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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알아가기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의 비유(내 안에 거하라)

작성자마당|작성시간26.06.07|조회수55 목록 댓글 0

예수님께서는 14장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떠나실 것이라는 말씀 하시면서

주님께서 가시더라도 염려하지 않도록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어 제자들을 도우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세상이 주는 평안을 따라가지 말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 안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다.  

 

이때는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마치신 목요일 저녁으로 다음 날 잡히시기 전날 밤이었다.

그날 밤 잡히시고 밤새도록 고난을 당하시고 다음날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오후 3시에 운명하셨다.

그 전날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는 길에 포도나무를 보시고 마지막 비유를 들려주신다.

 

1절에 보면..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시고 하나님을 포도나무를 가꾸시는 농부라고 하셨다.

포도나무라 하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은혜를 사람들에게 흘려보내시는 분이심을 나타낸다.

하나님을 농부에 비유하신 것은 포도원을 돌보시며 가지를 가꾸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농부가 열매를 맺을 가지를 선택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돌보시며 열매 맺도록 인도하신다.

 

2절에 보면..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여기서 제거한다는 말로 번역된 '아이로'는 들어 올리다는 뜻으로 성경 여러 곳에서 사용된다.

 

중풍병자에게 침상을 들고 가라고 하실 때에도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고,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돌을 옮기라고 하실 때에도 사용되었다.

또한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남은 조각을 거두어들일 때에도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농부가 땅에 늘어져 있는 가지를 들어 올려서 햇빛을 받게 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돕는 모습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제거한다는 의미로도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열매 맺는 삶을 위하여 우리를 돌보신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포도나무를 왜 들어 올리고 제거해야 하는가에 의문이 간다.

이스라엘 지역은 우리나라와 기후가 달라서 그들이 재배하는 방식과 우리의 방식이 다르다.

이스라엘은 건조한 기후이므로 비가 내리지 않고 사막화되어 있기 때문에 수분이 부족하다.

그래서 포도나무 가지를 땅에 펼쳐 놓아 아침에 내리는 이슬을 통해 수분과 양분을 공급받게 하였다.

 

그러나 열매를 맺을 시기가 되면 가지를 들어 올려 울타리나 지주대에 매달아 주어야 한다.

그대로 땅에 방치하면 먼지와 흙에 묻혀 썩거나 부패하여 포도나무 가지가 병들 수 있기 때문이다.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는 길에는 포도나무가 많아서 제자들에게 포도나무를 비유로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가시고 나면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세상을 떠나거나 벗어나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려면 주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들어 올려 주실 때에야

비로소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절에 보면..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깨끗하여졌다는 말씀은 죄에서 씻음을 받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가지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가지가 깨끗하게 되었다고 해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

뿌리로부터 올라오는 수분과 양분을 공급받아야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영적인 생명과 능력을 공급받을 수 없다.

포도나무 가지의 역할은 오직 열매를 맺어 농부를 기쁘게 해 주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함으로 사랑과 순종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5절에 보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포도나무에는 많은 열매가 맺히지만 모든 열매가 다 좋은 열매가 되는 것은 아니다.

농부는 좋은 열매를 맺도록 가지를 들어 올려 돌보고 다듬으며 열매를 해치는 것은 제거한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를 그대로 두면 양분만 빼앗아 가게 되므로 결국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없게 된다.

 

농부는 가지치기를 통하여 포도나무가 더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가꾸어 간다.

그러나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가지는 더 이상 양분을 공급받을 수 없어 결국 마르게 된다.

뻗어 나가려고 하는 것보다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가지 말고 꼭 붙어 있어야 하는 게 우선순위이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알고 있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인정하고 늘 주님과 동행하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영적인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풍성히 맺게 된다.

 

7절에 보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주신다는 이 말씀은 자신의 욕심으로 구하는 것 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주님 안에 거하며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구해야 다 들어주신다는 말씀이다. 

감당할 수도 없는 것을 구해서 만약에 주시게 되면 오히려 그것이 그 사람을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구하느냐보다 먼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주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의 기도도 주님의 뜻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약속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주님 안에 거하는 자의 기도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가 되는 것이다.

