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에 보면..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았다고 하며 다른 공관복음에서는
그때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러내고 그 위에 앉아 있었다.(마 28:2)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자들은 두려움에 죽은 사람들 같이 되었다고 하였다.
마가복음에서는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다른 두 여인이 함께 향품을 들고 갔다고 하였는데
그 두 여인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였다고 한다.(마가복음 16:1~2)
여인들만 갔기 때문에 무덤을 막고 있는 큰 돌을 어떻게 굴릴 것인지 걱정했으나 이미 돌문은 열려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자리에 남고 두 여인은 급히 베드로와 주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알렸다.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하자 베드로와 요한은 시신을 도난 당한 줄 알고 급히 무덤으로 달려갔다.
다른 제자는 요한을 말하며 복음서에 자신의 이름 대신에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 자신을 표현했다.
두 사람이 달려갔는데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먼저 무덤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들어가지 않고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시신은 보이지 않고 세마포만 놓여 있었다.
그가 먼저 도착했음에도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두려움이었는지 혹은 베드로를 기다린 것인지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아 분명하지 않지만 요한은 끝까지 먼저 행동하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당시에는 무덤이 완전히 봉해지지 않거나 관리가 허술한 경우 시신이 도난당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여인들은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옮겨 간 것으로 생각하고 제자들에게 가서 알렸던 것이다.
베드로가 달려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여있고 머리를 감쌌던 수건은 다른 곳에 따로 있었다.
이는 누군가 훔쳐 간 흔적이라기보다는 머리를 감쌌던 모양 그대로 말려 있는 상태로 정돈된 모습이었다.
8절에 보면..
'그 때서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요한은 믿었다고 하였는데 무엇을 믿었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시신이 없어진 사실을 믿은 것인지 아니면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은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이 말로 그들은 아직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완전한 믿음을 믿은 것이 아니라
눈앞에 벌어진 빈 무덤의 사실을 받아들였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10절에 보면..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나 참 그렇다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야 하는데 아닐까?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집으로 가버렸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무덤은 비어 있고 시신은 사라졌으며 세마포만 남아 있는 상황이었으니
정확한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더 머물러 살펴보는 것이 일반적일 법도 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놀라움과 혼란 속에서 더 이상 상황을 정리하지 못한 채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다.
여기서 “울다”는 단순한 눈물이 아니라 깊은 슬픔 속에서 터져 나오는 통곡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시신은 도난당했고 무덤에 왔던 제자들도 돌아갔지만 마리아는 갈 수가 없었다.
통곡하며 무덤 안을 바라보던 마리아는 그곳에서 흰 옷 입은 두 천사를 보게 되었고
그들은 예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곧 머리와 발 쪽에 각각 앉아 있다가 마리아에게 물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마리아가 이 말을 하다가 뒤를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더라.
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지금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신 줄 모르고 동산지기 인 줄만 알았다.
막달라 마리아는 설마 하니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또한 통곡하는 슬픔 속에서 눈이 흐려져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며 내가 가져가리이다."
"마리아야"
그 한마디 말씀에 마리아는 자신을 부르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게 되었다.
늘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던 그녀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예수님의 음성을 단번에 알아들은 것이다.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랍오니'는 아람어 표현으로 단순한 호칭을 넘어, 존경과 사랑을 담아 스승을 부르는 고백이었다.
17절에 보면..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아마도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 너무나 기쁜 나머지 주님을 꼭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던 상황을 보여준다.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잃어버릴까 싶은 마음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했다는 말씀은 승천을 의미하기보다는
이제는 이전처럼 육체적으로 붙잡는 관계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로 변화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내 형제들이라고 하신 말씀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친 제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주님 곁을 떠났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형제로 부르시며 관계를 회복시키셨다.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보지도 않고 싹 가버린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품어 주신다.
이는 그들이 십자가의 사건으로 인해 실패자이기 이전에 회복의 대상임을 보여 주신 것이다.
즉 부활을 통해 육체적인 관계를 넘어 성령 안에서 새롭게 이어지는 관계로 변화되었음을 보여 준다.
훗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이제는 믿음 안에 한 형제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과 형제가 되었으니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슬픔 속에 머물러 있지 말고,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제 마리아는 슬픔에 머물러 있을 사람이 아니라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증인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증인으로 인정하지 않던 당시의 문화 속에서 가장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찾아오셨다.
그것도 일곱 귀신이 들려서 천대받던 마리아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가장 큰 사명을 맡겨 주셨다.
형제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인간의 관계가 부활로 인해 성령을 통하여 새로운 관계로 변화된 것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가장 먼저 전하신 소식은 책망이 아니라 회복과 사랑의 소식이었던 것이다.
19절에 보면..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때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자기들도 잡으러 올까 봐 두려워서 문을 꽁꽁 닫아 놓고 숨어 있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책망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평강 하라고 하셨다.
이 세상에 있는 신들은 그들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섬기라고 찾아오라고 하지 찾아가는 신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둠 속에 있는 연약한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셔서 위로하시고 보듬어 안아 주신다.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기쁘면서도 어쩌면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았음에 고개를 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 못 하고 부활하심을 믿지를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못 박히셨던 손과 창에 찔리셨던 옆구리를 보여주니 그제야 예수님이신줄 알고 기뻐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은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일을 보지 못했으니 제자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곧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함께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였을 것이다.
