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에 보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실족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칸달리조마이'이며 돌에 걸려 넘어진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단순히 넘어짐이 아니라 어떤 사건을 계기로 믿음을 떠나거나 더 큰 위험에 빠지는 경우를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제자들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
제자들이 박해를 당하더라도 믿음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미리 말씀해 주고 계신 것이다.
아직 제자들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짐작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절에 보면..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 할 뿐 아니라.."
출교란 회당에서 쫓겨나는 것만이 아니라 예배도 참여할 수 없고 공동체에서 배제되는 것을 말하며
백성으로서 누리던 권리와 특권도 박탈당하며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교제까지 모두 금지되었다.
그래서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이 눈을 떴을 때에 그의 부모가 출교를 당할까 봐 아들에게 떠 넘긴것이다.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여기서 섬기는 일이라고 한 '일'은 헬라어로 '라크레이아'로 예배와 제사를 뜻하는 말이다.
제자들을 죽이려던 사람들이 제자들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믿게 된다는 뜻이다.
그들은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죽이는 맹목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의 가르침이나 잘못된 신념을 앞세우면 이와 같은 잘못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성경 말씀을 기준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깨달아 알아야 한다.
당시 이러한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던 사도 바울이었다.
그는 회심하기 전 스데반 집사가 죽임을 당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였다.(행 7장)
3절에 보면..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유대인들이 이렇게 엄청난 착각을 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열심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착각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 의미를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의 관심은 오직 돈과 명예와 권력에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들의 욕심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온갖 모함과 계략을 꾸민 것이다.
4절에 보면..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훗날 이러한 일을 당할 때 사람들의 말에 넘어지지 않도록 미리 말씀해 주셨다.
또한 십자가 사건 이후 큰 환난과 박해를 겪게 될 때 이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사실 이 말씀을 처음부터 하셨더라도 제자들은 무슨 말씀이신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실 때 이 말씀을 하셨다면 제자들은 큰 근심과 두려움에 빠졌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때가 가까와 졌을 때에 들려주시면서 앞으로 있을 일들을 준비시키고 계신 것이다.
5절에 보면..
"지금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미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어디로 가시는지 말씀하셨음을 의미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1~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어도 제자들은 이미 그 말씀도 다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설마 하니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두고 떠나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 것보다 주님을 잃게 된다는 생각에 큰 근심 속에 있었던 것이다.
6절에 보면..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을 수차례 듣고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눈앞에 닥친 이별만 생각했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7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왜? 예수님께서 계셨으면 좋겠는데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하시는 말씀일까?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곁에 계시는 것이 가장 큰 위로였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것이 어떻게 유익이 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자신이 떠나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고 계셨으므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셔서 여러곳을 다니실 수 없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영으로 오셔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 없이 모든 믿는 자들과 함께 해 주시기 때문이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가운데 오셔서 예수님을 기억나게 하시고 진리를 깨닫게 하시며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대로 알려 주셔서 예수님을 증언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예수님께서 떠나심은 끝이 아니라 성령님을 통해 더 깊은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8절에 보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책망하다(엘렝크세이)는 훈계하다 죄를 깨닫게 하다는 뜻으로 잘못한 것을 꾸짖다는 뜻의 미래형이다.
단순한 꾸짖음이 아니라 그들의 실체를 드러내게 하시고 그들의 잘못을 드러내고 진리를 깨닫게 한다는 뜻이다.
즉 성령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하나님의 진리를 알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죄와 의와 심판은 무슨 말씀이실까?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도 자상하게 말씀해 주신다.
9절에 보면..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셔서 죄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신 구원의 길을 거부하고 믿지 않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죄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구원에 이르게 되지만, 믿지 않는 자는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게 된다.
성령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인도하시며 이끌어 주신다.
10절에 보면..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정죄하여 십자가에 못 박았으므로 불의한 일을 하였다.
만일 그들의 판단이 옳았다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로 올리셔서 보좌 우편에 앉히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참으로 의로우신 분이심을 하나님께서 친히 증명하신 것이다.
또한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오직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
비록 우리에게 허물과 죄가 많을지라도 주님의 의를 덧입게 되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게 된다.
