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에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디베랴 호수는 갈릴리 바다를 가리키고 예루살렘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이 바다는 구약 성경에서는 긴네렛 바다(민 34:11)라 하였고 또 긴네롯 바다(수 12:3)라고도 했다.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디베랴 바다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왜 디베랴 호수로 간 것일까?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이 안계시니 무엇을 할지 몰라서 원래 어부의 직업으로 돌아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살아 나신 후에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신다고 하셨고.(마 26:3)
또 부활 아침에 천사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셔서 갈릴리로 가실 것이라고 하였다.(마 28:7)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갈릴리에서 볼 것이라고 하셨고(마 28:10) 천사도 제자들에게 말했다.(막 16:7)
그러므로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로 간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처음 부르셨던 갈릴리로 다시 모으고자 하셨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이 곁에 계시지 않으면 제자들은 각자 자기 삶의 자리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부터 갈릴리 바다로 제자들을 부르시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것을 보았으나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아직 분명히 알지 못하였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지만 예전처럼 함께 다니실 수 없으니 여전히 혼란과 기다림의 시간 속에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익숙했던 일로 돌아갔고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은 다시 그들을 찾아오신다.
대부분의 신들은 인간이 신을 향해서 가야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신이 인간을 찾아오시는 사랑이시다.
2절에 보면..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배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있을 때에 베드로가 자신은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그물을 들고 가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요한이 배와 그물을 기록할 때 그 단어 앞에 관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단순히 "배"나 "그물"이 아니라 "그 배", "그 그물"이라는 표현으로 기록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전에 탔던 배라고도 하지만 꼭 그 배나 그물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요한의 이러한 표현은 제자들에게 익숙했던 삶의 자리를 떠올리게 하였기 때문에 붙였던 것이 아닐까 싶다.
갈릴리 바다와 배와 그물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몸 담고 있었던 그들의 삶의 현장이었다.
그 때 그곳에서 물고기를 잡지 못하고 돌아왔을 때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그곳을 기억하기 위함이었으리라.
주님께서 처음 그들을 부르셨던 그 자리에서 부활 하신 후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4절에 보면..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 지라..
갈릴리 바다는 낮에는 뜨거워서 고기들이 물 속 깊은데로 들어갔다가 밤이 되면 해면으로 몰리기 때문에
어부들은 낮 보다는 밤에 더 적합한 조건이 되어 주로 밤에 그물을 던지는 경우가 많았다
제자들이 밤에 고기를 잡으려 한 것도 이러한 어부로서의 익숙한 방식에 따른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그들은 아직 예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경험과 익숙한 방법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 상태였다.
밤새 수고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다는 것은 인간의 경험과 능력만으로는 채울 수 없음을 뜻한다.
그리고 날이 밝아오자 이제 실패했다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신 것이다.
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얘들아" 라고 부르신 것은 아이들을 다정하게 부르는 애정이 담긴 사랑의 음성이다.
"없나이다." 제자들은 주님이 신줄 모르고 그 음성에 대답하였다.
"그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이에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배 오른편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이 잡혀서 그물을 들 수 없더라.
배와 바닷가 사이는 약 오십 칸쯤 된다고 하였으니 오십 칸은 약 200규빗으로 100m쯤 된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요한은 그물을 배의 오른편에 던지라는 말씀이 귀에 익었다.
어쩌면 요한은 바닷가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듣고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때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밤새 수고하였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던 때에 말씀 한마디로 물고기가 가득 잡혔던 일을 기억하여
예수님이 멀리 계셔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아 보았던 것 같다.
요한은 기쁘고 반가운 마음에 예수님을 바라 보면서 "주님이시다."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 소리를 듣자 마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바다로 뛰어내린 것이다.
그 와중에도 예수님께 간다고 생각하여 고기를 잡느라고 벗었던 옷을 입고 바다에 뛰어 든 것이다.
역시 베드로는 알게 되었으면 바로 행동으로 옮겨 실천하는 순수함 때문에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다.
