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에 보면..
이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로마의 형벌인 채찍질은 3가지가 있는데 가벼운 경범죄자에게 내리는 가벼운 채찍질과
그보다 좀 더 강력한 채찍질은 중한 죄를 범한 자에게 내리는 심한 채찍질이 있고
가장 무서운 채찍질은 십자가형을 앞둔 죄수에게 행하는 채찍질이었다.
죄수의 옷을 벗기고 기둥이나 말뚝에 묶은 뒤 고문자들이 번갈아가며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에는 작은 나비 모양의 쇠붙이나 뼛조각이 붙어 있어서 채찍에 맞으면 살점이 떨어져 나가서
십자가형을 받을 때에는 채찍질만으로도 죽게 되어 보통 십자가에 달리면 2~3일 만에 죽게 되는데
십자가 위에서 서서히 고통을 받으며 죽게 되어 십자가형은 가장 참혹한 형벌이라고 하였다.
빌라도는 유대 지도자들의 종교적인 문제이지 예수님께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예수님께 대체적으로 가벼운 채찍질을 하였던 것이다.
빌라도는 이 정도 형벌이면 유대인들의 분노가 가라앉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어떻게든 예수님을 놓아줄 방법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2절에 보면..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하고 손으로 때리더라.
군인들은 예수님께 왕을 상징하는 면류관을 가시나무로 엮어 만들어서 씌우고
로마 황제가 입은 자색 망토와 같은 자색 옷을 입히고 조롱하며 모욕하면서 예수님을 때렸다.
가시나무는 가시가 크고 날카로워서 머리에 씌우면 그 가시가 깊게 찔러 피가 흘러내린다.
그리고 네가 왕이니까 어디 왕의 옷을 입어 보라고 모욕감을 주려고 자색 옷을 입히고 손으로 때렸다.
손으로 때린다는 것도 유대인으로서는 심한 모욕감을 주는 것이며 조롱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태와 마가는 임금의 지팡이를 상징하는 의미로 갈대 지팡이를 쥐여 주고 지팡이로 쳤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 뱉음과 수염 뽑힘을 당하고 뺨을 얻어맞고 수치와 조롱을 당하시면서
거기에 가시 면류관과 채찍질을 당하시면서도 그 고난을 다 당하시면서 한마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 모든 수치와 고통을 당하셔야만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서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이셨다.
4절에 보면..
"보라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빌라도가 예수님을 데리고 관정 밖으로 데리고 나와서 유대인들에게 보여 주었다.
예수님은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셨으므로 머리에서부터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온몸에는 채찍질로 살점이 뜯겨 나가 몸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참혹한 모습이셨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이렇게 길게 한 말이 아니라 "못 박아라"라는 말로 죽여라! 죽여라! 하는 광적인 함성이었다.
빌라도는 죄도 없는 예수님을 보고도 이성을 잃은 채 외쳐대는 군중들이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저 정도로 맞아서 피를 흘리고 있으니 이제 충분하지 않으냐 하였는데 오히려 더 흥분하고 날뛰었다.
그래서 빌라도는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하며 책임을 돌리듯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분명하게 선언한다.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7절에 보면..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으니까 신성 모독을 했기 때문에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빌라도는 그렇다면 왜 자기들의 법대로 처리하지 않고 자신에게 끌고 왔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인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고 하자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빌라도는 다시 관정으로 들어가서 예수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자 빌라도는 더욱 두려워하였다.
당시 로마 사람들은 신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빌라도는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인지 두려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가 진심으로 묻는 것이 아니므로 대답할 필요가 없으셨으며 답하면 구차한 변명이 되실 테니까..
만약에 그가 진실로 예수님을 알고자 하였다면 예수님께서는 말씀해 주셨을 것이다.
빌라도는 바쁘다.
관정 밖으로 나와서 유대인들과 이야기하고 또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께 묻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그들에게 내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죄도 찾지 못했으니 대체 이 젊은이가 누군지 두려움이 커졌다.
재판을 받고 계신 분은 예수님이셨지만 오히려 두려워하며 답을 찾고 있는 사람은 빌라도였다.
지금 밖에서는 죽이라고 아우성인데 예수님은 그런 것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시고 잠잠히 서 계셨다.
보통 사람이라면 살기 위해 변명하고 억울함을 호소할 텐데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빌라도보다 더 담대하고 평안해 보이는 모습이었으니 빌라도가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10절에 보면..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아무 말 없이 서 계신 예수님이 답답하여 빌라도는 살려 줄 테니 어디 속 시원하게 말이라도 하라고 한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진 자의 죄가 더 크다."
