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니니라..
요한은 그 동산이 겟세마네 동산인데 왜 기드론 시내 건너편이라고 기록하였을까?
기드론 시내는 겨울철에만 물이 흐르므로 물이 없을 때에는 기드론 골짜기라고 부른다.
이곳은 다윗이 백성들과 함께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서 도망쳤던 곳이다.(삼하 15장 23절 전후)
그러나 이제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께서 유다가 배반하여 그 길을 건너가시는 것이다.
다윗이 목숨을 건지기 위해 기도론을 건넜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건너가셨다
요한은 배반당한 다윗이 기드론을 건넜던 그 사건을 의도적으로 떠올리게 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당시 유대인들은 평화롭게 살던 다윗 시대가 도래할 것을 기대하며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기드론 골짜기는 우상과 성전의 부정한 것들을 버리던 장소이기도 하였다.
예수님께서 기드론을 건너심으로 죄와 부정을 제거하시고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모습을 떠올리기도 한다.
비록 요한이 이러한 의미를 직접 설명하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묵상의 여지를 남겨 두고 있는 것 같다.
2절에 보면.
그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예수님께서 만약에 붙잡히지 않으려 하셨다면 유다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가셨을 것이나
예수님께서는 그곳이 자신이 붙잡히실 곳이라는 것을 아시면서도 담대하게 그곳으로 가셨다.
이미 붙잡히시고 고문을 당하시고 죽게 되시는 그 길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가셨다.
3절에 보면..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가서 이르시되..
여기서 말하는 군대란 예루살렘 성전에 인접한 안토니아 요새에 주둔한 로마의 군대를 말한다.
또한 원문에 사용된 군대라는 말은 로마의 군사들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성전 경비대도 함께 왔으므로 상당한 규모의 부대를 뜻하므로 적지 않은 수의 무장 병력이 동원되었다.
이는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 한분을 붙잡는 것을 두고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그들은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왔으나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고 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서 계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채 횃불을 들고 찾아왔다.
어쩌면 요한은 이 모습을 빛이 세상에 왔으나 세상이 그 빛을 알지 못하였음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배반하여 군대를 이끌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대답하되"나사렛 예수니라." 하니
나사렛 예수라고 함은 비천한 곳에서 자란 예수님이라고 지칭하는 말로 하찮을 사람이라는 말이다.
모욕적인 말을 들으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씀하신다.
"내가 그니라."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 중에는 가룟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과 입 맞춤을 하였다고 하는데 요한은 그 말을 뺐다.
그 말을 빼고 기록을 하지는 않았지만 요한은 다른 복음서에 없는 놀라운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잡으러 온 그들에게 당당하게 "내가 그니라" 하고 답하실 때
붙잡으러 온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예수님 앞을 물러나 땅에 엎드러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내가 그니라"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킴보다는 구약에서 하나님 이심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하나님을 떠올리게 하므로 그 권위에 눌려 기겁을 하고 한발 뒤로 물러나 엎어졌을 것 같다.
또한 한 밤중에 횃불을 들고 무기를 들고 왔는데 도망가기는커녕 정작 나와서 누구를 찾느냐고 하니
그 당당한 위엄에 눌려서 일 수도 있고 본문에서는 설명하지 않지만 예수님께서도 잡히지 않도록
뭔가 대책을 세우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주춤하다가 엎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예수님의 담대함 때문만은 아니고 이 장면을 통해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권세를 보여 주심이다.
우리는 가끔 어떤 사람을 볼 때에 그 사람에게서 그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의 모습이 비치어질 때가 있다.
내가 아는 어떤 군인이 목회하는 일을 방해하려고 군화를 신은채로 교회에 몽둥이를 들고 들어 왔는데
그를 무서워하지도 않고 담대하게 서 계신 목사님 앞에가서 그는 그대로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았다.
그분은 그때 펑펑 울면서 하나님을 영접하고 교회의 일에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봉사하시는 사람이 되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앞에서 물러나 엎드러진 것이 전혀 이상한 일만은 아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원하지 않으셨다면 아무도 그분을 붙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힘이 없어서 잡히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를 내려놓고 스스로 자신을 내어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뜻으로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시고 저항 없이 잡혀 주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스스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만민의 죄를 속량해 주신 것이다.