베드로는 헤엄쳐서 가고 다른 제자들은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가니
예수님께서 그들을 먹이시려고 숯불에 생선을 굽고 계셨고 그 옆에는 떡도 준비해 두셨던 것이다.
밤새도록 애를 써도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을 위해서 손수 먹일 음식을 준비하고 계셨다.
사실 제자들은 갈릴리로 오라는 말씀에 순종했지만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아직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지만 자신들이 걸어가야 할 길은 여전히 안개 속에 가려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책망하실만도 한데 그저 그들이 배가 고플까 봐 조반을 차리셨다.
주님께서 아침 상을 차려 놓으신 것을 보는 제자들의 마음은 과연 어땠을까?
갈곳 몰라서 헤매고 지쳐서 집으로 돌아온 탕자를 버선발로 달려가 맞아 준 그 따뜻한 온정을 느꼈으리라.
우리가 가는 길이 비록 험하고 힘들어 쓰러져도 항상 우리에게 손을 내 밀어 주시는 주님을 보는 것 같다.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즉시 배로 달려간다 베드로는 항상 바쁘다 ㅎ
시몬 베드로가 그물을 끌어 올리니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되었으나 그물은 찢어지지 아니하였다.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하다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자 그물이 가득 차도록 물고기가 잡혔다.
많은 사람들이 이때 잡은 153마리에 어떤 영적 의미가 있는지를 찾으려 하지만 본문에서 강조한 것은
153마리나 되는 많은 물고기의 숫자보다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한이 말하고 싶은 것은 잡은 물고기가 아니라 앞으로 제자들이 감당하게 될 사역에 중점을 둔다.
이제 제자들은 물고기를 잡는 어부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을 받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더라도 주님께서 친히 붙드시기에 그들을 놓치지 않으신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물고기 잡느라고 지치고 힘든 제자들을 향하여 부르신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사실 조반을 먹으라는 그 말씀 앞에서 제자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고 제자들은 주님을 버리고 다 도망쳤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나누어 주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난 기쁨과 죄송함이 뒤섞인 마음으로 주님 앞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침상을 차려놓고 먹으라 하시니 밥이 넘어가지 못했을 것 같다.
기쁨 반 눈물 반 뒤법벅이 되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묵묵히 눈물로 밥을 말아먹었으리라.
그 밥상에는 생선과 떡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향한 용서와 사랑이 함께 놓여 있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날 조반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참으로 따뜻한 아침 밥상이었을 것이다.
그 기억으로 그들은 예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했을 것이다.
15절에 보면..
그들이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베드로라고 부르지 않으시고 원래 요한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신다.
이는 주님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겠다고 장담하였던 베드로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연약한 시몬만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을 끄집어내신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뜰에서 주님을 세 번 부인하던 그 밤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가 잘못한 것을 묻지 않으시고 다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신다.
믿느냐고 물으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마음 안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느냐 하고 물으신 것이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이 사람들보다'는 전통적인 해석으로는 다른 제자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예전에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신만은 끝까지 따르겠다고 장담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한 죄책감으로 감히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도저히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여기서 사용된 사랑이라는 단어를 두고 여러 해석이 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사랑은 헌신적인 사랑을 뜻하는 '아가파오'이고
베드로는 친구 간의 우정을 뜻하는 '필레오'로 대답하였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의 핵심은 사랑의 단어 차이보다 베드로의 마음에 있는 것 같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뼈아픈 일이 그의 가슴을 치므로 친구 간의 우정인 필레오로 답을 한다
베드로는 더 이상 자신의 사랑을 자랑하지 않고 예전처럼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장담하지도 않는다.
다만 "주님께서 내 마음을 아십니다." 그것이 지금 베드로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고백이었다.
주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에게 사명을 맡기신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여기서 "먹이라"는 것은 양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는 것으로 즉 영적인 양식을 뜻한다.
내 어린양이라고 하셨으므로 베드로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씀이다.
어린 양이란 초신자를 가리키며 아직 자라야 하므로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믿음을 세워 주고 어린 신자를 돌보라는 사명을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넘어져 낙심한 베드로의 마음을 일으켜 주님의 양 떼를 맡기는 목자로 세워 주신다.
