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이루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고통이 가장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시고 신 포도주를 마시고 인류의 구원을 위한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숨을 거두셨다.
바로 그 순간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졌다.
그때부터 죄와 사망과 악의 권세를 무너뜨리게 되었고 구원으로 향하는 영생의 길이 열렸다.
그때 십자가 형을 집행하던 백 부장이 예수님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을 하였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그가 어떤 사람으로 살았든 간에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있을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 하나님을 내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신비로운 연합을 이루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죽으신 것은 이 세상사람들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이었다.
예수님은 오래전부터 오시는 것부터 죽으시는 그 순간까지 모두 말씀으로 예언되어 있었다.
모세가 놋으로 만든 뱀을 장대에 달아 높이 들어 올렸을 때부터 십자가는 예언되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난을 예고하실 때마다 인자가 높이 들려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서 "가상칠언" 즉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곱 마디의 말씀을 알아보자..
첫 번째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늑 23:34)
십자가에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였다.
두 번째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십자가 양쪽에 달린 강도 중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임할 때 기억해 달라고 할 때 하신 말씀이다.
강도는 선행도 공로도 없던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믿었을 뿐인데 구원을 약속하셨다.
세 번째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육신의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하시는 말씀이셨다.
주님은 30세까지 가족을 보양하셨고 자신의 죽음 보다 어머니를 더 걱정하셨다.
네 번째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 27:46), (막 15:34)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가상칠언 중에 가장 무거운 말씀이다.
시편 22편의 첫 구절을 인용하신 것으로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셨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죄를 담당하시며 인간이 느끼는 버림받음의 깊은 고통까지 담당하셨다는 의미이다.
다섯 번째로 "내가 목마르다"(요 19:28)
채찍질과 십자가형으로 인한 육체적 갈증은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을 증명하심이다.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이 느껴야 할 아픔과 고통을 똑 같이 느끼시는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심을 뜻한다.
여섯 번째로 "다 이루었다." (요 19:30) 헬라어로는'테텔레스타이'로 값이 완불되었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사역이 실패로 끝났다는 선언이 아니라 구원의 계획이 완성 되었다는 승리의 선언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어린 양이 되어 주셔서 우리의 죄를 속량해 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
일곱 번째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으로 절망의 외침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도이다.
예수님은 어쩔수없어서 죽음에 이끌려 가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영혼을 아버지께 맡긴 것이다.
31절에 보면..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않으려고
빌라도에게 아직 십자가 위에서 살아 있는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빌라도가 허락하였다.
여기서 큰 날이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이 아니라 안식일과 유월절 절기가 겹친 특별한 안식일을 말한다.
유대인의 절기를 보면 유월절(니산월 14일) 저녁부터 무교절이 시작되어 무교절 첫날은 안식일처럼
일을 하지 않는 거룩한 날이었기 때문에 평소의 안식일보다 더 중요하고 더 거룩하게 지켰던 것이다.
그날에 시체가 십자가에 달려 있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로마의 십자가형은 원래 죄수를 오랫동안 매달아 두어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주는 형벌로 그대로 두어야 하나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에 "시체를 밤새 나무에 두어서는 안 된다"(신 21:23)라는 말씀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특히 그날은 큰 안식일을 앞두고 있어서 다리를 꺾어 빨리 죽게하고 시체를 치워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빌라도는 유월절 기간의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그들의 요청을 허락한 것으로 보인다.
군인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 아직 살아있는 두 사람의 다리의 정강이를 쇠 몽치로 때려서 꺾는다.
다리를 꺾게 되면 몸을 밀어 올릴 수 없어서 질식하게 되어 빨리 죽게 되는 죽음을 앞당긴 잔인한 방법이다.
두 강도는 다리를 꺾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숨지셨기에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피와 물이 나왔더라.
35절에 보면..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은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이를 증언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부터 숨지실 때까지 모든 것을 그대로 다 지켜본 요한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요한은 여기서 왜 그 증언이 참이라고 거듭 강조하여 말을 한 것일까?
요한이 이 장면을 유난히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죽으셨음을 증언하기 위함이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도 있지만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쏟아 진 것을 직접 본 증인으로 그의 증언이 참되다고 말한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지 않고 기절만 했다가 3일 후에 깨어났다는 것이다.
심장병 의사들의 말을 빌리면 심장은 심낭이라 불리는 막으로 심장을 둘러싸여 있는데
이 막에는 심장의 표면이 건조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액체를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온 것은 심낭의 액체와 심실 안의 피가 섞여서 나왔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물과 피가 섞여 나왔다는 것은 심장이 파열되어 운명하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36절에 보면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함이라.(출 12:46, 민 9:12, 시편 34:20)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것을 보리라."(슥 12:10) 하였느니라.
그리고 예수님의 좌우편에 강도 둘이 함께 죽는다는 것은 이사야 53:12절로 성경에 예언 되었고
겉옷은 넷이 나눠 갖지만 속옷은 한 명이 제비를 뽑아 혼자 갖게 된다는 것은 (시편 22:18)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 예언된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자.
