트가 잘 나가던 때 그린 젊은 날의 자화상처럼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야박하고 매정하게 구경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 편에선 돈관리인이나 법률 고문이나 될까요, 돈 줄인 큰 아들 옆에 낮은 자세로 딱 붙어 있는 집사는 한술 더 떠서 얼마나 심사가 꼬였던지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주판알을 튕기고 있는 모습입니다. 오히려 동병상련이랄까? 귀퉁이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는 시종의 눈빛이 한층 더 따사로워 보이는군요. 이 그림 속에 등장인물의 표정과 태도가 어찌 그리 리얼하고 섬세한지 혹, 렘브란트는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또 다른 자신의 자화상으로서 의식과 형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은 아닌지 착각을 일으킬 정도지요.
세월이 익어 렘브란트는 해질녘 인생의 마지막 추수를 앞두고 인간은 날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뛰쳐나간 존재요, 산다는 것이 아버지께로 받은 모든 재산을 다 탕진하고 거지처럼 생을 구걸하다가 마침내 빈털털이가 되어 집나간 아들을 찾으시는 아버지께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정말 자신의 처지가 거지나 탕자와 다를 게 없다는 점을 깨닫고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하여 '돌아온 탕자' 즉 자신의 마지막 '영혼의 자화상'을 그려낸 것은 아닐까요? 또한, 이 탕자는 바라보면 볼수록 어쩜 그렇게 내 속사람과 흡사한 건지, 이 불멸의 그림을 통해서 오히려 사람에게 간절히 비는 아버지의 신령한 자비와 은혜의 세계에 깊이 목도하게 됩니다. 한편 그에게 슬픈 은총이 더해져 이 최후의 미완성 그림을 그린 다음해 그의 전부인 맏아들이 죽고, 그 역시 아들이 죽은 이듬해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또, 빛과 온 우주의 신비가 지켜보는 가운데, '죄 없다' 선언하신 아버지의 뜨거운 영접을 받으며, 신성의 품에 안겨 고이 잠들게 됩니다.
sial (202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