베드로가 아픈 그 기억으로 좌절만 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크신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16절에 보면..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치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시 처음과 똑 같이 같은 말씀으로 베드로에게 사랑하고 있느냐고 물으신다.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왜 또 물으실까 하며 점점 더 자신의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잠재해 있던 자신의 나약함을 베드로 자신이 스스로 끄집어 내게 만드신 것이다.
처음에는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하시고 두 번째에서는 내 양을 치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양을 치는 목자의 역할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 양을 인도하고 보호하고 돌보며
위험으로부터 지켜야 하는 것까지 훨씬 넓은 개념으로 하나님의 양들을 돌봐야 한다는 뜻이다.
앞으로 그가 걸어야 할 길이 평탄한 길이 아니고 고난의 길이기에 주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건드신다.
17절에 보면..
세 번째로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주님의 어린양을 치라고 그에게 목자의 사명을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시면서 세 번을 물으실 때마다 세 번 양을 부탁하셨다.
사랑은 말로만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돌보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양들은 베드로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의 양이 아니라 주님의 양이었다.
그런데 세 번째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를 베드로가 답하던 필레오로 물어보신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한 후에 감히 아가페 사랑을 말할 수 없어 필레오로 답을 하였는데
이번에는 베드로가 답을 한 필레오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 하고 물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제가 그 정도밖에 되지 못한다고 답하는 그 눈높이로 내려오신 것이다.
내 생각에는 베드로에게 '그래 네가 부족해도 괜찮아 너는 잘해 낼 수 있을 거야' 하시는 듯하다.
같은 말씀으로 사랑하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말씀에 베드로의 가슴속은 온통 울음바다였으리라.
첫 번째 질문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두 번째 질문에서는 그때의 아픈 기억이 떠올랐으며
세 번째의 질문에서는 그 밤의 그 모든 일이 가슴 깊이 사무쳐 올라와 심히 근심하였을 것이다.
주님 앞에서 큰소리치던 베드로는 사라지고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베드로만 남아 있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연약함을 다 끄집어내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맡기신다.
"내 양을 먹이라."
주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주님의 양을 맡기시며 다시 일으켜 세우신다.
베드로는 자신만만했던 자신의 삶이 얼마나 연약하였는가를 깨달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은 절대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부인하고 말았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죄책감에 주저앉아 있던 베드로를 회복시키시고 다시 사명의 자리로 부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말씀은
차라리 후련하게 매를 맞는 것보다 더 아프게 베드로의 마음을 파고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사랑의 손길로 어루만지시며 다시 일으켜 세우셨다.
오래전에 내가 섬기던 목사님께서 주일 예배 설교로 시편 23편 말씀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씀을 설교하셨다.
그런데 다음 주도 똑 같이 이 말씀을 전하시고 그다음 주도 또 같은 말씀으로 설교를 하셨다.
성도들은 두 번째는 목사님께서 착각하셔서 그러신가 했다가 세 번째도 같은 말씀을 하시니까
모두가 숙연해지면서 자신들을 뒤돌아보게 되면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또 다른 내가 내 마음 안에서 나를 움직이고 있는 그것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울컥하며 세상을 향해 얼마나 부지런히 뛰고 있는 내가 보인 것이다.
주님께서 나를 이끌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어야 하는데 난 늘 목이 말라 있는 것이다.
믿음 안에 살아야 한다는 설교 보다도 더 깊은 말씀에 자상하게 안아 주시는 주님을 뵙게 되었었다.
사실 목사님께서도 목회하시는 것이 힘들어 목사님 자신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다.
18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젏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진실로 진실로라고 하심은 아주 중요한 말씀이라는 뜻으로 명심하여 들으라는 말씀이다.
베드로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다닌다는 것은 자유롭게 복음을 증거하고 다닐 것이라는 의미이고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린다는 말씀은 십자가에 죽게 되는 것을 말씀하시며 남이 띠를 띠운다는 것은
베드로가 자유를 구속받게 된다는 말씀으로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죽게 될 것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훗날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초대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그는 자신을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죽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면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를 원하였다고 한다.
