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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알아가기

사도행전 1장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작성자마당|작성시간26.06.20|조회수29 목록 댓글 0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울과 함께 동행했던 누가이며 기록 연대는 주후 61~63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성령님이 내려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초대 기독교의 역사적인 이야기이다.

교회와 사도들 위에 성령님이 임하신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다와 사마리아를 거쳐

유럽과 마케도니아를 넘어 로마 제국 전역으로 기독교가 어떻게 퍼져나갔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사도행전을 크게 둘로 나눈다면..

1~12장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된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수리아의 안디옥까지의 기록이고

13~28장은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이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를 거쳐 로마에까지 전파되는 기록이다.

 

1절에 보면..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데오빌로(Theophilus)는 Theo(테오) = 하나님, Philos(필로스) = 사랑하는 자라는 뜻으로

이름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라서 특정된 사람인지 성도를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하다.

 

어떤 사람들은 데오빌로를 예수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쓴 복음서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누가복음 1장 3절에는 '데오빌로 각하'라고 기록하였으므로 헬라인 중의 믿음있는 귀족일지도 모른다.

각하라는 호칭은 헬라인들이 기사 계급 이상으로 높은 계층의 사람에게 붙이는 호칭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믿는 헬라인의 어떤 귀족에게 쓴 글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렇다면 데오빌로가 유대인이 아닌데 어떻게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이름을 가졌을까?

이는 공관복음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고 기록되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기록될 당시에는 이미 30년이 지난 후이니 복음이 이방지역까지 퍼진 후였다.

갈릴리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복음이 헬라인 귀족에게까지 전해진 것은 복음이 빠르게 퍼진 것을 의미한다.

 

먼저 쓴 글이란 누가복음을 말한다.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일들과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하실 때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는 성령님께서 임하신 이후 복음이 세상 가운데 전파되어 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다른 두 권의 책이 아니라 한 권의 책을 전편과 후편으로 나눈 형식이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선교 여행을 끝까지 동행했던 의사 누가가 기록한 두 권의 책 중 두 번째 책이다.

 

3절에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다시 살아나셨음을 보이셨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조반도 차려 주시고 함께 여러 차례 음식을 드시기도 하셨는데

이는 단순히 영으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부활하신 몸을 가지신 분임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며 복음을 전할 사명을 맡기신 후 승천하셨다.

 

4절에 보면..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물세례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고백하는 신앙의 표시이고

반면 성령 세례는 주님께서 그 믿음을 받으시고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시는 선물이다.

성령을 받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나타내는 은혜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 것을 분부하셨다.

 

그 말씀을 하실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쭈어 이르기를..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니 이제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때가 온 것이냐고 묻는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 나라를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회복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은 너희가 알 바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때에 해당하는 '크로노스'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진 흘러가는 일반적인 시간을 가리키며

'카이로스'는 그 흘러가는 시간 중에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역사하시는 결정적인 순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느 때에 어떤 역사를 어떻게 하실지는 모두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일이라고 하셨다.

그들에게 장차 미래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 어느 때 그 일이 일어날지에 대하여 관심 갖지 말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오직 그것에만 관심을 가지라는 뜻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보내 주신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보이지 않던 신앙의 세계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만드신다.

 

성령님께서 내 안에 오시면 내 안에 주께서 주시는 기쁨과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고

그 기쁨을 자꾸 전하고 싶은 거룩한 충동이 일어나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해 주신다.

세상적인 기쁨은 한쪽이 기쁘면 다른 한쪽은 시기와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반면에

성령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함께 나눌수록 더욱 커지고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도 기쁘게 한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한 사람은

그 기쁨을 혼자 간직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고 싶어 지게 된다.

결국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세우시며 복음을 전하는 삶으로 인도하신다.

 

예루살렘에서 유대까지는 당연하고 자연스럽지만 왜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라고 하셨을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순수한 이스라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마주치기 조차도 꺼려하였다.