빌라도는 자신이 예수님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빌라도도 예수님을 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자들의 죄가 더 크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표적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죽이려 하였으니 그 책임이 더욱 컸던 것이다.
12절에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힘썼으나 그들은 마침내 빌라도의 가장 약한 부분을 공격하였다.
종교적인 문제로는 빌라도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제는 정치적인 문제를 꺼내 든 것이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이 말은 예수님의 죄를 입증하는 말이 아니라 빌라도를 압박하는 협박에 가까운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가 기록한 저서에 따르면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황제를 기념하는 금빛 방패를 세웠다가 유대 지도자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
빌라도가 그것을 철거하기를 거부하자 유대인 지도층이 직접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상소를 했고
결국 빌라도는 황제의 황금 방패를 치우게 된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위력이 있었다.
13절에 보면..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을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았다.
가바다는 "돌을 깐 뜰"이라는 뜻의 재판 광장으로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 최종 판결을 내린 장소이다.
요한이 장소와 이름을 중요시한 것은 예수님의 사건이 실제 역사 속에 있었던 사건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14절에 보면..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요한은 이때를 "유월절 준비일 제육시"라고 기록하였는데 마가복음의 시간 기록과 차이가 있어 보인다.
요한은 에베소 등 헬라 로마 문화권 독자를 대상으로 복음을 썼기 때문에 로마식 시간을 사용했을 것이다.
로마식은 자정부터 시작하니 제6시는 오전 6시경에 빌라도가 최종 판결을 내릴 때의 시간이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 위를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못이 박히실 때가 오전 9시가 된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
그러자 모인 군중들이 소리 지르며 말한다.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여기서 없이 하소서는 치워 버려라, 제거해 버려라 즉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라는 요구였다.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빌라도가 예수님을 앞에 세워 놓고 이 말을 하는 것은 사실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해서가 아니라
이 사람이 너희들의 왕이라며? 그런데 정말 왕이라고 하는 이 사람을 죽을 셈이냐? 하는 뜻이다.
자신을 정치적으로 압박하는 유대 지도자들을 향한 조롱이 들어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의 말이 그야말로 어이없는 말을 하고 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겨야 할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로마 황제를 자신들의 왕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을 신성 모독하였다고 죽이려고 하면서 실상은 그들이 신성 모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이들의 말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는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독자들에게도 과연 우리는 누구를 왕으로 섬기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듯하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조롱하며 왕이라고 하고 유대지도자들은 부인하나 실상은 예수님은 참된 왕이시다.
그 왕 앞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던 유대 지도자들이 왕은 로마 황제 밖에 없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요한은 이들의 말을 적나라하게 펼쳐 내면서 마치 예수님께서 왕으로 즉위하시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16절에 보면..
이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빌라도가 덕망이 있고 공정한 사람이었다면 이 문제를 흔들리지 않고 자기 주관대로 처리했을 것이다.
그는 양심과 출세라는 두 길을 놓고 망설였지만 결국은 유대인들과 등지게 되면 출세의 길을 택했다.
예수님께서 죄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총 독직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앞에 굴복하였다.
결국 그는 정의보다 자신의 자리를 선택함으로 무죄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고 말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총독직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지 몇 년 후인 주후 36년경, 사마리아에서 한 사람이
모세가 감추어 둔 성물들을 보여 주겠다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 산으로 모여들자
빌라도는 이를 반란의 움직임으로 판단하고 군대를 보내 강경하게 진압하였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이 무장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단지 종교 집회였다고 주장했다.
당시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에 의해 결국 빌라도는 로마로 소환되었고 총독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는 총독직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었으나 결국 그 총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7절에 보면..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1절에서도 예수님을 채찍질하였지만 이 때는 고문자들이 더 잔인하게 돌아가면서 채찍질하였다.
이 채찍질이 잔인해서 이것만으로도 사람이 죽을 수 있어서 십자가에 달리지 못할 때도 있었다.
골고다는 아람어로 "해골" 또는 "두개골"이라는 뜻이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언덕의 모양이 해골처럼 생겼기 때문이거나 공개 처형이 이루어지던 장소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골고다는 "해골의 곳"이라는 뜻으로 예루살렘 성 밖에 있던 처형장이다.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장소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곳에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일을 이루셨다.
그런데 공관복음에는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했는데 요한은 이를 언급하지 않는다.