 

8절에 보면..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열매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삶이 바로 열매 맺는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열매에는 사랑과 섬김, 순종과 믿음 등 하나님을 향한 삶의 모습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열매가 맺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 열매를 맺듯이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주님을 닮아간다.

반대로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영적인 생명력도 점차 약해지게 되면서 하나님과 멀어져 간다.

그러므로 열매는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예수님의 제자라고 인정을 받게 된다는 말씀이다.

 

9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사랑하셨다는 것은 좋아한다는 의미를 넘어 깊은 교제와 친밀한 관계 안에 거한다는 뜻이다.

그동안 요한복음은 주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거듭난 자, 생명의 약식을 먹는 자,

주님의 빛 가운데 거하는 자라고 말씀하였으나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 안에 거하라고 하신다.

생명의 양식을 먹는 것이 주님의 말씀을 항상 늘 묵상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면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주님과 사랑으로 교제하는 친밀한 관계 가운데 살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사랑하는 독생자를 우리의 죄를 위해 이 땅에 보내 주셨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 주셨다. 그러므로 그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으니 주님께서 바로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10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거하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 처럼 예수님도 제자들을 사랑하니 그 사랑안에 거하라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킨 것 같이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계명을 지키라고 하신다.

 

그런데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계명을 지켜야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계명을 지켜야 비로소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이미 사랑받고 있는 자가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살아가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아버지와의 사랑의 관계 안에 거하셨던 것처럼,

제자들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주님과 더욱 깊은 교제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희생의 사랑이다.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면,

예수님의 새 계명은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계명이다.

예전에는 짐승의 희생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갔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11절에 보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려면 계명을 지키게 되고 주님과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면 기쁨이 생긴다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억지로 순종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거하면 참된 기쁨으로 이어진다는 말씀이다.

 

세상에서의 기쁨은 돈이나 성공에서 찾게 되지만 거기서 얻어지는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쁨이므로 환경이 변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께서 곧 체포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데 그것조차 기쁨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12절에 보면..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의 사랑 안에 거하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그 사랑은 제자들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흘러가야 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신다.

 

13절에 보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주님을 믿는 자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 주실 것을 앞두고 가장 큰 사랑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신다.

세상은 사랑을 감정으로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희생하는 사랑이다.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고 자기의 유익보다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랑이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적당히가 아니라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따라 사랑해야 한다.

그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고 때로는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상대를 품어 주는 사랑이다.

 

사실 이러한 사랑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 할 수 있어도

나를 미워하거나 해를 끼치며 괴롭히는 사람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생각만 해도 부담스럽고 어떻게 그런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까지도 품으셨고 십자가 위에서 그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셨다.

주님께서 먼저 그런 사랑을 보여 주셨기에 우리도 그 사랑을 배우고 따라가도록 부름 받은 것이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창조주의 친구로 불린다는 것은 참으로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종은 주인과 기쁨을 함께하지 않고 그저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희생을 강요당하기만 한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 친구는 그 하는 일을 알게 하며 함께 하기를 원한다.

주님은 우리를 친구로 여기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는지 알게 해 주시고

또 왜 죽으셔야 했는지도 알려 주시며 주님을 믿으면 장차 어떻게 될 지도 알게 해 주신 것이다..

 

16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때때로 내가 교회를 선택했고 내가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먼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너희를 택하였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우리의 구원이 인간의 공로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기들이 예수님을 잘 따라왔기 때문에 제자가 된 것이 아닌가 하기도 하며

또 다른 사람들보다 믿음이 좋아서 선택을 받은 게 아닐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 너희가 먼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너희를 선택했다고 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자들을 선택하신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열매는 내적인 열매와 외적인 열매가 있다.

내적인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9가지 성품이 있다.(갈 5:22~23)

외적인 열매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전파하라고 하셨다.(마 28:19~20)

열매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결과만을 뜻하지 않는다.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삶의 변화와 성품의 변화,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삶의 열매를 포함한다.

 

열매가 맺히면 농부는 그 열매가 더욱 건강하게 자라도록 돌보고 가꾸어 준다.