그래서 갈릴리로 갈 때에도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먼 길을 돌아갈 정도로 그들을 멸시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만이 아니라 사마리아에까지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이 미워하고 외면하던 사람들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땅 끝이란 먼 지역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영적으로는 삶의 끝자락에 서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땅 끝이란 세상으로부터 밀려나 낭떠러지 끝 자락에 서서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미워하는 사람들도 삶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도 다 품으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도 그렇게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복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외면하던 사람에게까지도 흘러가야 한다

 

9절에 보면..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지내며 다시 예전처럼 주님 곁에 머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속 머무르지 않으시고 하늘로 올려져 가시니 이제 뵈올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자들을 떠나가시고 난 후 성령께서 오시면 더 유익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지금까지는 제자들이 눈으로 주님을 따라다녔다면 이제부터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했다.

구름이 예수님을 가리어 보이지 않게 된 것은 단순히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들어가셨음을 보여 주며 우리에게도 그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게 한다.

 

10절에 보면..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떠나가시는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구름이 가리어져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다시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으리라..

제자들은 주님과 3년 동안 함께 지내며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보내 드리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때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의 천사가 그들 곁에 서서 말하기를...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천사들은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떠나가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한다.

주님께서는 승천하셨지만 그분은 약속하신 대로 다시 재림으로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일러 준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가신 곳만 바라보지 말고 어서 말씀하신 대로 너희들이 해야 할 일들을 하라는 뜻이다.

 

장차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는 이 땅과 하늘의 왕의 신분으로 오셔서 산 자나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그날까지 너희는 해야 할 일을 하라는 사도행전의 출발 신호와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 일은 구약의 오랜 시간 동안에도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지 못한 일로 엄청난 큰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옛날 세상 만민에게 복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에게 맡기셨으나 그들은 세상을 구하기는 커녕 자신들도 구원받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뿐인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죄를 사하여 주시고

성령님을 보내사 우리의 믿음을 도와 주님의 복음을 증거 하는 자들이 될 수 있도록 만드신 것이다.

 

12절에 보면..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감람원은 감람(올리브)이 많이 나는 올리브 산을 가리키며 실제 지명 이름은 감람산이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쪽에 위치한 산으로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기간에 자주 찾으시던 장소였다.

예수님께서는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산에 머무르시며 기도하시던 곳이며

제자들에게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과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기도 하셨던 장소였다.

 

또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감람산 기슭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며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다.

감람산은 예수님의 눈물과 기도가 있었던 장소이며 십자가를 앞두고 가장 큰 고뇌를 겪으셨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늘 기도하시던 그 감람산에서 제자들을 축복하시며 하늘로 올려지셨다.

 

이 감람산은 예루살렘과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의 규정이 있었는데(미쉬나의 규정) 안식일에는

그 규정에 따라 2,000규빗(914m)을 넘어가면 안 되지만 감람원에서는 약 900m쯤 되니 알맞다는 뜻이다.

 

13절에 보면..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가룟 유다를 뺀 열 한 제자들이 거기에 다 있었다.

감람원에 있는 다락방은 마가의 다락방으로 우리나라에서 알고 있는 다락방과는 다르다.

당시 유대인의 부유한 집은 이층 구조로 아래층은 생활공간으로 손님을 맞이할 때 사용하고

위층은 비교적 조용한 공간으로 조용히 모여 기도하고 말씀 나누는 공간으로 다락방이라고 하였다.

 

이 다락방은 성경에는 기록하지 않았어도 여러 의미로 마가의 다락방으로 추정한다.

ㅁ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장소로도 전통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누가복음 22장)

ㅁ 예수님 승천 후 제자들이 모여 기도한 장소이기도 하며 (사도행전 1장)

ㅁ 120명의 성도들이 모여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일어난 장소가 바로 이 다락방이다. (사도행전 2장)

 

다락방에는 열 한 제자들만 있는 게 아니고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과 더불어 

모인 무리들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그들이 그냥 모여서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전심전력을 다해 오직 끊임없이 몰두하여 기도한 것을 뜻한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40일 동안 함께한 후에

감람산에서 승천하시는 주님을 목격하였고 감람산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120명이나 되는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께서 보내 주신다는 성령님을 기다리며 온 힘을 다해 기도하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이 10일 후에 성령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들은 그 시기를 몰랐다.

