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절에 보면..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안나스가 예수님을 결박한 채 대 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낸 것은 정식으로 산헤드린 공회에 넘긴 것이다.
예수님을 끌고 간 곳은 가야바의 저택이었을 것이고 그들은 급하게 모든 일을 마치려고 하였다.
민란이 일어날까 봐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이 되기 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날 밤 예수님의 죄목을 만들어 금요일 아침 빌라도에게 넘기고 사형 판결을 받아 내려고 하였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한 결론을 미리 정해 놓고 진행하는 엉터리 재판에 불과하였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율법을 지켜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이다.
본래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사형판결과 같은 중대한 범죄는 반드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에 판결한다.
대제사장이 혹시나 흥분하여 감정에 잘못된 판결을 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정한 규칙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이런 일정을 다 무시하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불법적인 재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불법 재판이 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안식일 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가 안식일이므로 금요일 저녁이 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쳐야 한다.
안식일 법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규정을 무시하고 엉터리로 재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25절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베드로를 보고 묻는다.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나는 아니다."라며 자신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한다.
여기서 '아니다'로 번역된 헬라어 '레르네 사토'는 의절하다 인연을 끊었다는 의미의 단어이다.
베드로는 부인하기 위해 나는 저 사람과 완전히 인연을 끊고 의절했다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중에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가 잘린 말고의 친척인지라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베드로는 처음에는 단순히 나는 아니다고 했으나 두 번째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였고
나중에는 예수님을 알고 있다면 내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면서 세 번째로 부인을 한 것이다.
이때에 심문을 받으시던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바라보시고 눈이 마주쳤다 그때 닭이 울었다고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뛰쳐나가 펑펑 울었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은 별반 다를 게 없었으나 그 결과는 달랐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잡혀서 죽게 되시니 그 돈을 도로 돌려주려 하였으나 이미 늦어 버려서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을 후회하면서 목을 매달아 자살을 한 것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베드로는 단순히 후회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회개하였다. 바로 그 점이 가룟 유다와 달랐다.
주님께서는 만일 가룟 유다가 베드로처럼 주님께 돌아와 회개하였다면 그 역시 용서하셨을 것이다.
그가 잘못된 마음을 품었을 때부터 계속해서 그가 깨우치기를 안타깝게 지켜보고 계셨으니까...
가룟 유다 역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괴로워하며 통곡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회개는 단순히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만을 가지고 회개를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했음을 고백하며 잘못을 시인해야 하며
이제부터는 주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마음을 다해서 간절히 간구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안나스에게 끌려가셨다가 다시 가야바에게 넘겨지셨다고 하여서
안나스의 집과 가야바의 집이 서로 멀리 떨어진 별개의 장소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면 베드로는 두 곳을 왔다 갔다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말이 되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그러나 당시 안나스는 비록 공식적인 대제사장은 아니었지만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던 인물이었다.
가야바는 대제사장이었기에 두 사람은 같은 대제사장 관저 안에서 직무를 보았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안나스에게 심문을 받고 가야바에게 넘겨지시는 동안에 베드로는 관저의 뜰에 있었을 것이다.
거기서 불을 쬐며 기다리는 가운데 여러 사람들의 질문을 받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된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부인하였을 때 주님께서 돌이켜 베드로와 눈이 마주쳤다고 했다.
이는 예수님과 베드로가 전혀 다른 장소가 아니라 같은 관저 안에서 바라볼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을 것이다.
요한은 이런 설명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시는 동안 베드로도 같은 곳에 있었다.
예수님께서 모진 심문을 받으며 고통 가운데 계셨는데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던 것이다.
29절에 보면..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로마 총독 빌라도가 있는 관정(로마의 법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책망하실 때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자들"이라고 하셨다(마 23:24).
그 말씀 그대로 지금 유대인들은 부정한 사람은 유월절 양을 먹을 수 없다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빌라도의 관정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빌라도를 밖으로 나오라고 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의 거처에 들어가는 것을 시체에 접촉하는 것만큼이나 부정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율법은 까다롭게 지키면서 율법을 어기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일에는 조금의 죄책감도 없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돈과 권력 와 세상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방해가 되는 예수님을 죽여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성전에서 그들에게 들어오는 막대한 돈 줄이 막히고 명예도 권세도 다 잃게 된다.
그들은 겁도 없이 하나님께서 그들이 하는 모든 것들을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새벽부터 유대 지도자들이 관정 밖에서 자신을 부르자 빌라도는 직접 밖으로 나와야 했다.
유대인들의 종교 관습 때문이었지만 총독의 입장에서는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도 절차를 밟아서 온 것이 아니고 그들의 율법까지도 어기면서 새벽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빌라도가 유대 지도자들에게 묻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무슨 죄를 지으셨는지 분명하게 말을 하지 못하고 다만 이렇게 말을 했다.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자 빌라도가 어이없어하면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다른 공관 복음에서도 빌라도는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질투해서 모함하려고 하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다.
또한 빌라도의 이 말도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예수님이 로마의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이니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스스로 판단하면 될 일이다. 로마에서는 종교에 어느 정도 자유를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자로 고발하고 있다는 뜻이다.