한때는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였지만 단 한 번 설교에 삼천 명을 믿음으로 이끌기도 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까지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 하시기 위해서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을 것이다.
베드로에게 물어보신 것은 그의 마음 안에 죄의식에 사로 잡혀 있었기에 그것을 치유하심이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이 짧은 말씀이 어쩌면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요점이 아닐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씀을 배우며 믿음 생활을 한다는 것은 말씀을 안다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된다.
알았으면 주님께서 가신 길을 함께 동행해서 걸어가야 하는 것인데 이것이 사실 만만치 않다.
부유하게 살았던 사람은 배고픈 사람의 심정을 절대로 이해 못 한다
그가 배가 고파봐야 배가 고픈 사람의 심정을 알게 되고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아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런 아픔을 겪었기 때문에 자신과 똑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니까
예수님처럼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품어 줄 수 있게 되는 그것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20절에 보면..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요한은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기록한다.
자신이 예수님을 사랑한 것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이 더 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는 요한을 보고 예수님께 여쭈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아이고! 베드로 어쩌나...
그렇게 찔림을 받고 주눅이 들어 있다가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다가
어째서 예수님을 따라오는 요한이 그의 눈에 들어오자 그의 앞날이 궁금해진 것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은 또한 솔직하기도 해서 금방 혼이 났던 것을 잊어버리고 예수님께 물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요한이 어떻게 되던지 그건 주님께서 하실 일인데 그게 베드로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시면서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니 너는 너의 할 일이나 잘해라 하시면서 주님을 따르라고 하셨다.
어쩌면 베드로는 요한이 동생 같아서 챙겨주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한 눈 판 것이다.
따르라고 하셨으면 뒤 돌아보지 말고 주님만 따르면 되는데 다른 곳을 보게 되면 제대로 따를 수 없다.
주의 일을 하면서 여러 가지 내 생각에 사로 잡히면 비교하게 되어 주님을 따를 수가 없게 된다.
23절에 보면..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니라.
24절에 보면..
이 일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이 말씀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눈에 띈다.
요한은 복음서 전체에서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하였는데,
마지막에 와서는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바로 이 사람이라는 말과 우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우리는"이라는 표현은 마치 요한 외에 또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부분이 요한의 증언을 잘 알고 있던 제자들이나 초대교회 공동체의
확인과 보증의 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물론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쳐 기록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말씀은 적어도 요한이 아닌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인정되고 받아들여졌음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엉뚱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보게 된다.
요한복음이 기록된 시기를 생각하면 사도 요한은 이미 상당히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요한이 자신의 증언을 들려주고 곁에 있던 집필자가 기록했을 가능성도 고려해 볼 만하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기록된 말씀은 요한의 증언을 기록하던 사람이 남긴 확인의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생각일 뿐 정확한 기록 과정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만일 이 문장이 훨씬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면 적혀 있지 않은 사본도 발견되어야 할 텐데
현재 발견된 사본들에는 모두 이 말씀이 기록되어 있어서 나는 오히려 이 문장이
요한의 증언이 정리되는 과정에서 처음부터 함께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보게 된다.
2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이 외에도 많다고 말씀한다.
요한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표적과 말씀들을 기록하였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모든 사역을 다 적은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셨고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셨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고 생명을 살리시는 일들을 행하셨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을 하나하나 기록한다면 세상이라도 그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문자 그대로 세상에 책을 둘 곳이 없다는 뜻이라기보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과 말씀이 그만큼 풍성하고 무궁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일 것이다.
사람은 평생을 살아도 자신이 살아왔던 지난 삶을 다 기록하지 못한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어찌 몇 권의 책으로 다 담아낼 수 있겠는가.
요한은 복음서를 마치면서 자신이 기록한 내용이 전부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일부만 기록되었다 할지라도 이 말씀만으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믿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요한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기 위해 복음서를 기록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따랐던 제자였지만 자신이 기록한 것이 전부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님은 자신이 기록한 것보다 훨씬 크신 분이라고 고백하며 복음서를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 증언을 마치며 조용히 펜을 내려놓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