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에 보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마음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머무는 곳이며 근심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마음이 흔들리는 상태이다.
예수님께서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로 인해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라는 뜻이다.
제자들은 누군가가 예수님을 팔 거라고 하시며 제자들이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간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어디로 가시는 건지 그리고 또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한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혹시나 정말 바리새인들에게 잡혀서 죽게라도 되시나 하고 심히 걱정과 근심에 사로잡혔다.
지금까지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이제는 주님 없이 남겨진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밀려왔던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근심거리는 일상의 사소함 보다는 궁극적으로 죽음에 관한 문제가 가장 크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앞으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보이는 것에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신뢰하라는 말씀이다.
2절에 보면..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아버지의 집이란 천국을 의미하며 천국에 거할 곳이 없다면 제자들에게 말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거처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말씀은 십자가를 통해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길을 여신 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처소는 인간의 힘으로는 갈 수 없으므로 주님께서 길을 열어주셔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십자가는 주께서 마련하신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며 죄인 된 우리에게는 생명의 문인 것이다..
허물과 죄로 인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던 우리를 위하여 주님께서 친히 그 길이 되어 주신 것이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주님께서 먼저 가셔서 영원히 거할 처소를 준비하고 다시 오셔서 제자들을 그곳으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하신다.
잠시동안의 이별로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라고 하신다.
제자들은 아직 이 말씀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실제로 예수님께서 어딘가로 가신다고 생각하였다.
4절에 보면..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우리는 이 말씀이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 제자들은 당혹스럽고 의아했을 것이다.
그러자 도마는 그 말씀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정확히 알고자 예수님께 묻는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사람들은 흔히 도마를 의심이 많은 제자라고 기억하지만 이 질문은 의심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마음이다.
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척하지 않았고 이해되지 않는 것은 예수님께 솔직하게 묻는 성품이다.
어쩌면 신앙 안에서 "왜?"라고 묻는 것은 불신앙보다는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6절에 보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에 길과 진리와 생명에는 'The'라는 정관사가 각각 앞에 붙어 있어서 유일한 하나라는 뜻이다.
도마의 질문은 예수님께서 길이 되시고 그 길이 진리와 생명으로 통하는 길이라는 말씀을 듣게 되었다.
만약 도마가 어디로 가시는지 묻지 않았다면 이 귀한 말씀을 듣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도마나 제자들의 생각에는 목적지를 알아야 길도 알 수 있다고 여겼으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길은 다르셨다.
목적지로 가는 길과 방법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영적인 길로 가는 길을 알려 주신 것이다.
제자들은 아직 십자가도 부활도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뜻도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이라고 하신 것은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어서 자신의 노력이나 선행으로는 결코 하나님께 갈 수 없다.
구약에서는 죄 씻음을 위해 사람 대신 짐승을 죽여 그 피를 뿌려야만 하나님께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세상은 진리를 찾고 도를 깨달으려면 수행을 하여 높은 경지에 이르면 된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진리를 찾아 올라가는 방식을 알려주고 있지만 결국은 자신이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길과 진리를 가르쳐 주신다고 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바로 그 길이라고 하신다.
즉 사람이 구원의 길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다.
죄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나 공로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단순히 육신의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다.
마치 태아가 탯줄을 통해 어머니로부터 생명을 공급받듯이 믿는 자는 예수님과 연결되어 생명을 공급받는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예수님이 길이시고 진리이시고 생명이라고 연결해서 말씀하신 것일까?
사람은 무엇이 옳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또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질문을 안고 살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 진리를 먼저 찾으려 하나 예수님께서는 진리보다 먼저 자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셨다.
바른 진리의 길을 찾아야 하는데 길을 잃은 사람은 아무리 좋은 진리를 알려 주어도 모르는 것처럼
먼저 참된 길을 만나야 비로소 진리를 알게 되고 생명의 길인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참된 길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면 실패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면서 진리를 깨우쳐 알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알게 된 진리는 단순한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진다.