11절에 보면..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이 세상 임금이란 사탄과 마귀를 뜻하며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멸하기 위해서 오셨다.(요일 3: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권세는 이미 결정적인 심판을 받게 되었다.
비록 지금도 사탄이 사람들을 미혹하고 시험하지만 그 최후는 이미 정해져 있다.
성령님께서는 이 사실을 깨닫게 하여 믿는 자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하고
믿는 일을 도우시며 결국 최후의 승리는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마귀는 시험을 통하여 약속을 하고 잊게 만들고 기도는 약속을 믿고 시험을 이기게 하여 준다.
12절에 보면..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제자들에게 말할 것이 많지만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씀은 이는 제자들의 믿음이 부족해서라기보다
아직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 강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지만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13절에 보면..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여기서 진리의 성령은 보혜사 성령님을 가리키며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본질상 한 분이시며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주님은 성령님께서 오시면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제자들이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깨닫게 될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님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직 들은 것을 말씀하신다고 하셨다.
이는 성령님께서 자신의 뜻이나 권위로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역하신다는 의미이다.
14절에 보면..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라 하였느니라."
성자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던 것처럼 성령님께서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역사하시므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 사이에는 뜻의 충돌이나 의견의 상충이 있을 수 없다.
또한 성령님께서는 장래 일을 알리신다고 하셨는데 이는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성령의 주요 사역 가운데 하나가 성자의 구속 사역의 의미와 하나님이 되심을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에 감동된 사람도 역시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러한 일에 동참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16절에 보면..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조금 있으면 볼 수 없게 된다는 말씀은 이제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라는 뜻이고
다시 보게 되리라는 것은 부활하시므로 다시 보게 된다는 말씀이지만 좀 더 깊이 보면
성령님께서 오시므로 예수님을 보는 듯할 것이며 마지막 때에 주께서 재림하실 때를 의미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궁금해하므로 예수님께서 설명해 주신다.
20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에는 제자들이 놀라고 큰 슬픔과 근심에 쌓이게 되겠지만
세상 즉 사탄의 세력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기뻐할 것이라고 하신다.
바리새인들이나 종교 지도자의 마음 안에 있는 영적인 세력을 의미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너희가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시게 되면 그 근심이 기쁨으로 변한다고 하셨다.
여자가 해산할 때는 고통과 아픔 속에서 아기를 낳게 되지만 아기를 낳게 되면 아기가 태어남으로
크게 기뻐하게 되므로 아기를 낳을 때의 그 고통을 곧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신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3일 후에 부활하시고 50일 후 성령이 오실 때에는 기쁨이 된다고 하셨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미움받고 쫓겨 다니며 조롱을 받아 잠시 슬픔이 되겠지만
잠시 후에는 마귀의 세력을 이기셨으니 그 고통과 슬픔이 변하여 더 큰 기쁨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23절에 보면..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왜냐하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 기억나게 하시고 그 뜻을 밝히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 묻지 않게 된다는 말씀이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우리가 기도를 할 때는 하나님 아버지께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 할 때에 마지막에 꼭 해야 하는 말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드려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구하는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것이지
자신의 뜻대로 욕심껏 구하는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으니 기도 할 때에 잘 분별해서 구해야 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이 달라는 대로 다 주게 되면 자식은 노력 없이 받아 쓰게 되니 함부로 사용할 것이며
언제든지 손만 벌리면 주실 것이라는 것에 길들여져서 노력해서 살아 볼 생각을 하지 않아 자식을 망치는 것이다.
어떤 90세의 할머니한테 60이 넘은 아들이 나가서 돈을 벌 생각을 하지 않고 평생토록 어머니께 손을 벌렸다.
나중에는 노령 연금이 나올 때마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간다고 핑계를 대니 할머니는 남에게 돈을 빌려서 주셨다.
할머니는 아들이 아프다고 하니 가슴 아파서 눈물을 흘리며 꾸어다 준 소중한 돈을 아들은 함부로 써 버리고 말았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돈을 구할 데가 없으니 그 아들은 벌어서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 결국 폐인이 되고 말았다.