병충해도 막아 주고 필요한 양분을 공급하며 잘 가꾸어서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돕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믿음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해 주시고 우리를 훈련하고 연단하셔서

영적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시며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 데 있다.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더욱 큰 은혜와 능력을 공급하여 주시지만

세상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고 주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면 영적인 생명력도 점차 메마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주님 안에 거하며 열매를 맺고 있는 가지인가를 늘 점검해 보아야 한다.

 

17절에 보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9절부터 계속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셨고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말씀하시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신다.

이는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선택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맺어야 할 열매임을 보여 준다.

    

18절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왜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하게 되는 것일까?

이는 세상은 더 높아지라고 하고 더 가져야 하며 네가 우선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섬기라고 하고 나누라고 하고 자신을 낮추라고 하니까 완전히 방향이 반대인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은 어둠이고 예수님은 빛이시기 때문이다.

빛이 비치면 어둠은 잘못된 것들이 드러나기 때문에 빛의 존재만으로도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죄가 드러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빛이신 진리를 밝히시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미움을 당하게 될 것이나 그것은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19절에 보면..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이 말씀은 너희가 세상과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하면 세상은 너희를 좋아할 것이라는 뜻이다.

즉 자기와 같은 생각, 같은 가치관,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을 편하게 여기고 좋아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라는 말씀 하신다.

 

20절에 보면..

"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예수님을 미워하고 박해했으니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미워하며 박해도 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 것 같이 믿는 자들이 제자들의 말도 지킬 것이라고 하신다.

 

21절에 보면..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돌아가신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박해를 할 것이니 그렇게 함은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정작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안다고 했는데 그들은 정작 하나님의 뜻을 몰랐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오시리라고 예언했던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박해한 것이다.

박해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 가장 잔인한 십자가 형으로 메시아를 죽게 하였음이다.

 

22절에 보면..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죄를 짓는 것을 알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박해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죽일일도 없었으니 그들은 징계만 받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밝히 드러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므로 이제는 알지 못했다고 핑계할 수 없게 되었다.

 

23절에 보면..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하나님을 미워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이니 하나님과는 관계가 끊어진 상태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르고 잘못을 저지른 것은 회개하고 용서를 빌면 긍휼 하심으로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신데

알고도 짓는 죄는 징계를 내리시는데 그래도 깨닫고 돌이키지 않으면 돌보시지 않고 내버려 두신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하여 예수님을 떠나면 안 되고 꼭 붙들고 그 안에 있어야 한다.

 

25절에 보면..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단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부당하게 나의 원수 된 자가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서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시편 35편 19절)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시편 69편 9절)

 

유대인들이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이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의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존경하고 흠모하는 다윗과 같은 사람에게도 다윗을 미워하며 고난을 겪게 되었던 것을 말씀하신다.

누구보다도 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이 말씀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에게도 이러했는데 하물며 그들의 잘못을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따를 리가 없었던 것이다.

 

26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메시아로 오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서 오신 것임을 보혜사 성령님이

증언해 주실 것이며 또한 공생애 동안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다 보고 배웠으니

그들이 또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셔서 오신 메시아 이심을 증언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렇게 상세하게 말씀해 주셨는데도 그 당시는 무슨 말씀이신지 알지 못했다.

만약에 깨달아 알았더라면 잠시 후에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에 다들 도망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그들이 도망갔을 때에도 다시 찾아오셨고 넘어졌을 때에도 다시 일으켜 세우셨다.

 

어떻게 죽기까지 따르겠다던 제자들이 그랬을까

하지만 과연 우리도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조금만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겨야 하냐고 주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도.. 그렇게 원망을 하며 불평을 하며 어둠 속에 머물러 있어도...

주님께서는 인자하신 눈길로 우리를 염려하시며 바른 길로 가도록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안아 주신다.

주님을 모함하고 죽이기까지 한 사람들조차도 감싸 안으시며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분이시니..

그러니 좌절하지 말고 자애롭게 미소 짓고 나를 바라보고 계신 주님을 늘 바라보면서 그 안에 머물러 있자.

예수님을 사랑하며 이웃도 사랑하면서 연약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그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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