길과 진리와 생명은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예수님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7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이번에는 빌립이 예수님께 묻는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빌립은 현실적인 사람으로 오병이어 때에도 이 사람들을 먹이려면 200 데나리온이 필요하다고 했던 사람이다.
빌립이 이해할 수 있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고 있으니 예수님께서 참으로 난감하셨을 것 같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빌립에게 책망하시기보다는 따뜻하게 말씀해 주신다.
지난 삼 년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는 모습을 보아 왔다.
제자들은 비록 그 의미를 모두 이해하지는 못하였지만 이미 예수님과 함께 그 길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니 제자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목적지를 보여 달라고 기도하나 주님께서는 목적지보다는 주님을 먼저 보라고 하신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세상적인 부유함과 지식이 아니라 길이 되어 주신 예수님 그분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10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는 것이라."
이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게 하고 나타내시는 분이시므로 예수님을 바로 알면 하나님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즉 예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도 내 안에 계심을 믿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이 말씀은 지금까지는 제자들이 잘 모르겠지만 이제 곧 예수님이 누구신지 점점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시다.
아직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이므로 제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12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큰 일을 한다는 말씀은 예수님보다 더 큰 능력을 행한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말씀하신다.
각지로 흩어져 복음을 전함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것이므로 큰 일을 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는 인간의 몸으로 계셨기에 여기저기로 옮겨 가실 수 없지만
이제 제자들은 각지로 흩어져 복음을 전함으로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보다 더 넓은 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것이므로 큰 일을 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13절에 보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주시겠다고 하여 우리의 욕심대로 구해도 주신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구해야 하며 그것을 응답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지
우리의 욕심대로 구하면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이 되므로 그것은 영광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되 어떤 때는 즉시 응답하시고 어떤 때는
기다림과 인내를 통해 응답하시며 어떤 때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하지 않으시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기 전에 구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된 일인가를 먼저 알고 구해야 한다.
15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새 계명은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게 된다
우리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먼저 마음이 그 사람으로 향하게 되고 뭐든지 다 해 주고 싶어 진다.
주님을 사랑하면 말씀이 다 사랑으로 들리고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여 그 사랑을 전하고 싶어진다.
여기서 "지키라"는 말씀은 단순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간직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삶 속에서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자가 된다.
16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라."
또 다른 보혜사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이며 곁에서 도와주고 위로하며 변호해 주는 자를 의미한다.
제자들을 떠나시더라도 홀로 두지 않으시고 영원토록 함께하실 성령님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성령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시며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17절에 보면..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시기에 진리의 영이라고 불리신다.
성령님께서는 때로는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때로는 사명을 맡기시며 연약할 때에는 위로와 힘을 주신다.
또한 우리의 상담자가 되어 주시고 보호자가 되어 주시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늘 함께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지만 성령님을 보내심으로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19절에 보면..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을 들었지만 그 의미를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곧 닥쳐올 십자가와 제자들이 겪게 될 절망을 모두 알고 계셨다.
얼마 후면 예수님은 붙잡혀 가시고 심문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며
제자들은 믿고 의지하던 주님을 잃었다고 생각하며 두려움과 슬픔 속에 숨어 지내게 될 것이다.
그런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다시 살아나게 되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마치 자녀를 두고 먼 길을 떠나는 부모의 마음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겪어야 하실 고난보다도
남겨질 제자들이 겪어야 할 일에 더 마음 아파하시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죽는 것이 아니고 다시 살아나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줄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격려해 주신다.
주님께서는 죽음을 향해 걸어가시면서도 그분의 마음은 끝까지 제자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계셨다.
20절에 보면..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날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성령님이 오시는 때를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의 곁을 떠나시겠지만 그것으로 주님과 끊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신다.