ㅁ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시 69:21)
ㅁ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시 34:20)
ㅁ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슥 12:10)
ㅁ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사 53:9)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순간까지도 성경의 말씀대로 다 지키고 이루셨으며
죽으신 후 장사되시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은 조금도 어긋나지 않고 예언하신 말씀대로 다 이루셨다.
이렇게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 땅에 오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시다.
요한이 예수님의 죽음을 유난하게도 정확하면서도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갔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후대에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죽지 않았고 기절하였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라는 주장들도 있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음을 밝히면서 십자가의 마지막 순간을 매우 세밀하게 기록하였다.
그리고 또 요한은 어떻게 빌라도가 관정 안에서 예수님과 대화한 내용을 어떻게 자세히 알고 있었을까이다.
어떤 사람들은 빌라도와 같이 있었던 사람이 나중에 예수님을 믿으면서 알려 준 것이라고도 하고
다른 주장은 당시 총독 관저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여 로마에 보고한 내용이라고 보기도 한다.
본디오 빌라도 역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에 대해 상부에 보고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 기록이 오늘날 전해지지는 않지만 십자가의 사건은 결코 어느 한구석에서 은밀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았고 로마와 유대의 지도자들이 모두 관련된 공개적인 사건이었기에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말씀하고 있지 않으므로 우리는 그 경로를 정확히 알 수는 없고 그렇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38절에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들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에는 눈에 띄지 않고 믿었던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두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다 도망치고 오히려 그들이 앞으로 나선다.
요한은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를 등장시키며 지금까지 숨어 있던 제자들의 참 모습을 보여 준다.
아리마대는 유대 지방의 성읍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무엘의 고향인 라마다임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총독 관저에 가서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요구하였다.
당시 예수님은 로마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된 죄수였고 유대 지도자들이 제거하려던 사람이었으며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마저도 숨어 있는 상황에서 시신을 달라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당시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시각은 오후 3시경이었다.
그러나 곧 안식일이 시작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시신을 수습할 시간은 3시간 밖에 없었다.
아리마대 요셉은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 방치해 둘 수 없었다.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의 시신은 로마의 관리 아래 있었기 때문에 아무나 가져갈 수 없었다.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 지내기 위해서는 총독의 허락이 필요하였으므로 아리마대 요셉은
지체하지 않고 빌라도를 찾아가 시신을 요청하였고 허락을 얻어내어 장례를 준비할 수 있었다.
아리마대 요셉이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했던 것은
예수님의 시신을 장례를 치르지 않고 십자가에 내버려 두면 새들의 먹이가 되어 훼손이 되고
시신을 공동묘지에 던져 방치해 놓기 때문에 짐승들의 먹이가 되는 것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로마는 반역죄로 처형된 죄수에게는 마지막 존엄까지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39절에 보면...
일찍이 예수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시신을 달라고 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던 사람이었고
니고데모도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유대교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그는 부자였다.(요 3장)
니고데모가 가져온 몰약과 침향은 시체 썩는 냄새를 없애는 데 사용하는 방부제 역할을 한다.
백 리트라는 약 34kg으로 왕을 장사 지낼 때 사용되는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이다.
니고데모 역시 숨어 있던 제자로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경외심을 나타내는 모습을 보인다.
40절에 보면..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에 쌌더라.
아리마대 요셉은 서둘러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리고 니고데모는 막대한 양의 향품을 발라드렸다.
그들은 예수님의 장례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왕을 모시는 장례 절차대로 정성껏 모셨다.
41절에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이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곳은 아리마대 요셉이 죽게 되면 자신이 묻혀야 할 그의 무덤에 예수님을 모셨다.
이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진정한 왕으로 모신 것이다.
이 일로 니고데모는 그동안 누려왔던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의 사회적 지위와 명망을 잃었을 것이고
아리마대 요셉 역시 그동안 자신이 쌓아 온 사회적 지위를 모두 잃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이 누렸던 지위보다는 예수님을 섬기는 것을 더 존귀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숨어있던 그들은 지금이 바로 자신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주님을 섬겨야 할 때임을 알았던 것이다.
무덤과 향품에 사용된 막대한 양의 돈도 돈이지만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서는
당국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고 예수님의 시신을 안장하려면 이 정도의 영향력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이들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일은 자신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그동안 쌓아 놓은 모든 지위를 잃게 되는 것을 각오하고 주님을 모시는 일에 참여한 것이다.
42절에 보면..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에 두니라.
사람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보였으나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구원의 역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주님의 제자들 중에는 베드로처럼 앞장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철저한 빌립도 있고
배려심 많은 안드레도 있고 의심 많은 도마도 있으며 언제나 사랑받기를 원했던 요한도 있지만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오랫동안 숨어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쓰임 받는 사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드러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자리에서 그가 최선을 다해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의 부족함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많은 것을 드리기보다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를 보신다.
우리는 빌라도처럼 진리를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또한 베드로처럼 두려움 때문에 주님을 멀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점검해 보아야 한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 처럼 부족함과 연약함이 있어도 주님을 향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함을 배운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준비된 사람을 부르시고 사용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