그들은 성령이 언제 임하실지도 모르며 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가운데 기도하며 기다렸다.

주님께서 약속하셨으니까 언젠가는 반드시 성령님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도 이 사람들처럼 마음을 다해 힘을 다해 기도하면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

기도의 응답은 즉시 주시기도 하지만 인내하고 기다릴 때 주시기도 하고 주시지 않는 것도 응답이다.

그러므로 주시든지 안 주시든지 주님의 뜻대로 말씀을 따르며 주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15절에 보면..

120명이 모여서 기도에 힘쓰고 있을 때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말하였다.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던 자라."

 

가룟 유다가 맡았던 직무란 예수님의 공생애를 직접 따라다니며 증인 역할을 하였던 것과

말씀과 기적을 보고 전하는 사도 공동체의 일원이며 복음 사역의 열두 제자 안에 있었던 사람으로

단순한 수행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이자 공동체 대표 그룹 중의 한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것을 한 사람이 빠짐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비어진 자리로 본 것이다.

즉 그의 배신은 맡겨진 증인의 자리를 버린 것이므로 그 자리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의미이다.

베드로는 모인 사람들 앞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며 가룟 유다 대신 다른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히자고 한다.

 

사실 내가 주님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가

손해 보거나 위협을 당하지 않고 오히려 나만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되고 마는 것이다.

내가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시고 나는 그 자리에서 멀어질 뿐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지 맡겨 주시면 은혜로 여기고 온 마음을 다해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8절에 보면..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처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피밭)라 하더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은 30에 예수님을 팔았다가 예수님께서 잡혀가서 죽게 된 것을 알고

뒤늦게 후회하여 은을 성소에 던져 놓고 물러가서 그는 스스로 목 매어 죽었다고 기록되었다.(마 27:5)

 

가룟 유다의 죽음은 자살 이후에 부패되었거나 추락 등으로 인해 훼손된 상태를 묘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마태는 그의 죽음을 목매어 죽은 방식으로 기록하고 사도행전은 드러난 시신 상태를 비극적으로 표현하였다.

창자가 터졌다는 표현은 의학적인 설명이 아니라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20절에 보면..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시 69:25)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시 109:8)

시편에 기록된 이 말씀을 인용하여 베드로는 가룟 유다를 대신 해서 다른 사람을 세우자고 한다.

 

21절에 보면..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요한의 세례 때부터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까지 함께 다녔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왜 그들 중 일부는 처음부터 12제자로 불리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모두가 12제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는 많았지만 12제자는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로 구성된 그룹이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에서는 유다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뽑기 위해 처음 세례 요한 때 부터

예수님의 사역을 끝까지 본 사람 중에서 예수님을 증언할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은 것이다.

 

23절에 보면..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요셉의 이름인데 바사바는 안식일의 아들이란 뜻이나 선한 사람 또는 의로운 사람으로 의미한다.

유스도는 라틴어로 의로운 또는 정직한이란 뜻이므로 요셉은 의롭고 신실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왜 이렇게 표현하였느냐 하면 당시는 이름이 같은 사람이 많았기에 성품이나 특징으로 부른 것이다.

 

하나는 맛디아라..

맛디아는 유다를 대신 해 사도직에 세워진 인물로

이름은 “하나님이 주신 사람”이라는 뜻이며 사도행전 1장에만 집중적으로 등장한다.

유스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맛디아는 에티오피아에서 설교하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24절에 보면..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시니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베드로는 열두사도 중에 한 사람이 비었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열둘’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의미가 컸기 때문일 것이다.

구약의 열두 지파가 그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셨을 때에도 열두 제자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숫자를 채우는 것보다 주님의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보기도 한다.

 

열두 사도가 꼭 필요했다면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셨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교회의 대표 자리를 채우는 일이라면 마땅히 이런 방식으로 제비 뽑아 세울 수 있겠지만

제자도 아니고 사도의 자리를 채우는 중요한 일을 아무리 사도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해석이 반드시 옳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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