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를 아십니까?
‘불우한 이웃’이 생각나는 시기가 왔다.
날이 추워지면 구세군 냄비가 등장하고 자선 단체들도 분주해진다. 한 사회의 성숙도는 사회적 약자를 얼마나 배려하는가에 나타난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르는 때다. ‘사회적 약자’라는 말은 사실 지시 대상이 고정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의미도 명확하지 않다. 사회적 약자는 말 그대로 어떤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거나 힘이 없는 사람을 뜻한다.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생계를 꾸려 나가는 능력이 부족하여 약자로 구분된 사람들은 경제적 약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경제적 약자가 되는 이유는 다양하다. 사회의 문제일 수도 있고,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다. 때로는 시대의 문제일 수도 있다. 이번 호에는 한국의 각 시대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약자, 특히 경제적 약자를 가리키는 말에 대해 알아본다. 각 단어들의 사용 양상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그 일단을 엿보기로 한다.
▲<그림 1> ‘전재민, 세궁민’의 연도별 사용 빈도(동아일보 역사 말뭉치)
1940년대 후반은 ‘전재민(戰災民)’의 사용이 두드러진다. 전쟁으로 재해를 입은 사람을 뜻하는 말인 전재민은 본래 전리재민(戰罹災民) 즉, 전재민과 이재민을 아우르는 말에서 왔지만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전쟁으로 인한 재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한국 전쟁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1940년대 당시의 ‘전쟁’은 한국 전쟁이 아니라 일본이 일으킨 제2차 세계 대전을 가리킨다. 즉 일제의 징용으로 전쟁에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전재민이라고 불리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는 그들 대부분이 사회에 안착하지 못하고 불우한 계층으로 전락하고 만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 준다.
담 뒤에 똑다거려서 짓던 / 戰災民[전재민]의 지붕은 널장이든데 / 이 비를 무엇으로 막는가 / 열세 대가리 머리털로 막는가- 설정식(1948), 「음우(淫雨)」
전재민 이후에는 ‘세궁민(細窮民)’이 1950년대를 상징하는 약자로 등장한다. 세궁민은 말 그대로 극도로 가난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로 이어지는 시기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광복 이후 미군정 시기의 혼란, 거기다 1950년의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민중의 삶은 피폐하고 궁핍해졌다. 세궁민으로 불렸던 사람들은 1960년대까지 정부로부터 ‘구호미’를 전달받아서 생활했다. 세궁민은 이후 ‘영세민’이라는 말이 세를 얻으면서 그 자리를 내주게 된다.
▲<그림 2> ‘피난민, 절량농가’의 연도별 사용 빈도(동아일보 역사 말뭉치)
1950년대 초반 ‘피난민’의 높은 사용 빈도는 한국 전쟁으로 인한 것이다. 피난민의 사전적 의미는 ‘재난을 피하여 가는 백성’이며 여기서 재난은 전쟁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1950년대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재난은 전쟁이었으며, 이 때문에 ‘피난민’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특히 ‘전쟁 피난민’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피난민의 어려움과 설움은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전후 세대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1970년대 중반에도 피난민의 빈도가 높아진 현상을 보이는데, 이 시기에 사용된 피난민은 베트남 전쟁과 같은 국외의 전쟁 상황과 관련된 것일 뿐 우리와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1950년대 중반, 즉 전쟁 이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절량농가(絶糧農家)’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절량농가는 쌀이나 보리 같은 양식이 끊긴, 절대적인 굶주림에 처한 농가를 뜻하는 말이다. 농업 사회였던 한국에서 ‘절량농가’가 얼마나 절박한 상황을 의미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옛이야기 속에서나 접할 수 있는 ‘보릿고개(춘궁기)’와 ‘꿀꿀이죽’ 등이 모두 이 시기와 관련된다. 향수에 젖어서 먹는 쑥, 냉이 같은 나물들도 이때는 연명하기 위해 끓여 먹던 재료였다니 세상이 바뀌기는 많이 바뀌었다. 1962년 이후 신문에서는 절량농가가 거의 등장하지 않게 되니 다행이라고 할까.
▲<그림 3> ‘영세민, 철거민’의 연도별 사용 빈도(동아일보 역사 말뭉치)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영세민(零細民)’의 시대다. 영세민이나 세궁민이나 모두 몹시 가난한 사람을 지칭하기는 말이기는 하지만 영세민은 ‘수입이 매우 적은 계층’을 뜻한다는 점에서 세궁민보다는 왠지 형편이 나아 보이기도 한다. 수입이 적으나마 있다는 것이 전제된 말이라 그런 듯하다. 1999년도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이 시행된 이후 ‘기초생활수급자’라는 말이 쓰이게 되었지만, 지금도 ‘영세민’은 ‘저소득층’, ‘기초생활수급자’ 등과 같은 맥락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한편 ‘철거민’은 한국 전쟁 이후 ‘판자집’, ‘바락/빠락(barrack, 가건물)’, ‘토막(土幕)’ 등과 함께 높은 빈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후반, 그리고 2000년대 후반에 더욱 본격적으로 사용된다. 1970년대 한국의 공업화,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로 판자촌이 형성되고, 이는 주거환경의 악화로 이어져 도시 재개발을 불러오게 된다.
이 과정에서 판자촌 사람들은 살던 집을 철거당하고 도시 빈민층으로 전락하게 된다. ‘철거민’이 한국 사람에게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는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1976년)』에 잘 드러난다. 지금도 ‘재개발 철거민’, ‘재건축 철거민’ 같은 맥락에서 이 말은 여전히 쓰이고 있다.
한국 사회는 급속한 근대화와 경제 성장에 힘입어 2000년대 후반 선진국의 대열에 진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회가 발달할수록 또 그 변화의 속도가 급격할수록 다양한 ‘약자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경제적 약자를 가리키는 말로 ‘흙수저’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이 말은 타인에 대한 차별, 조롱의 의미로 쓰일 뿐 아니라 누군가 자기 자신의 형편을 자조하는 의미로도 쓰이고 있다고 하니 씁쓸하다. 사회에서 이러한 약자들에 대한 충분한 배려와 공감이 없다면 우리 사회는 극심한 양극화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성숙한 사회로 가는 길과는 분명 다른 길일 것이다.
글: 김일환 (성신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