21절에 보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오신 예수님께서는 평강을 선포하시며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도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신다고 하신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시고 그들을 만민에게 보내 하나님 백성 만들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신들만 선민이라 여기고 만민을 배척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성령은 창세기 1장 2절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한 분으로 혼돈 위를 움직이며 질서를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상 안에서 실제로 역사하시는 방식으로 드러내시며 임재하는 것을 말한다.
22절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께서 숨을 내쉬는 모습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셨던 장면이다..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뜻이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을 받으려면 예수님을 믿는 것만 아니라 거듭나야 그 사람 안에 성령이 거하실 수 있다.
그리하여야 그 사람의 생각을 밝히시고 진리를 깨우치게 하시며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게 하신다.
성령님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며 믿음의 길로 인도하사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며 성령을 주시며 사람들의 죄를 사하는 권세도 맡기셨다.
제자들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여서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엉뚱한 길로 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말씀은 사람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를 주신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는 복음을 맡기셨다는 의미이다.
이 말씀은 사람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으로 오해하여 교회 역사 속에서 많은 논쟁을 낳았다.
이미 죄를 지었어도 천국으로 가는 열쇠를 사면 그 죄를 면제받는다고 하여 면죄부를 팔았던 사건도 있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말을 들어야 죄 사함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이단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을 믿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는 죄 사함을 받고
거부하는 자는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게 된다는 의미로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할 권한을 주심이 아니라
죄 사함의 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자들이 본 그대로 증언하여 그 말을 믿으면 죄사함을 얻는 것이다.
24절에 보면..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디두모는 그리스어로 쌍둥이인데 도마 역시 아람어인 테오마에서 온 이름으로 그 뜻 또한 쌍둥이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쌍둥이라 하는 도마"를 아람어와 그리스어로 함께 기록한 셈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도마가 누구의 쌍둥이인지는 누구의 형제였는지 전혀 말해 주고 있지 않다.
25절에 보면..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도마는 자신이 직접 확인하지 않은 것은 쉽게 믿지 못하는 신중하고 비판적인 사람이었다.
반면에 그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것을 알면서도 나사로를 살리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신다고 하자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며 앞장서 따라나섰던 사람이기도 하다.
누구보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따랐기에 더욱 확실히 알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여자들의 말을 듣고도 제자들이 숨어 있는 것을 보고
도마는 그렇게 숨어 있기보다는 여자들이 보았다는 예수님을 찾아 내 보려는 마음이 들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분을 만나 진실로 예수님이신지 알아보려고 했던 의도였는지도 생각해 볼 만하다.
성경은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않고 있지만 그러나 도마는 겁쟁이보다는 직설적이고 진지한 사람이었다.
26절에 보면..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유대인들은 날짜를 셀 때 처음 날과 마지만 날을 모두 포함해서 세는 경우가 많아서
부활하신 날을 첫째 날을 첫날(주일)로 치면 여드레날이면 7일 뒤 첫날 즉 주일이 된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첫날을 주일로 정하여 섬기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돼라."
도마는 첫 번째 주일에 자기가 없을 때에 예수님께서 오셨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눈으로 직접 예수님을 만나 보아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참석한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자신의 못 자국 난 손을 보고 옆구리에 창에 찔린 곳을 넣어 보라고 하신다.
도마의 속 마음을 다 아시고 의심스러우면 확인해 보고 믿음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신다.
어쩌면 우리 같으면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도 그렇지만 숨어 있는 제자들도 한심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연약한 모습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도마가 말한 그대로 해 보라고 하신다.
유대인들을 향해서는 거침없이 진리를 말씀하시나 연약한 자들에게는 그렇게 온유하실 수 없으시다.
예수님의 말씀에 도마는 만져보지 않아도 바로 예수님이심을 깨달아 알았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는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이며 메시아 이시라는 고백을 넘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한다.
제자들 중에서 도마가 가장 먼저 예수님을 향해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하였다.
2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도마가 예수님을 보고서야 그 믿음을 고백하자 도마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보고 믿는 것이란 과학적이거나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만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의 경험이란 제한적이라서 잘못된 판단을 하기 쉽고 자신이 본 것 외에는 믿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표적은 과학이나 경험으로는 터득할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기적들이다..
그러므로 보고 경험한 것만 믿는 자들은 결단코 주님을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이 마찬가지이다.
반면에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은 무조건 아무거나 믿는 맹목적인 신앙을 가지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기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으라는 말이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면
그것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성경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보지 않고도 믿게 된다.
그런데 이런 믿음은 영적인 눈이 떠져야 가능하므로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모셔야 한다는 뜻이다.
30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갖게 하려는 데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요한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부터 차례로 기록하지 않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였다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에 대해서 요한복음 첫 장과 연결해서 후대 사람들에게 전한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면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씀이다.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며 살아가는 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이란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을 뜻하는 말이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장자 우리를 심판하실 우리의 구세주 왕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뜻이다.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주께로부터 오는 생명인 영원한 생명도 그를 떠나게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