본래 사람을 죽이는 형벌은 로마에서만 할 수 있었고 식민지 백성인 유대인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종교적인 문제로 산헤드린에 의해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이는 일은 총독이 묵인하였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늘 그래왔던 대로 돌로 쳐서 처형하라고 하는 말인데
그들이 빌라도에게 굳이 맡기려고 하는 것은 반역자에게 내리는 십자가의 형벌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율법에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신 21:23)
그들은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십자가에 달아 사람들 앞에 수치와 저주의 대상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죄인이라고 여기게 하려 함이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민란을 일으킬까 봐 유대 지도자들은 뒤로 쑥 빠지고 로마 총독의
판결을 통하여서 십자가형이 집행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정식 재판의 결과로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는 동시에 그 죽음이 정당하였다고 여길 수 있도록 하려는 속셈이었다.
32절에 보면..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자신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수치와 패배로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길을 열고 계셨던 것이다.
33절에 보면..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네게 한 말이냐?"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여기서 예수님이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말씀을 하시면 로마의 허락 없이
왕이 되려 한 것으로 해석이 되어 로마에서 볼 때에는 반역죄가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 되려고 자로 몰아 빌라도의 법정에 세운 것이다.
36절에 보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아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약에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 되시려고 하셨다면 유대는 물론 로마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왕이셨다.
37절에 보면..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빌라도가 예수님께 다시 물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확인하고자 물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다.
38절에 보면..
"진리가 무엇이냐?"
만일 빌라도가 진심으로 진리를 알고자 하였다면 그는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빌라도가 진심으로 진리를 알려고 물어봤다면 진리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을 것이다.
산헤드린 공회원 니고데모가 밤에 찾아왔을 때에도 그에게 거듭남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빌라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곧바로 유대인들에게 나가 버린다.
그는 눈앞에 진리가 서 있었음에도 진리를 알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말았다.
그랬다면 이천 년이 넘도록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 죽게 만든 사람이라는 욕을 먹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우리에게도 늘 이런 아차 하는 순간에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때가 있다.
순간의 선택이 어떤 사람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막다른 길목으로 내 몰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지 신중하게 생각하고 함부로 결정하지 말고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이다.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로마의 재판은 반드시 피고인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그 죄목을 분명하게 제시하여야 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죄목을 행악자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잡아오지 않았을 것이라며 죄목을 밝히지 못했다.
빌라도는 이미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선언하면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석방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가 망설이는 사이에 사태는 점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유대 지도자들이 시기심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유월절 명절에는 죄인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풀어 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는 아마도 백성들이 예수님과 바라바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당연히 예수님을 택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 빌라도는 예수님보다 바라바를 죽이라고 할 줄 알았을까?
여기서 공관복음에서 말하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 그리고 서기관에 대해서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바사의 고레스에 의해서 포로가 되었던 바벨론에서 풀려나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후에 잠시 평화가 왔었으나 알렉산더 대왕으로 인하여서 헬라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알렉산더가 아들 없이 일찍 죽는 바람에 그의 부하들에 의해 4개의 나라로 분산되었는데
그 중간에 끼어 있던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남쪽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북쪽 셀레우코스로 넘어가며 안티오쿠스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돼지의 피를 제단에 뿌리므로
제사장이었던 하스몬가의 맛다디아가 분기해서 그들을 쳐 죽이고 마카비 왕가가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그러나 또다시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게 되자 유대인들의 높은 지위에 있던 유대 지도자들은 로마에게
아부하기 시작하였고 그 바람에 대제사장직은 사독 개열로 종신직인데 재물로 대제사장직을 사고팔았던 것이다.
그들은 모세 오경을 가장 권위 있는 성경으로 인정하였고 부활과 천사와 같은 영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현실의 권력과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로마와 협력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성전을 중심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명절마다 예물을 드리기 위해 올라오는
백성들의 재물을 트집 잡아 자기들이 준비한 것으로 바꾸게 하거나 환전하는 일을 통해 큰 이익을 얻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상을 엎으시고 그들을 쫓으셨으니 자신들의 권력과 돈벌이가 위협받게 된 것이다.
그와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과정에서 사두개인들과 자주 충돌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수많은 전통과 규례를 만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이 만든 전통과 규례가 오히려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으며 또한 그들은 율법에 정통하여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며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고, 서기관들과 함께 종교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굳혀 갔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다.
안식일에도 사람을 살리셨고 병든 자를 고치셨으며, 외식하는 그들의 모습을 책망하셨다.
그 결과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게 되었고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자리가
위태로워진다고 느끼게 되어.결국 그들은 사두개인들과 힘을 합하여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열심당원으로 알려진 바라바는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잡혀 온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빌라도가 생각할 때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보다 바라바를 더 위험한 인물로 여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과 바라바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면 당연히 예수님을 놓아 달라고 할 것이라 기대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관정 밖에 모인 사람들은 오히려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 자리에서 슬그머니 빠지고 그의 하수인들이 몰여와 서 빌라도에게 판결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이었을까? 아니면 종교 지도자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을까?
혹은 예수님께서 로마를 물리치고 새로운 왕국을 세워 주실 것이라 기대하였다가 실망한 사람들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군중의 분위기에 휩쓸려 아무 생각 없이 소리를 지르던 사람들이었을까?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세상은 오래가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A.D 70년에 로마의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과 성전은 완전히 무너졌고 그들이 의지하던 권력도 사라졌다.
어쩌면 요한은 이 모든 일을 직접 보았던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무엇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가를 묻고 있는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