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영성 - 하나님의 신비|
중세의 수도사들이 한결같이 소망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고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비에 이르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이들이 그토록 찾아 경험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신비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deo mistica” 이 말은 창세기 1장으로부터 시작하여 요한의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체를 지배하는
하나님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는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거리에 있고 그 거리를 어떻게 좁혀
그 신비에 이를까를 고민하고 연구하는 것이 신학의 본질입니다.
이 신비는 우리의 이성적 사변으로는 결코 이를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계시로만 이 신비를 부분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누구나 하나님의 세계를 부분적으로 경험하며, 거울을 보는 듯이 희미하게 밖에
볼 수 없습니다. 희미하다는 말의 헬라어 ainigmati는 ‘obscure image’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언가 얇은 막을 한 겹 싸고 있어서 형체는 보이지만 실체가 뚜렷하지 못해서 보는 사람마다 제 각각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그런 형상이라는 뜻입니다.
보긴 보아도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서 달리 보일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다르게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으며, 시대에 따라
가치관에 따라 집단의 요구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보일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아이니그마토스’를 보는 우리의 눈의 선명도를 높혀 주님의 본질에 가능한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던 고대의 영성가들의 희망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소망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를 얼마나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가까이 갈 수 있는지를 계속 고민하며 이에 이르는
방법들을 제시해왔고 교회 공동체는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비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비에 이르는 길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계시하심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고통이라고 하는 십자가의 길이며, 이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신비에 이르는 길이 없으며, 이 십자가를 피해서 가려는
어떠한 시도도 결국에는 허무하게 끝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비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이 십자가의 길은 고통의 길이며, 죽음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비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이 십자가와 마주서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 십자가를 대함으로써 우리는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계시에 들어갈 수 있는 입구에 바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하나님의 신비에 이르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마주쳐야 할 대상이며,
이 고통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피할 수 없는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지식으로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지식으로 주님을 알고 싶어하는 것은
이 십자가를 피하고 하나님의 신비에 이르기를 바라는 육체의 본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고통 보다는 즐거움을 좋아합니다. 이는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 피할 수 없는 유혹입니다.
이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신비를 외곡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고통의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지식으로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
십자가의 고통을 통과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지식으로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우리는 영지주의자(gnosist)라고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신비에 접하는 유일한 길인 십자가의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의 주장과 맞서서 써웠습니다.
중세의 많은 영성가들 가운데는 십자가를 피해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진정한 영성가들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고통과 죽음입니다. 이 고통과 죽음을
우리는 인위적인 방법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방법들을 개발했습니다.
이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 얻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간접적인 경험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갖게 하고
십자가의 고통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자리로 이끄는 수단이 됩니다.
이는 마치 골프를 배우는 사람이 필드에 나가기 앞서서 먼저 연습장에서 치는 법을 배웁니다.
이 과정에서 골프의 맛을 알게 되어 필드로 나가기를 소망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간접 경험을 통해 실제적 경험을 얻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영성훈련의 많은 기법들은 하나님의 신비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함으로써
십자가의 고통을 무서워하지 않고 기꺼이 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식을 통해서 또는 영성의 매뉴얼을 통해서 간접으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실체를 위한 예비 단계입니다.
이것을 본질로 착각하고 이것에만 매달리면 우리는 초기의 영지주의자들이 실수한 그 오류에 빠질 수 있게 됩니다.
간접 경험은 실질적인 경험에 이르기 위한 예비 수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쌓아가는 것은
그 하나님의 본질에 이르는 십자가의 길에 두려움 없이 들어서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이 고통의 터널을 지나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몸으로 경험하고 몸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식으로(머리로 영어 표현은 mind)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주제를 반드시 몸으로 거치게 합니다.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되는 고통의 경험을 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극도의 신비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의 절정입니다.
이 알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내용을 극명하게 다룬 책이 “욥기”입니다.
우리는 욥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신비에 이르는 길이 어떠한 것인지를 지식으로 접하게 됩니다.
욥은 고통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귀로 듣기만 하였지만 이제는 눈으로 보게 되었고
이 사실을 몰랐던 이전의 일들을 회개하였습니다(욥 42:5~6).
하나님의 신비에 이르는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에 대해 들어서 아는 것을 통과하여 보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몸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계속되는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하나님에게 던지게 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나에게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다”라는 독백은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이끌려 나아가는 길에 있음을 고백하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이 “왜”라는 부르짖음으로 인해서
지금 신비의 하나님과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신비의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고 있습니다.
들어서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경험으로 보는 하나님을 우리가 만지고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영성의 가장 심오한 단계로 이끌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막의 교부들과 중세의 수도사들은 고통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고통의 자리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만든 고통은 또 다른 형태의 지식을 얻는 들어서 아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뿐이였습니다.
우리가 경험하기 원하는 십자가의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다가오는 고통의 문제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왜”라는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신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신비하신 존재임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부분은 언젠가는 그 본질을 맞이할 때 버려야 할 겉옷과 같은 것입니다.
겉옷은 추위를 피하고 우리 몸을 감싸기 위해서 임시로 입는 것이지 우리의 본질은 아닙니다.
버리면 버려질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 또한 이런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 공동체가 유지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한 이 시대의 공동선(共同善)입니다.
이것은 공동체의 합의에 의해서 언제라도 바뀔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만나는 하나님의 신비는 사람에 의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의 터널을 통해서 얻어진 하나님의 경험은
우리 각 사람을 진정 하나님의 자녀로 인치는 하나님의 신비인 것입니다.
그 신비의 길을 열어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은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가 가장 소망해야 할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고통은 하나님의 은사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은사로 주시는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욥은 아무런 까닭없이 닥친 고통으로 인해서 사람들로부터 갖가지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자신 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서 괴로워했습니다.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는 말로 그 고통의 신비를 표현했습니다.
알 수 없는 계속되는 고통을 경험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정말로 이해하기 힘들어집니다.
회개도 해보고 여러 가지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갖은 노력을 다해도
거두어지지 않는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욥을 보게 됩니다.
까닭을 모를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신비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경험으로 인해서 우리는 실질적으로 어떤 것을 얻은 것이 없고, 사람들에게 보여줄 만한 것도 없지만
우리는 한 가지 하나님의 신비를 몸으로 경험했다는 사실, 이 하나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고 있다는 인식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는 우리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줍니다.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구원을 얻습니다.
극심한 고통과 이해할 수 없는 불행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며,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아들을 보게 되며, 그와 연합하는 실질적인 경험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성의 최고 단계이며,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부활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욥이 들어서 아는 하나님에서 보아서 아는 하나님의 단계에 이르러 그가 예전의 일들을 회개한 것처럼 우리 역시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경험해) 보아서 아는 하나님을 알게 되며,
이것이 영성 생활이 추구하는 목표이며 대상인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고통을 통해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하기 바랍니다. (담아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