요한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유다의 입맞춤이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기록하지 않았다.
대신에 제자들을 위한 기도 하신 것을 기록하였고 예수님의 힘들어하셨던 것은 기록하지 않은 것은
가룟 유다가 배신해서 예수님을 넘겨준 것이 아니라 주님 스스로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누구신가 보다는 예수님의 신성과 주권을 강하게 보여 주려고 하였다.
7절에 보면..
놀라서 엎드러진 그들에게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시니 그들이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하였다.
"내가 그니라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히 시니라.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잡으려고 하는 사람은 나니까 제자들은 보내 주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이 위기를 벗어나려고 했을 텐데 주님은 모든 것을 초월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면서도 언제나 그렇듯이 제자들이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을 보고 계신 것이다.
9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심이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에도 그랬고 지금도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 앞에서도 제자들을 보호하셨다.
그러나 주님이 가시고 난 후에는 제자들에게 고난과 핍박이 와서 허둥대며 도망 다니기에 급급했지만
성령을 받고 난 후에는 그들도 예수님처럼 그 고난을 당당하게 맞서 받으며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된다.
10절에 보면..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깨 부신 일 외에는 그 어떤 일도 폭력적인 방법으로 행사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핍박을 하고 죽이려고 해도 그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으시며 말씀으로 물리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피할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으셨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 예수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폭력으로는 평화를 이룰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많은 군대의 병사들을 몰고 왔어도 붙잡히지 않으려면 얼마든지 물리치실 수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공생애 3년 동안 위태로울 때는 피하시고 그들을 말씀으로 꼼짝 못 하게 하여 물리치셨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부러 잡히시는 것이니 무력으로 대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12절에 보면..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더라.
천부장이라고 함은 로마 군사들 천명을 다스리는 장군으로 군사 천명을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
그가 군사들을 지시하기 위해서 온 것으로 보아 예수님을 잡기 위해 로마 군사도가 총동원된 것 같다.
그 해 대제사장은 가야바인데 군사들은 어째서 장인이 안나스에게로 먼저 예수님을 끌고 갔을까?
본래 대제사장직은 평생직으로 죽을 때까지 하는데 로마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대제사장직을 로마가 임명하게 되어서 여차하면 로마에서 마음대로 대제사장을 갈아 치웠다.
안나스는 유다 총독 발데리오 글라투스에 의해 주후 6년에 대제사장으로 임명된 후로
주후 15년까지 대제사장을 있었고 그 후에 4명의 아들들과 사위인 가야바에게 물려주었다.
그는 18년 동안 막강한 권세를 누리던 실세로 그때의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도 안나스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그의 지시를 따를 정도였으니 안나스에게 먼저 예수님을 끌고 간 것이다.
전승에 의하면 가야바는 주후 18~36년까지 직임 하다가 수리아의 총독 피델리우스에 의해 쫓겨났다.
15절에 보면..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다른 제자들은 모두 다 도망하였는데 그나마 베드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용기를 보였다.
그러나 대제사장의 집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어서 문 밖에 서서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데
대제사장을 아는 또 다른 제자가 와서 문을 열어 주워 대 제사장의 집 안 뜰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럼 여기서 대제사장의 집 문을 열어 준 이름을 말하지 않는 또 다른 제자는 누구일까?
여기서 대제사장의 집 문을 열어 준 또 다른 제자가 누구인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전통에이나 성경 학자들에 의하면 이 복음서를 기록한 사도 요한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는 자신을 "다른 제자" 또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편 요한의 아버지 세베대는 품꾼들을 둘 정도로 제법 큰 어업을 하고 있었으므로(막 1:20)
부유층에 속한 사람으로 볼 수 있고 예루살렘의 상류층들과 거래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그래서 요한이 대제사장 집안과 어느 정도 알고 지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는 것이다.
17절에 보면..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말한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그러자 베드로가 엉겁결에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여기서 궁금한 것 하나는..