3년 동안 주님 곁에 있으면서 눈으로 보며 따라다닐 때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였으나
성령님께서 임하신 후에는 주님께서 자기 안에 계시고 자신도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오히려 성령님께서 오시면 제자들은 이전보다 더 깊이 주님과 하나 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21절에 보면..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주님의 말씀을 지키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억지로 순종하여 사랑을 얻으라는 뜻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기쁨으로 순종한다는 뜻이다.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말을 소중히 여기고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고 싶어 한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원하게 된다.
또한 주님께서는 그렇게 사랑 안에서 순종하는 자에게 자신을 나타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잘 안다고 뽐내며 자랑하는 사람에게 나타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을 알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가는 사람을 더욱 사랑해 주시는 것 같다.
22절에 보면..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이 사람은 야고보의 동생 유다를 가리키며 그는 예수님의 제자 다대오이다.(마태 10:3)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다대오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와 진리에 대하여 자세히 가르쳐 주시면서
어째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메시아의 영광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으시는지 묻고 있다.
그러나 다대오의 질문은 예수님의 사역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질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지난 3년 동안 말씀을 전하며 병든 자를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시며 자신을 보이셨으나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이며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믿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은 눈으로 기적을 본다고 해서 모두가 다 믿게 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표적을 본다고 해서 오는 게 아니라 마음이 열리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생겨난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빛으로 오신 주님을 거절한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23절에 보면..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다대오는 왜 세상에 나타내 보이시지 않으시냐고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른 말씀으로 답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지킬 것이나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대오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면 모두가 믿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영광을 얻으시려 하심이 아니라 만민의 구원을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자신을 억지로 나타내시는 분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지키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 즉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를 그 사람 안에 거처를 정하시고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께서 건물인 성전이 아니라 믿는 자들의 마음 가운데에 거하신다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성전으로 찾아오신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전을 우리 마음에 간직하게 되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찾아 오신다는 뜻이다.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말씀을 지키게 되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말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된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말씀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거절하면 하나님을 거절 함과 같은 의미가 된다.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항상 빛과 어둠, 믿음과 불신, 사랑과 거절 이렇게 두 가지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였다.
그러므로 요한은 말씀 안에서 "너의 마음은 지금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느냐" 하고 우리에게도 묻는 것 같다.
25절에 보면..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제자들이 지금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시게 되면
성령님이 제자들 마음 안에 오셔서 이 모든 것을 깨달아지게 하고 생각나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세상에 많은 종교들 가운데 이렇게 영을 보내서 사람을 돕게 하여 진리 가운데로 이끄는 종교는 없다.
오직 기독교에서만이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가르치고 위로하며 도우시는 분이 계신다.
그래서 기독교를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 올라가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신앙이라고 한다.
불교는 사람이 수행과 명상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 해탈에 이르게 되면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하고
유교는 도덕과 예절과 올바른 삶을 강조하지만 돕는 영이 사람 안에 거한다는 개념은 없다.
이슬람은 알라를 믿으면서 알라는 초월적인 분으로 이해하나 성령님의 존재를 나타내지는 않는다.
세상의 많은 종교는 사람 스스로 수행하고 노력함으로 그 진리를 찾아가도록 가르치고 있으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에게 찾아 오심을 말하고 있다.
27절에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평안은 히브리어로 '샬롬'이다 우리나라도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도 평안하신 지를 묻는 말이다.
여기서 "끼치노니"라는 말은 '남겨 두다', '유산으로 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면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제자들에게 남겨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평안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도 아버지를 신뢰하며 흔들리지 않으셨던 평안이다.
아기가 엄마의 등에 업혀 있으면 그 어떤 위험이 오더라도 평안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에서 오게 된다.
믿음 안에서는 어려움이 오더라도 주님께서 선한 뜻 가운데로 인도하심을 믿기에 평안을 누리나
믿음 없이 남을 이기고 높아지려는 마음은 끊임없는 불안과 염려로 인해 결국 스스로 불행해진다.