할머니는 평생 아들을 위해서 기도 하셨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아들의 버릇을 고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오래된 습관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 안에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25절에 보면..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구약의 말씀으로 율법을 가리키는 말씀이며
구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신다는 말씀들로 기록되어 있고 신약은 오신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다.
때가 이르면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과 모든 말씀들을 생각나게 해 주시고
하나님에 관한 말씀들을 알려 주어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아도 성령께서 알려 주신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시고 우리는 제자들이 기록한 신약성경의 말씀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기록하였으나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록되었으니 성경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같다.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여기서 말씀하시는 그날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성령님이 오시고 난 후를 말한다.
그때에는 우리의 기도가 구약 시대와는 완전히 달라지는 모습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구약에서는 대제사장이 속죄일에 일 년에 한 번만 지성소에 들어갔는데 그에게 죄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러면 지성소에 들어가지 못하니 허리에 끈을 매달고 들어갔다가 죽으면 그 묶인 끈을 끌어당겨 시신을 꺼냈다.
그만큼 하나님을 뵙고 기도드리기가 두려웠던 것을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하셨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여기서 '친히 사랑하심이라'는 말은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 버리셨다는 뜻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사랑하는 그 순간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사이는 아버지와 자녀의 사이로 회복이 된다.
예수님께서 중간에서 하나님께 말씀드려서 겨우 기도를 들어주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고 계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 안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마칠 때 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고백하는 특권을 누리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구하심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수 있도록 장벽을 무너뜨리셨다.
28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계셨던 곳에서 오셨다가 다시 가야 할 길을 이 한 문장으로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하늘에서 오셔서 다시 하늘로 가시는 이 위대한 여정은 당신을 위함이 아니라 오직 인류를 향한 사랑이었다.
이 말씀은 세상의 다른 종교들과 완전히 차별화되는 기독교만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의 종교들은 스스로 고행하고 터득해서 최고의 경지에 오르려 하지만 결국 인간의 한계에 갇히고 만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기 위해 세상으로 친히 찾아오신 은혜를 보여 주신다.
제자들은 이 선언을 듣고서야 비로소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심을 깊이 깨닫게 된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달은 것은 아니고 어렴풋이 이해를 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 원래 계시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신다고 하셨으니 승천하는 것을 보지 못한 제자들에게
솔직히 예수님의 말씀이 완전히 이해가 된다는 것은 아무리 상상력을 펼쳐도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제자들이 처음으로 진정한 마음을 담아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신 분이심을 믿는다고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의 믿음을 보시고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시기를 사랑의 눈길로 사랑하는 자녀를 보는 부모와 같이
그렇게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냐고 꾸짖지 않으시고 모르는 부분들을 자세히 풀어서 설명해 주신다.
그러나 그들은 그 믿음을 고백한 지 만 하루가 가지 못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는 자들이 된다.
32절에 보면..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제자들이 믿는다고 고백하는 소리를 들으시고도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에 제자들이 다 도망칠 것을 아셨다.
절대적인 고독의 자리에 머물게 되실 주님께서 도망치는 제자들에게 그들을 안심시킬 말씀을 해 주신다.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고 가더라도 내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나와 함께 계시니 너무 걱정 말아라.'하시는 듯하다.
마지막 길을 가시면서도 예수님의 시선은 자신이 겪을 아픔보다는 제자들의 연약함을 더 염려하셨다.
우리가 힘들어 견디기 어려울 때에도 항상 우리 곁에서 내 손을 잡고 일어서거라 하시는 모습에 눈물이 난다.
어떤 목사님께서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올 때에 어떤 사람이 오면 반갑게 달려가서 맞이하셨다고 한다.
목사님께서 그 성도에게 "힘들지"라고 말씀하시며 손을 잡아 주시면 그 성도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우리 힘으로 해결이 되지 않아 힘들 때에 분명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힘들지?" 하고 위로해 주실 것이다.
33절에 보면..
"이것이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으신 것처럼 제자들도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신 것은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평안을 주시려고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면 능히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아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인데도 "이기었노라"고 과거형으로 선포하셨다.
주님께서는 환난이 오기 전에 이미 승리하신 것을 확신하며 선포하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을 미리 믿고 확신 속에서 달려 나가야 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할까 말까' 망설이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은
이미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승리를 확신하며 주님을 따라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