문을 지키는 여종은 신분이 낮은 사람인데 어떻게 베드로에게 이렇게 당돌하게 말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예수님을 체포하여 끌고 온 직후라 집안 전체가 술렁이고 있었을 것이며 또한 그녀는
출입하는 사람을 확인하는 일을 맡고 있었으므로 문을 열어 주면서 베드로가 제자라고 확신한 것이 아니라
"당신은 설마 저 사람의 제자는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을 텐데 베드로는 그 말에 찔렸던 것 같다.
만일 자신이 제자라고 대답하면 즉시 체포되어 예수님과 같은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밀려왔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엉겁결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 일은 베드로가 살아 있는 동안 평생을 자신을 낮추게 되는 계기가 되어 순교할 때에 꺼꾸로 십자가에 매달렸다.
18절에 보면..
그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까지 들어왔으나 그의 한계는 여기까지였다.
예수님 앞에서 칼을 휘두를 용기는 있었지만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을 용기는 아직 없었던 것이다.
19절에 보면..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여기서 이상한 점은 예수님을 심문하려면 먼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물어야 하는데
안나스는 죄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대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제자들을 가르쳤느냐고 묻고 있다.
왜 그랬을까?
안나스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이미 마음을 정한 사람이었는데 왜 가르치는 법을 알고 싶었을까..
그는 예수님이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정죄할 명분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로마는 종교 문제에는 크게 간섭하지 않고 백성들을 선동하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일에는 매우 민감하였다.
그러므로 안나스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얼마나 되고 어떤 조직을 이루고 있는가를 알아내는 동시에
또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알아내어 예수님을 반란을 일으키는 위험한 인물로 몰아가려고 했던 것 같다.
만약 예수님께서 비밀리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특별한 가르침을 주셨다고 대답하셨다면
그것을 빌미로 죄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의도를 아시고 조금도 말려들지 않으셨다
20절에 보면..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비밀 조직을 만든 적도 없고 몰래 사람들을 모아 가르친 적도 없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말씀과 사역은 언제나 공개적으로 회당에서도 말씀하셨고 성전에서도 말씀하셨으며
누구든지 와서 들을 수 있도록 드러내 놓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알고 싶으면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라고 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예수님께서는 이미 안나스의 심중을 아셨고 그들의 재판이 정당하지 않음을 증언하신다.
정상적인 재판이라면 먼저 증인을 세워 증언을 듣고 피고에게 묻는 것이 순서인데 그런 절차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결박당한 채 조금도 밀리지 않으시고 서서 계시고 오히려 다급한 쪽은 대제사장 안나스였다.
예수님을 죽일 명분은 이미 정해 놓았는데 정작 죄를 찾을 수가 없으니 제자들과 교훈을 캐묻고 있는 것이다.
안나스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안나스의 불의함이 드러나고 있는 장면이다.
22절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있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님을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아마도 예수님의 뺨을 쳤을 것이나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지 않고 오히려 담담하게 말씀하신다.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안나스는 재판에 있어 한 밤중에 끌고 와서 증인도 세우지 않고 예수님에게서 죄를 끌어내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재판의 부당함을 지적하시자 곁에 서 있던 아랫사람이 갑자기 예수님의 뺨을 때린다.
아무리 죄인이라도 재판장에서는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인데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의 행동에 예수님께서 죄가 있다면 죄를 증명하면 될 일인데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고 말씀하신다.
아랫사람은 상전을 위해 그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했지만 그가 훗날 주님 앞에 가서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요한은 여러 사람의 모습들을 우리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 같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부터 가장 낮은 여종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불법도 마다하지 않고 저지르고 아부하기 위해 그들을 돕는 군상들...
그리고 절대로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하던 베드로의 배반까지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요한은 이들에게서 지금 우리의 마음이 어떤 사람에게 가 있는 가를 물어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과연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도 내놓으신 분이신데 우리는 과연 무엇을 드리고 있는 것일까...
그 분 앞에가서 네가 한 일을 내 놓으라고 하실 때에 나는 무엇을 주님 앞에 내어 드릴수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