그러나 남을 사랑하고 섬기려는 마음에서 돕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므로 평안을 주신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나니"
요한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도 세상의 평안과 주님의 평안 이 두 가지의 의미로 비교하고 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그 시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로마가 주는 평화 '팍스 로마나'를 뜻한다.
로마는 점령지역의 식민지 백성들에게 로마의 지시를 잘 따르면 그 대신 로마의 평화를 주겠다고 하였다.
실제로 어떤 나라는 자기들의 힘으로 독립이 어려워 로마에게 항복하여 스스로 평화 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로마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십자가와 같은 아주 참혹한 처형을 당해야 하고 무엇 보다도
로마의 황제는 신으로 숭배해야만 하기 때문에 사실상 권력의 힘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잠정적인 평안이다.
그러므로 로마의 평화는 이 땅에서만 누리는 평안이지 로마 황제를 섬겨야 하니 그 끝은 멸망의 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안은 환경에 따라 사라지는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오는 평안이다.
이 땅에서도 물론이고 죽어서도 영원히 이어지는 평안이기에 예수님께서 이 평안을 주시려고 오신 것이다.
로마는 권력으로 평화를 만들어 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샬롬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을 뜻하지만 여기서의 평안은 예수님께서 누리셨던 평안을 뜻한다.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공격해도 흔들리지 않으셨던 그 평안함 폭풍우 속에서도 잔잔케 하셨으며
귀신을 책망하고 쫓아 내시며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으시는 그 평안함을 뜻한다.
근심과 두려움은 마음이 상황에 사로잡힐 때 점점 커지게 된다.
두려움에 붙들리면 사람은 흔들리고 조급해지며 눈앞의 힘을 의지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 계실 것이니 어떤 일이 있더라도 두려워하지도 근심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28절에 보면..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들었으니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에 근심했지만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기뼈 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 땅에서의 사명을 마치시고 다시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로 돌아가시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께서 떠나심으로 보혜사께서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지는 과정이었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땅에 계신 동안 영광을 취하지 않으시고
낮아지신 겸손을 의미하며 예수님의 사역이 '중보자'로서 아버지께 종속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29절에 보면..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말씀하심으로 그 일이 실제로 이루어질 때
제자들이 두려움에 머무르지 않고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 하셨다.
30절에 보면..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여기서 세상의 임금은 사탄을 가리키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 세력을 가리킨다.
이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실 시간이 되었기에 제자들과 긴 말씀을 나누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유다의 배신과 종교지도자들의 음모와 그리고 로마의 재판이 이어지게 될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탄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관계할 것이 없다고 하신다.
이는 사탄이 예수님을 지배하거나 굴복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 안에는 사탄이 붙잡을 죄도 없고 정죄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사탄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이었기 때문이다.
31절에 보면..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피할 수 없어서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사랑하시기에 순종으로 나아가신다.
십자가는 억지로 끌려가신 길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선택하신 순종의 길이었다.
사탄은 예수님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 했지만 그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완성되어 갔다.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이제 말씀의 시간이 끝나고 십자가를 향한 순종의 걸음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곳에서 떠나셔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자고 제자들을 이끄신다.
예수님께서는 늘 그래 오셨듯이 기도 하심은 십자가를 피할 방법을 찾으러 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 기도하러 가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
어렵고 힘든 일이 앞에 놓이면 우리는 우선 먼저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부터 생각한다.
머릿속에는 무수한 생각들이 떠오르고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하는 고민 속에서 결정을 내리려 한다.
그러나 나의 계획 앞에 반드시 해야 할 것은 먼저 하나님께 기도부터 하시는 주님을 닮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내 뜻을 관철시키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할 힘을 얻는 시간이다.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할 때 우리의 생각들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게 되므로
그렇게 되면 주님의 뜻도 알게 되고 그분의 손길을 보게 되며 가야 할 길도 점차 분명해지게 되기 때문이다.
"주님 내게 왜 이런 일이"... 이런 기도가 "주님 이런 일도 감당하게 하소서"로 성숙한 기도로 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