이는 예수님께서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신 분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18절에 보면..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요한은 공관복음과는 다르게 그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면 쌍둥 쌍둥 다 잘라내 버리고 만다.
왜냐하면 요한의 관심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셨는가에 있기보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누구신가를 드러내는 것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 과감하게 잘라낸다..
요한은 십자가의 처참함보다 그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누구신지를 보여 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죄수 한 사람이 처형되는 것을 보았지만 요한은 그곳에서 왕의 즉위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십자가의 고통을 자세히 묘사하기보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에 시선을 집중시킨다.
20절에 보면..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워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 로마,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십자가형의 죄인은 앞에서 그의 죄명을 적은 패를 들고 가거나 죄인의 목에 걸어 모두가 알게 하였다.
그 명패에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명을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같은 말을 세 나라 글자로 새겨 넣었다.
그러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내가 쓸 것을 썼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혀 있으면 마치 로마 총독이 예수님을 실제 왕으로 인정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람이 사실이 아닌데 자기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일 뿐이라는 뜻을 넣어 달라는 요구였다.
빌라도는 은근히 그들이 하는 짓이 속이 다 보이니 총독이 할 수 있는 권한 하나를 딱 잘라 행사한 것이다.
23절에 보면..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여기서 깃이라고 한 단어는 옷 깃이 아니라 각 사람이 나누어 가진 분배된 몫이라는 뜻이다.
즉 겉옷이나 겉에 걸치는 망토나 허리띠 또는 머리 덮개 등등 예수님이 지니셨던 물품들을 말한다.
우리가 보는 성화에는 예수님의 앞을 천으로 가려 놓은 모습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옷이 벗겨진 채 달리셨다.
우리가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 모두 내어 놓아야 하듯이 예수님께서는 걸치신 모든 것을 벗기 우셨다.
우리가 당해야 할 수치를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도 남김없이 모든 수치를 다 짊어지시고 담당하신 것이다.
군인들은 이 속옷은 호지(꿰매다)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찢지 말고 제비 뽑자고 하였다.
그렇다면 군인들은 상전의 허락도 없이 이렇게 죄인의 물건을 자신들 마음대로 분배해도 되는 것일까?
아마도 이는 특별한 행동이라기보다 당시 십자가형을 집행하던 로마 군인들의 관행이었던 것 같다.
죄수의 처형이 끝나면 그의 소지품과 의복은 집행한 병사들에게 분배되곤 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그 단순한 장면 속에서 시편의 말씀이 성취되고 있음을 보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성경에.."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시 22:18)
시편 22편은 고난 받는 의인의 시로 기독교 전통에서는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예언해 준다.
극심한 고난과 버림받음을 탄식하며 조롱과 모욕을 받는 것을 노래하며 육체적인 고통까지도 묘사한다.
그리고 옷을 제비 뽑아 나눈다는 말로 마치 다윗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는 듯한 예언 시이다.
그러나 시편 22편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고백으로 끝이 난다.
군인들이 옷을 나누는 장면은 오래전에 기록된 시편의 말씀이 십자가 현장에서 그대로 펼쳐지고 있는 장면이었다.
25절에 보면..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여인들 네 명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시는 모습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 제자들은 다들 도망갔지만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이 함께 있었음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이었을까?
요한도 제자들이 도망칠 때에 같이 도망쳤을 테지만 다시 돌아와서 예수님 곁을 지켰던 것 같다.
26절에 보면..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에게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한은 자신을 나타낼 때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에
여기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동생들이 있어서 동생들이 어머니를 돌봐야 할 텐데 왜 요한에게 부탁을 하셨던 것일까?
그것은 예수님의 형제들은 아직 예수님을 믿는 제자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신 것은 단순한 효도의 모습이 아니라
요한이 끝까지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곁에 있었기에 믿음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가족 선언이다.
즉 믿음 안에서 형성되는 공동체가 혈연관계보다 더 깊은 관계가 된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28절에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이에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대었다.
몰약을 탄 포도주는 십자가의 고통을 덜 느끼도록 일종의 진통제나 마취 효과가 있는 음료였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흐리지 않고 온전히 감당하시기 위해 그것을 거절하셨다.
그러나 이제 “목마르다” 하신 후 받은 신 포도주는 단순한 진통제가 아니라 시어진 포도주로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며 동시에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는 장면이다.(시편 69:21)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후 마지막 말씀을 하신다.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이 숭고한 사랑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를 위해 죽어 주신 주님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